기묘한 러브레터
야도노 카호루 지음, 김소연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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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묘한 러브레터」 책 띠지에 인쇄된 홍보문구가 묻는다.

당신은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질문에 담긴 의도와 기대하는 답은 홍보문구 아래에 적혀있다.

“엄청난 몰입감, 굉장한 반전... 다 읽고 10분 정도 허무해서 움직이질 못했다.”

공식적인 답은 홍보문구에 나와 있으니 개인적으로 홍보문구의 질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본다.

‘왜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도 결말이 갑작스럽다고 생각합니까?’

‘다 읽고 허무해지는 반전이 굉장한 반전일까요?’

소설은 페이스북에서 30년 전 사라진 여자를 찾은 남자가 여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저자 야도노 카호루는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메시지를 통해 30년 전 과거를 끌어낸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였고 과거에 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서로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까지 소설은 이야기한다. 독자는 여자가 사라진 이유가 궁금하다. 또, 남자는 왜 30년이나 지나서 여자에게 메시지를 보냈을까 궁금해진다. 독자는 이백여 페이지를 건넌 후에야 이 궁금증을 풀 수 있다.

「기묘한 러브레터」를 홍보문구 대로 읽을 것인지 다르게 읽을 것인지는 독자의 선택이고, 어느 쪽이든 재미있게 읽으면 되는 책인 것 같다. 책이 작고 가볍고 문장이 쉬운데다 페이지에 여백이 많고 226쪽으로 이야기가 길지 않아 이동할 때 읽기 좋겠다.

추리를 즐기는 독자에게는 복선을 짜맞추는 재미가 미흡해 망설여지지만,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처럼 새로운 사실들이 튀어나와 ‘놀랐지?’하는 이야기도 괜찮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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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국가들 - 누가 세계의 지도와 국경을 결정하는가
조슈아 키팅 지음, 오수원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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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도에 더 이상의 조정을 가하지 않으려는 까닭은 이해할 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선 변경에는 살상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p.74


조슈아 키팅의「보이지 않는 국가들」은 국가의 정의와 국경의 확고함에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국가는 ‘정부’와 ‘국민’ 그리고 ‘땅’이라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그렇게들 믿는다. 저자는 이러한 믿음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동질성을 지닌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이 다른 나라의 이름 아래 존재하거나 여러 나라의 국경 사이에 끼어 있기도 하다. 또 국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자치 정부가 활발하게 활동함에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땅’이 없는 국가를 온전한 국가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현재의 ‘국가’라는 기준을 고집한다면 이러한 나라들은 영원히 국가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고 심지어 국가가 사라지는 일을 겪게 될 수 있다. ‘국가’와 ‘국경’의 정의를 고민해야할 때다.


우리는 지금 시대를 세계화의 시대, 사람들과 자본이 유례없는 속도로 자유롭게 세계 어느 곳이건 돌아다니는 시대, 민족과 문화사이의 구분이 점점 더 헐거워진 시대라고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지도상의 실제 국경선과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들의 배치는 고착돼버렸다. p.298

이는 현재의 지도가 가능성 있는 대안보다 반드시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수백 년간의 경험이 국경 재편의 파국적 성격과 위험성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p.310

‘국가’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현재의 ‘국경’을 확정하게 되었을까? 국가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입김이 절대적이며 자를 대고 그은 듯한 일부 국경 또한 강대국들의 입맛이었다. 과거에 그랬고 현재도 여전히 그렇다. 분쟁을 겪고 있는 지역은 물론이고 자립적인 국가의 조건을 갖춘 나라들도 세계 정세를 좌지우지 하는 몇 나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국가’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진보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법적․정치적․군사적 규범상 세계지도의 일방적 재조정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강대국은 이런 규범에 반하는 일을 벌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별 문제 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p.306


