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송(KTV)에서 월요일 새벽 1시에 방영되는 'KTV 시네마'는 주로 오래전 한국 흑백 영화들을 방영한다. 1950, 60년대 흑백영화들은 대부분 한국 영화의 진부하고 신파적인 주제와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간혹 비전형적인 영화 문법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간에 방영된 박성복 감독의 1961년작 '해바라기 가족'이 그러했다. 그 시대에도 작가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유현목 감독은 여러편의 주목할만한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구름은 흘러도'는 그가 1961년도에 만든 문제작 '오발탄' 이전에 만든 영화로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부모를 잃고 가난을 견디며 사는 4남매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막내 말숙이의 일기를 통해 이어지는데, 말숙이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 그 자체라고도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큰오빠가 탄광촌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이 가족은 오빠가 탄광 파업에 참여하다 해고당하자 세상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나간다. 큰오빠는 다른 도시의 탄광으로, 둘째는 식모로, 그리고 남겨진 남매는 기름집 아저씨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말숙이의 유일한 위로는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일기장에 자신의 모든 소망과 꿈을 적어가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말숙이가 감당해야 하는 극심한 가난은 너무 처절해서 영화 내내 말숙은 거의 단벌 옷에 맨발로 나온다. 그 맨발을 보면 누가 저 아이에게 양말이라도 사서 신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둘째 오빠의 행색도 마찬가지여서 터지고 헤진 단벌 바지를 말숙이가 대충 꿰매주어 입고 다닌다. 이 영화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가를 말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 같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말숙이에게 늘 일기를 읽고 격려해주는 여선생은 빵을 사주는 호의 뿐만 아니라 학비 문제도 해결해서 학업을 잇게 해준다. 이 일기야말로 말숙이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영화는 말숙이의 일기가 출판되어서 세상에 큰 반향과 호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 4남매가 다시 탄광촌에 모여서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그렇게 좋은 결말로 끝났지만, 이 영화의 내적인 유기성은 성글게 이어져 있고, 그렇게 비어있고 단절된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는 보는 사람에게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재일교포 소녀 야마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로, 1958년 일본 출판사 광문사에서 '니안짱'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NHK에서 라디오 방송극으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명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서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는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출판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정식 계약을 맺고 출판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기를 끌었던 이 책은 영화화의 과정까지 밟게 된다.


  일본 탄광촌이 배경인 일기는 한국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면서 상당한 사실성을 상실했고, 그것이 영화 내내 무언가 잘 해명되지 않고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했다. 재일교포로 차별받고 정식 탄광 노동자가 될 수 없었던 스에코의 큰오빠와 4남매가 겪었던 현실은 탄광촌이라는 배경만 따온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로 치환되었다. '가난'은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는 주제였기에 스에코의 이야기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스에코와 4남매가 겪어야 했던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순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에서도 배제되어야 하는 요소였고, 당시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배경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제작된 두 영화 모두 원작자인 스에코가 그려낸 일기의 본질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화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구름은 흘러도'가 보여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에 찬 시선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유현목은 영화 내내 맨발로 나오는 말숙이가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가난이라는 혹독한 현실을 아름답고 처연한 일기의 문장들로 승화시킨다. 제각각 흩어진 가족들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언젠가 다시 하나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숙이의 희망에 찬 내레이션은 그 시대의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니안짱'은 산하 출판사에서 어린이용 도서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다. 영화를 보고나서 꼭 구해서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의 주인공 야마모토 스에코는 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문필가로 활동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출판된 일기로 받게된 엄청난 인세가 4남매의 삶의 행로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스에코에게는 인생을 뒤바꿔 놓은 일기였던 셈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자세한 배경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2012년에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발간한 김승구"아동 작문의 영화화와 한일 문화교섭"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 김승구는 현대시를 전공한 국문학자인데도 한국 영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데도 그의 논문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영화에서 말숙 역으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서 극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찾아보니 배우의 이름은 김영옥인데, 아역시절이라고 해도 원로배우 김영옥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 김영옥의 필모그래피에는 분명히 올라와 있지만, 이 영화의 아역이 그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옥 씨의 공식적인 영화 데뷔작은 '가거라 슬픔이여(1957)'인데, 그 영화 포스터의 아역 얼굴과 이 영화 주인공의 얼굴은 동일하게 보여서 김영옥 씨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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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교의 선문답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서 참사람이 된다."  영화의 제목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바로 그 선문답이 가리키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많은 비유들 가운데 하나인 포도나무는 바로 예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베라니요, 거기엔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민병훈 감독의 이 영화는 외양상으로는 가톨릭의 색채를 띤 종교영화입니다. 신학생, 신부, 수녀, 이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뿐만 아니라 배경이 되는 공간도 신학교, 수도원, 성당이 주를 이루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거룩한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단정하는 일은 아직 이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민이 매우 인간적이니까요. 신학생인 수현은 여자친구인 수아를 마음에서 밀어내지 못해 힘들어합니다. 그가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서 찾아간 수도원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또 어떤가요? 수련 수사인 정수는 예쁜 외국인 노동자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상태이고, 무뚝뚝하고 엄격해 보이는 문 신부는 자신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네, 그들은 모두 약함을 가진 인간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수현의 마음은 수아와 너무나 닮은 헬레나를 보고서 더 헝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수아의 갑작스런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의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병훈 감독은 이 영화가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수현에게 있어 그 두려움이란 신을 따르는 길, 사제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기인 강우가 신학교를 그만 두는 모습을 보고 흔들리지요. 강우는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출 수 있어?" 강우는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떠나지만, 주인공 수현은 아직 자신이 가야할지 멈추어야 할지 모릅니다. 

