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The Civil War, 1861-1865)이 일어날 당시 남부의 인구는 9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흑인 노예 인구가 4백만 명이었다. 이는 면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남부의 경제 구조에서 노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링컨은 노예 제도를 철폐하려고 했다. 남부인들 입장에서 그것은 재산인 노예를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사회, 정체성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남부가 연방을 탈퇴하고 전쟁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안 감독의 1999년작 'Ride with the Devil'은 남부인의 입장에서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비정규 군사 조직인 'bushwhackers'는 노예제 철폐주의자들에 대한 잔혹한 공격을 감행한 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민병대의 역할을 떠맡으며 북군을 공격했다. 'Ride with the Devil'에서 제이크(토비 맥과이어 분)는 친구 잭을 따라 엉겁결에 'bushwhackers'가 된다. 곧 그들의 무리에 백인 주인과 함께 다니는 흑인 다니엘도 합류한다. 그들에게 북군은 남부인들을 죽이고 남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적 악이다. 그 북군과 대적하기 위해 부대원들은 점점 더 잔혹해진다. 그렇게 전투가 거듭되면서 온화했던 제이크의 심성도 거칠게 망가져 간다.

  집과 가족, 공동체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희미해진다. 오직 무차별적인 살육과 방화만이 반복된다. 영화는 제복 입은 정규 군대의 전투 바깥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전장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제이크는 회의감을 느낀다. 이제 그를 싸움에 나서게 만드는 동력은 동료애에서 나온다. 잭의 죽음, bushwhackers 내부의 불화와 분열을 보면서 제이크는 남부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한다.

  이안 감독의 이 영화는 아마도 남부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무겁고 어두운 남북 전쟁의 서사에는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감동이 배제되어 있다. 이안은 이야기의 무미건조한 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어찌 보면 적당한 감동을 위한 영화적 타협을 거부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잭과 젊은 과부 수의 러브 스토리가 짧게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이야기의 구색맞추기용 조각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다. 솔직히 러닝타임 2시간 28분(감독판 기준)이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보는 내내 심드렁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나가고 있었다. 제이크는 잭의 아이를 낳은 수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는 평범한 한 가장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유일하게 남은 동료이자 친구, 흑인 다니엘도 자신의 길을 떠난다. 마침내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로 하고 인사를 나눌 때, 그들은 이제까지 불렀던 별명 대신 서로의 온전한 이름을 불러준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무언가 가슴에 묵직한 감정이 올라옴을 느꼈다. 

  제이크는 독일인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다니엘은 흑인이었다. 그들은 미국 사회 내부의 비주류, 변방에 자리한 이들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주변부의 사람들은 어느 쪽에 설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았다. 제이크와 다니엘이 남부 게릴라군이 된 것은 정치적 신념이 아닌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이안은 껍데기로 남은 정치적 대의명분에 냉소를 보낸다. 'Ride with the Devil'에서 전쟁은 인간 내면의 감성적 영역에 자리한 우정, 연대 의식, 충성심과 긴밀한 접점을 가진다. 제이크와 다니엘의 작별 장면은 어떤 면에서 남북 전쟁에서 스러진 무수한 개인들에 대한 호명이다. 그것은 북부 연방이나 남부 연맹에 속하지 않는 불행한 주변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이안은 자신의 실패한 영화에서 전쟁의 회색 지대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와 잭은 미주리주 출신이다. 당시 미주리주는 노예제 찬성주였다. 미주리주의 싸움꾼들(Border Ruffian)은 인접한 켄터키주로 넘어가 노예제 폐지론자들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Ken Burns의 다큐 'The West(1996)' 4편에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bs-8-ken-burns-west199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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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영화들 특집 2편


  말 그대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려다가 쓸 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버려둔 영화들 특집이다. 


