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손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잘라서 강물에 내던져야 한다."

  영화 '개의 심장(Heart of a Dog, 1988)'을 만든 Vladimir Bortko는 신문에 실린 평론가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작가 Mikhail Bulgakov가 1925년에 쓴 원작 소설은 소련에서 오랫동안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 집권기에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을 타고 공식적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을 가지고 TV 방영용 영화로 만들었다. 방영 후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저주에 가까운 혹평은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영화 '개의 심장'은 문학을 모범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소련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세피아(sepia)'색의 필터를 끼워서 촬영했다. 누리끼리한 황갈색의 독특한 색감은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개의 시점 쇼트로 펼쳐지는 1920년대 소련의 풍경과 마주한다. 눈이 쌓인 황량한 거리에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한다. 1차 세계 대전에 이어 오랜 적백 내전으로 소련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소련 인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사람이 그럴진대 개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원작 소설 속에서 처음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바로 'Sharik'이라는 이름의 개이다. 샤릭은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굶주린 개 샤릭은 Filipp Filippovich Preobrazhensky 박사가 건네는 소시지 한 조각에 혹해서 따라간다. 회춘 시술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에게는 시커먼 속셈이 있다. 그는 샤릭을 자신의 의학 실험에 쓰려고 한다. 그렇게 박사의 아파트로 들어선 샤릭은 곧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다. 박사는 샤릭의 생식기와 뇌하수체를 제거한다. 그리고 샤릭에게 술집에서 칼에 찔려 죽은 발랄라이카 연주자 클림 추군킨의 몸에서 떼어낸 기관을 이식한다. 과연 박사가 만들어낸 괴이한 피조물 샤릭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원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소련이란 국가의 탄생과 성장을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관점은 뒤틀리고 기이한 환상 문학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개의 심장'은 불가코프의 소련 체제 비판서나 다름없다. 검열 당국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체제의 중심 구성원들이다. 7개의 방이 딸린 아파트에서 지내는 박사는 부르주아를, 거리의 개 샤릭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박사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본더는 공산당을 대표한다.

  영화는 초창기 소련 체제에서 그 세 구성축이 어떻게 은밀하고도 격렬하게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부르주아의 삶을 영위하는 박사의 저녁 식탁에는 와인과 캐비어가 자리한다. 그는 우매한 민중과 그들을 조종하는 공산당에 대해 성토한다. 슈본더와 동료들의 공산당 지부에서는 장엄한 혁명가가 울려퍼진다. 그 사이에서 샤릭은 박사의 수술을 통해 개에서 조금씩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이 과정은 매우 극적이다. 짐승의 소리에 가까운 어, 으, 하는 비명을 내던 샤릭은 점차 인간의 말을 배워간다. 말을 하게 된 샤릭은 박사를 '아빠'로 불렀다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박사를 보며 '동무(comrade)'로 바꾼다. 천대받는 동물의 위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적 각성을 하는 순간이다.     