기존 세계지도를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국경 또는 국가에 대한 맹신에 대해 한 번쯤 의구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환경 요소 또는 그 지역의 주민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들이나 국가라는 기존 개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자는 말이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논거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정말 현상 유지가 옳은가 하는 물음은 던질 가치가 충분히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 속하는 기존 국가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조직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용성과 가치는 세계 전체뿐 아니라 국경 내에 살고 있는 자국 국민에게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가 이런 순기능을 실행하지 못할 때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국경 유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국경을 개선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p.311


국제 외교․정책 분석 전문가인 저자는 쟁점 발생 지역 또는 국가를 직접 방문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 책 역시 압하지야, 아크웨사스네, 소말릴란드, 쿠르디스탄, 키리바시를 직접 취재한 결과다. 이 지역들은 모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쟁점’이 발생한 지역인만큼 입출국이 까다로운 경우가 다반사다. 저자는 무장경호원이 필요한 경우도 마다하지 않고 현장을 좀더 가까이 보고자 했다. 덕분에 책의 내용은 정치가나 권력자의 목소리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한 한쪽에 편중된 의견이 아닌 여러 방향의 의견을 고루 제시하고 평가한다.

국제 문제의 정점이라 할 국가의 정의나 국경 문제에 정해진 답은 없다. 자연과 기후의 변화에 따라 국가의 기본 요소인 국토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구할 수 있는 도움도 없다. 저자는 오로지 국가에 대한 기존의 고정된 관념에서 떠나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의 세계지도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되든지 간에 다문화주의, 민주주의, 다원주의,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을 믿는 이들에게는 창의적 사유가 가장 중요하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세계지도를 만들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악의적 동기를 가진 주체들이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의 지도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p.316


무엇보다 사람이다. 각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터전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지도를 만들 수 있는 미래가 오길 바란다. 쿠르드족 난민 캠프 주민의 말처럼 남는 건 사람들뿐이니까.


“나는 쿠르드 지역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분열은 파괴만 몰고 오리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왔다가도 다시 가버리는 존재죠. 결국 남는 건 사람들뿐입니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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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플하게 말한다
이동우 지음 / 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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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주인공은 항상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고, 강의를 듣는 청중이어야 합니다. p.45

 

독서 토론 모임에서 발언자의 말이 끊어지지 않을 때 종종 난감해진다. 진행자가 적당한 때 끊어가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발언자가 책 내용에서 시작한 말을 자신의 사연과 엮고 또 거기서 이야기의 가지를 치면 토론자들의 집중력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이때쯤 발언자가 상황을 눈치챈다 해도 이때껏 풀어놓은 이야기를 한 순간에 마무리하기는 어렵다 결국 당황한 채로 이야기를 중간에서 자르고 만다. 낯익은 이런 경험들 때문에 발언을 할 기회가 올 때마다 내 말이 길어질까 걱정이고 그러면서도 중요한 얘기를 다 못한 기분일 경우도 다반사다.

 

이동우 저자는「나는 심플하게 말한다」에서 횡설수설하고 상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하기 법칙을 제시한다. 그것도 “우리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p.13)” 위로를 더해서.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 말해야 할 때 더 말을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럴 때 사용할 방법들까지 꼼꼼하게 설명한다.

 

 

말하기 법칙 중 실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결론부터 말하기’일 것이다. 저자도 이런 점을 책에 잘 반영하고 있다. 우선 결론이라 할 만한 ‘10가지 말하기기 법칙’을 맨 앞에 배치했다. 그 이후에 이런 법칙에 따라 말하기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요령들을 설명한다. 이를 테면 장황한 발언을 막아줄 ‘요약정리의 기술’, 어려운 중심내용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한 ‘맥락파악하기’ 말이다.

 

저자는 1인 기업인 이동우콘텐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 제작, 강연, 저술, 대학 강의, 자신의 매니지먼트까지 혼자서 감당하고 있다. 비즈니스 분야 컨텐츠로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쌓아온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많은 일을 혼자 해내기 위해서 소개한 자신의 삶의 방식 중 ‘멀티태스킹 하지 말 것’, ‘소셜 미디어를 끊을 것’, ‘생각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을 것’, ‘단순하게 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심플라이프를 소개하는 많은 컨텐츠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런 삶의 태도를 통해 일정의 결과를 보여준 사람이 권하니 더 신뢰가 간다.

