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영화의 주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문예 영화였다. 그 시기에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수준 높은 영화들이 꽤 많이 제작되었다. 주인공들은 대개 여성들, 그 가운데 '게이샤(芸者)'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띈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6년작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도 게이샤가 주인공이다. 원작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의 1961년작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에는 '코엔'이란 이름의 게이샤가 나온다. 토미타 츠네오(富田常雄)가 쓴 '코엔의 일기(小えん日記, 1959)'가 원작이다.

  코엔(와카오 아야코 분)에게 남자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일상이다. 말이 좋아 '예인(예술을 아는 사람)'이지 게이샤들은 웃음을 파는 직업이었다. 코엔은 '마마짱'이 배정해주는 손님들을 받는다. 부유한 건축가, 초밥집 요리사, 증권가 브로커... 그곳 손님들의 직업과 연령대도 다양하다. 코엔은 술 마시고 노닥거리다 손님 받고, 그러다 손님들하고 만나 데이트 하고 여행도 간다. 그런 삶을 사는 코엔에게는 괴로움이라던가 심각함이 보이지 않는다.

  게이샤들이 모여서 사는 집에 코엔의 개인 공간이라고 해봐야 손님 받는 방이다. 그런데 코엔은 자신이 애지중지 하는 작은 화분을 그 방이 아니라, 게이샤들이 함께 머무는 거실 쪽에다 둔다. 동료 게이샤가 실수로 화분을 건드려 깨뜨리자 코엔은 살짝 화를 낸다. 그곳에는 사생활이라든가, 오롯한 고요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사(神社) 근처라서 수시로 신사에서 치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런 곳에 사는 코엔에게 드디어 자신의 집이 생긴다. 중년의 돈 많은 건축가는 코엔을 내연녀로 붙들어 두고 싶어한다.

  코엔이 얻은 셋방에서는 종소리 대신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폰서 영감은 코엔이 꾸며 놓은 집을 둘러보며 '하숙방'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과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그건 코엔에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코엔에게 진짜 '집'의 분위기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화류계로 흘러 들어와서 살게 된 삶. 이 천진난만한 게이샤에게는 욕심도, 괴로움도 없다.

  카와시마 유조는 게이샤의 삶을 손바닥의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느낌을 준다. 유흥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도 했던 감독에게 그쪽 세계의 삶을 묘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돈이 물처럼 흘러다니는 곳. 그런 세계에 살면서도 코엔에게는 순진한 구석이 있다. 스폰서 영감의 뜻대로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도 하고, 게이샤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래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나름의 소망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코엔의 주변 남자들은 그 기대에서 모두 벗어난다. 데이트했던 초밥집 요리사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며, 스폰서 영감은 갑작스런 병을 얻어 죽는다. 연모했던 대학생은 회사원이 되어, 외국인 손님 접대를 하러 나타난다.

  기차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에서 코엔은 부서졌던 화분의 식물을 다시 잘 키워낸다. 좀 인색하기는 해도 스폰서 영감은 친절했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코엔은 다시 '마마짱'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마마짱(ママちゃん)'은 어린 아이가 부르는 '엄마'라는 뜻도 있지만, 물장사 하는 술집 여주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코엔은 스폰서 영감을 '파파(パパ, 아빠)'로 불렀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관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친해진 십 대 청소년은 코엔을 '누나(姉さん)'라고 부른다. 코엔에게 그들은 마치 유사가족(類似家族) 같다. 하지만 마마짱은 매상을 위해 코엔이 내켜하지 않는 손님을 강권하는 포주일 뿐이다. 스폰서 영감 파파는 강퍅한 마누라에게 질려서 코엔의 젊음을 값싸게 사들여서 즐겼다. 남동생을 자처했던 녀석은 급기야 코엔을 여자로 보고 달려든다.

