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 감독의 잊혀진 영화가 발견되었다. 'The Amusement Park(1975)'는 그때까지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펜실베이니아의 루터교 봉사 협회(Lutheran Service Society)는 로메로에게 의뢰한 작품을 받아보고 너무 놀라서 그냥 협회 캐비닛에 넣어버렸다. 협회 관계자들 눈에 그건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 영화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공포 영화였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복원 과정을 거쳐서 2021년에 다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공포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로메로와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은 뜻밖의 결과물로 나왔다. 제목 'The Amusement Park'의 뜻대로 영화는 유원지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 링컨 마젤이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곁들인다. 화면이 바뀌면 온통 하얀색인 방에 흰색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노인(링컨 마젤이 연기함)이 보인다. 한 노인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얼굴에는 상처가 나있고 몰골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노인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친 노인을 염려스럽게 쳐다 본다. 무언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지친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멀쩡한 노인이 그럼 자신은 밖에 나가보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 노인은 외친다. "나가지 마! 거긴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없다구!"

  문이 열리고, 바로 놀이공원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노인이 앞으로 겪게 될 모험이 영화를 채운다. 사실 모험이라기 보다는 차별과 멸시, 강탈과 몰락의 경험이다. 노인들은 유원지 입장 티켓을 사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물건을 내다 판다. 매입업자는 말도 안되는 헐값에 물건을 사들인다. 이 놀이공원에서 노인은 결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들은 각가지 금지사항이 적힌 놀이기구 앞에서 입장을 거부당한다. 범퍼카를 탄 노부부의 에피소드에서는 현실의 교통사고 장면을 은유적으로 재현한다. 그들의 범퍼카는 젊은 남자의 범퍼카와 부딪힌다. 경찰이 출동하고, 충돌 장면을 본 노인은 젊은 남자의 과실을 증언하려고 한다. 하지만 노인이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증언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노년의 신체적 노화는 판단 능력의 손상이라는 편견과 직결된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노인은 소아성애자로 몰리기도 한다. 노인들이 유일하게 입장을 환영받는 곳에 가보니 그곳은 재활 치료 센터이다. 사기꾼들과 소매치기는 노인들의 돈을 노린다. 노인은 소매치기를 당하고, 폭주족들에게는 얻어맞으며 유원지에서의 공포 체험을 이어간다. 물론 그곳에서도 부자 노인은 환영받는다. 음식점의 종업원들은 부자 노인의 시중에만 응하며 우리의 흰양복 노인은 무시한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위로를 찾고자 한다. 하지만 노인이 도착하자 교회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모든 수모를 겪으며 깔끔했던 노인의 행색은 노숙자처럼 변해간다.

  기괴한 대머리 고무 마스크를 쓰고 낫을 든 남자의 형상은 분명히 죽음의 사신(Grim Reaper)을 의미한다. 다소 우습고 기괴한 모습의 그 남자는 노인의 주변에 출몰한다. 조지 로메로는 현실의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노년에 마주하게 되는 여러 고통을 묘사한다. 노화, 경제적 궁핍, 사회적 편견, 질병, 인간 관계의 단절...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이 영화의 은유는 밋밋하며 참신함과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평생을 공포 영화에 천착한 이 감독이 동시대의 사회 문제에도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영화는 저예산 제작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주연 배우인 링컨 마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원 봉사로 참가한 일반인들이 연기했다. 무엇보다 품질의 심각한 손상은 조악한 사운드 녹음에 있다. 러닝타임 54분 동안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계속 깔린다. 그런데 그것이 역설적으로 노인이 느끼는 내면의 슬픔과 공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세월의 더께를 벗겨내고 만나게 된 영화 'The Amusement Park'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영화가 환기시키는 진실에 있다. 우리 모두는 늙어가고 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노인에 대한 혐오와 학대를 멈추라'. 루터교 봉사 협회의 제작 의도는 로메로에 의해 완벽하게 구현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본주의적 탐욕이 음악 축제와 만났을 때: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


  프로모터인 Michael Lang과 John Scher는 1994년, Woodstock의 영광을 재현하는 뮤직 페스티벌을 뉴욕에서 열었다. 축제는 평화롭게 치뤄졌으나,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5년 후, 두 사람은 새롭게 Woodstock '99를 기획한다. MTV에서는 축제 전기간의 공연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뉴욕 Rome에서 열린 축제에 무려 4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DMX, Limp Bizkit, Korn, Red Hot Chili Peppers, Rage Against the Machine, Metallica 같은 뮤지션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을까? 다큐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의 감독 Garret Price는 시작부터 못을 박는다. "그 축제는 공포 영화 같았습니다."

