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종말,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 1960)



1. 몰락의 시작

  "남색가로 처신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For Oscar Wilde posing Sodomite)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건의 시작은 바로 그 짧은 메모에서부터였다. 그런 상스러운 메모를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에게 남긴 사람은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erry)이었다. 그는 와일드가 아들 알프레드 더글라스(Alfred Douglas)를 유혹해서 앞길을 망치고 있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Bosi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퀸즈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과 와일드는 지나치게 친밀했다. 21살의 옥드퍼드 대학생 알프레드를 만났을 때의 와일드의 나이는 서른 아홉, 그로부터 4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해외 여행을 다녔고, 여러 호텔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와일드는 작가로서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명성과 돈이 그의 곁에서 마구 흘러다녔다. 그런 그에게 퀸즈베리 후작이 보낸 메모는 파멸의 신호탄이었다.

  켄 휴즈 감독의 1960년작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은 메모 한 장으로 촉발된 재능있는 작가의 몰락을 담아낸다. 오스카 와일드는 명예훼손 혐의로 후작을 고소했다. 이후 세 번의 재판이 이어졌다. 와일드는 승소를 장담했다. 하지만 재판은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재판에서 변호사들은 패소를 예감하고 소를 취하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이제 그는 피고석에 서야만 했다. 젊은 남자들을 유인해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죄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당시의 재판 기록과 작가의 편지에서 드러난 사실을 충실히 재현한다.

  1895년, 재판이 시작된 그 해에 와일드는 인생의 전성기를 맘껏 구가하고 있었다. 이전에 발표한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 1892)'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직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이 그해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은 참이었다. 와일드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스런 두 아들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중에 감옥에서 쓴 서간집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에 그렇게 썼다. 신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왕세자가 그의 연극을 관람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단 한 사람, 퀸즈베리 후작은 적대감을 표시한다. 와일드(피터 핀치 분)는 그런 후작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람들은 후작을 비웃는다. 그 장면은 이 다혈질의, 고집불통인 귀족이 사교계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

  그는 아들 알프레드와 극도로 불화했다. 아들은 와일드와 헤어지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한다. 더이상 자신의 삶에 간섭하면 총으로 쏘아죽이겠다는 악담과 함께. 이 부자(父子)는 물과 기름처럼 화합할 수 없는 사이였다. 영화에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알프레드의 형 프랜시스의 장례식으로 가족이 모였을 때이다. 사냥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정황은 자살을 암시한다. 프랜시스는 동성애에 대한 추문에 휩싸였다. 후작은 장남을 잃은 상심이 큰 상태에서 셋째 아들 알프레드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그는 아들을 다그치지만, 알프레드는 지독한 증오로 맞설 뿐이다. 어머니를 버리고 상간녀를 집안에 들였다며 알프레드는 후작을 비난한다.

  후작은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오스카 와일드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냥감을 조준하는 사냥꾼처럼 와일드를 몰아나갔다. 와일드의 집에 깡패와 함께 들이닥쳐서 난동을 부렸다. 와일드의 희곡 '정직함의 중요성'이 초연될 때에는 쓰레기 뭉치로 연극을 망쳐놓으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와일드도, 아들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다. 마침내 후작은 미끼를 던진다. 와일드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 공개적으로 모욕의 메모를 남긴 것이다. 와일드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당했다고 느꼈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와일드의 지인들은 소송이 결코 현명한 대응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것이 불쏘시개가 되어 더 큰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이었으며 세월이 흘러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로비 로스는 와일드를 잘 알았다. 해외로 나가서 지내라고 말했지만, 와일드는 듣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소송이 자신의 아버지를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라며 와일드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결국 와일드는 젊은 연인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커다락 패착임이 밝혀진다.

