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드라마에 스며든 소련의 변화: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Вокзал для двоих, Station for Two, 1983)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복역중인 남자는 하룻밤 동안의 짧은 외출을 허락받는다. 간수는 남자의 아내가 근처 마을로 찾아와서 기다린다고 알려준다. 눈길을 헤치며 남자는 아내를 만나러 마을로 향한다. 남자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형수 플라톤은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한 여자가 있다. 엘다 라자노프(Eldar Ryazanov) 감독의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Station for Two, 1983)'에는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피아니스트인 플라톤(올레그 바실라시빌리 분)은 병중의 부친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 여행중이다. 중간 정차역에서 잠깐 점심을 먹기 위해 내린 그는 식당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일어선다. 하지만 웨이트리스 베라(루드밀라 구르첸코 분)는 음식값을 내라며 플라톤을 채근한다. 둘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플라톤이 타야할 기차는 떠나버린다. 플라톤은 하는 수 없이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역에는 베라의 애인 안드레이가 운전하는 기차가 도착한다. 안드레이는 멜론 상자를 봐달라고 플라톤에게 부탁하면서 담보로 플라톤의 여권을 가져가 버린다. 안드레이가 돌아올 때까지 플라톤은 이 작은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 신분을 증명할 여권이 없으면 숙박도 할 수 없다. 미안함을 느낀 베라는 플라톤이 머물 곳을 함께 찾아보는데...

  엘다 라자노프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그의 로맨틱 코미디는 소련 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운명의 아이러니(The Irony of Fate, 1975)', '직장 로맨스(Office Romance, 1977)'의 연이은 성공으로 라자노프 감독은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1983년작인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은 사랑에 대한 라자노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앞서 제작한 두 개의 로맨틱 코미디와는 좀 다른 결의 분위기를 지닌다. 남녀 주인공의 나이는 중년에 접어들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베라는 가난한 웨이트리스이며, 플라톤은 감옥행을 앞둔 피아니스트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곤경에 처해 있다.

  플라톤은 시골 웨이트리스 베라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여자의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애인이라는 작자는 푼돈으로 여자를 지배하려고 한다. 여자의 곁에는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주며 존중해주는 그 누군가가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처지는 어떤가?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먹고 사는 일은 버겁다.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연주며 녹음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는 과실치사 교통사고를 낸 아내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쓴다. 유명한 방송인인 아내는 곤경에서 벗어나자 남편을 외면한다. 그런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에서 플라톤과 베라의 사랑이 시작된다.

  상처입은 중년 남녀의 가슴 짠한 사랑 이야기.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40년 전의 이 소련 영화는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위한 역'에는 당시 소련 사회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1982년, 오랫동안 소련을 강권으로 통치한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영화 속에서 베라의 친구는 새로 장만한 비디오 기기를 자랑한다. 친구가 보는 것은 러시아어로 더빙된 모잠비크 가수의 공연이다. 베라와 플라톤은 안드레이로부터 넘겨받은 멜론을 장터에 내다파는데, 이 시장의 풍경도 꽤나 활력이 넘친다. 그러한 시장은 집단 농장과 계획 경제 시스템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행위, 이른바 '제 2 경제(second economy)'의 영역에 자리한다. 1980년대는 소련의 그러한 문화 경제적인 변화가 점차 가속화되는 시기였다.

  '서구의 문물'과 '돈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소련인들의 마음을 차지했다. 사랑의 방식과 그 가치도 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베라와 플라톤의 사랑은 계층과 물질적 욕망 너머에 자리한다. 영화의 마지막, 플라톤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아내가 아닌 베라임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개봉 첫해에 3580만 명의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였다. 어떤 면에서 구시대적 감성의 이 영화는 당시 소련인들의 마음을 강타했다. 가망없는 사랑이지만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체제에 대한 소련인들의 믿음도 그러했을까? 엘다 라자노프는 멜로 드라마의 틀 안에 흔들리는 소련 사회의 내밀한 풍경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autogear.ru



