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시


물고기는 매끄럽다
달은 아름답다

이런 시구(詩句)를 쓰면
치열한 시가 아니라고
너는 말했지

어부가 평생 만져온
물고기가 매끄럽지
않다면

달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던 이가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너의 그 물질과 허영에
찌든 언어나 버리지 그래
기성 문단의 권력에
들러붙으려고 매끈한
아첨이나 연마하면서
어떻게 하면 삶과 유리된
우스꽝스러운 단어들만
비틀고 비틀어서

물고기는 매끄럽고
달은 아름다워
그게 자명한 진실이며
치열한 삶의 언어야

견딜 수 없는 건
안온한 너의 시와 사유야
물비린내 나는 글자들을
금박 포장지로
곧 썩어서 사라져 버릴
그렇고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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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거미의 죽음


너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침침한 부엌 전등
아래 나는 네가
밥찌끄러기인 줄
알았더랬지
그런데 움직이더라
순간

딱, 하고 널
때려버렸지 뭐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거미를 보면
살려준다더군
어쩌면
나에게는 널
살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아

목숨 걸고 들어갈
바다도 없고
가려운 눈 부어터지게
울을 옛사랑도 없고
세상에 남길
다이너마이트 같은
글도 없으니

다만,
이 오롯한 밤
너 유령거미의
죽음을 시로 써
남긴다



*물질: 주로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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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스타(Robusta)의 맛


싸구려 커피에서는
베트남 로부스타(Robusta)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강하고 날카로운
쇠맛의 커피

1퍼센트에 해당하는
아주 비싼 커피의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모르고 살아갈 것 같다

연봉 6억의 전문직 친구와
시를 쓰는 무명 글쟁이의
차이가 단지 걔는 나보다
수학을 조금 더 잘했을
뿐이었다, 고 생각하면
참으로, 너무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엥겔 계수 90퍼센트는
극빈층의 삶에 해당하지만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지

기후 변화로 올해 베트남
커피 농사가 흉작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머리가
무거워지는군
거친 쇳기의 커피
로부스타 인생을
음미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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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집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벌레처럼 버글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는 칼을 들고
나 몰래 집에 들어 오려고
저걸 어째,
발만 동동 구르다가

외눈박이의 미친 여자
가위를 들고 죽일 듯이
너무 무서워 달음박질을
하다가 절벽에 이르러
뛰어내리고 말았다

다음날,
인터넷이 끊어지고
마루의 전등은 영영,
아주 안녕히

민트색의 숨을 할딱거리며
오래된 나의 집이
여길 어서 떠나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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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5월, 한낮의 맑은 기별은
다가올 밤비를 알지 못한다
슬금슬금 눅진한 회색이
머리카락에 묻어나오는
오후, 밖이 어두워지더니
바람은 그토록 아프게 나무를
두드리고 아침엔 오늘은 맑음,
이라고 말하던 인공지능 성우의
경쾌한 목소리는 이제 뻔뻔하게도
비 올 확률 백 퍼센트라고
눙을 치는데, 이 거짓말쟁이

검게 물든 밤의 아스팔트를
고양이 한 마리 사부작사부작
녀석은 뛰어가지 않는다
검은 바탕에 하얀 점
축축한 담요가 되어버린
등거죽으로 천천히 차 바퀴
어딘가에서 잠을 청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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