  영화는 첫 번째 재판에서 퀸즈베리의 변호인 카슨(제임스 메이슨 분)이 와일드를 교묘하게 몰아세우는 것을 보여준다. 카슨(그는 와일드의 트리니티 대학 동기였다)에게 오스카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의 남색 기질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다. 와일드는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현실의 규범은 다른 것이라며 현란한 말솜씨로 카슨의 심문을 피해갔다. 피고인석에 있는 퀸즈베리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재력과 온갖 더러운 연줄을 동원해 와일드의 과거를 캐냈다. 그렇게 해서 '와일드의 남자들'이 법정에 등장했다. 변호사는 와일드에게 소를 취하할 것을 권유한다. 후작은 풀려났다. 이제 와일드가 후작이 서있던 피고인석에 서게 될 차례였다. 경찰은 와일드에게 신속하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3. 체포와 투옥,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와일드의 감옥살이는 단순히 동성애 때문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법적인 문제가 얽혀있다. 와일드의 혐의는 'gross indecency(중대한 외설 행위)'에 해당했다. 1885년에 개정된 영국 형법 11조의 항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죄목은 성범죄에 있어 이전까지 보호받지 못했던 어린 소년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남색(sodomy)'을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한 조항으로 여겨졌으나, 문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과연 무엇을 '남색'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런 법 조항 때문에 정황 증거만으로도 혐의가 인정될 수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었다. 법률가들은 이 형법 조항이 피의자에 대한 '협박용'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두 번째 재판에서 검사는 오스카 와일드가 가깝게 지냈던 과거의 남자들이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와일드의 젊은 시절은 분명 방탕했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엄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칭송하던 작가의 과거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범죄로 가득차 있었다. 검찰 측은 와일드를 미성년자를 꾀어서 타락하게 만든 범죄자로 몰아갔다. 사법 당국의 입장에서 와일드의 재판은 '중대한 외설 행위'를 규정한 형법 조항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본보기였다.  

  와일드에게 감옥행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막대한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난 와일드에게 절친 로비 로스는 해외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와일드는 영국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배편을 붙잡지 않았다. 아마도 이 소송의 시작에서부터 마비된 그의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와일드는 2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감옥 생활은 혹독했다. 몸과 마음이 병든 것은 물론이고, 와일드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했다. 후작의 소송 비용까지 갚아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콘스탄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떠났다. 남편의 불명예가 두 아들의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의 성씨를 바꾸어 버렸다. 와일드는 감옥에서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 아내에 대한 미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도록 와일드를 괴롭혔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인색하게 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이 받은 유산이 있음에도 아내는 와일드에게 지원을 꺼렸다. 감옥에 있던 와일드가 가장 의지한 것은 로비 로스였다. 와일드의 전 연인이 우정의 가치를 입증한 것과는 달리 젊은 연인은 그다지 한 일이 없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그 배신감을 절절히 토로한다. 알프레드는 감옥의 와일드를 만나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았다. 와일드에게 받은 이전의 편지들을 출판하고 싶다고 뻔뻔하게 의향을 묻기는 했다.


4. 최후

  영화는 감옥에서의 와일드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처리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와일드는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혹독한 노동과 열악한 감옥에서의 생활로 와일드의 모든 것은 망가졌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감 생활의 끝 무렵에서야 글을 쓰는 것이 어렵게 허용되었다.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 모음집인 '심연으로부터'는 그때 쓰여졌다. 그 서간들에서는 지독한 사랑 때문에 내치지 못했던 연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연인은 심한 낭비벽에, 제멋대로였으며,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와일드를 집요하게 조종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와 퀸즈베리 후작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라며 분노를 표시한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은 뛰어난 작가를 파멸로 이끈 주변 인물과 재판의 과정을 간결하게 그려낸다. Peter Finch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었던 와일드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알프레드 역을 연기한 John Fraser는 정말 놀랍다. 허영과 야망, 독선으로 똘똘 뭉친 파괴적인 아도니스(Adonis)는 자신이 가진 사랑의 권력을 맘껏 휘둘렀다. 실제로 동성애자였던 프레이저는 와일드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젊은 연인 알프레드 그 자체로 변모한다.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를 연기한 Emrys Jones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출옥한 와일드는 아내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국을 떠난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알프레드가 와일드를 부른다. 하지만 와일드는 슬프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연인을 외면한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알프레드가 돌아서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나중에 알프레드는 와일드를 찾아가 잠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들의 재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마지막 만남을 '쓰라린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고 글로 남겼다. 그는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난과 병고는 그의 남은 생의 동반자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 호텔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뇌수막염이었다. 그는 수감 생활 중에 귀 한쪽의 청력을 잃었고,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렇게 상한 육신으로 와일드는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기도 했다. '상호합의에 의해 맺은 동성애 관계는 처벌할 수 없다.' 1967년, 와일드를 감옥으로 가게 만들었던 영국의 형법 조항은 개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뜬지 67년이나 지난 뒤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에서 John Fraser(맨 오른쪽)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라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감옥에서 쓴 서한집 '심연에서(De Profundis)': 이 책은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가 편찬했다. 와일드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사후 관리인으로 로스를 지정했다.