**엘다 라자노프 감독의 영화 리뷰

차 조심!(Берегись автомобиля, Beware of the Car,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Невероят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итальянцев в России,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 197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unbelievable-adventures-of-italians-in.html

운명의 아이러니(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егким паром!, The Irony of Fate, 197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blog-post.html

직장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 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ffice-romance-1977.html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 198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9-cruel-romance-19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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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도쿄의 시나가와(品川) 지역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온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 시나가와는 에도의 유명한 홍등가였다. 그러던 곳이 1956년, 매춘금지법이 시행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은 시간을 거슬러 1862년을 배경으로 한다. 쇼군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시나가와의 어느 유곽(遊廓), 사헤이지(프랭키 사카이 분) 일행은 게이샤들을 불러 진탕 퍼마시고 논다. 술값을 내지못한 사헤이지는 외상을 갚을 때까지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빌붙어 지낸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헤이지 말고 또 다른 외상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다. 타카스기(이시하라 유지로 분)와 동료 사무라이들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왜 그곳에 모였을까...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은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병이 있었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 우리가 루게릭병으로 알고 있는 병이다. 그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술값과 유흥으로 탕진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사헤이지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헤이지가 대책없이 외상으로 술을 마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헤이지는 겨울 동안 시나가와의 바다 공기를 마시며 요양차 눌러 앉을 심산이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걸렸지만, 사헤이지에게서는 결코 그늘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기지와 순발력, 유머 감각으로 사헤이지는 술집의 골치아픈 대소사를 해결해주며 환영받는 객식구가 된다.

  영화에서 술집 이곳저곳을 누비는 사헤이지의 민첩한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병자가 맞나 싶다. 카와시마 유조는 사헤이지가 술집의 모든 공간에서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도록 만든다. 가진 것도 없고 몸도 아프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배포가 있다. 그러므로 타카스기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카스기 일행은 영국 공사관을 폭파하려고 일을 꾸미는 중이다. 사헤이지는 그들로부터 막부의 스파이로 오인받는다. 타카스기가 칼을 들이대자 사헤이지는 한번 죽여보라, 고 맞선다. 평민 사헤이지는 그렇게 사무라이의 칼과 위세를 비웃는다.

  기막힌 민첩성과 친화력을 지닌 사헤이지와 대비되는 존재들은 타카스기와 그 일행 사무라이들이다. 타카스기는 그저 방구석에 누워 있거나 노래를 부르며, 동료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칼 뽑는 시늉을 할 뿐이다. 이 초슈번(長州藩)의 무사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존황양이(尊皇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타도에 앞장선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외국 공사관 폭파는 그들이 세운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1862년 12월 2일, 실제로 초슈번의 무사들은 시나가와에 있는 영국 공사관을 폭파시켰다. 영화 속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실존 인물이었다.

  카와시마 유조는 1950년대의 일본과 혼란기의 막부 말기를 기묘하게 대비시킨다.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타카스기(그는 메이지 유신을 앞두고 죽었다)와 같은 이들은 결국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 내었다. 일본에서 미군정이 끝난 때는 1952년, 일본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흔적을 하루빨리 지우고 싶어했다. 패전 이후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보수 우익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변혁의 시대', 영화 속 사헤이지와 타카스기가 살았던 그 시절은 감독이 통과하는 동시대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지배 계급과 정치인들은 권력과 대의명분을 두고 싸우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고 괴로울 따름이다. 술집에 진 빚 때문에 매춘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게이샤는 몸값 치뤄주고 자신을 빼내어줄 남자를 기다린다. 도박꾼 남자는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게이샤 하나를 두고 싸움을 벌인다. 신사(神社)의 축제에 온 저잣거리가 들썩인다. 영화 속 홍등가의 풍경은 애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카와시마 유조는 영화로 막부 말기의 세밀한 풍속화를 그려내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사헤이지는 게이샤로부터 골치아픈 손님을 따돌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이샤가 죽었다며 손님을 묘지로 안내한 사헤이지는 속임수가 들통나자 도망을 친다. 묘지로부터 해안길로 이어지는 탁 트인 그 길을 사헤이지는 신나게 달려간다. 원래 카와시마 유조는 사헤이지가 묘지를 지나 현대의 시나가와를 통과하는 것으로 찍으려 했다. 하지만 주연 배우 프랭키 사카이를 비롯해 촬영 스태프 대부분이 반대하자 뜻을 접었다(출처: ja.wikipedia.org).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부터의 탈주.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후대의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헤이지의 도피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감지한다. 아마도 격변기의 시대와 병고를 뛰어넘고자 했던 또 한 사람은 이 영화를 만든 카와시마 유조 감독, 그 자신일 것이다.  