  스폰서 영감의 죽음에 상심한 코엔은 게이샤들의 거실에 작은 분향 제단을 세운다. 동료 게이샤는 그런 코엔에게 개인 공간이 아니라며 이죽거리고, 격분한 코엔은 몸싸움을 벌인다. 그렇다. 마마짱과 게이샤들은 코엔의 가족이 아니며, 그들과 함께 사는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코엔은 낯선 시골 마을의 역에 서있다. 젊고,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 뿐인 이 가난한 게이샤의 목적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카와시마 유조는 집을 찾아나서는 코엔의 여정에 쉽사리 희망의 빛을 드리우지 않는다. 코엔이 짓고 있는 희미한 웃음 속에는 막막함이 서려 있다.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는 그렇게 화류계 여인의 부박하고도 허망한 삶의 단면을 잡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토요타 시로 감독의 문예 영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猫と庄造と二人のをんな,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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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emme du boulanger, The Baker's Wife(1938)
La Fille du puisatier, The Well-Digger's Daughter(1940)



1. 제빵사의 아내, 마르셀 파뇰의 대표작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1986)''우물 파는 사내의 딸(La Fille du puisatier, 2011)',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리메이크 작품이다. 오리지널 영화를 만든 이는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1895-1974)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극작가로 시작했다. 연극에서 거둔 성공은 영화로 이어졌다. 무성 영화가 이제 막 유성 영화로 전환될 무렵에 파뇰은 자신의 작품들을 영화화하면서 영화계에 안착했다. 그의 1938년작 '제빵사의 아내(The Baker's Wife)'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행운은 '우물 파는 사내의 딸(1940)'로 이어졌다. 파뇰은 두 영화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희곡에서 갈고 닦은 그만의 유머러스한 문체는 영화에서도 돋보인다. 파뇰은 코미디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당대의 사회를 영화 속에 투영한다.

  '제빵사의 아내(1938)'는 지극히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시골 마을에 빵집을 연 제빵사 에마블레는 맛난 빵을 구워 마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그의 젊은 아내 오렐리가 양치기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다. 상심한 에마블레는 아내를 찾을 때까지 빵을 굽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빵 없이는 살 수 없는 마을 사람들, 급기야 마을 후작의 지휘하에 특별 수색대가 조직된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제빵사의 아내를 찾아올 수 있을까...

  에마블레가 빵집을 연 이 시골 마을은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마을의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한다. 교리에 충실한 마을 신부는 좌파주의 교사와 언쟁을 벌인다. 대대로 불화하는 두 집안의 농부는 서로 말하지 않는다. 마을 여자들은 뒷담화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후작은 자신의 성에 세 명의 애첩을 두고 지낸다. 그런 그들의 식탁에 에마블레의 빵이 올라간다. 그런데 그 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든 제빵사의 아내를 찾아야만 한다.
 
  마을 농민들은 후작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수색에 나선다. 이 마을은 계층적으로 명백히 구분되어 있다. 후작은 봉건 영주처럼 마을 주민 위에 군림한다. 그는 함께 사는 세 명의 여성을 조카라고 뻔뻔하게 둘러댄다. 신부는 후작을 질책하지만, 낡은 교회를 고쳐줄 수 있는 후작 앞에서는 약자나 다름없다. 후작이 세속의 권력을 대변한다면, 신부는 영적인 권위로 마을 사람들의 내면을 통제한다. 그는 제빵사에게 닥친 불행에 냉담하다. 신부에게 그 일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도덕적 훈화에 적합한 소재이다.

  마르셀 파뇰은 그런 지배 계층과 대비되는 인물로 에마블레를 내세운다. 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남자는 절대로 아내의 바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의 아내가 양치기와 떠났다고 말하는데도, 끝까지 아내는 친정에 간 것이라고 우겨댄다. 그가 절절하게 토로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은 마치 신앙과도 같다. 그에게 빵을 굽는 행위는 아내를 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의 부재는 그가 더이상 빵을 구울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에마블레의 '파업'은 마을을 마비시킨다. 파뇰이 보기에 노동 계급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이들이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의 합심으로 제빵사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신부는 오렐리가 제빵사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한다. 주저하는 오렐리에게 신부는 신약 성서를 읽어준다. 예수가 돌팔매질을 당할 위기의 간음한 여자를 구하는 부분이다. 제빵사는 아내를 맞이하며 용서한다. 여기에서 드는 한가지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애첩을 세 명이나 둔 후작의 행위는 죄악시되지 않으면서, 오렐리의 불륜은 죄사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마을 여자들은 제빵사의 아내가 젊고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한다. 그들은 오렐리가 자신들의 남편을 유혹할까봐 두려워 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매력과 욕망은 사회의 악덕이 되며, 그것은 구제의 대상이 된다.