Oscar Wilde Himself(1985): BBC 제작 다큐. 이 다큐에는 퀸즈베리 후작의 증손녀와 와일드의 손자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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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ey Gardens(1975). Direct Cinema(제작자의 관점을 최소화하는 다큐 제작 방식)의 기수였던 Maysles 형제는 괴짜 모녀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녀의 집은 부유층 주거지역에 자리한,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이다. 재클린 케네디는 모녀와 인척 관계(이모와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인 접촉도 없이, 마치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큐는 몰락한 상류층의 음울하고도 폐쇄적인 삶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Amalia Ulman의 'El Planeta(2021)'를 보면서 나는 그 다큐를 떠올렸다. 감독 Amalia Ulman은 모친과 함께 이 영화에서 연기도 한다. 영화는 퇴거 직전의 아파트에 사는 모녀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대생 레오가 어떤 남자와 커피숍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날씨에 대해 말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오는 남자와 가격을 흥정한다. 남자가 부른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자 거래는 곧 무산된다. 그렇게 돈에 쪼들리는 여대생 레오의 매춘 시도는 허망하게 끝난다. 레오가 엄마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집세는 밀려있다. 그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한은 겨우 두 달, 패션을 전공하는 세련된 여대생과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엄마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급전이 필요하니 집안의 가전 제품이라도 내다파는 딸과는 달리, 엄마 마리아는 천하태평이다. 식탁에 앉아서 싫어하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 냉동실에 넣는다. 이 괴짜 엄마는 외출할 때는 모피와 명품으로 치장한다. 딸은 온라인 채팅에서 자신의 신분과 배경을 과시하면서 괜찮은 남자가 걸려들까 기대한다. 놀랍게도 두 모녀는 코앞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지 않는다. 돈보다는, 이제는 죽어서 곁에 없는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전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녀가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명품으로 치장한 엄마는 좀도둑처럼 상점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다. 딸은 낭만적 연애를 기대하며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침내, 집안의 전기가 끊긴다. 냉장고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레오는 현관 앞의 전등불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 비참해지고 슬퍼진 모녀는 서로를 비난하며 싸운다. 그들이 화해하고 한 일은? 고급 미용실에 가서 단장을 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한다. 물론 외상으로.

  영화 속 한가롭고 평화로운 해변 도시 히혼(Gijón)의 풍광에서 스페인이 겪고 있는 오랜 경제 침체의 그림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서민층 주거의 불안정성이 주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자금력을 지닌 부동산 업체들은 싼값에 건물을 매입해서 임대 사업을 벌이며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집세를 내지 못한 저소득층 세입자들이 퇴거당해 길가에 나앉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감독 아말리아 울만도 퇴거의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출처: interviewmagazine.com).

  아말리아 울만은 중산층의 삶에서 급전직하하는 모녀의 모습을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코미디로 비틀어 끼워넣는다. 계급 의식과 삶의 방식은 결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녀의 삶에는 도무지 처절함이라든가, 심각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마틴 스콜세지가 인근 도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가 봐야 한다며 고급 의상실에서 옷을 맞춘다. 전기가 끊겨서 촛불을 켜놓은 집에서 돌리 파튼의 흉내를 내면서 즐거워 한다. 마리아의 지독한 속물 근성과 기만적 현실 인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종의 애잔함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닥친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도달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풍경은 스산하다. 결국 마리아는 집을 찾아온 두 명의 경찰과 함께 사라진다.