*사진 출처: odyssey3.exblog.jp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women-are-born-twice-1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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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와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온다. 남자의 오랜 친구 마렉이다. 그는 휴가를 보내러 이 외딴 시골 마을의 친구를 찾았다. 한때 촉망받는 물리학자로 함께 연구소에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얀은 시골 기상 관측소 일을, 마렉은 하버드에서도 공부하고 아주 잘 나가는 학자가 되었다. 마렉은 재능있는 친구가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렇게 얀과 그의 아내 안나의 시골 마을 일상에 마렉이 들어온다.

  폴란드의 감독 Krzysztof Zanussi의 데뷔작 '수정의 구조(Struktura kryształu, 1969)'는 제목만 본다면 무슨 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화같다. 74분의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이 흑백 영화는 의외로 매우 명쾌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마렉은 관찰자로서 친구 얀의 시골 생활을 들여다 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 팔씨름, 썰매 타기... 둘은 곧 떨어져 있었던 5년의 시간을 메꾸며 친밀감을 회복한다. 하지만 마렉이 보기에 얀의 삶은 지루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다.

  "넌 낭비하고 있어. 재능과 너 자신을."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렉에게 얀과 안나 부부의 삶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마렉은 부부 침실의 열려진 문으로 안나가 얀에게 베개를 던지며 장난을 거는 것을 본다. 이혼한 마렉에게 부부의 친밀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활달한 안나는 마렉과도 곧 친해진다. 그들 세 사람이 일상을 함께 하며 지내는 모습에서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과 짐(Jules et Jim(1962)'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관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 태도의 차이를 대비시킨다.

  미국에서 지내다 온 마렉은 얀에게 최신식 자동차와 멋진 여자 모델이 등장하는 잡지를 보여준다. 얀은 그것들을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고 평을 한다. 얀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연을 벗삼아 지낸다. 별다른 욕심이 없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삶. 마렉은 얀에게 재능을 발휘하며 성취하는 삶이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떠본다. 그렇다. 그가 이 시골 마을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렉이 일하는 연구소의 소장은 얀을 다시 불러서 함께 일하고자 한다. 마렉은 얀을 설득해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

  얀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제공될 것이며 높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얀은 그 제안을 거부한다. 마렉은 그런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렉은 얀이 쓸모없는 램프 장난감을 만드는 걸 한심하게 여긴다. 얀이 술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 마렉의 눈에 비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죄다 무지렁이 시골 농부일 뿐이다. 뛰어난 머리를 가졌으면 그것을 활용해서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하고, 부와 명예를 쌓아야 마땅하다. 마렉은 그런 신념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얀은 마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바라본다. 충만함, 평화, 자유, 사랑과 같은 것들...