2. 우물 파는 사내의 딸, Vichy Film이 보여주는 시대의 초상

  '언제든 타락할 수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1940년작 '우물 파는 사내의 딸'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영화의 이야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우물을 파는 직업을 가진 파스칼은 홀아비로 여섯 명의 딸을 키운다. 그의 아름답고 착한 첫째 딸 파트리샤는 공군 조종사인 자크와 사랑에 빠진다. 파트리샤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자크는 전쟁터로 떠난다. 파스칼은 자크의 부모에게 딸과 태어날 아기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파스칼은 딸을 먼 시골로 보내 출산하도록 한다. 그러던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자크의 부모는 파트리샤의 아기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도 계층에 대한 파뇰의 시각은 명확하다. 자크의 아버지 마젤은 커다란 상점을 소유한 부자이다. 떠나는 자크는 어머니에게 파트리샤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기 대신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젤 부인은 파트리샤의 행색을 보고 가난한 집 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편지를 전해주지 않고 불태워 버린다. 파스칼이 파트리샤의 아기 문제를 상의하러 왔을 때에도, 마젤 부부는 아들의 핏줄인지 알 수 없다며 모욕을 준다. 파스칼의 직업인 우물 파는 일은 매우 유용하고 가치있는 일임에도 사회에서 그의 계층적 지위는 밑바닥에 위치한다.

  계층에 대한 파뇰의 비판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시선은 차별적이다. 파트리샤의 임신은 부주의하고 부도덕한 행실로 묘사된다. 파스칼은 딸이 집안에 가져올 불명예에 대해 근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먼 곳에 보낸다. 그가 다시 딸과 손주를 데려오는 계기가 참 흥미롭다. 파트리샤는 아들을 낳았다. 딸만 여섯인 파스칼에게 아들 손주의 존재는 남다르게 느껴진다. 대를 이을 자손으로서 아이의 존재는 자크의 전사 소식에 상심한 마젤 부부에게도 희망이 된다. 파트리샤의 타락과 일탈은 비로소 사회적 인정의 범주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전사한 줄 알았던 자크가 귀환하면서 파트리샤에게 청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결말은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기묘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가 제작될 무렵,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영화는 프랑스가 패전하기 직전에 거의 완성되었다. 하지만 극중에는 당시 패전을 선언하는 필리프 페탱의 라디오 연설이 나온다. 패전 후 수립된 비시(Vichy) 정부는 독일의 괴뢰 정권이었다. 그 시절 모든 것은 독일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영화 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전 검열이 이루어진 영화들만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영화 속에 삽입된 패전 선언은 프랑스인들에게 비통함과 수치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와는 달리 점령군 독일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지위를 명확히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들이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결말은 이제는 하나가 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비시 영화(Vichy Film)'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 '제빵사의 아내'와 '우물 파는 사내의 딸'은 마르셀 파뇰의 영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그는 재치있고 간결한 대사로 코미디의 묘미를 끌어낸다. 그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시선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파뇰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전근대성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실패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들이 겪는 곤경은 멜로 드라마의 진부함과 긴밀히 결합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관객에게 파뇰의 영화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전근대적 단면을 반영하는 영화적 초상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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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 1960)



1. 몰락의 시작

  "남색가로 처신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For Oscar Wilde posing Sodomite)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건의 시작은 바로 그 짧은 메모에서부터였다. 그런 상스러운 메모를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에게 남긴 사람은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erry)이었다. 그는 와일드가 아들 알프레드 더글라스(Alfred Douglas)를 유혹해서 앞길을 망치고 있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Bosi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퀸즈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과 와일드는 지나치게 친밀했다. 21살의 옥드퍼드 대학생 알프레드를 만났을 때의 와일드의 나이는 서른 아홉, 그로부터 4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해외 여행을 다녔고, 여러 호텔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와일드는 작가로서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명성과 돈이 그의 곁에서 마구 흘러다녔다. 그런 그에게 퀸즈베리 후작이 보낸 메모는 파멸의 신호탄이었다.