  Maysles 형제는 'Grey Gardens'에서 궁핍한 처지에 놓인 상류층 모녀의 뒤틀린 삶을 다소 착취적인 방식으로 전시한다.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 감독은 그와는 다른 지점에서 빈곤과 계층 의식에 대한 탐구를 풀어낸다. 'El Planeta'의 레오와 엄마의 모습에는 추락하는 존재의 비감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결코 냉소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 모녀 사이로 영화 속 배역을 소화해낸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주는 영향도 있다. 영화의 제목 'El Planeta'는 '행성'이란 뜻이다. 아말리아 울만에게 있어 퇴거의 경험은 낯선 행성의 삶처럼 막막했던 것일까? 영화는 그렇게 창작자의 현실을 반영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2018년에 마틴 스콜세지는 예술에 공헌한 공로로 스페인 왕실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당시 실제 뉴스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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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적 마법, 59분의 Long take: 지구 최후의 밤(地球最後的夜晚, 201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은 무척 많다. 중국의 Bi Gan(毕赣) 감독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러닝타임 2시간 18분. 그의 2018년작 영화 '지구 최후의 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은 도입부에서부터 매우 불친절하고 지루한 서사를 이어간다.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다가 1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인공 남자는 허름한 시골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그제서야 뜬다. 남자는 동굴의 협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롱 테이크(long take)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시간을 재어 보니 1시간에서 1분이 빠진다. 무려 59분의 롱 테이크. 이 기기묘묘한 영화적 마법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허름한 유곽의 어느 창녀의 집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기억 속에서 한 여자를 떠올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루오'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완 치완(탕웨이 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주를 이룬다. 남자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 Kaili를 방문한다. 계모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유품인 벽시계 뒤에는 주소가 적힌 사진이 있다. 그 주소에는 죽어버린 루오의 친구 Wildcat의 모친이 살고 있다. 그 모친에게서 루오는 한때 Wildcat과 가까웠던 완 치완의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대강의 줄거리를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엉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영화 속 세계를 설계한 감독 자신 뿐이리라.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 속에서 비간은 이야기 중심의 서사에서 이탈하며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배열한다. 이 영화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Stalker, 1979)'에서 차용한 '물'의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산사태와 홍수 예보가 나오는 도시, 루오는 물이 흥건한 폐가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머문다. 완 치완은 루오와 함께 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완 치완의 행방을 찾아 시골 마을에 다다른 루오는 영화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59분의 롱 테이크가 영화의 후반부를 이룬다. 동굴 안에서 소년을 만난 루오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출구를 찾는 여정, 그것은 루오가 꿈에서 현실과 기억을 변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 치완은 당구장을 운영하는 여주인으로, Wildcat의 모친은 사랑에 미쳐버린 늙은 여자로 나온다.

  어떻게 59분 동안 하나의 테이크를 이어갈 수 있을까? 루오가 타고 들어간 협궤 열차에서부터 시작된 테이크는 동적인 에너지에 의해 연속적으로 추동된다. 소년의 오토바이, 외줄 수송선, 움직이는 장난감 트럭, 당구공, 흥분해서 날뛰는 소... 마치 게임에서 최고난도의 퀘스트를 깨는 사람처럼 비간은 그 모든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통제한다. 물론 완성된 테이크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려 7번에 이르는 시도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출처 indiewire.com). 드론을 이용한 촬영은 놀라운 공감각적인 풍광을 제시한다. 3D로 변환된 이 테이크는 오직 영화관에서만 온전히 볼 수 있다. 비록 일반 화면으로 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비간의 영화적 실험은 전율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며, 롱 테이크를 비중있게 배치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 비간의 영화 문법은 기존 중국 영화의 전통에서 특이하게 동떨어져 있다. 그의 2015년작 'Kaili Blues(路边野餐)'에는 신인 감독 비간의 영화적 근원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흩어져 있다. 구이저우성은 중국 소수민족 '묘족(苗族)'들의 중심 거주지이다. 구이저우성 Kaili출신인 비간은 변방의 정서에, 이미지 중심의 새로운 서양 영화 문법을 결합시켰다.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에게서 빌려온 물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시계, 사진, 동굴, 터널, 기차와 같은 이미지들이 변주된다. '지구 최후의 밤'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불교의 경전 '금강경(金剛經)'의 구절처럼 함축적이고 다의적 의미를 지닌 언어와 노래 또한 비간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주요한 소재가 된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이 쓴 시를 읊는다.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2. 고장나고 망가진 현실을 떠나: Kaili Blues(路边野餐, 2015)