Annette(2021), 레오스 카락스
Undine(2020), 크리스티안 페촐트
The French Dispatch(2021), 웨스 앤더슨


1. Leos Carax가 만들어낸 따로 국밥 뮤지컬, Annette(2021)

  Leos Carax의 '나쁜 피(1986)'와 '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본 것이 벌써 20년도 더 되었다. 그동안 그의 이름을 통 들을 수가 없었는데, 뮤지컬 영화 '아네트(2021)'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가 만든 뮤지컬은 어떤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난 내 짧은 감상평은 이렇다. 뮤지컬 영화를 보고나서도 기억나는 뮤지컬 넘버가 없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아네트'는 실패작이다. 주연인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는 나쁘지 않지만, 그의 가창 실력은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상대역인 마리옹 코티야르는 자기 목소리가 아닌 더빙을 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헨리는 유명 소프라노 앤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곧 둘 사이에 딸 아네트가 태어난다. 그러나 앤이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며 승승장구하는 것과는 달리 헨리의 코미디는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헨리는 앤과 떠난 요트 여행에서 예기치 않게 앤을 물에 빠져 죽게 만든다. 경찰 조사에서 살인 혐의를 벗고 홀로 아네트를 키우는 헨리. 그는 딸에게 노래를 부르는 재능이 있음을 알아챈다. 인터넷에 올린 아네트의 영상이 폭발적 조회수를 올리면서 헨리는 아네트를 내세워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서는데...

  조지 큐커의 '스타 탄생(A Star Is Born, 1954)'에서 영화 감독 남편은 잘 나가는 배우 아내를 보며 알콜 중독으로 망가진다. 아내의 성공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스타 탄생'의 주인공과는 달리, '아네트'의 헨리는 그 화살이 아내에게 향한다. 결국 헨리의 비뚤어진 분노와 내면의 욕망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자기 자신마저 파멸로 이끈다. 이 어둡고 개연성 없는 서사에는 무엇보다도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자크 드미가 '쉘부르의 우산(1964)'에서 보여준 프랑스 뮤지컬의 현실성과 아름다움은 헐리우드 뮤지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카락스는 자신의 뮤지컬을 그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가공된 세트들에서 배우들이 펼치는 공연에는 인생의 진실이나 생기 같은 것이 없다.

  아마도 우리는 카락스의 이 실패한 영화와 대조되는 지점에 밥 포시의 'All That Jazz(1979)'가 있음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둔 뮤지컬 기획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펼치는 놀라운 퍼포먼스에는 인생과 예술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노래도, 연기도, 메시지도 마치 따로 국밥처럼 노는 '아네트'는 카락스의 소진된 영화적 재능을 확인하게 만든다. 한가지 더, 아담 드라이버는 앞으로 노래하는 연기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2.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평범한 신화적 변주, Undine(2020)

  "날 떠나면, 너 죽을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If you leave, you have to die. Do you understand?)

  이런 말을 내뱉는 여자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살기가 느껴진다. Christian Petzold의 2020년작 'Undine'는 르네상스 시대 연금술사 Paracelsus가 만들어낸 물의 정령 운디네를 현대 시대로 불러낸다. 이 이야기의 가장 잘 알려진 버전은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이다. 바닷속에 사는 인어 공주가 인간 왕자를 사랑했다 버림받고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이야기. 그렇다면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영화로 만들어낸 '운디네'는 어떤 이야기일까?

  베를린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는 운디네는 사귀던 남자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다. 운디네는 남자에게 그 일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에 대해 암시하지만 남자는 끝내 운디네를 떠난다. 잠수사 크리스토프와 뜻하지 않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된 운디네. 크리스토프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운디네는 연인과 함께 있는 전 남친과 마주친다.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에게 전 애인에 대해 묻지만 운디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작업 중에 일어난 사고로 크리스토프는 식물 인간이 되어버렸다. 절망한 운디네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꼭 해야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주인공 운디네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꽤나 긴 베를린시의 역사를 듣게 된다. 무슨 로맨스 영화에 '쓸데없는' 역사 강의가 저렇게나 길게 들어가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럴 때는 좀 생각을 깊게 해볼 필요가 있다.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고,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영화 속에 집어넣고 싶어한다. '운디네'의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왜 운디네의 입을 통해 베를린시의 유구한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베를린은 늪지대를 메꾸어 만든 도시이다. 냉전 시대에 동서로 분단되기도 했던 이 도시에는 과거의 상처와 재건의 흔적이 공존한다. 운디네가 들려주는 베를린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개발하고 변형시키면서 끊임없이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갔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를린의 근원적 토대는 그것이 시작된 늪지대이다. 자연의 본질은 결코 변하거나 마멸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인 운디네는 물의 정령으로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신화적인 존재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 운디네와 대비되는 인간의 사랑은 휘발적이며 가변적이다. 페촐트는 신화 속 운디네가 인간과 사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국을 그려낸다. 영속적 존재가 꿈꾸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불변의 사랑. 영화 속 운디네는 그런 사랑을 고집한다. 이별을 통보하는 남자에게 죽음을 경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별 후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와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운디네는 사귀던 남자가 없었다는 거짓말까지 한다. 이미 운디네 자신이 티 한 점 없는 완전무결한 사랑의 기준에서 벗어나 버렸다. 크리스토프에게 닥친 재난을 운디네는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형벌로 받아들인다. 더이상 운디네는 이 지상의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운디네의 갑작스러운 사라짐은 실종이나 죽음이 아니라, 원래 속한 자연으로의 귀환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의 존재는 합일의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잃게 되자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공주는 결국 공기의 요정이 되어 왕자의 새로운 사랑을 축복하며 지상을 떠난다. 영화 속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에게 생명과 사랑의 기억을 돌려준다. 영화의 끝부분에 크리스토프가 물속에서 건져낸 작은 잠수부 조각품은 운디네에게 그가 주었던, 둘 사이의 사랑의 징표이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추억은 남는다. 그렇게 페촐트는 운디네 설화를 현대 베를린이라는 시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신화에 대한 이러한 페촐트의 해석은 그리 심오하지도, 독창적이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영화 '운디네'는 아쉬움을 남긴다.