  켄 휴즈 감독의 1960년작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은 메모 한 장으로 촉발된 재능있는 작가의 몰락을 담아낸다. 오스카 와일드는 명예훼손 혐의로 후작을 고소했다. 이후 세 번의 재판이 이어졌다. 와일드는 승소를 장담했다. 하지만 재판은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재판에서 변호사들은 패소를 예감하고 소를 취하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이제 그는 피고석에 서야만 했다. 젊은 남자들을 유인해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죄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당시의 재판 기록과 작가의 편지에서 드러난 사실을 충실히 재현한다.

  1895년, 재판이 시작된 그 해에 와일드는 인생의 전성기를 맘껏 구가하고 있었다. 이전에 발표한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 1892)'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직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이 그해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은 참이었다. 와일드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스런 두 아들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중에 감옥에서 쓴 서간집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에 그렇게 썼다. 신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왕세자가 그의 연극을 관람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단 한 사람, 퀸즈베리 후작은 적대감을 표시한다. 와일드(피터 핀치 분)는 그런 후작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람들은 후작을 비웃는다. 그 장면은 이 다혈질의, 고집불통인 귀족이 사교계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

  그는 아들 알프레드와 극도로 불화했다. 아들은 와일드와 헤어지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한다. 더이상 자신의 삶에 간섭하면 총으로 쏘아죽이겠다는 악담과 함께. 이 부자(父子)는 물과 기름처럼 화합할 수 없는 사이였다. 영화에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알프레드의 형 프랜시스의 장례식으로 가족이 모였을 때이다. 사냥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정황은 자살을 암시한다. 프랜시스는 동성애에 대한 추문에 휩싸였다. 후작은 장남을 잃은 상심이 큰 상태에서 셋째 아들 알프레드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그는 아들을 다그치지만, 알프레드는 지독한 증오로 맞설 뿐이다. 어머니를 버리고 상간녀를 집안에 들였다며 알프레드는 후작을 비난한다.

  후작은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오스카 와일드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냥감을 조준하는 사냥꾼처럼 와일드를 몰아나갔다. 와일드의 집에 깡패와 함께 들이닥쳐서 난동을 부렸다. 와일드의 희곡 '정직함의 중요성'이 초연될 때에는 쓰레기 뭉치로 연극을 망쳐놓으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와일드도, 아들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다. 마침내 후작은 미끼를 던진다. 와일드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 공개적으로 모욕의 메모를 남긴 것이다. 와일드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당했다고 느꼈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와일드의 지인들은 소송이 결코 현명한 대응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것이 불쏘시개가 되어 더 큰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이었으며 세월이 흘러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로비 로스는 와일드를 잘 알았다. 해외로 나가서 지내라고 말했지만, 와일드는 듣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소송이 자신의 아버지를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라며 와일드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결국 와일드는 젊은 연인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커다락 패착임이 밝혀진다.