  개에서 사람으로, 이제 샤릭의 이름도 바뀐다. Poligraf Poligrafovich Sharikov. 샤릭이 갖게 된 이름 '폴리그라프'는 '거짓말 탐지기'를 뜻한다. 피험자의 생리적 신체 반응을 기록하는 장치. 비유적인 의미에서 샤릭의 몸은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의 실험장이다. 샤리코프의 존재로 박사는 일순간에 과학계의 스타가 된다. 그와 동시에 샤리코프는 박사의 안정된 일상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노숙자들을 끌고 와서 집안에서 술을 퍼먹는다. 고양이(개였을 때 샤릭은 고양이를 싫어했다)피한다고 욕실로 숨었다가 수도꼭지를 파손시켜 박사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샤리코프가 보여준 파괴적이고 저속한 행동은 박사와 조수 보르멘탈을 경악하게 만든다.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자신만의 각인을 새겨넣는다. 바로 무성 영화를 활용한 장면이다. 영화의 초반부, 떠돌이개 샤릭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타이피스트 아가씨가 나온다. 이 가난한 아가씨는 틈만 나면 영화관에 가서 무성 영화를 본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러한 장면은 민중을 현혹하는 거대한 환영(幻影)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암시한다. 이는 나중에 샤리코프가 공산당원이 되어 열성적으로 일하는 장면이 무성 영화로 제시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박사가 만든 괴이한 생명체 샤리코프는 이제 박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아니, 박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슈본더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박사는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서신을 읽고 있는 샤리코프를 보게 된다. 샤리코프는 더이상 개가 아니다. 단지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발화'를 할 줄 아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개의 심장'에서 '거울'은 의미심장한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개의 모습일 때의 샤릭이 보는 거울, 수술을 통해 인간 샤리코프가 된 후 바라보는 거울. 박사가 만들어낸 이 괴생명체는 개인가, 인간인가? 관객은 거울 속 존재의 내면에 자리한 다층적 면모를 목도한다. 떠돌이 개 샤릭, 범죄자 추군킨, 슈본더가 주입한 공산주의 사상, 박사가 가르치려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과 허위의식... 원작자 불가코프는 공산당이 부르짖는 인간 개조의 불합리성과 허상을 샤리코프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결코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는 이 존재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박사는 자신을 당에 고발한 샤리코프를 원래 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초반부와 마지막 부분에는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눈으로 진창길이 된 거리를 행군하며 힘차게 군가를 부른다. Julius Kim이 작사한 군가의 가사는 이렇다. '백군은 완전히 패배했지만, 붉은 군대는 그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의 관객에게 그 군가는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66년 전에 예지적 안목을 지닌 작가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역사적 실험을 그렇게 글로 남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개가 된 샤리코프, 아니 샤릭은 박사의 서재에 편안하게 앉아있다. 박사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공산당원에게 프롤레타리아가 싫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들, 부르주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진 출처: open-foto.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Mikhail Bulgakov(1891-1940)

 


***'NEP' 시기 소련의 흔들리는 풍경,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Трактир на Пятницкой, The Tavern on Pyatnitskaya, 1978)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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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구부러진 길, 영국 감독 Barney Platts-Mills(1944-2021)의 영화 두 편

Bronco Bullfrog(1969), 1시간 26분

Private Road(1971), 1시간 29분


  영국의 감독 Barney Platts-Mills'Bronco Bullfrog(1969)'는 하마터면 다시는 관객을 만나지 못할 뻔 했다. 개봉 당시에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배급사는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급기야 1980년대 중반에 마스터 네가티브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걸 매립지행에서 구해낸 사람은 영화사 직원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살아남았다(출처 theguardian.com). 'Bronco Bullfrog'에 출연한 이들은 하층민 출신의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Stratford의 Theatre Royal에서 지역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해 마련한 연기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저예산에 아마추어 배우들을 데리고 플래츠 밀즈는 자신의 첫 영화를 찍었다.

  델, 로이, 크리스, 제프. 4명의 십 대 청소년들은 잽싸게 카페의 창문을 깨고 가게 이곳저곳을 뒤진다. 기껏 갖고 나간다는 것이 케이크 몇 조각. 어째 하는 걸 보니 녀석들은 초짜 도둑들 같다. 싸구려 변두리 영화관에서 시간을 죽이더니, 길가던 남자한테 주먹질로 시비를 건다. 버려진 건물 아지트에서는 도색 잡지를 보면서 키득거린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Bronco Bullfrog 조가 무리에 합류하면서 녀석들의 비행은 범죄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델은 또래 아이린과 연애를 시작한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연애를 할까? 가진 돈이 없으니 갈 데도,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훔친 오토바이로 시내 질주하기, 무너진 건물 아지트와 근교 숲에서 시간 때우기... 맘놓고 서로를 안을 장소도 찾기 어렵다. 궁리 끝에 연인들이 찾아간 곳은 친구 Bronco Bullfrog의 허름한 하숙방이다. 훔친 물건들로 채워진 비좁은 침실에서 델과 아이린은 침대에, 조는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감독 바니 플래츠 밀스의 이 데뷔작은 모든 일에 어색하고 서투른 십 대 연인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놀라운 생기가 영화 곳곳을 가득 채운다. 사실적이고 자연스런 연출, 주변부 청춘과 하층민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에서 이 감독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2년 뒤에 내놓은 'Private Road(1971)'는 얼핏 보기에 평범한 로맨스 영화 같다. 이제 막 첫 소설을 낸 피터는 출판사 직원 앤과 연애를 시작한다. 이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게 푹 빠진다. 중산층인 앤의 부모는 가난한 글쟁이 피터가 영 마뜩잖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스코틀랜드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시골 오두막에서의 목가적인 생활도 잠깐, 앤은 임신하고 책임감을 느낀 피터는 결혼을 생각한다.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광고 회사에 취직한 피터. 원치 않는 일을 하려니 자괴감만 커진다.