  '카일리 블루스'에서 전반부는 Kaili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과 경력이 있는 Chen은 늙은 여의사와 마을 진료소를 꾸려간다. 그는 아이에게 무관심한 이복 동생을 대신해 어린 조카 웨이웨이를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가 사라진다. Chen은 동생을 거칠게 다그치지만 조카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웨이웨이를 찾아 나서는 길, 늙은 동료 의사는 Chen에게 자신의 옛 연인을 찾아서 셔츠와 카세트 테이프를 전해주라고 부탁한다. 기차를 타고 Chen이 도착한 곳은 Dangmai라는 기이한 마을이다.

  '지구 최후의 날'에서 루오가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그의 무의식, 꿈에 해당하는 영역의 탐험과도 같다. 과거와 현실이 마구 혼재된 루오의 이 여행은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Chen의 Dangmai 여정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들은 어느 시점에서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닻을 내린다. 물은 현실을 꿈으로 이행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루오가 완 치완과 함께 누워있을 때 강물이 그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Chen은 상상 속에서 어머니의 파란 색 신발이 강물에 가라앉는 것을 본다.

  현실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주인공의 여정에 계속해서 틈입한다. 감춰둔 과거의 기억과 감정, 소망과 두려움이 인물을 감싼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Chen은 자신의 기억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과거와도 마주한다. Chen은 입고 갔던 셔츠를 벗고, 동료 여의사가 준 셔츠로 갈아입는다. 마치 영매(靈媒)가 되듯, Chen도 자신의 의뢰자인 동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예상과는 다르다. 옛 애인에게 전해달라는 카세트 테이프를 아내의 얼굴을 닮은 미용실 주인에게 선물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었을 때 아내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렇게 속죄하고 싶어한다. 늙은 여의사의 오래전 이루어지지 못한 애절한 사랑은 Chen의 과거와 닮아있다. 나중에 그는 여의사의 옛 애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테이프는 전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작별(farewell)'이란 노래가 실린 테이프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의지하고 지낸 두 의사의 과거를 통합한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웨이웨이."
  "이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군."

  마침내 마을을 떠나려는 Chen은 자신을 오토바이에 태워준 청년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름 '웨이웨이'는 Chen이 찾는 조카의 이름이기도 하다. 꿈 같다고 혼잣말을 하는 Chen의 대사와 함께 40분 동안 이어진 Dangmai에서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비간은 영화의 전반부에 Chen의 집 거실 벽을 스크린 삼아 달리는 기차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마치 진짜 기차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것 같은 그 장면에서 기차는 위와 아래가 바뀐 전복된 이미지로 제시된다. 뒤집어진 기차처럼 Chen의 Dangmai 여정은 현실의 반대 지점에 자리한 꿈의 미로를 달리며 구현된다.