  안나는 마렉에게 얀이 산에서 큰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그것이 얀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마렉은 얀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실패한다. 영화 '수정의 구조'에서 마렉이 얀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와도 닮아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기(reflection)'. 물론 응시와 성찰만으로 삶에서 근원적인 변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마렉은 자신이 질주해온 설원의 길을 다시금 방향을 돌이켜 떠난다. 두 친구의 서로 다른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지평선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지평을 응시하는 그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크지스토프 자누시는 그렇게 자신의 소박한 데뷔작에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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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패전은 일본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1950)'를 보고 있노라면, 그 즈음의 일본이 서서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郎)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발표한 단편 소설 40편을 묶어서 4권의 책으로 펴냈다. 소설에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골 마을의 선생 이시나카가 나온다. 주인공 이시나카 선생은 아오모리현(青森県)의 농촌 마을에 살면서 자신이 듣고 경험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꽤 인기가 있어서 1950년에 신도호(新東宝)에서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 영화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마을의 과수원이다. 마을 청년은 패전이 임박한 시기에 자신이 과수원 땅에 군부대의 석유 드럼통을 묻어놓았노라고 말한다. 석유값이 올라 귀하게 취급되는 시기에 그것을 발견한다면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다. 이시나카 선생, 마을의 램프 가게 주인이 청년과 함께 과수원에서 드럼통 발굴에 나선다. 그러나 청년의 기억은 불확실하고, 그 넓은 과수원을 다 헤집어 놓는 것도 어렵다. 곧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속셈이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과수원 주인의 딸에게 반한 청년이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찾아보려고 나름의 꾀를 낸 것.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과수원집 처녀와 마을 청년은 결혼을 약속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농촌 마을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순박한 삶이다. 피폐해진 전후의 경제 상황에서도 농부들은 땅에 의지해서 삶을 재건해 나갈 수 있었다. 일종의 향토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원작자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이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것도 그 지점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웃음이 필요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힘든 시절이지만 영화 속 농촌 마을 사람들은 찌들려 있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거짓말을 눈감아 주며, 청년과 과수원집 딸의 앞날을 축복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서점 주인 야마다와 손님 키하라는 선정적인 무희들의 공연을 보러 간다. 야마다의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남자 친구를 불러 함께 아버지를 골려주고 싶어한다. 남자 친구는 아버지와 동행한 손님 키하라의 아들이다. 딸은 공연을 보고 나오는 아버지에게 누가 먼저 보자고 한 것이냐고 캐묻는다. 야마다와 키하라가 서로를 탓하는 가운데 두 연인도 각자의 아버지 편을 든다. 자식의 연애를 망치고 싶지 않은 아버지들은 이시나카 선생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무희들의 춤 공연을 꽤 비중있게 담는다. 그곳에 모인, 대개는 중년의 남자들은 호기심과 욕망의 눈빛으로 무희들의 몸을 응시한다. 그 장면은 일본인들이 이제 먹고 사는 문제의 절박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나선다. 서점 주인과 손님은 다소 남사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공연을 보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질책하지만, 이시나카 선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그 욕망을 옹호한다. 변화하는 일본인의 성의식은 새로운 세대의 개방성과 솔직함으로 이어진다. 언쟁으로 멀어졌던 두 연인은 사랑의 감정을 되새기며 화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배우의 길에 막 들어선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농부를 연기한다. 병원에 입원한 언니를 간호하러 간 철부지 아가씨 요시코는 병원 환자가 봐주는 손금 해석을 듣는다. 조만간 배필을 만나 결혼할 거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 마을 청년 나가사와의 건초 마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요시코. 청년의 집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여 들뜬 분위기가 된다. 마을 마츠리 행사에서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가 떠나기 전에 경찰을 부르는데...

  아마도 세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가장 기이하게 비춰질 것이다. 나가사와의 어머니가 경찰을 부른 이유는 요시코의 '처녀성(virginity)'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혼기를 앞둔 아가씨가 외박을 한다는 것은 정조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를 자신이 잘 보호했다는 사실을 공권력에 기대어 인정받고자 한다. 요시코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찰은 동행한 이시나카 선생에게 요시코의 처녀성이 손상되지 않았음을 간결하게 기술하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뜨악하게 느껴지는 이 에피소드에서 여성의 몸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영역에 자리한다. 순결하고 건강한 여성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자격을 얻는다. 경찰은 요시코의 몸을 훑어보며 처녀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여성은 새로운 세대를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군국주의의 끈질긴 망령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삶과 내면을 옭아맨다.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에는 그렇게 전후 일본의 서늘하고도 일그러진 이면이 포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루세 미키오는 변화하는 젊은 세대의 사랑 이야기 속에 웃음과 희망을 포개어 놓는다. 흥행에도 성공한 이 영화에는 패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강렬한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산의 소리(山の音, 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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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미래를 생각한다면 엄마가 여기 있는 편이 훨씬 낫겠죠."