  영화는 첫 번째 재판에서 퀸즈베리의 변호인 카슨(제임스 메이슨 분)이 와일드를 교묘하게 몰아세우는 것을 보여준다. 카슨(그는 와일드의 트리니티 대학 동기였다)에게 오스카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의 남색 기질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다. 와일드는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현실의 규범은 다른 것이라며 현란한 말솜씨로 카슨의 심문을 피해갔다. 피고인석에 있는 퀸즈베리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재력과 온갖 더러운 연줄을 동원해 와일드의 과거를 캐냈다. 그렇게 해서 '와일드의 남자들'이 법정에 등장했다. 변호사는 와일드에게 소를 취하할 것을 권유한다. 후작은 풀려났다. 이제 와일드가 후작이 서있던 피고인석에 서게 될 차례였다. 경찰은 와일드에게 신속하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3. 체포와 투옥,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와일드의 감옥살이는 단순히 동성애 때문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법적인 문제가 얽혀있다. 와일드의 혐의는 'gross indecency(중대한 외설 행위)'에 해당했다. 1885년에 개정된 영국 형법 11조의 항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죄목은 성범죄에 있어 이전까지 보호받지 못했던 어린 소년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남색(sodomy)'을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한 조항으로 여겨졌으나, 문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과연 무엇을 '남색'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런 법 조항 때문에 정황 증거만으로도 혐의가 인정될 수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었다. 법률가들은 이 형법 조항이 피의자에 대한 '협박용'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두 번째 재판에서 검사는 오스카 와일드가 가깝게 지냈던 과거의 남자들이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와일드의 젊은 시절은 분명 방탕했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엄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칭송하던 작가의 과거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범죄로 가득차 있었다. 검찰 측은 와일드를 미성년자를 꾀어서 타락하게 만든 범죄자로 몰아갔다. 사법 당국의 입장에서 와일드의 재판은 '중대한 외설 행위'를 규정한 형법 조항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본보기였다.  

  와일드에게 감옥행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막대한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난 와일드에게 절친 로비 로스는 해외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와일드는 영국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배편을 붙잡지 않았다. 아마도 이 소송의 시작에서부터 마비된 그의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와일드는 2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감옥 생활은 혹독했다. 몸과 마음이 병든 것은 물론이고, 와일드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했다. 후작의 소송 비용까지 갚아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콘스탄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떠났다. 남편의 불명예가 두 아들의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의 성씨를 바꾸어 버렸다. 와일드는 감옥에서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 아내에 대한 미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도록 와일드를 괴롭혔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인색하게 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이 받은 유산이 있음에도 아내는 와일드에게 지원을 꺼렸다. 감옥에 있던 와일드가 가장 의지한 것은 로비 로스였다. 와일드의 전 연인이 우정의 가치를 입증한 것과는 달리 젊은 연인은 그다지 한 일이 없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그 배신감을 절절히 토로한다. 알프레드는 감옥의 와일드를 만나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았다. 와일드에게 받은 이전의 편지들을 출판하고 싶다고 뻔뻔하게 의향을 묻기는 했다.


4. 최후

  영화는 감옥에서의 와일드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처리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와일드는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혹독한 노동과 열악한 감옥에서의 생활로 와일드의 모든 것은 망가졌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감 생활의 끝 무렵에서야 글을 쓰는 것이 어렵게 허용되었다.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 모음집인 '심연으로부터'는 그때 쓰여졌다. 그 서간들에서는 지독한 사랑 때문에 내치지 못했던 연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연인은 심한 낭비벽에, 제멋대로였으며,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와일드를 집요하게 조종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와 퀸즈베리 후작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라며 분노를 표시한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은 뛰어난 작가를 파멸로 이끈 주변 인물과 재판의 과정을 간결하게 그려낸다. Peter Finch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었던 와일드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알프레드 역을 연기한 John Fraser는 정말 놀랍다. 허영과 야망, 독선으로 똘똘 뭉친 파괴적인 아도니스(Adonis)는 자신이 가진 사랑의 권력을 맘껏 휘둘렀다. 실제로 동성애자였던 프레이저는 와일드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젊은 연인 알프레드 그 자체로 변모한다.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를 연기한 Emrys Jones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출옥한 와일드는 아내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국을 떠난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알프레드가 와일드를 부른다. 하지만 와일드는 슬프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연인을 외면한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알프레드가 돌아서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나중에 알프레드는 와일드를 찾아가 잠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들의 재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마지막 만남을 '쓰라린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고 글로 남겼다. 그는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난과 병고는 그의 남은 생의 동반자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 호텔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뇌수막염이었다. 그는 수감 생활 중에 귀 한쪽의 청력을 잃었고,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렇게 상한 육신으로 와일드는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기도 했다. '상호합의에 의해 맺은 동성애 관계는 처벌할 수 없다.' 1967년, 와일드를 감옥으로 가게 만들었던 영국의 형법 조항은 개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뜬지 67년이나 지난 뒤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에서 John Fraser(맨 오른쪽)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라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감옥에서 쓴 서한집 '심연에서(De Profundis)': 이 책은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가 편찬했다. 와일드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사후 관리인으로 로스를 지정했다.