  감독 Barney Platts-Mills는 두 연인의 사랑과 이별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집요하게 계층의 문제를 다룬다. 전작인 'Bronco Bullfrog'에서도 그러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델의 아버지는 아이린을, 아이린의 엄마는 델을 싫어한다. 그들은 같은 하층민이면서도 서로의 배경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돈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Private Road'에서 앤의 부모가 피터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앤도 차츰 자신과 피터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 차이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 피터는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에 찌들어 간다. 경제적인 압박감은 앤과 피터의 삶에 조금씩 균열을 가한다. 거기에 피터가 이어온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도 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터는 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약쟁이 친구가 집에 맘대로 드나드는 것을 감싼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앤은 피터를 떠나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앤이 둘 사이의 아이를 포기하게 되면서 젊은 연인의 짧았던 좋은 날도 끝난다. 다시 작가의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피터는 친구와 함께 회사의 타자기를 훔친다.

  영화는 청춘의 구부러진 뒤안길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계층간의 격차는 사랑으로 극복되지 않으며, 예술가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Private Road'는 'Bronco Bullfrog' 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작품성 면에서는 데뷔작을 능가한다. 두 작품을 통해 동시대 영국 젊은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 Barney Platts-Mills는 작년 10월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올해 초에 디지털로 새롭게 복원된 'Bronco Bullfrog'가 고인의 영화 세계를 알고픈 관객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사진 출처: observer.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감독 Barney Platts-Mills



****영국의 Kitchen Sink Drama Film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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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들은 들뜨고 기대에 차있다. '새로운 고기(new meat)'가 곧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정육점인가? 아니다. 호주 오지의 술집(pub)이다. Coolgardie는 서호주 중남부 내륙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 20세기 초반에 금광의 발견으로 흥청거렸던 이 마을은 이제 그 누구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두 명의 핀란드 아가씨가 도착한다. 배낭 여행객 스테파니와 리나는 Bali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남은 돈이라고는 15달러가 전부. 호주에 도착한 그들은 워킹 홀리데이로 여행 경비를 벌 생각을 하고 직업 소개소로 간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Hotel Coolgardie'. 그렇게 스테파니와 리나의 잊지못할 워킹 홀리데이가 시작된다.

  시골 술집의 구수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큰 오산이다. 술집 주인 피터는 욕설과 모욕적인 표현(shit, bitch)을 입에 달고 산다. 예절바르고 교양있는 두 명의 핀란드 아가씨는 그곳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다(언어 때문이 아니다. 리나와 스테파니의 영어 구사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 이 시골 주민들의 입은 거칠기 짝이 없다. 스테파니와 리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명백한 성차별, 성희롱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말부터, 나체 여자 사진 들이대면서 지분거리는 일은 사소할 뿐이다. 술꾼은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속하고 너절하게 구는 중년의 여자 술꾼들도 있다. 리나와 스테파니에게 욕설을 퍼붓고, 먹다 남은 술을 카운터에 쏟아버리기도 한다.