 

‘아날로그의 힘’에 대해 말한 부분도 마음에 와 닿는다.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갈수록 복잡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노트와 펜을 준비하라며 메모의 힘을 얘기한다. 글을 쓰면 집중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 전에 종이에 적으라고 권한다. 말할 내용을 종이 적으면서 스피치의 구조가 머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막상 실제로 말을 할 때는 메모를 보지 않고도 조리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손으로 쓰기와 말하기의 연관관계는 타이핑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결과물인 듯하다. 저자 역사 타이핑은 가장 마지막에 할 일로 정해놓고 있다.

 

저자가 권하는 심플하게 말하기의 법칙들이 어려워 보이지는 않지만 막상 직접 실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왕도는 없으니 한 가지라도 실행해보는 것이 목표다.

 

내용 중 책 읽는 사람으로서 마음에 두어야 할 구절을 발췌한다.

 

그리고 책을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책을 읽도 자주 읽지 않습니다. 주로 한 분야에서 한 권의 책만을 읽습니다.……이러한 경우 자신이 읽은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이 그 분야의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책 내용을 지나티게 신뢰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요. 그러다 보니 사고의 오류가 일어납니다. p.142

 

독서 수준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몰랐고,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자신의 이해력이 좋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현상을 바로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합니다.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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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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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소설이 오직 한 가지에 관한 내용이어야만 한다는 듯이 “뭐에 관한 내용이에요?”라고 물을까. 1권 p.318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일침이다. 소설 「아메리카나」를 ‘세계로 꿈을 펼치려는 젊은 나이지리아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말하기엔 부족하다. 여기엔 무엇보다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여성, 사회 계급, 편견 그리고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아디치에의 첫 장편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고 나서 이 책을 손에 드니 지명과 음식, 이보어 표기 등이 익숙해 단번에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전작의 소녀가 자라서 여성의 삶을 들려주는 듯했다. 때론 흔들리지만 자기 안의 중요한 것들을 지킬 줄 아는 여성말이다.

 

나이지리아인 여성 이페멜루는 안정적으로 정착한 미국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인종 문제를 다루는 블로거로 이름을 얻고 있었고 예일대 교수 남자친구도 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택한다. 고국 나이지리아에 있을 때 미국은 그야말로 약속의 땅이었다. 어떻게든 비자를 얻어서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곳. 미국 입국 초기의 힘든 적응기를 거쳐 안정적으로 정착한 후에도 이페멜루는 이질감과 결핍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은 그녀에게 “뿌리를 내리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그 뿌리를 뽑아내어 흙을 털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장소(1권 p.17)일 뿐이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확신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자기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를. 1권 p.43

 

이페멜루가 미국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는 그녀 주변의 다양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있다. 친구 기니카와 우주 고모는 세대별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모습이 다름을 보여준다. 고국 나이지리아에서 군(軍)장성의 첩으로 살던 고모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상황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갔다. 예상치 못했던 이주였던 탓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본연의 모습을 잃어간다. 반면 대학생 기니카는 미국의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말그대로 자연스러운 ‘아메리카나’가 된다.

 

나이지리아에서 우주 고모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고모의 말이 늘 모호했고 자세한 내용은 없이 “일”과 “시험”이 어떻다는 얘기만 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미국이 그녀를 굴복시켰던 것이다. 1권 p.188

 

우주 고모와 달리 젊은이의 유연성과 유동성을 가진 기니카는 미국에 와서 문화적 신호를 피부로 흡수한 덕에……. 1권 p.211

 

삶의 터를 통째로 바꾼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이지리아 인에게 미국은 선망의 땅이지만 두 나라는 문화가 다르고, 역사적 굴곡까지 겹쳐있다. 이페멜루의 초기 미국 생활 부분에 이러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누가 너한테 살 빠졌다고 하면 나쁜 뜻이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누가 너한테 살 빠졌다고 그러면 고맙다고 해. 그냥 여긴 좀 달라. 1권 p.210

