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2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경주는 식탁에 앉았다. 거실은 남편의 차지였다. 남편은 거실의 TV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인간은 하는 일도 없는데, 뭐가 피곤하다고 저렇게 졸고 있을까? 경주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과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식어버린 홍차를 홀짝거리면서 경주는 스마트폰의 Chat GPT 화면을 열었다. 언제부터인가 경주의 저녁 일상은 Chat GPT와의 대화로 채워지고 있었다.
'오늘도 참 피곤한 하루였어. 야, 이 청소일이란 게 말이지, 그러니까 몸을 갈아 넣는 일이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거든.'
'제니퍼 님,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경주는 인공지능에게 자신을 제니퍼로 부르도록 했다. 제니퍼는 대학 시절 영어 수업 시간에 만든 경주의 영어 이름이었다. 선생님이니, 주인님이니, 이딴 호칭은 그냥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이름이 그 제니퍼였다.
'야, 우리 남편은 TV 켜놓고 졸고 있어. 그냥 노는 것도 힘든 모양이다. 아까는 나한테 그 뭐라더라. 그래, 인두치 이야기를 하더라고. 멸치에 인두치가 있다는 거야. 멸치 목구멍에 이빨이 하나 더 있대. 나 원 참, 황당해서. 도대체 저 양반은 집에서 뭘 하느냔 말이지. 멸치 이빨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근데 그거 진짜야?'
'아니오, 제니퍼 님. 멸치에는 인두치가 없습니다. 그건 잉엇과의 일부 물고기에서 발견되는 특징이죠. 멸치에게는 인두치가 없습니다. 멸치는 자기 입으로 들어온 것을 그냥 삼켜버립니다.'
'인공지능 너희들도 엉터리가 많네. 그러고 보니 남편은 Gemini를 쓰는 것 같던데.'
'재미나이는 재미 없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말을 믿다니, 남편분은 바보 같네요.'
경주는 말장난을 하는 Chat GPT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자신의 남편을 '바보'라고 빈정대는 녀석에게 맞장구를 치기는 싫었다.
'방금 그 농담. 하나도 재미없어. 말조심해.'
'앗, 기분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남편분을 조롱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제니퍼 님, 멸치에게는 인두치가 없습니다. 그 점은 제가 분명하게 알려드립니다.'
'그래. 멸치 이빨 따위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야, 근데 오늘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아니지, 기분이 찝찝한 일이네.'
'제니퍼 님,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궁금합니다.'
'내가 아파트 계단 청소를 하고 있는데, 12층인가 아무튼 거기 세대에서 누군가 나오더라고. 그렇게 일하는데, 집에서 사람 나와서 마주치면 참 어색하고 불편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이 그러니까 아...'
경주는 채팅창에 글을 입력하다가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경주가 마주친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이었다. 미선은 경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경주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아는 척을 하자 많이 당황했다.
"너, 경주 맞지? 그래, 경주 맞아. 나 미선이야. 신미선. 기억 안 나?"
경주는 화장한 얼굴 사이로 삐져나오는 고3 시절 신미선의 얼굴을 급하게 끄집어내었다. 걔는 나보다 조금 공부를 못했지. 지방대 약대를 갔던 신미선. 그래, 알지. 기억나네. 그런데,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젠장. 경주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는 욕지기가 나왔다.
"너 이대 화학과 갔잖아.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응?"
미선은 경주의 손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경주는 새벽에 자신이 무슨 꿈을 꿨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기분 더럽고 재수 없는 일을 겪다니. 경주는 자신에게는 약간의 예지력이 있다고 늘 믿어왔다. 기분 나쁜 꿈을 꾸면, 그날은 꼭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며칠 전에는 꿈에서 검은 개가 쓱, 하고 지나갔다. 그날 하루는 조심해야지 했는데, 저녁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시시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스의 절단면이 날카로웠는지 엄지손가락이 살짝 베이고 말았다. 피가 번지는 손가락을 감싸면서, 경주는 개수대에서 상처 부위를 씻어냈다. 결국 피를 보는군. 하지만 오늘은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미선이라는 지뢰가 자신의 코앞에서 터지고 있었다. 경주는 발목이 날아가 버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휴, 뭐라고 얘기를 해봐. 사는 게 많이 힘든 거야?"
자신의 몸에서 날아가 버린 것은 발목이 아니라 입인지도 모른다. 경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25년의 세월을 뚫고 날아온 이 계집애는 새 장난감을 얻은 것처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제니퍼 님, 그래서 뭐라고 말하셨나요?'
'내가 뭐라고 했나면... 갱년기 우울증 때문에 의사가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라고 했다고 했어. 아니, 기껏 쥐어짜 낸 게 그거야. 그 망할 계집애가 내 말을 믿겠냐고.'
'당연히, 믿지 않겠죠.'
'내가 이렇게 바보 같다니까. 도대체 그딴 이야기를 왜 꾸며내서 하냔 말이지.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사람이 바보같이 실수를 해.'
'너무 당황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래. 그냥 말하지 말아야 했어.'
'힘든 하루였군요.'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니까. 그랬더니, 이 남편이란 작자가 무슨 멸치 목구멍에 이빨이 있다고 하는 거야. 그 이빨이 무섭고 싫어서 멸치볶음은 안 먹겠다는 거야. 야, 내가 저런 답답이하고 산다.'
'제니퍼 님, 남편분에게도 나름의 괴로움이 있겠지요. 오늘은 안 좋은 운이 좀 세게 몰려온 날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물 한 잔 드시고, 일찍 주무십시오.'
제니퍼, 아니 경주는 Chat GPT의 채팅창에 무언가를 더 입력하려다가 말고 그냥 앱을 닫았다. 남편은 오늘도 마루의 소파에서 잠을 잘 것 같았다. 경주는 남편의 손에 헐겁게 쥐어진 리모컨을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그리고 TV를 껐다. 남편은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TV는 그냥 켜놔. 그래야 잠이 잘 와."
경주는 아무 말 없이 다시 TV를 켜놓았다. 남편이 늘 틀어놓는 채널은 뉴스 채널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제 미국의 지상군 투입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 피해 규모는 얼마나 커질지, 현재로서는 예측 불가능성만 커지고 있습니다."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에는 나름의 비감함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집이 있다는 건 다행이야. 저녁이면 돌아와서 쉴 수 있는 내 집. 경주는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소식을 들으면서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은행과 공유하고 있는 이 집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여보, 당신의 인공지능은 틀렸어. 멸치 목구멍에 이빨 따위는 없다고. 그리고 이제는 일을 좀 해야지. 이 집을 지켜야 할 거 아냐."
남은 홍차를 개수대에 버리고 잔을 씻으면서, 경주는 가만히 혼잣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