  호주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Pete Gleeson은 호텔 쿨가디를 이전에 여러 번 방문했었다. 그의 관심은 그곳 사람들의 폐쇄성이 외지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2016년작 다큐 'Hotel Coolgardie'는 그렇게 외국인 스테파니와 리나의 쿨가디 체류기를 담아낸다. 거칠고 상스러운 술꾼들에게 핀란드 아가씨들은 바텐더가 아니라 정육점에 전시된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meat)'이다. 어떻게든 들이대려고 추근거리고, 욕설과 희롱으로 모멸감을 준다. 그런 상황에서 리나와 스테파니가 보여주는 절제와 평정심은 놀랍기만 하다. 이전의 많은 여자 바텐더들이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나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긴 너무 슬프고 희망이 없는 곳이에요. 이런 곳에 누가 있으려고 하겠어요?"

  리나는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부는 마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광산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자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손님들이 털어놓는 개인사는 건조하고 서글프다. 한 남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 주변 사람들과 바람난 아내 이야기를 꺼낸다.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몇 번이나 낙태를 시켰는가를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좀 더 대범한 스테파니가 그런 말들을 흘려버리는 것과는 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리나는 힘들어 한다. 힘든 노동 환경에서 두 명의 아가씨는 일과 후에 술에 취한 날들이 많아진다. 무엇보다 당뇨가 있는 리나에게 그런 상황은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Hotel Coolgardie'는 호주 오지 마을의 술집을 통해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동력 착취의 맨얼굴을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한 집단, 사회의 안정성이 여성의 지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성이 바텐더로 일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만약 스테파니와 리나가 시드니나 퍼스 같은 대도시 pub에서 일했다면 그 경험은 분명 쿨가디에서와는 달랐을 것이다. 빈곤, 억눌린 분노와 좌절, 단절된 인간 관계의 시골 마을에서 여성들, 외지인은 차별적인 구조의 하부에 자리한다. '고깃덩어리'로 취급받는 젊은 여성 바텐더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가깝게 지내온 손님들과 근교로 캠핑을 다녀온 뒤, 리나는 당뇨로 악화된 감염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 가차없는 술집 주인은 스테파니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큰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은 뒤에 리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감염의 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잃고, 다른 한쪽 눈의 기능은 30%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리나에게 호주 쿨가디에서의 경험은 '악몽의 워킹 홀리데이'로 남았다.

  Pete Gleeson은 현실 여행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밑바닥을 호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놓는다. 차별, 적대감과 공포, 질병, 불운과 궁핍... 인생에서 어떤 일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Coolgardie가 리나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그토록 노골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릴 수 있는 기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맞다. 결국 관객들은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교류와 소통에는 지역과 계층, 경제적 배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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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메타버스(Metaverse). 3차원의 가상 세계와 소셜 미디어가 결합된 새로운 플랫폼. 호소다 마모루의 2021년작 '용과 주근깨 공주(Belle, 2021)'는 바로 그 메타버스를 애니메이션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미녀와 야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 특이한 애니메이션은 프랑스 동화에서 한참을 이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호소다 마모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늑대아이(2012)'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한 감독이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국내 개봉한 그의 신작은 별다른 화제가 되지 못하고 곧 잊혀졌다. 아니, 혹평 속에 버려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개연성 없는 이야기, 지나치게 난삽한 플롯, 빈약하게 구축된 캐릭터들. 메타버스 열풍에 발빠르게 탑승한 이 영화는 실패작인 걸까?

  보고 나면 한숨만 나오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일본에서의 초대박 흥행 성적이었다. 이 영화는 2021년 일본 흥행 성적 3위로 65억 3천만 엔의 극장 수익을 기록했다. 물론 일본 관객들의 특촬물과 애니메이션 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용과 주근깨 공주'가 특별히 관객성에 더 호소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일본의 관객들을 이 영화 앞으로 모여들게 만들었을까? 이 글은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스즈는 17살 고등학생이다. 스즈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겠다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은 성장 과정에서 스즈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는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스즈에게 절친 히로는 가상 메타버스 'U'를 소개한다. 'Belle'이라는 아이디로 U에서 가수로 데뷔한 스즈는 엄청난 인기를 얻는다. 마침내 전세계의 팬들이 모인 가운데 Belle의 콘서트가 열린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Dragon'의 난동으로 콘서트는 엉망으로 끝난다. U에서 자경단을 이끄는 저스틴이 드래곤을 추적하는 동안, 스즈 또한 드래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히로의 도움으로 드래곤의 은신처를 찾아낸 스즈는 드래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스즈는 현실 세계에서 '목소리'를 잃은 존재이다. 엄마는 스즈의 애원을 뿌리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 목숨을 잃었다.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스즈는 마음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런 스즈에게 'U'는 새로운 안식처, 탈출구가 된다. 노래에 소질이 있는 스즈는 현실에서는 부를 수 없는 노래를 U에서 불러 스타가 된다(U는 접속자의 생체 정보를 그대로 반영한다). 메타버스의 가상 현실 속에서 스즈는 내성적인 17살 소녀가 아니라, 주근깨가 있는 인기 미녀 가수 Belle이다.