Oscar Wilde Himself(1985): BBC 제작 다큐. 이 다큐에는 퀸즈베리 후작의 증손녀와 와일드의 손자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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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ey Gardens(1975). Direct Cinema(제작자의 관점을 최소화하는 다큐 제작 방식)의 기수였던 Maysles 형제는 괴짜 모녀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녀의 집은 부유층 주거지역에 자리한,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이다. 재클린 케네디는 모녀와 인척 관계(이모와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인 접촉도 없이, 마치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큐는 몰락한 상류층의 음울하고도 폐쇄적인 삶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Amalia Ulman의 'El Planeta(2021)'를 보면서 나는 그 다큐를 떠올렸다. 감독 Amalia Ulman은 모친과 함께 이 영화에서 연기도 한다. 영화는 퇴거 직전의 아파트에 사는 모녀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대생 레오가 어떤 남자와 커피숍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날씨에 대해 말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오는 남자와 가격을 흥정한다. 남자가 부른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자 거래는 곧 무산된다. 그렇게 돈에 쪼들리는 여대생 레오의 매춘 시도는 허망하게 끝난다. 레오가 엄마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집세는 밀려있다. 그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한은 겨우 두 달, 패션을 전공하는 세련된 여대생과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엄마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급전이 필요하니 집안의 가전 제품이라도 내다파는 딸과는 달리, 엄마 마리아는 천하태평이다. 식탁에 앉아서 싫어하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 냉동실에 넣는다. 이 괴짜 엄마는 외출할 때는 모피와 명품으로 치장한다. 딸은 온라인 채팅에서 자신의 신분과 배경을 과시하면서 괜찮은 남자가 걸려들까 기대한다. 놀랍게도 두 모녀는 코앞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지 않는다. 돈보다는, 이제는 죽어서 곁에 없는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전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녀가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명품으로 치장한 엄마는 좀도둑처럼 상점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다. 딸은 낭만적 연애를 기대하며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침내, 집안의 전기가 끊긴다. 냉장고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레오는 현관 앞의 전등불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 비참해지고 슬퍼진 모녀는 서로를 비난하며 싸운다. 그들이 화해하고 한 일은? 고급 미용실에 가서 단장을 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한다. 물론 외상으로.

  영화 속 한가롭고 평화로운 해변 도시 히혼(Gijón)의 풍광에서 스페인이 겪고 있는 오랜 경제 침체의 그림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서민층 주거의 불안정성이 주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자금력을 지닌 부동산 업체들은 싼값에 건물을 매입해서 임대 사업을 벌이며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집세를 내지 못한 저소득층 세입자들이 퇴거당해 길가에 나앉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감독 아말리아 울만도 퇴거의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출처: interviewmagazine.com).

  아말리아 울만은 중산층의 삶에서 급전직하하는 모녀의 모습을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코미디로 비틀어 끼워넣는다. 계급 의식과 삶의 방식은 결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녀의 삶에는 도무지 처절함이라든가, 심각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마틴 스콜세지가 인근 도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가 봐야 한다며 고급 의상실에서 옷을 맞춘다. 전기가 끊겨서 촛불을 켜놓은 집에서 돌리 파튼의 흉내를 내면서 즐거워 한다. 마리아의 지독한 속물 근성과 기만적 현실 인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종의 애잔함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닥친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도달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풍경은 스산하다. 결국 마리아는 집을 찾아온 두 명의 경찰과 함께 사라진다.