3. 웨스 앤더슨의 과대포장 선물세트, The French Dispatch(2021)

  영화는 'The French Dispatch'라는 잡지사 편집장의 죽음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유언장에 따라 4편의 기사가 잡지에 실리고 잡지는 폐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 4편의 이야기가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1편은 잡지사가 있는 도시 Ennui-sur-Blasé의 변천사를 소개한다. 2편은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살인범 화가의 콘크리트 벽화 그림이 유명 미술관에 걸리게 된 유래를 설명한다. 3편은 아주 시시한 학생 시위의 주모자가 어떻게 혁명 정신의 상징이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 4편은 경찰청장 아들의 유괴 사건에 얽힌 외국인 요리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웨스 앤더슨의 이 영화에는 등장 인물들도 많고, 유명 배우들도 꽤 나온다. 1편에서 자전거 타고 도시를 안내하는 이는 오웬 윌슨, 2편에서 죄수 화가를 연기한 사람은 베니시오 델 토로, 그리고 그 모델 역은 레아 세두가 연기한다. 3편에서 시위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자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이다. 잡지사 편집장 역은 빌 머레이가 맡았다. 이 쟁쟁한 배우들을 섭외해서 영화를 찍는 웨스 앤더슨의 마당발 인맥이랄지, 친화력이 대단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그런 능력과는 별개로 영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잘 찍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The French Dispatch'의 작품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앤더슨은 특파원의 눈을 통해 낯선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1편에서 도시의 역사를 들려주는 오웬 윌슨은 마치 그곳 주민처럼 보인다. 외국인이지만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그 땅과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3편에 나오는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독신 여기자는 중년의 위기에서 오는 외로움과 직업 윤리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4편에서 경찰청장의 납치된 아들을 빼오기 위해 비밀 임무를 받고 투입된 요리사는 동양인이다. 그는 납치범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독이 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 취재하는 특파원은 영웅적인 행동이라며 놀라워한다. 하지만 요리사는 외국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주변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영화 'The French Dispatch'는 파리 거주 외국인 앤더슨의 프랑스 별곡 같다. 정교하게 구성된 영화의 세트는 앤더슨의 심미안을 입증하지만 거기에는 알맹이가 없다. 이 영화의 진정한 학습적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은 영화학도가 아니라,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 어떤 정서적 울림도 없는, 예쁜 화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 이것은 마치 안팔리는 과자들이 들어있는 멋진 포장의 종합 선물세트를 연상케 만든다. 웨스 앤더슨이 '내 스타일이라구', 하고 말한다면야 '아, 그렇군' 할 밖에. 앤더슨 영화의 팬이라면 반복되고 변주되는 그의 스타일을 이 영화에서 확인하고 좋아할 수도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버린 영화들 특집 1편

Leave No Trace(2018)외 4편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leave-no-trace2018-bait2019.html
 


***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 1937/195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star-is-born-19371954.html

 