  거기까지의 내러티브 개연성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스즈, 그러니까 Belle이 자신의 콘서트를 망쳐놓은 드래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좀 이상하다. Belle은 드래곤의 숨겨진 내면의 상처에 감응하고 고통을 느낀다. 이런 설정은 현실 세계에서 아동 학대의 피해자인 드래곤과의 연결점을 만들려는 데에서 생겨난 무리수이다. 드래곤은 케이라는 이름의 아이로 남동생 토모와 함께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드래곤은 그런 케이에게 현실 세계의 학대 피해자가 아닌 강력한 힘을 지닌 가상 캐릭터로 기능한다. 스즈가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Belle을 통해 표현하듯, 케이는 학대의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소망을 드래곤에게 투사한다.

  호소다 마모루는 현실 세계의 해결되지 않은 고통과 상처를 그렇게 메타버스와 결합시킨다. 메타버스는 치유와 평화를 가져오는 거대한 인큐베이터가 되며, 그 중심 역할을 떠맡는 것은 수줍고 내성적이며 트라우마가 있는 여고생 스즈이다. '용과 주근깨 공주'는 이제 페미니즘 서사로 명백하게 전환된다. 스즈는 학대받는 '케이' 형제를 위해 'U'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언베일(unveil)'의 희생을 감수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먼 거리에 있는 케이의 집에 직접 찾아가서, 폭력을 휘두르는 케이의 부친과 대면한다. 아동 학대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것은 공권력과 국가 기관의 몫이지, 일개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과 주근깨 공주'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스즈의 아버지는 매번 딸에게 말을 걸지만 무시당한다. 이런 무기력한 아버지와는 반대되는 지점에 폭력으로 자녀를 지배하려는 케이의 부친도 있다. 스즈가 짝사랑하는 시노부 또한 병풍처럼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호소다 마모루는 남성 캐릭터들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주변부로 밀쳐낸다. 그와는 달리 스즈에게는 '구원자'로서의 사명감을 불어넣고 실행하게 만든다. 이 기이한 페미니즘 서사는 매우 엉성하고 비현실적이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일본 관객들은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을까? 현지인이 아닌 국외자의 시선에는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요인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Covid-19이라는 전세계적인 전염병의 유행, 오랜 경제 침체,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불거진 여러 사회 문제들의 지속,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치유'와 '희망'은 절실한 가치가 되었다. '용과 주근깨 공주'는 그러한 시점에서 일본 관객들의 관객성과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매우 불완전한 서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시대의 호흡으로서 영화가 대중의 기대와 취향에 어떻게 부응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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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학교 마치면 어디 딴 데 가 있고 싶어. 이 영화판 사람들 정상인 사람들 아무도 없어. 다 또라이야."

  이제 막 자신의 영화를 찍은 대학원생 문수(이선균 분)는 전 여자친구 선희(정유미 분)에게 그렇게 말한다. 홍상수의 2013년작 '우리 선희'에는 문수가 말한 그 '또라이' 천지인 영화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아, 거긴 또라이들이 가득했어. 결국 그래서 '어디 딴 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과 학생 선희는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두고 추천서를 받기 위해 최교수(김상중 분)를 찾는다. 헤어진 남자 친구 문수, 가깝게 지냈던 선배 재학(정재영 분)은 다시 보게 된 선희가 너무나도 반갑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세 남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희에 대한 마음을 토로한다. 문수는 선희의 마음을 다시 얻고 싶어하고, 재학은 숨겨왔던 연심을 내비치고, 최교수 또한 제자가 아닌 여자로 선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홍상수의 '소주'가 함께 한다. 