  델리리스의 9살 된 어린 딸 키키는 감옥에 있는 엄마를 면회하고 나오면서 그렇게 말한다. 도대체 소녀의 엄마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84년, 다큐멘터리 제작자 Jon Alpert는 New Jersey의 Newark 거리에서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알게 된다. 롭과 프레디는 친구 사이였고, 델리리스는 롭의 여자 친구였다. 앨퍼트의 카메라는 1년 동안 절도와 마약 밀매에 가담한 세 사람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다큐가 'One Year in A Life of Crime(1989)'이었다. 다큐의 후일담도 나왔다. 'Life of Crime 2(1998)'가 그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어져서 이제 완결판 다큐인 'Life Of Crime 1984-2020(2021)'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무려 36년 동안의 시간이 담겨 있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범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롭과 프레디를 만나게 된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그들에게 생계이며 일상이다. 훔친 물건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마약 밀매도 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약 중독자의 길에 들어선다. 롭의 여자 친구 델리리스 또한 마약 중독의 늪에 빠져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했던 델리리스는 중독자가 되면서 삶이 추락했다. 세 아이의 엄마인 델리리스는 매춘과 마약 판매로 중독자의 삶을 이어간다.

  존 앨퍼트가 보여주는 범죄의 초상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마치 착취 다큐멘터리 같다. 그의 카메라는 롭과 프레디의 절도 행각을 비롯해 마약을 주사하는 장면도 그대로 다 담는다. 앨퍼트는 처음에는 냉철한 관찰자로서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앨퍼트 사이에는 인간적인 유대가 쌓였다.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는 자신들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앨퍼트는 진심 어린 조언도 한다. 제작자와 촬영 대상자 사이에 그런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다큐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촬영된 낡고 거친 화면 속의 젊은 세 사람은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다. 롭은 사회적 낙인을 이겨내고 일자리를 얻어 일반인의 삶에 안착하려고 애쓴다. 프레디는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 HIV 양성 판정을 받고 에이즈 환자가 된 그에게 감옥 밖의 삶은 버겁기만 하다. 델리리스도 착실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중독의 수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린 딸 키키는 엄마의 삶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다큐는 체포와 수감, 실패한 재활과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어떤 면에서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의 처절한 삶의 여정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맞닿아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마약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레이건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단속과 강력한 처벌로 대응했다. 거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형량과 인종 차별적인 편향성이라는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 다큐에 나오는 세 명의 인물들 가운데 롭은 백인, 프레디와 델리리스는 히스패닉이다. 그들이 수감된 감옥을 비춰주는 장면에서 수형자들 대부분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이다. 미국 사회에서 범죄와 인종 문제는 뿌리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마약 범죄자들을 단지 감옥에 넣는 것만으로 마약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큐는 세 친구의 험난한, 그리고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 재활의 여정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따라간다. 롭과 프레디는 결국 마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오직 델리리스만이 신앙과 의지력으로 13년 동안 마약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 COVID-19으로 사회 복지 서비스가 축소된 상황에서 델리리스는 단 한 번의 마약 복용으로 죽음에 이른다. 델리리스의 삶은 '중독'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하는 힘든 투쟁임을 보여준다.

  다큐의 마지막, 앨퍼트는 촬영을 시작한 1984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의 약물 중독 사망자수가 500만 명이라고 알려준다. 'Life Of Crime 1984-2020'은 어느 범죄의 응축된 연대기인 동시에, 다큐 제작자의 36년에 걸친 집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마약 문제, 중독자들의 재활 지원 정책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도 포개어져 있다. 영국의 다큐 제작자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Up series'는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계층의 어린 아이들이 중년에 이르는 삶을 담아냈다. 계층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앱티드의 다큐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존 앨퍼트는 범죄와 삶,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초상을 그려낸다.  



*사진 출처: daily-journal.com



**마이애미 마약왕들의 범죄를 다룬 다큐,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cocaine-cowboys-kings-of-miami-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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