****그림 출처: artvee.com

George Frederic Watts(1817-1904), Und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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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lfast는 북아일랜드의 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도시의 이름은 '강의 입구'라는 아일랜드어에서 유래했다. Kenneth Branagh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으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났고, 9살 무렵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 9살 소년 버디가 주인공인 영화 '벨파스트'에서 브래너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펼쳐놓는다. 영화는 현재의 벨파스트 발전상을 보여주는 컬러 화면에서 1969년 8월의 과거로 들어가면서 흑백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브래너의 선택은 매우 탁월하고 효과적이었다. 브래너는 흑백 화면이 실제의 현실과는 다르지만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촬영했다고 밝혔다(출처: ew.com과의 인터뷰). 그리고 그의 말대로 관객은 이 흑백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놀랍도록 생생하고 핍진성있게 다가옴을 느낀다. 그렇다면 1969년 8월, 소년 버디와 가족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버디는 집앞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가 몰려들고 화염병과 돌덩이가 날아든다. 버디의 집을 비롯해 근처의 집들은 파괴되고 불탄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1969년 8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교도 주민들과 프로테스탄트 주민들 사이에 극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벨파스트는 그 중심 도시였다. 1922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주민들이 점차적으로 이주해 오면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1969년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버디의 가족은 프로테스탄트 교도이다. 폭동의 기간 동안 양측은 서로의 집과 건물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다. 폭동은 영국군이 개입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영화는 버디의 눈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와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9살 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쓰는 도구는 TV와 영화이다. 게리 쿠퍼가 나오는 'High Noon(1952)'과 같은 서부극 영화는 버디에게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나뉜 세계를 인지시킨다. 버디에게는 프로테스탄트인 자신의 가족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계 주민들은 서부극의 악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것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북아일랜드의 첨예한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소년 버디의 시점에서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게 말하면 관조적인 것이지만 비판적으로 본다면 논쟁을 비켜가는 영리한 수법이다.

  TV 서부극과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보는 즐거운 모험 영화를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버디.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소년을 둘러싼 세계는 바뀌어 간다. 버디는 영국으로의 이주를 두고 벌이는 부모의 말다툼을 목격한다. 카메라는 그 장면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버디를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로 따라간다. 하나의 쇼트에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과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하지만 주의깊게 듣는 버디의 얼굴이 함께 담기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어른들과 주변의 세계를 탐색하고 이해해 나간다.

  캐네스 브래너는 '벨파스트'가 역사 영화가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임을 강하게 주지시킨다. 버디는 생의 황혼기에도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조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버디의 부모는 가족의 미래를 두고 서로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사랑으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9살 소년은 풋풋한 사랑의 감정도 예쁜 여자친구 캐서린에게서 느낀다. '1969년의 벨파스트'라는 시대적 배경이 없다면 이 영화는 그저그런 가족 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 '벨파스트'라는 지역의 역사성은 어린 버디에게 여자 친구와의 이별을 강제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버디의 할머니가 영국으로 떠나는 아들 내외와 손주 버디를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이 세상을 뜨고 오롯이 홀로 살아내야 함에도 할머니는 자신의 고향땅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왜 분쟁 지역의 사람들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가? 아마도 주디 덴치가 연기한 버디 할머니의 선택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영화 '벨파스트'는 벨파스트라는 지명이 가진 역사성과 의미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캐네스 브래너의 이 영화는 피로 얼룩진 북아일랜드의 현대사 한 부분에 설탕물을 입힌 안온한 가족, 성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첨언하자면 이러하다. 1969년 8월의 폭동 기간 동안 압도적 피해를 입은 지역은 개신교 주거 지역에 둘러싸인 가톨릭 교도들의 주거지였다. 폭동의 여파로 벨파스트에서 이주한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이 1505명, 프로테스탄트가 315명이었다. 가톨릭 교도들이 아예 아일랜드로 이민을 떠난 것에 비해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근 도시로 이사했다(출처 en.wikipedia.org).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에 무얼 그리 정확하고 대단한 역사성을 바라느냐, 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뭉뚱그려서 투영하는 과거의 기억이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문제는 이런 것이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아이의 관점을 채택했다 하더라도 성찰적 사유가 들어있는가에 관한 문제. '벨파스트'는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매우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카를로스 사우라가 '까마귀 기르기(Raise ravens, 1976)'에서 보여준 은유적이지만 명징한 현실 인식과 역사성을 보라. 8살 소녀 아나의 이야기를 통해 사우라는 독재자 프랑코의 폭압적 지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북아일랜드의 역사적 상흔으로 가득한 벨파스트의 과거와 현재를 보려는 이들은 캐네스 브래너의 이 영화가 아닌 'I Am Belfast(2015)'를 보는 것이 더 낫다. Mark Cousins가 만든 이 다큐는 도시를 노파로 의인화해서 그의 입을 통해 벨파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린넨 제조 산업과 조선소로 흥했던 벨파스트의 과거, 1969년 이후 극심해진 갈등과 폭력, 오늘날에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는 분쟁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다큐는 시적인 방식으로 벨파스트라는 도시를 조망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임에도 '벨파스트'에서 괜찮았던 점은 버디 역을 연기한 Jude Hill의 존재였다. 이 귀여운 꼬마 배우는 정말이지 영화를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영화가 여기저기서 받은 상들을 어떻게 나눌 수 있다면, 그 절반은 이 친구의 몫으로 주어야 한다. 주드 힐은 역사적 성찰이 결여된, 안일하고 평범한 회고담을 한 소년의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로 만들어 버린다. 캐네스 브래너가 이 놀라운 아역 배우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2022년 아카데미상 수상작 리뷰