  영화에는 수현이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과 직면하게 만들기 위한 몇가지 우연적인 사건과 신비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자친구와 닮은 외모의 수련 수녀라던가, 죽어가는 아이가 수현의 기도로 병이 낫는다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물론 이것들은 명확히 설명되지도 않고, 그 때문에 관객들의 상상력은 더 풍성해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요소들로 인해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는 감독의 시도는 너무 도식적이에요. 영화는 단아하고 깔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여요. 

  영화의 제목은 말 그대로 포도나무를 베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문답도 마찬가지구요. 그 말의 뜻은 수행자가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맞서야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수행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직시하고,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심리상담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과도 비슷해 보이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돌아가는 기차 안, 자신의 손목시계에 귀를 갖다댄 수현은 잠시동안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크게 울리는 초침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그가 짓는 미소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이의 설레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제 막, 신을 따라 떠나는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사제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장면을 보면 그럴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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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그 비극적 삶에 대해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영화 "힐러리와 재키(1998)"는 바로 그 재클린과 언니 힐러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재클린의 언니 힐러리와 동생 피어스가 함께 쓴 자서전일 겁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가족의 시점, 특히 힐러리의 시점이 주가 됩니다.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의 힐러리(플룻 연주자였어요)가 재클린 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재클린의 재능은 힐러리를 앞질러 나가게 되죠. 그래서 힐러리가 재클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정도 질투가 섞여있는 것처럼 보여요. 힐러리가 동생에게 보여주는 그 모든 호의에도 불구하고요. 천재적 재능을 가진 동생 재클린은 17살때부터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고, 전세계에 연주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갑니다.

  22살이 된 재클린은 촉망받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합니다. 재클린의 연주 레코딩 가운데에 대부분은 바렌보임과의 협연에서 나온 것이었죠. 바렌보임은 자신의 경력을 쌓는 데에 재클린을 혹사시켰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데, 재클린의 연주 스케줄이 지나치게 꽉 짜여져 있었고, 그것이 재클린의 발병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었어요. 

  영화는 재클린이 살았던 실제의 드라마틱한 삶에 비한다면 아주 평범해요. 그녀가 살아내야했던 삶의 엄청난 고통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요. 영화가 그것을 다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니까요. 28살에 다발성 경화증으로 진단받은 재클린은 첼로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이후 14년을 투병하다 세상을 떠요. 재클린은 투병기간동안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남편 바렌보임은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동거하면서 두 아들을 낳았고, 재클린을 버려두다시피 했죠. 그런가하면 가족들은 재클린이 결혼과 함께 남편이 믿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후 멀어져있었구요. 물론 영화는 언니 힐러리와 가족의 관점이 더 투영되었으니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영화가 재클린과 그 삶에 대해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내었을까요? 재클린의 지인들은 영화 개봉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재클린의 모습과 다르다면서 영화사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해요. 바렌보임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는 거냐며 투덜거렸고요.

  재클린의 연주 음반을 들어보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클린이 들려주는 첼로는 매우 순수하고 놀라울 정도로 활기가 넘치죠. 영화에서 묘사된 제멋대로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의 재클린도 어느 부분은 진실일 수도 있어요. 에밀리 왓슨의 뛰어난 연기가 그 믿음을 더하게 만들거든요. 