  Maysles 형제는 'Grey Gardens'에서 궁핍한 처지에 놓인 상류층 모녀의 뒤틀린 삶을 다소 착취적인 방식으로 전시한다.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 감독은 그와는 다른 지점에서 빈곤과 계층 의식에 대한 탐구를 풀어낸다. 'El Planeta'의 레오와 엄마의 모습에는 추락하는 존재의 비감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결코 냉소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 모녀 사이로 영화 속 배역을 소화해낸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주는 영향도 있다. 영화의 제목 'El Planeta'는 '행성'이란 뜻이다. 아말리아 울만에게 있어 퇴거의 경험은 낯선 행성의 삶처럼 막막했던 것일까? 영화는 그렇게 창작자의 현실을 반영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2018년에 마틴 스콜세지는 예술에 공헌한 공로로 스페인 왕실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당시 실제 뉴스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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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적 마법, 59분의 Long take: 지구 최후의 밤(地球最後的夜晚, 201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은 무척 많다. 중국의 Bi Gan(毕赣) 감독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러닝타임 2시간 18분. 그의 2018년작 영화 '지구 최후의 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은 도입부에서부터 매우 불친절하고 지루한 서사를 이어간다.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다가 1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인공 남자는 허름한 시골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그제서야 뜬다. 남자는 동굴의 협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롱 테이크(long take)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시간을 재어 보니 1시간에서 1분이 빠진다. 무려 59분의 롱 테이크. 이 기기묘묘한 영화적 마법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허름한 유곽의 어느 창녀의 집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기억 속에서 한 여자를 떠올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루오'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완 치완(탕웨이 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주를 이룬다. 남자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 Kaili를 방문한다. 계모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유품인 벽시계 뒤에는 주소가 적힌 사진이 있다. 그 주소에는 죽어버린 루오의 친구 Wildcat의 모친이 살고 있다. 그 모친에게서 루오는 한때 Wildcat과 가까웠던 완 치완의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대강의 줄거리를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엉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영화 속 세계를 설계한 감독 자신 뿐이리라.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 속에서 비간은 이야기 중심의 서사에서 이탈하며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배열한다. 이 영화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Stalker, 1979)'에서 차용한 '물'의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산사태와 홍수 예보가 나오는 도시, 루오는 물이 흥건한 폐가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머문다. 완 치완은 루오와 함께 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완 치완의 행방을 찾아 시골 마을에 다다른 루오는 영화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59분의 롱 테이크가 영화의 후반부를 이룬다. 동굴 안에서 소년을 만난 루오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출구를 찾는 여정, 그것은 루오가 꿈에서 현실과 기억을 변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 치완은 당구장을 운영하는 여주인으로, Wildcat의 모친은 사랑에 미쳐버린 늙은 여자로 나온다.

  어떻게 59분 동안 하나의 테이크를 이어갈 수 있을까? 루오가 타고 들어간 협궤 열차에서부터 시작된 테이크는 동적인 에너지에 의해 연속적으로 추동된다. 소년의 오토바이, 외줄 수송선, 움직이는 장난감 트럭, 당구공, 흥분해서 날뛰는 소... 마치 게임에서 최고난도의 퀘스트를 깨는 사람처럼 비간은 그 모든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통제한다. 물론 완성된 테이크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려 7번에 이르는 시도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출처 indiewire.com). 드론을 이용한 촬영은 놀라운 공감각적인 풍광을 제시한다. 3D로 변환된 이 테이크는 오직 영화관에서만 온전히 볼 수 있다. 비록 일반 화면으로 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비간의 영화적 실험은 전율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며, 롱 테이크를 비중있게 배치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 비간의 영화 문법은 기존 중국 영화의 전통에서 특이하게 동떨어져 있다. 그의 2015년작 'Kaili Blues(路边野餐)'에는 신인 감독 비간의 영화적 근원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흩어져 있다. 구이저우성은 중국 소수민족 '묘족(苗族)'들의 중심 거주지이다. 구이저우성 Kaili출신인 비간은 변방의 정서에, 이미지 중심의 새로운 서양 영화 문법을 결합시켰다.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에게서 빌려온 물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시계, 사진, 동굴, 터널, 기차와 같은 이미지들이 변주된다. '지구 최후의 밤'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불교의 경전 '금강경(金剛經)'의 구절처럼 함축적이고 다의적 의미를 지닌 언어와 노래 또한 비간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주요한 소재가 된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이 쓴 시를 읊는다.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2. 고장나고 망가진 현실을 떠나: Kaili Blues(路边野餐, 2015)