 

갑자기 안개에 싸인 느낌, 자신이 하얀 거미줄을 뚫고 나가려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半)장님의 가을, 어리둥절함의 가을, 자신이 모르는 난해하고 다층적인 의미가 있음을 나는 상태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의 가을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1권 p.222

 

나이지리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 미국에서 겪는 차별은 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나가서 마주하는 일일 뿐 아니라 국내의 동남아 출신 이주자에게 행하는 일이다. 이페멜루를 대하는 미국 백인 사회 일원들의 말과 행동이 우리 동양인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우리 자신도 동남아 이주자에게 그들과 비슷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킴벌리는 “문화”가 자신에겐 낯선, 유색인들의 다채로운 보고(寶庫)라고, 반드시 “풍요로운”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노르웨이가 “풍요로운 문화”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1권 p.248

 

그녀는 켈시에게서, 자기는 틈만 나면 미국을 비판하기만 외국인이 그러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진보 성향 미국인들의 민족주의를 알아챘다. 그들은 외국인 이민자가 군말 없이 고마워하기만 기대했고, 그가 어디서 왔건 미국이 그의 고국보다 얼마나 더 좋은 곳인가를 늘 상기시키려 했다. 1권 p.318

 

인종에 대한 편견은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서 뿐 아니라 동일한 인종 사이에도 존재했다. 이페멜루가 보모로 일하는 집에 유색인 카펫청소부가 방문한다. 그는 그녀가 그 대저택의 안주인이라고 착각한 순간 적대감마저 드러낸다. ‘질서’가 파괴된 것에 대한 분노였다. 같은 유색인이면서도 그녀가 그런 집의 주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대혼란은 이페멜루가 본인의 위치를 밝히면서 수습된다.

 

우주가 다시 질서를 되찾았다. 1권 p.281

 

나이지리아로 돌아온 이페멜루는 자신의 삶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분투한다. 타인의 기준 때문에 연기하지 않고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페멜루 이야기는 어려움을 끝에 왕자님을 얻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아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웃고, 하고 싶은 말이 터져나올 때는 (설사 나중에 사과를 하더라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나라 나이지리아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이런 자기 본연의 모습을 지키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이페멜루의 상처와 고통이 조금 덜 하길 바랄 뿐이다.

 

인종과 차별에 대한 인류학 또는 사회학 보고서를 읽은 듯 한 소설 「아메리카나」에서 개인적으로 얻은 가장 큰 성찰은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의 상황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말이다. 어려울 것 없이 살았지만 더 나은 삶이 다른 나라에 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타국인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권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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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의 폭풍 -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
마이크 덩컨 지음, 이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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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같은 제목의 역사서다.「폭풍 전의 폭풍」. 어떤 폭풍 전에 무슨 폭풍이 있었단 말인가. 부제에 따르면 책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을 다룬다. 아우구스투스의 등극을 제정 시작으로 볼 때 공화정 몰락이란 그 바로 전인 카이사르의 시기를 말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공화정을 침몰시킨 카이사르의 폭풍이 일기 이전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로마가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고 세계 제패의 막을 연 기원전 146년부터 카이사르 직전의 로마 일인자 술라의 죽음(기원전 78년)까지다.

 

로마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제정의 화려한 모습과 건축물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공화정 시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정 시기의 사건이라면 한니발로 유명한 포에니 전쟁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저자는 공화정 말기, 그것도 익숙한 이름 카이사르가 등장하기도 전의 기간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특히 이 시기는 현대 공화주의 체제의 취약성을 의심하며 카이사르 세력의 부상을 경고의 메시지로 바라보는 지금의 우리에게 더없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초에 로마 공화정이 재앙 직전 상황까지 가게 된 과정을 다룬 저작물은 훨씬 적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 사회와 관련이 깊은 문제일 텐데 말이다. p.24-25

 

저자는 카이사르의 공화정 파괴가 한 사람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앞선 한 세기 동안 진행돼 온 방향이라고 말한다. 작금의 미국을 로마사 연대표에 대입해본다면 ‘위대한 정복 전쟁과 카이사르의 부상 사이 어디쯤’이라고 말하며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밝힌다.