  이 영화에서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재클린과 첼로의 관계에요. 영화에서 재클린과 첼로의 관계는 사도마도히즘적이에요. 자신에게 끊임없이 연주를 강요하는 첼로를 재클린은 일부러 택시에 두고 내리거나 추운 겨울날 밖에 내놓기까지 하죠. 그럼에도 재클린 앞에 다시 놓여져 그녀로 하여금 연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첼로를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에요. 그 첼로가 다비도프였어요. 다비도프가 재클린 사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알아보니 지금은 요요마의 손에 있더군요(영문 위키피디아에 그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조하고요). 



  재클린의 삶을 보면 어쩌면 재능이란 저주받은 이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삶이었어요. "힐러리와 재키"는 그렇게 천재 첼리스트의 가려진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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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예고없이 집을 방문했고, 저녁만 먹고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차를 운전해서 아버지를 어디론가 데려다 주었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나서야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알지못했던 사생활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에게는 부인과 딸이 있었고, 혼외 관계에서 얻은 또 다른 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예순이 되어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혼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가 11살 때, 아버지는 인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기차역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현대 건축에 놀라운 영감을 불어넣은 루이스 칸이었다. 아들 나다니엘은 자신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생활을 가졌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의 지인들을 만나고,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들을 탐방한다. 그 여정은 5년이란 시간이 걸리고서야 끝난다.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세 개의 가정이 있었다. 그 집들은 불과 5마일 근방에 모여있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바람둥이였을까? 어째서 그토록 위대한 건축가가 사생활만큼은 도덕적이지 못하고 비밀 속에 두어야 했는지 아들은 그 답을 찾으러 나선다.

  에스토니아 태생으로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지만 쉰이 될 때까지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러다 우연히 가게 된 유럽 여행에서 보게된 고대와 중세 건축물들은 루이스 칸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그때부터 이 건축가의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켐벨 미술관, 소크 연구소,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칸의 건축물은 곧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건축물들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해나간다. 또한 한번도 같은 자리에서 만나본 적이 없는 두 명의 배다른 누나들과도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오래된 과거의 상처를 헤집는 질문을 해서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아버지 루이스 칸"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때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루이스 칸의 아들이자 이 다큐의 감독인 나다니엘 칸은 그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건축물들이 주는 위대함 앞에서도 결코 거기에 매몰되어 서둘러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감독의 느리고 진중한 호흡을 통해 관객은 한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건축물에 영적인 영감을 불어넣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한 인간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 루이스 칸"은 인간의 내면에는 불완전함과 함께 그것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라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일지도 모른다. 아들 나다니엘 칸은 그렇게 아버지 루이스 칸을 사랑했고, 그래서 결국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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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20 17: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큐 제목이 어떻게 되나요?

푸른별 2007-12-20 22:25   좋아요 0 | URL
IMDB에 My Architect(2003)로 나와있군요. 포스터를 보니 부제로 A Son's Journey라고 되어있네요. 2005년에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도 방영이 되었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1 01: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꼭 구해서 봐야 겠군요..
칸의 사생활은 비정상적이였을진 모르지만 그의 건축물은 대단하거든요.^^
 

  영화 〈조춘(早春)〉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른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시간이 그것인데 영화 속의 인물들은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그러한 증언들을 듣게 된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초반부에 남자 주인공 스기야마는 오랜만에 도쿄 본사에 올라온 자신의 상사를 집에서 묵게 한다. 손님의 이부자리를 마련한 부인에게 그는 묻는다. 

  “밤에 추울지도 모르는데 이불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밤에 남아있는 그 때가 바로 이른 봄이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이른 봄이라는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듯 초봄에서 시작된 시간적 배경은 계속해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데 스기야마의 친구인 미우라에게 이르면 초여름으로 변화한다. 

  미우라는 스기야마의 회사 동기로 병을 얻어 누워있는 처지이다. 거의 거동을 못하고 투병생활에 지친 미우라에게 스기야마의 방문은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미우라는 말한다.

  “내가 병을 얻어 누워있게된게 벌써 백일째군. 그새 봄에서 초여름이 되었네 그려.”

  이제 시간은 초여름에서 성하(盛夏)로 이르게 되는데, 그 때는 바로 영화의 끝부분에 해당한다. 샐러리맨 생활에 대한 회의와 부인과의 불화를 떠안고 지방의 공장으로 전근온 그에게 사무실의 동료는 무더위에 대해 말하며 그에게 묻는다.

  “도쿄도 여기처럼 더울까? 여긴 산으로 둘러싸여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더 덥게 느껴져.”