감독상, The Power of the Dog(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ashik-kerib1988-power-of-dog2021.html

국제 장편 영화상, Drive My Car(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drive-my-car-2021.html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
 
The Long Day Closes(1992), 테렌스 데이비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long-day-closes1992.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The Approach of Autumn, 1960), 나루세 미키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 폴 뉴먼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effect-of-gamma-rays-on-man-in-moon.html

남쪽(El Sur, 1983), 빅토르 에리세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el-sur-1983.html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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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9세기 미국 서부에는 Gold rush뿐만 아니라 Silver Rush도 있었다. 1859년, 'Comstock Lode'로 불리는 은광맥이 네바다주 버지니아 시티에서 발견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융성했던 골드 러시의 끝물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인생역전을 꿈꾸며 네바다로 몰려들었다.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로 네바다에는 여러 광산 도시들이 생겨났다. 열기는 18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잦아들었다. 광맥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네바다 사람들은 광산업이 아닌 목축업으로 전향해서 삶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옥스 보우 사건'은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자 Walter Van Tilburg Clark(1909-1971)는 네바다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Bridger's Wells에서 일어난 린치 사건을 그려낸다. William Wellman 감독은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영화까지 만들게 되었다. 

  1885년, 겨울에서 이제 막 봄으로 넘어갈 무렵의 네바다 시골 마을 Bridger's Wells. 친구 사이인 방랑자 카우보이 길 카터(헨리 폰다 분)와 아트 크로프트는 마을에 도착해 선술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최근 소도둑들의 출몰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길과 카터는 외부인인 자신들이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저어한다. 그런 가운데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장주 킨케이드의 살해 소식이 술집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소도둑들의 소행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은 보안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하게 자경단을 꾸린다. 길과 카터는 마을 사람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경단에 합류한다. 자경단은 마을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 보우(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닮은 구릉 지대에 붙인 이름)에 도착한다. 그들은 곧 그곳에서 도둑 패거리로 의심되는 세 명의 남자를 보게 된다. 자경단을 이끄는 목장주 테틀리는 그 세 명이 범인이니 교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영화 속 마을 자경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마 그리어(Ma Grier)'로 불리는 여성이다. 나이든 여장부처럼 보이는 마는 거친 말투에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낸다. 원작 소설에서도 마 그리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이 여자를 마을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 모두가 다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비호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캐릭터를 작가는 자신이 실제로 시골 선술집에서 본 인물을 떠올리며 만들어 냈다. 그런 마 그리어의 모습은 이 여성이 거친 서부의 삶에서 자신의 성 역할(gender role)을 지배적 남성성으로 대체했음을 보여준다.