  '카일리 블루스'는 진료소의 고장나 깜빡거리는 전등불을 비춰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Chen의 집 선풍기는 작동이 되다가 멈춘다. 마을에는 광인이 시시때때로 분란을 일으킨다. 라디오에서는 괴물과 같은 야인의 습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흐리고 습한 Kaili의 날씨는 세기말의 풍경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삼십 대에 접어든 이 젊은 감독에게 현실은 수리가 필요한, 망가진 그 어떤 것일까?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터널과 동굴 속에 서있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영화의 제목은 어두운 터널에 서있던 Chen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날 때, 영화가 시작한지 30분 즈음에 등장한다. 비간에게 현실은 그 자체로 온전히 기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난 미지의 영역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꿈의 미로로 초대한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지구 최후의 밤'의 영어 제목은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동명 희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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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팬데믹 시대의 인간 관계, Language Lessons(2021)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Cariño는 온라인 수업의 새로운 학생을 기다리는 중이다. 수업을 등록한 사람은 윌인데, 윌은 그 수업을 들을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인 아담이라고 알려준다. 아담은 윌이 자신을 위한 깜짝 선물로 100회의 스페인어 수강권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카리뇨와 아담의 스페인어 수업이 시작된다. 영화는 웹캠 화면 속의 작은 대화창이 뜬 상태로 시작해서 내내 그 화면이 이어진다. 감독으로 카리뇨 역을 연기한 Natalie Morales는 아담 역의 Mark Duplass와 각자의 지역에서 촬영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나중에 편집 작업을 했다. 'Language Lessons(2021)'는 Covid-19으로 이동이 통제된 시기에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카리뇨와의 첫 수업에서 아담은 자신과 윌이 동성 부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는 매우 영리하게 앞으로 진행될 스페인어 수업이 연애로 흐를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오로지 아담과 카리뇨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아담은 5년 전, 현대 무용가인 윌의 공연을 보고 반해서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사는 부유한 동성애자 아담과 코스타리카에 사는 중하층의 스페인어 선생 카리뇨의 언어 수업은 도대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사랑이 아니라면 우정? 영화는 그 흥미진진한 줄타기로 관객을 유인한다.

  갑작스런 윌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던 수업은 다시 이어지고, 아담과 카리뇨는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의지한다.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만이 이어질 것 같았던 수업은 어느 날, 아담이 카리뇨의 얼굴에 생긴 멍과 상처를 보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카리뇨는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것인가? 영화는 인간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호기심, 친밀함, 갈등과 거리감을 맛깔나는 대사 속에 풀어놓는다.

  마크 듀플라스는 나탈리 모랄레스와 이전에 함께 한 작업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감독은 모랄레스가, 제작은 듀플라스가 맡은 이 영화에서 대본 작업은 두 사람이 같이 참여했다. 잘 이루어진 협업의 케미스트리는 영화 곳곳에서 느껴진다. 웹캠 화면으로만 이루어진 단조로운 쇼트 구성에도 불구하고 Language Lessons에서는 그 어떤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인간으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관계의 역동성이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이제 전염병의 시대는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일상과 삶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과제가 남았다.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 감독은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팬데믹 시대의 소통과 교류를 이야기한다. 나는 이 소박하고도 따뜻한 코미디 영화에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2. 로버트 에거스의 실패한 신화 서사, Northman(2022)


