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 밑바닥 인생 넬리의 선택

  케이블 방송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채널은 국회방송(NATV)입니다. 외국의 다양한 다큐는 물론 괜찮은 영화도 방영합니다. 특히 '다양성 영화'라는 프로그램이 눈길을 끕니다. 주로 제 3세계 영화들, 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 변방 국가의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거든요. 그 영화들의 작품성이 균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시청자들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특색있는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국회방송에서 방영한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좀 길어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이 한국어 제목이고, 영어 제목은 'Secret Name'이죠. 프랑스어 제목 'La Place d'une autre'은 번역을 해보면 '타인의 장소'가 되더군요. 제목부터 번잡스럽고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드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든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약간의 스릴러 느낌도 있구요. 자, 그럼 영화 '시크릿 네임'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대, 여자 주인공 넬리는 고아입니다. 하녀 생활을 하던 넬리는 주인집 남자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옵니다. 하층민 고아 여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지요.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넬리는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넬리에게 적십자사의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넬리는 간호사의 일을 배우고, 전장에 파견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거든요.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지요. 그렇지만 넬리는 놀라운 적응력과 활달한 성품으로 간호사 일을 잘 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라는 이름의 스위스 여성이 프랑스군 막사에 머물게 됩니다. 로즈는 프랑스로 가야하는데, 전쟁통에 길을 잃었어요. 로즈는 넬리에게 프랑스에 있는 엘레노어 부인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로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인 엘레노어 부인이 후견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죠. 상류층 여성이기는 해도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잃은 로즈 앞에 놓인 삶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넬리와 로즈, 두 여성이 잠깐 통성명하는 사이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쾅, 로즈는 죽고 넬리는 겨우 목숨을 건지죠.

  넬리는 무척 영리한 여성이에요. 넬리는 재빨리 로즈의 소지품을 챙기고, 로즈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네, 넬리는 로즈의 삶을 살아보려는 겁니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빠져나온 넬리는 엘레노어 부인이 있는 낭시로 향합니다. 그리고 곧 부인을 만나죠. 부유한 사교계 인물인 엘레노어 부인은 로즈를, 아니 로즈 행세를 하는 넬리를 환대합니다. 특유의 붙임성과 신실한 태도로 넬리는 부인이 신뢰하는 손님이 되죠. 손님이라기보다는, 우리말의 '수양딸'이 더 어울리는 단어겠군요.

  넬리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좀 불안하기는 하죠.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구요. 넬리는 충분히 불우한 삶을 살았거든요. 넬리가 로즈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로즈는 전쟁통에 불운하게 죽었으니까요. 부인에게는 목사인 조카 줄리앙이 있는데, 그도 넬리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엘레노어 부인은 넬리를 더 아끼게 되고, 사교계에도 소개하려고 하죠. 이제 넬리에게 꽃길만 펼쳐지는 걸까요? 그런데,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넬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로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죠. 넬리는 자신의 사교계 데뷔 파티에 나타난 로즈를 보고 기절해 버립니다.

  오, 영화가 꽤나 흥미진진해집니다. 과연 넬리는 어떻게 될까요? 넬리의 정체를 알게 된 엘레노어 부인은 어떻게 할까요? 로즈는 길길이 날뛰면서 넬리가 자신의 행세를 하는 가짜라고 외치죠. 그런데 거렁뱅이같은 행색의 로즈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부인은 넬리를 철썩같이 믿습니다. 넬리는 로즈만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자신의 평화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죠.

  이후 넬리와 로즈의 대결은 스릴러물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게 되죠. 줄리앙은 넬리가 진짜 로즈인지 적십자사의 기록이며 전쟁 때 로즈와 함께 일했던 군의관까지 만나봅니다. 로즈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정신병원에 갇히고요. 와우, 이 영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요?

  그런데 영화 '시크릿 네임'은 중반부가 지나면서 이야기의 힘을 잃어갑니다. 넬리는 로즈가 겪는 고초를 외면하질 못해요. 넬리는 결국 자신이 로즈 행세를 했다는 걸 부인과 줄리앙에게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길거리 여성들이 머무는 구빈원으로 가버리죠. 엘레노어 부인은 그런 넬리를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넬리는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딱, 끝나버립니다. 대체 이 허망한 결말은 뭔가요? 스릴러물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 뭔가 감동이 있는 드라마도 아닌 '시크릿 네임'은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에요.

 
2. 소설 'The New Magdalen(1873)'과 Wilkie Collins(1824-1889)

  나는 영화 '시크릿 네임'이 뭔가 더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읽어봤죠. 영화의 시나리오는 원작이 되는 소설을 바탕으로 쓰여졌어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작가인 Wilkie Collins(1824-1889)가 쓴 'The New Magdalen(1873)'이라는 소설이었죠. 제목의 '막달레나'는 신약 성서 속의 창녀 막달레나가 맞아요. 소설은 중편 소설의 분량입니다. 오래전에 저작권이 풀린 작품이라 인터넷으로 원본을 구해서 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Project Gutenberg: Free eBooks www.gutenberg.org). 나는 원작 소설이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았어요.

  거리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 여자 주인공 Mercy Merrick이 영화의 넬리입니다. 로즈는 'Grace Roseberry'라는 이름으로 나오고요. 성씨의 로즈베리에서 로즈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재밌군요. 엘레노어 부인은 Lady Janet으로 나옵니다. 재닛 부인의 조카 줄리앙은 영화와 이름이 같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이 하나 더 있죠. 재닛 부인의 지인으로 중산층 남성인 Horace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와 거의 비슷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1차 대전이 아닌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이구요.