  이러한 대사들 외에도 시간은 여러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영화 내내 제시된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은 계절에 대한 이러한 단서들을 마구 흘려대는 것일까? 과연 〈조춘(早春)〉에서 계절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즈가 말하는 계절이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춘(早春)〉의 인물들이 말하는 시간들은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즈는 여기에 좀 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또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제시된다. 우리는 그것을 스기야마와 상사 오노데라의 대화 속에서 볼 수 있다. 

  부인을 남겨두고 홀로 전근지로 떠나온 스기야마는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상사에게 털어놓는다. 마치 다정한 부자(父子)처럼 두 사람은 강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주변으로 조정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의 배가 지나간다. 그것을 보고 오노데라는 말한다.

  “저들이야말로 인생의 봄이군.” 

  사실 인생의 봄을 살고 있는 것은 주인공 스기야마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막 서른의 초입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에 산적한 문제들과 직면하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한 갈등과 고통이야말로 〈조춘(早春)〉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스기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회사생활에서 회의를 느끼고 별다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그는 같이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알게된 여성과 급속도로 가깝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의 관계는 급기야 별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래전에 병으로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거대 조직을 떠받치는 일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샐러리맨으로서의 비애가 그로 하여금 좀처럼 삶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다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조춘(早春)〉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제시되는 계절, 즉 시간의 의미는 눈에 포착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어갈수록 관객은 눈에 보이는 즉자적인 의미로서의 계절과, 그와 동시에 인생의 한 시기, 즉 상처와 고통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부유하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의 내면과 조우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오즈는 항상성(恒常性)에 따르고 있는 자연의 시간과 그 법칙을 조화의 이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계절은 마치 자신이 오고 가야할 때를 아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계절이 자연 속에 머물다 가는 궤적을 명확히 추적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내면은 얽힌 실타래와 같아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혼란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결국 〈조춘(早春)〉에서 오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조화로운 시간, 자연에로의 회귀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장면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역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기차와 그것이 지나간 뒤의 산을 잠시 동안 보여준다. 기차는 얼핏 보기에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과 유사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부부는 창 밖 너머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차가 지나간 곳에는 산이 그들의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든든하게 서있다. 이제 한 남자의 내면에 일렁이던 고통과 상실의 감정은 잔잔해질 것이며, 그것은 그가 견뎌온 시간에 의해 마침내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렇듯 오즈에게 있어 시간은 상처입은 것과 잃어버린 것의 재건과 복귀를 의미한다. 영화 〈조춘(早春)〉에는 계절과 자연에 대비되는 한 남자의 흔들리는 내면의 부조화가 포착되어있다. 이것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결국 치유와 회복으로의 여정을 가져오게 만드는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게 되고, 우리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목격하는 것도 화합과 평화의 대단원인 셈이다. 하지만 〈조춘(早春)〉에서 그러한 성숙과 변화, 조화와 통합의 시간에 이르게 되는 이는 스기야마 뿐만은 아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스기야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을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즈에게 있어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며, 그러한 이유로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잃은 후 겉도는 남편의 마음을 잡지 못해 속앓이를 하는 부인 마사코, 자신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상대로 늘 유부남을 택하고 스스로를 상처 속에 가두는 스기야마의 애인, 시집간 딸의 결혼 생활에 노심초사하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사코의 어머니, 30년을 다닌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두고 생겨난 걱정과 근심을 술로 달래는 술집의 손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다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는 스기야마의 동료 미우라, 한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지혜를 스기야마에게 일러주는 상사 오노데라와 같은 인물이 그러하다.

  이렇듯 점점이 흩어지고 열려진 개개의 시간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형성한다. 개별적으로는 작고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식 가능한 덩어리, 즉 3차원적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오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 안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적 국면들에 대해 보여주면서,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반복적이고 동일한 기제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간과 세계를 넘어 우주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에까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조춘(早春)〉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즈가 만들어낸 시간의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인생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게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를 깨뜨리는 인간의 무질서 때문이다. 무질서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리석음과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는 항으로서 시간은 존재한다.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바로 그러한 시간에 대한 찬미를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갈등과 고통, 혼란과 무질서적 상황들에 처한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오즈가 보기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춘(早春)〉의 인물들은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구원받는다.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하고 집을 나간 부인은 결국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남편은 그런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금 부인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이제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기야마는 부인에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3년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부인은 답한다. 

  “3년이란 시간도 금새 흘러가버릴 거에요.”

  오즈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낼 것임을, 시간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그들 삶의 유일하고 힘 있는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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