 에단 호크는 급전이 필요했던 것일까? Robert Eggers의 2022년작 'Northman'에서 에단 호크가 연기한 아우반디르 왕은 영화가 시작되고 20분 정도 될 때 죽는다. 대사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니, 정말 괜찮은 배우를 저렇게 밖에 쓰지 못하다니... 에단 호크는 더 나이먹기 전에 좀 좋은 영화나 부지런히 찍을 것이지, 그냥 한숨이 나왔다. 더 황당한 건 영화에서 주술사 역으로 잠깐 나왔던 윌렘 더포였다. 긴 수염에 알아볼 수 없는 분장을 해서 그랬나, 나는 그 배우가 나온지도 몰랐다. 나중에 출연 배우들 명단을 보고 알았다. 로버트 에거스는 헐리우드의 탑급 배우들을 그냥 마구 소모해버린다. 영화 'Northman'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암레스 왕자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기 895년, 아우반디르 왕(에단 호크 분)은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섬 왕국 흐라프니로 돌아온다. 구드룬 왕비(니콜 키드먼 분)와 어린 암레스 왕자가 그를 반긴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왕은 동생 푤니르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 왕자는 바이킹의 땅으로 도망친다. 소년은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전사로 거듭난다. 암레스는 푤니르가 왕국을 잃고 아이슬랜드에서 망명자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복수를 위한 출정길,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암레스는 노예선에서 마법사 올가를 만난다. 드디어 원수인 숙부의 땅에 잠입한 암레스, 그는 복수로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언어' 문제가 크게 느껴진다. 영어로 제작된 영화에 주연 배우를 비롯해 대다수 출연 배우들은 북유럽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영어 대사의 처리가 썩 매끄럽지 않다. 지독한 자막 기피증을 가진 미국 관객들은 이 영화가 영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 영어 대사들은 칠판에 거칠게 긁히는 분필 소리처럼 들렸다. 니콜 키드먼은 상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느라 느린 속도로 또박또박 발음을 하는데, 그것이 마치 학예회 연기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로버트 에거스는 북유럽의 신화를 나름대로 성실히, 온전히 복원하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고고학자와 민속학자가 제작 과정에 참여해 조언을 했고, 그런 부분들은 영화 곳곳에서 눈에 띈다. 주술사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암레스의 성인식, 바이킹의 마을 축제, 짜임새 있게 배치된 고대 가옥들의 마을 세트, 바이킹의 전투 장면 같은 것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Northman'이 펼쳐놓는 북유럽 고대 신화의 서사는 너무나도 거칠고 잔혹하다. 영화 속 바이킹의 시대는 야만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죽음과 폭력, 근친상간에 대한 암시, 강력한 주술사의 예언과 마법, 그런 묘사가 이 시대의 관객과 어떤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영화 'Northman'이 판타지 게임의 서사와 다른 점은 비싼 출연료의 배우들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신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이 영화는 그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Northman'은 거대하고 허황된 영화적 낭비라는 인상을 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내포한 삶과 죽음, 미움과 사랑, 어리석음과 악덕, 젊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 인도의 감독 Vishal Bhardwaj의 2014년작 'Haider'는 카슈미르 분쟁을 배경으로 인도식 햄릿을 그려낸다. 서구의 서사는 인도 영화의 특징인 춤과 노래 속에서 독창적인 하이브리드로 재탄생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원전을 대하는 창작자의 태도이다. 과거의 텍스트에서 어떻게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다른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로버트 에거스의 'Northman'은 그런 점에서 철저히 실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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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만에 장편 극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1960년대 일본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그것은 좀 버겁기는 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카토 타이(加藤泰) 감독의 'Blood of Revenge(1965)'는 18일 동안의 촬영 결과물이었다. 감독과 주연 배우는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의 원제목은 '明治侠客伝 三代目襲名', 우리말로 번역하면 '메이지 시대 협객전 삼대의 이야기'쯤 되겠다. 여기에서 '협객(侠客)'은 중국 무술 영화에서 볼 법한 그런 협객이 아니라 '야쿠자(ヤクザ)'를 뜻한다. 영화는 메이지 시대(1907년) 오사카를 배경으로 야쿠자 세력들의 암투를 그린다.

  TV의 등장은 영화 산업계에 커다란 숙제를 안겨주었다. 더이상 영화관은 관객들로 미어터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편안히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러한 상황은 1960년대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오랜 검열 제도가 막을 내리고, 폭력과 성을 과감하게 내세운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흐름은 야쿠자들이 등장하는 영화였고, 또 다른 흐름은 로망 포르노였다. 'Blood of Revenge(1965)'는 당시에 공장에서 찍어내듯 양산된 야쿠자 영화의 초기작이다.   

  영화는 인파로 붐비는 마츠리 행사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자객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멀리에서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다. 키야타츠시 일가의 2대 수장 후쿠이치는 아내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러 나왔다. 카토 타이는 바닥을 훑는 로우 앵글(low angle) 쇼트로 야쿠자 두목에게 닥친 불시의 습격을 보여준다. 오야붕의 치명적 부상에 조직은 동요한다. 후쿠이치에게는 유흥으로 시간을 보내는 철없는 아들 하루오가 있다. 복수를 하겠다며 혈기에 날뛰는 하루오를 진정시키는 이는 조직의 2인자 아사지로(츠루타 코지 분)이다. 적대하는 군지로 조직이 꾸민 일이라는 심증은 있다. 하지만 후쿠이치는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가의 주력 사업인 건설업이 군지로 일파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후쿠이치가 죽는다. 미망인은 아들인 하루오 대신에 분별력 있는 아사지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 영화에 묘사된 야쿠자 두목 후쿠이치는 일반인의 인식과는 다소 동떨어진 지점에 존재한다. 그는 자신에게 자객을 보낸 상대 일파에 대한 보복을 자제한다. 그의 조직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건설업'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직에 의탁하고자 찾아온 손님 야쿠자 이시이는 '도박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후쿠이치는 자신의 조직에서 도박 사업은 금지되어 있음을 주지시킨다. 에도 시대 때부터 '도박장'은 전통적으로 야쿠자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영화는 키야타츠시 일가가 고베시 건설에 사업자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야쿠자 조직은 도박이나 매춘으로 돈을 벌지 않는다. 아사지로와 부하들은 '시멘트' 조달에 목숨을 건다.