  절친한 사이인 세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 여자가 '선희'라는 사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희는 세 남자에게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확실히 문수와는 끝났고, 최교수에 대해서는 모호하며, 재학에 대해서는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사각 관계의 오묘한 퍼즐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소주'에 있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은 본심을 말하고, 솔직해지며,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 근접한다. '소주'는 홍의 영화적 각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영화쪽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술과 담배는 인간 관계, 영화 작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서 계속 변주해서 보여주는 영화계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신랄하고 풍자로 가득 차 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 선희'는 로맨스 영화라기보다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영화판,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돈 들여 영화를 찍어서 어쨌든 감독 '입봉'을 한 문수, 선희에게 '감독님'으로 불리지만 써지지 않는 차기작 시나리오 붙잡고 씨름하는 재학, '교수' 직함 달고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진입한 최교수. 그들은 서로에게 모두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 세 명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친 곤경은 '선희'가 아니다. 생의 활력 내지는 창의력의 고갈이다.

  관객은 세 남자가 바라보는 선희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같은 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최교수의 추천서에서부터 시작된 이 언어의 여정은 세 남자가 창경궁에서 우연히 모이게 되는 자리에서 정점을 이루며 끝난다. 내성적이지만, 똑똑하고, 안목이 있으며, 때론 또라이 같지만, 용감하다. 마치 감염이 되듯 그들은 술자리에서 서로 나눈 대화들을 머릿속에 '입력(input)'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인출(output)'한다. 이건 선희에 대한 평가뿐만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개똥철학과 같은 신념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수가 투정처럼 영화판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선희는 한 우물 파듯 끝까지 해봐야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다고 젠체하며 충고한다. 그런데 그건 선희가 문수를 만나기 직전에 추천서 문제로 만난 최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문수는 선희에게 들었던 그 말을 선배 재학과의 술자리에서 열정적으로 강변한다. 재학은 나중에 선희와의 술자리에서 그 '한 우물' 타령을 앵무새처럼 읊조린다. 이 우스꽝스러운 언어의 유랑을 보는 일은 허허로우면서도 통렬하다.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판'이라는 비좁은 생태계의 폐쇄성을 선희와 세 남자의 관계를 통해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적확하며 사실적이다. '선희'는 세 남자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정체된 삶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줄 영감(靈感), 뮤즈(Muse)로 여겨진다. 최교수는 선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의 울렁거림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재학에게 토로한다(그는 선희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차기작은 언제 할지도 모르는 재학에게 선희는 신선한 열정의 통풍구이다. 문수는 또 어떤가. 돈 천만 원 들여 찍은 영화는 관객이 거의 들지도 않은 영화이다. 선희는 그 영화가 둘의 연애 관계를 그대로 베껴서 써먹었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문수가 선희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것은 바닥난 창작력에 물을 붓고 싶어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우리 선희'는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허명(虛名)에 얽매인 인간군상들의 적나라하고도 서글픈 초상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 내내 계속 웃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는 가슴 한켠이 꽤나 쓰라렸다. 문수, 재학, 최교수, 선희...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한 번쯤 만났을 법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술자리와 대화는 나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반복해서 쓰는 말이 있다. 시간 되면 전화할게, 꼭 보고 싶었어, 너 예뻐(이건 남자들이 선희에게만 하는 건 아니다. 선희도 재학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쁘다고 말한다). 모두다 거짓부렁이야... 아름답게 빛나는 예술은 저 멀리에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며, 인생은 짧다. '우리 선희'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 예술의 진창길에서 몸부림친다. 나는 홍상수가 보여준 이 처절한 자기 성찰에 진심으로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들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도망친 여자(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woman-who-ran-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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