  원작 소설에서 호레이스는 머시(영화의 넬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줄리앙도 넬리를 사랑하게 되죠. 좀 통속적인 삼각관계 로맨스군요. 이 로맨스는 그레이스의 등장으로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그레이스는 머시를 사기꾼 범죄자로 비난하며, 머시의 천한 신분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고아 출신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머시에게 온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속 머시의 과거에는 매춘부로 살았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의 넬리가 그냥 거지로 살았던 것과는 좀 다르죠. 말하자면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의 머시는 진짜 영락한 하층민 여성의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최하층민 출신인 머시를 인간적인 품격이 있는 여성으로 그려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레이스입니다. 이 상류층 출신의 여성은 오만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재닛 부인이 그레이스의 신분을 알고 나서도 머시에게 마음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결한 여왕이 다스리는 영국에서 '가정'은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 가정에 매춘부 출신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자리합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그런 면에서 아주 남다른 시대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작가 '윌키 콜린스'의 이름은 진짜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영화 '시크릿 네임'을 보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영문 위키에 나온 작가의 이력을 읽어보니, 동시대 영국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교류도 했을 만큼 이름있는 작가였습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주로 추리소설이었어요. 소설 'The New Magdalen'은 콜린스에게 약간 막간극 같은 느낌을 주죠. 이 소설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의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오죽 인기가 있었으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을까요. 콜린스는 소설을 희곡으로 직접 각색도 했습니다. 나는 희곡도 읽어보려다가 그만두었어요. 뭐 소설하고 같은 내용일 테니까요.

  소설의 인기는 콜린스 사후에 무성 영화 시절로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무성 영화가 여러 편 있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걸 구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검색되는 자료가 없어서 아쉽더군요. 결국 그 무성영화 시절의 유산이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로 이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 소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건 '새로운 막달레나'에 내포된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일 겁니다. 소설에서 머시의 신분이 탄로 나면서 호레이스는 머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매춘부 여성은 신성한 가정의 여주인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목사인 줄리앙만이 머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 합니다. 재닛 부인은 둘의 사랑을 묵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줄리앙과 머시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지요. 신대륙 미국만이 신분과 과거를 뛰어넘은 사랑을 포용할 수 있으니까요. 윌키 콜린스는 불행한 매춘부에게 자비(여주인공 Mercy의 이름 그대로)를 베풀지 않는 당시 영국 사회의 폐쇄성과 이중성을 에둘러 비판합니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윌키 콜린스 자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겁니다. 콜린스는 이른바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는 애 딸린 과부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그 두 여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콜린스에게 동시대 사람들이 큰 돌맹이는 아니더라도 작은 돌맹이라도 던졌겠지요. 그의 행실은 분명히 비도덕적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콜린스는 '두 집 살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마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고수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콜린스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이들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는 너희들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빅토리아 시대라는 번지르르한 도덕 우위의 시대에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영화 '시크릿 네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여정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에게는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한 편의 영화는 그렇게 접혀진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시대,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나의 이 글도 그러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작가 Wilkie Collins(1824-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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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시


물고기는 매끄럽다
달은 아름답다

이런 시구(詩句)를 쓰면
치열한 시가 아니라고
너는 말했지

어부가 평생 만져온
물고기가 매끄럽지
않다면

달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던 이가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너의 그 물질과 허영에
찌든 언어나 버리지 그래
기성 문단의 권력에
들러붙으려고 매끈한
아첨이나 연마하면서
어떻게 하면 삶과 유리된
우스꽝스러운 단어들만
비틀고 비틀어서

물고기는 매끄럽고
달은 아름다워
그게 자명한 진실이며
치열한 삶의 언어야

견딜 수 없는 건
안온한 너의 시와 사유야
물비린내 나는 글자들을
금박 포장지로
곧 썩어서 사라져 버릴
그렇고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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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거미의 죽음


너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침침한 부엌 전등
아래 나는 네가
밥찌끄러기인 줄
알았더랬지
그런데 움직이더라
순간

딱, 하고 널
때려버렸지 뭐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거미를 보면
살려준다더군
어쩌면
나에게는 널
살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아

목숨 걸고 들어갈
바다도 없고
가려운 눈 부어터지게
울을 옛사랑도 없고
세상에 남길
다이너마이트 같은
글도 없으니

다만,
이 오롯한 밤
너 유령거미의
죽음을 시로 써
남긴다



*물질: 주로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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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스타(Robusta)의 맛


싸구려 커피에서는
베트남 로부스타(Robusta)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강하고 날카로운
쇠맛의 커피

1퍼센트에 해당하는
아주 비싼 커피의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모르고 살아갈 것 같다

연봉 6억의 전문직 친구와
시를 쓰는 무명 글쟁이의
차이가 단지 걔는 나보다
수학을 조금 더 잘했을
뿐이었다, 고 생각하면
참으로, 너무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엥겔 계수 90퍼센트는
극빈층의 삶에 해당하지만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지

기후 변화로 올해 베트남
커피 농사가 흉작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머리가
무거워지는군
거친 쇳기의 커피
로부스타 인생을
음미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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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집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벌레처럼 버글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는 칼을 들고
나 몰래 집에 들어 오려고
저걸 어째,
발만 동동 구르다가

외눈박이의 미친 여자
가위를 들고 죽일 듯이
너무 무서워 달음박질을
하다가 절벽에 이르러
뛰어내리고 말았다

다음날,
인터넷이 끊어지고
마루의 전등은 영영,
아주 안녕히

민트색의 숨을 할딱거리며
오래된 나의 집이
여길 어서 떠나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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