  이러한 야쿠자 일파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 야쿠자는 흔히 폭력과 범죄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일본 사회 내부에서 차지한 독특한 위치를 부각시킨다. 지배 계층은 필요에 따라 야쿠자를 써먹었으며, 그 결과 야쿠자들은 오랫동안 합법과 불법의 회색 지대에서 생존을 용인받을 수 있었다. 아사지로는 군지로 조직의 방해로 시멘트 공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자 그는 양해를 구하기 위해 건설 현장을 총괄하는 가장 큰 야쿠자 조직의 수장 노무라를 찾아간다. 노무라는 이 사업이 고베시의 근간을 만드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제 그들은 범죄가 아닌 '사업'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조직의 내부 규범은 봉건 제도의 틀에 갇혀있다. 후쿠이치의 죽음 이후, 키야타츠시 일파는 후계자 문제로 분란에 휩싸인다. 오야붕의 미망인은 아들 하루오 대신에 아사지로를 지명한다. 일가의 미래는 혈족의 논리보다 뛰어난 리더의 능력에 달려있다. 다른 조직에서도 아사지로를 후계자로 인정한다. 하지만 아사지로는 후쿠이치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자리를 거절한다. 하루오를 오야붕의 자리에 올리고, 그는 보좌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아사지로의 모습은 마치 주군의 아들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는 가신과 닮았다. 아사지로는 자신을 낮추며 고된 건설 현장을 책임진다.       

  아사지로에게서 그 어떤 인간적인 결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 충성하며, 상대 조직과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공존하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또 다른 면모는 불운한 처지의 게이샤 하츠에(후지 준코 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와 사랑이다. 카토 타이 감독은 아사지로의 연정을 매우 비감하고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담아낸다. 해질 무렵의 강둑에서 아사지로가 연인과 만나는 모습은 야쿠자가 아닌 평범한 한 남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발을 디딘 세계는 범부의 소박한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군지로 일파의 방해 공작은 극심해지며, 급기야 그들은 하루오를 공격해 큰 부상을 입힌다. 아사지로의 본성이 폭발한다. 그는 적들을 응징하러 갈 때 옷을 벗어 문신을 한 상체를 드러낸다. 그가 광포하게 휘두르며 내리꽂는 칼은 문신과 함께 아사지로의 본질적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입증한다. 키야타츠시 일가의 2인자로서 그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만, 한 여자의 남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의 꿈은 부서진다. 아사지로는 연인 앞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간다.

  츠루타 코지(鶴田浩二)는 신의를 지닌 인간적 야쿠자 아사지로를 잘 연기해 낸다. 그는 현실의 야쿠자에게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협객'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그가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야쿠자 최대 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미움을 사서 테러를 당한 일은 기묘한 울림을 준다. 어떤 면에서 전성기 야쿠자 영화의 서사들은 실제 현실과 유리된 지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환영(幻影)이었다. 그럼에도 'Blood of Revenge'는 야쿠자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메이지 시대에 합법적 사업으로 세력 확장을 모색하는 야쿠자들, 봉건적 주종 관계로 얽힌 조직의 위계 질서, 경쟁 관계에 놓인 일파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감독 카토 타이는 열악한 제작 여건 속에서 만들어진 양산형 야쿠자 영화에 그렇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진 출처: eduardo.exblog.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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