  이 황량한 서부의 마을에는 젊은 여자들이 없다. 길은 전 여자친구 로즈 메이펀을 찾아 마을에 왔다. 그런데 그는 로즈가 마을의 나이든 기혼 여성들에게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술집 주인은 이 마을에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82세의 장님과 인디언 뿐이라고 말한다. 로즈와 같은 젊은 여성은 서부를 떠나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옥스 보우로 가는 도중에 길은 도시 남자와 결혼한 로즈와 마주친다. 독하고 늙은, 자신의 여성성을 힘을 휘두르는 남성성으로 대체한 마 그리어 같은 여성만이 그곳의 삶에 적합하다. 마 그리어는 테틀리가 주도한 린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런 마 그리어와는 대립되는 지점에 전복된 젠더 역할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또 있다. 테틀리의 아들 제랄드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자경단을 따라나선다. 테틀리는 유약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터였다. 소설에서 제랄드는 여자 아이 같다고 묘사된다. 그런 제랄드에게 테틀리는 남자다움을 강조하고 그것을 습득하도록 밀어붙인다. 어떤 면에서 테틀리에게 이 자경단의 여정은 아들을 그가 생각하는 '진짜 남자'로 만드는 훈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에게 린치의 실행을 지시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을 자경단에 의해 교수형 당할 위기에 처한 세 명의 남자들은 정말로 목장주 킨케이드를 죽이고 그의 소를 훔쳤을까? 그들을 둘러싼 정황 증거들은 매우 불리하다. 젊은 남자 마틴은 킨케이드로부터 샀다는 소들에 대한 매매 영수증이 없다. 멕시코인 후안이 숨기고 있었던 총은 킨케이드의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없는 영감은 강도로 몰린다. 세 남자에 대한 심문을 주도한 테틀리는 정의의 실현를 내세우며 린치를 결정한다. 길은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느낀 그는 테틀리에게 반기를 들지만, 곧 다른 자경단원들에게 총을 빼앗기고 제압당한다.

  길이 강력한 항의로 테틀리의 자의적 정의에 반대를 표시했다면, 침착하고 온화한 주민 데이비스는 유화적 방식으로 린치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틴이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자경단원들에게 읽어줌으로써 마틴이 진실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마틴은 그런 데이비스의 시도를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하고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편지를 먼저 읽어본 데이비스는 마틴이 무죄임을 직감한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테틀리와 일행을 저지하는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마틴은 데이비스를 이렇게 비난한다.

  "I thought there was one white man among you. But I was wrong."
  (나는 당신들 가운데 제정신 박힌 올바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 근데 내 생각이 틀렸어.)

 
이 문장에서 'white man'은 온전한 양심을 가진 선인을 의미한다. 분명 데이비스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런 그에게는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린치를 막기 위해 데이비스가 취하는 소극적 행동들은 유약한 남성성을 보여준다.

  결국 세 남자는 죽음에 이른다. 돌아오는 길에 자경단원들은 보안관과 함께 있는 킨케이드를 본다. 킨케이드는 살아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테틀리는 제랄드의 비난을 들은 직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테틀리의 최후는 영화와 소설이 동일하지만, 테틀리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는 그 결이 서로 좀 다르다. 소설에서 테틀리는 아들 제랄드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자신도 곧 그 뒤를 따른다. 테틀리의 자살은 제랄드가 자신이 바라는 남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 아들을 위해 시도했던 모든 것이 실패였음을 자인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다. 이는 자신이 주도한 잘못된 린치에 대한 부채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테틀리 부자(父子)에게 닥친 비극은 테틀리의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남성성이 가져온 귀결이다. 

  작가 Walter Van Tilburg Clark는 득세하고 있는 나치 세력을 보며 이 소설을 썼다. 그가 보기에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폭력에 유럽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 거대한 불의와 폭력에 맞설 것인지 작가는 고민했다. 데이비스의 유화적인 방식(소설 속에서 데이비스는 총을 가져가라는 테틀리의 요청을 거절한다)으로는 불법적 폭력 행위인 린치를 막지 못한다. 클라크는 소설에서 린치를 주도한 테틀리보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데이비스에게 윤리적 책임의 무게를 더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야만과 폭력에 맞서야만 할까? 어떤 면에서 그 질문은 폭력의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남성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윌리엄 웰먼 감독의 '옥스 보우 사건'은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독선과 편견을 가진 지도자와 군중,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폭압적 사태를 인지하게 만든다.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만 있을 뿐이다. 방관자들의 좌절감으로 가득찬 이 뒤틀린 서부극에는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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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재현된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변형과 이탈

 