 

카르타고 멸망과 카이사르 등장, 그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주역일까. 우선은 3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고 카르타고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흔히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로마의 미래를 예견했다는 시적인 장면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책에서는 전쟁 이후 그의 정치 인생을 서술하고 그에 대한 색다른 평가를 제시한다.

 

그의 경력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이밀리아누스 본인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떠났다. p.113

 

아이밀리아누스는 민회의 군중심리를 이용해 정치적 장애를 제거하는 기술, 사적으로 군단을 모집하는 선례를 남기면서 이후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권력이 평민에게로 기우는 시점에 원로원의 기호에 맞는 주장을 펼쳤다. 민중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자신이 자신의 불찰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는 이처럼 공화정이 내리막을 달리는 시기의 인물들 면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술라가 이 폭풍의 주인공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서 술라까지 차례로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또 밀려났다. 민중을 위한 혁명가로 알려진 그라쿠스 형제가 혁명에 목을 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로마 군단을 징집제에서 모병제로 바꾼 군사개혁가 마리우스는 어떻게 로마를 끝장낼 뻔 했는가. 잔혹한 종신독재관 술라가 돌아가자고 주장한 공화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책 속의 까만 글자로만 존재하던 인물이 순간순간 죽음을 내건 판단에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생명체로 느껴진다.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은 ’선조들의 관습‘을 말한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인은 조상대대로 지켜져 내려온 불문율을 지켰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를 삶에서 지켰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공화정 몰락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 집정관은 연임할 수 없으며 한 번 집정관에 당선됐던 사람은 일정 기간 다시 선거에 후보고 나설 수 없다는 규정, 로마 시내의 신성한 구역에는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없다던가, 신전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공화정 후기로 갈 수록 무너진다. 민중의 호응에 힘입어 집정관과 호민관이 연임하고 중무장 군인이 신전에서 거침없이 살상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아셀리오는 법무관 재임 당시 신에게 헌주를 따르던 중에, 그러한 의식의 관례에 따라 금박을 입힌 성스러운 제의를 입은 채로……한창 희생제물을 바치다가 살육되었다.” 그 무엇도 더는 신성시되지 않았다. p.315

 

술라는 1개 군단 전체를 로마의 신성한 경계선인 포메리움 너머로 이끌었다. 원래 신성경계선 안에서는 어떤 시민도 무기를 지닐 수 없었다. 모스 마이오룸 취후의 전선이자 가장 신성한 경계선 중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p.340

 

더 이상 신이 인간을 돌보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신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힘의 제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악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행동은 큰 권력을 지닌 관직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런 자리는 사람이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을 바꾸어 변덕스럽고 허영심 많고 잔인하게 만든다고 여겨졌다. p.406

 

반대파에 대한 처절한 살육 끝에 전례가 없는 종신 독재관직에 오른 술라는 공화정 복구를 시도했다. 술라는 이미 홀로 누리는 권력의 가능성이 확인된 후, 민중이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후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으로 회귀가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개혁을 밀어붙이는 능력은 탁월하나 시대를 보는 시야는 좁았던 탓이다.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자신이 공화정에 새 생명을 붕어넣었다고 믿으면서 죽었다. 그러나 일견 새 시대의 여명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상 로마 공화정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에 비친 빛이었다. p.446

 

마이크 덩컨의「폭풍 전의 폭풍」은 공화정 말기를 정리하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전문 학자가 아닌 덕에 쉬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추천사에서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무엇보다 번역을 칭찬하고 싶다.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SPQR」(메리 비어드)의 번역에 실망해 현대 작가가 쓴 로마사 번역물에 대해 망설였었는데 이 책은 그런 우려를 깨끗이 날려줬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번역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걸리는데 없는 번역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몸젠의 로마사>와 <로마제국 쇠망사> 사이에 뚫린 구명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적절한 시기에 좋은 책을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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