  '카일리 블루스'에서 전반부는 Kaili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과 경력이 있는 Chen은 늙은 여의사와 마을 진료소를 꾸려간다. 그는 아이에게 무관심한 이복 동생을 대신해 어린 조카 웨이웨이를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가 사라진다. Chen은 동생을 거칠게 다그치지만 조카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웨이웨이를 찾아 나서는 길, 늙은 동료 의사는 Chen에게 자신의 옛 연인을 찾아서 셔츠와 카세트 테이프를 전해주라고 부탁한다. 기차를 타고 Chen이 도착한 곳은 Dangmai라는 기이한 마을이다.

  '지구 최후의 날'에서 루오가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그의 무의식, 꿈에 해당하는 영역의 탐험과도 같다. 과거와 현실이 마구 혼재된 루오의 이 여행은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Chen의 Dangmai 여정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들은 어느 시점에서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닻을 내린다. 물은 현실을 꿈으로 이행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루오가 완 치완과 함께 누워있을 때 강물이 그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Chen은 상상 속에서 어머니의 파란 색 신발이 강물에 가라앉는 것을 본다.

  현실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주인공의 여정에 계속해서 틈입한다. 감춰둔 과거의 기억과 감정, 소망과 두려움이 인물을 감싼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Chen은 자신의 기억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과거와도 마주한다. Chen은 입고 갔던 셔츠를 벗고, 동료 여의사가 준 셔츠로 갈아입는다. 마치 영매(靈媒)가 되듯, Chen도 자신의 의뢰자인 동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예상과는 다르다. 옛 애인에게 전해달라는 카세트 테이프를 아내의 얼굴을 닮은 미용실 주인에게 선물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었을 때 아내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렇게 속죄하고 싶어한다. 늙은 여의사의 오래전 이루어지지 못한 애절한 사랑은 Chen의 과거와 닮아있다. 나중에 그는 여의사의 옛 애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테이프는 전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작별(farewell)'이란 노래가 실린 테이프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의지하고 지낸 두 의사의 과거를 통합한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웨이웨이."
  "이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군."

  마침내 마을을 떠나려는 Chen은 자신을 오토바이에 태워준 청년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름 '웨이웨이'는 Chen이 찾는 조카의 이름이기도 하다. 꿈 같다고 혼잣말을 하는 Chen의 대사와 함께 40분 동안 이어진 Dangmai에서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비간은 영화의 전반부에 Chen의 집 거실 벽을 스크린 삼아 달리는 기차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마치 진짜 기차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것 같은 그 장면에서 기차는 위와 아래가 바뀐 전복된 이미지로 제시된다. 뒤집어진 기차처럼 Chen의 Dangmai 여정은 현실의 반대 지점에 자리한 꿈의 미로를 달리며 구현된다.

  '카일리 블루스'는 진료소의 고장나 깜빡거리는 전등불을 비춰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Chen의 집 선풍기는 작동이 되다가 멈춘다. 마을에는 광인이 시시때때로 분란을 일으킨다. 라디오에서는 괴물과 같은 야인의 습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흐리고 습한 Kaili의 날씨는 세기말의 풍경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삼십 대에 접어든 이 젊은 감독에게 현실은 수리가 필요한, 망가진 그 어떤 것일까?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터널과 동굴 속에 서있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영화의 제목은 어두운 터널에 서있던 Chen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날 때, 영화가 시작한지 30분 즈음에 등장한다. 비간에게 현실은 그 자체로 온전히 기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난 미지의 영역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꿈의 미로로 초대한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지구 최후의 밤'의 영어 제목은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동명 희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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