Redeeming Love(2022), D. J. Caruso



  영화의 제목 'Redeeming Lov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救贖)의 사랑'이 될 것이다. 이 '구속(redeem)'이란 개념은 비기독교도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을 풀어서 표현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는 사라졌고 신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부터가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독교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무려 300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기독교 소설이길래 그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아주 거칠고 간명하게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850년대 서부 캘리포니아, 불행한 운명의 매춘부 앤젤과 그런 앤젤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농부 마이클의 이야기. 여자 주인공 이름이 천사(Angel)이고, 남자 주인공의 성씨는 무려 호세아(Hosea, 구약 성서의 예언자)이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뭐 맹물같은 성경 이야기의 현대 버전이겠구먼, 할지도 모른다. 속단은 금물이다. 교회 사람들과 이 영화 같이 보러 갔다가는 영화관 나와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수 있다. 원작 소설의 작가 Francine Rivers는 기독교 소설에 화끈한 로맨스를 결합시킨다. 매춘부, 매음굴, 근친상간, 소아성애, 낙태, 폭력과 강간... 도대체 기독교 소설에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나 싶겠지만, 그것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된 현대 기독교 소설(Christian novel)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7세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나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 바디스(Quo Vadis)'는 그 장르의 먼 과거에 해당한다.

  영화는 골드 러시로 흥청거리는 서부 정착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지역에서 최고로 인기가 많은 창부 앤젤은 잔혹한 포주 밑에서 희망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런 엔젤에게 순박한 청년 농부 마이클이 나타난다. 이 남자는 앤젤을 사랑한다면서 결혼해달라고 말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앤젤은 마이클을 밀어내지만, 남자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씩 마이클에게 마음을 열게된 앤젤은 마이클의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클의 매형 폴이 찾아오고 폴은 앤젤의 과거를 들먹이며 마이클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앤젤은 고통스런 과거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원작자 프랜신 리버스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서부'를 온갖 죄와 악덕의 구렁텅이로 묘사한다. 금을 찾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은 앤젤과의 동침을 꿈꾸며 번호표 당첨의 기회를 열망한다. 그들이 내는 화대(花代)는 고된 노동의 산물인 '사금'이다. 욕정을 만족시키는 댓가로 금가루를 지불하는 그곳에 처절하게 고통받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자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앤젤을 낳았다. 버림받은 앤젤의 엄마는 매춘부로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그리고 어린 앤젤은 사창가에 팔렸다. 주인공 앤젤이 살아온 지독한 수난극 같은 인생에 구원자 마이클이 홀연히 등장한다. 마이클은 더러운 서부의 지옥도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순결한 인물이다. 마이클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앤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마이클의 앤젤에 대한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신앙적 사명감의 측면이 더 크다.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사랑을 신의 계시와 섭리로 생각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앤젤에게 다가서며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삶의 큰 틀에 앤젤을 포섭하려고 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을 언급하는 이 남자의 집념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서 앤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온전히 한 인간, 여성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앤젤이 강물에서 피가 나도록 마구 피부를 문지르며 씻는 장면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런 앤젤과 정반대의 대비되는 지점에 마이클이 서있다. 완벽하고 순결한 배우자, 구원자인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작가 Francine Rivers의 개인적 삶에 들어 있다. 리버스는 로맨스 소설로 자신의 글쓰기 경력을 시작했다. 1947년생인 이 작가는 마흔이 될 무렵, 인생과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만난다. 독실한 기독교도로 거듭난 것이다. 더이상 그저 그런 싸구려 로맨스 소설 따위는 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와 신의 섭리를 전파하는 도구로써 글을 써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쓴 작품이 바로 'Redeeming Love(1991)'였다. 이 소설은 구약 성서의 '호세아서(Book of Hosea)'에서 주요한 플롯을 따왔다. 14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예언서는 예언자 호세아가 신의 명령에 따라 창녀 고멜과 결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창부 고멜은 이교도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리버스의 소설 '구속의 사랑'은 순박한 농부 마이클 호세아와 창녀 앤젤의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선정적이고 적나라한 표현과 설정도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미명하에 쉽게 용인된다. 성서와 로맨스의 이 기묘한 결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상업주의적인 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폭력과 성에 대한 묘사의 수위가 높아진다.

  "새라, 그게 내 진짜 이름이에요."
   (My real name is Sarah.)

  영화 내내 '앤젤(Angel)'로 불리던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지겨운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2시간 14분은 정말이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었다. 앤젤의 진짜 이름 사라는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이삭의 어머니. 그 작은 뿌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무수한 별처럼 뻗어나갔다. 불임이었던 앤젤은 아이를 갖게 되고 마이클과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영화 'Redeeming Love'는 그렇게 끝난다.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기묘한 변형과 일탈적 면모가 어떻게 영화로 구현되었는지 궁금한 이라면 한번 볼 법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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