  1969년의 Woodstock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그 시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를 대표하는 평화와 사랑의 축제이다. 다큐 'Woodstock(1970)'으로 우드스탁은 일종의 신화적 상징성을 획득했다. 그럼에도 그 축제의 이면에는 폭력과 마약, 성범죄와 같은 문제가 엄연히 존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Woodstock '99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명만을 뒤집어 쓴다. 지독한 상업주의와 결합한 이 음악 축제는 폭력과 방화, 총체적인 혼란으로 점철되었다. 다큐는 그러한 실패의 원인을 축제 관계자와 뮤지션들, 참가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씩 되짚어 나간다.

  축제가 열린 곳은 폐쇄된 공군 기지로 유해 물질에 오염된 지역(superfund)이었다. 이미 문제가 있는 장소에서 열리는 축제. 거기에다 날은 미치도록 더웠다. 38도가 넘는 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물탱크의 물을 마구 끌어다 썼고, 곧 기지 전체는 배설물과 진흙이 뒤섞인 거대한 진창이 되었다. 매점의 음식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특히 생수에 대한 폭리가 심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위와 성적 흥분이 참가자들의 이성을 점차 마비시켜 갔다.

  다큐는 축제 참가자 대다수가 20대 초반의 백인 남자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시 언론은 이른바 X 세대(Generation X) 청년들을 '분노의 세대'로 불렀다. 거기에는 1999년의 미국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그 해에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국이 시끄러웠다. 기성 세대에 대한 지독한 불신, 지나치게 개방적인 성의식도 X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이었다. '가슴을 보여달라(show us your tits)'고 외치는 남성들의 구호가 현장을 지배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여성 참가자들에 대한 성범죄로 이어졌다.

  3일 동안의 공연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이 다큐에는 당시 참가자인 David DeRosia의 일기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데이비드는 공연에 대한 감상과 현장의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그는 축제 마지막 날의 일기를 쓸 수 없었다. '탈수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축제 현장에서는 데이비드를 포함해 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곳곳에서 기물 파손과 난동 행위가 일어났다. 그 정점은 방화였다. 참가자들은 닥치는대로 물건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결국 경찰 병력과 소방차가 출동한 뒤에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Woodstock '99는 결국 최악의 뮤직 페스티벌로 남았다. 축제를 기획한 Michael Lang과 John Scher는 인터뷰 내내 변명으로 일관한다. 뮤지션들이 관객의 폭력 행위를 부추겼고, 중계를 포기하고 철수한 MTV가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성토한다. 러닝타임 1시간 50분 동안 미쳐 돌아가는 음악 축제의 실상을 보는 것은 감독의 말대로 공포 영화나 다름없다.

  그러한 광기와 폭력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왔는지, 그 근원에 대한 의문은 다큐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1999년의 미국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X 세대 백인 대학생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본과 긴밀하게 결합한 대중 문화 사업의 본질적 속성 때문일 것이다. 주최 측은 제대로 된 보안 인력도 배치하지 않았고, 그저 참가자들의 돈만을 쥐어짜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음악을 사랑한 평범한 대학생 데이비드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착취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비극인 셈이었다. 


*사진 출처: hbo.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얄라알라 2022-06-16 11:04   좋아요 0 | URL
축제를 맨발로 즐겨본 적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배설물로 엉망이 된 바닥, 흥분한 군중, 성범죄.

말씀 그대로 공포스러워지네요

푸른별 2022-06-16 11:13   좋아요 0 | URL
그냥 다큐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현장의 광기가 느껴지더군요. 결국 안좋은 의미로 ‘전설의 음악 축제‘가 되어버렸지요.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어요. 팝음악 좋아하는 이들은 뮤지션들 공연을 보는 나름의 의미는 있겠네요. 그런데 뮤지션들 인터뷰 보니 그들도 무대 위에서 관중들 보면서 무서웠다고 회고하네요...
 

 
  "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구. 그러니 얼른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해."


  유키코(타나카 키누요 분)는 마흔 문턱에 접어들었다. 동생처럼 아끼는 쿄코(카가와 쿄코 분)에게 유키코는 그렇게 충고한다. 미혼모로 어린 아들 하루오를 키우고 있는 유키코는 쿄코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유키코는 술집 마담으로 일하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 시즈에는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앉았다. 어디 괜찮은 남자라도 있으면 마담일 그만 두고 의탁이라도 하련만, 주변에 꼬이는 이들은 죄다 글렀다. 후원자였던 후지무라는 사업이 망한 후 가끔 용돈을 얻기 위해 유키코를 찾아온다. 젊은 건달과 중년의 느물거리는 사업가는 유키코를 욕망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런 유키코에게 친구 시즈에가 소개해준 부유한 지주의 아들 이시카와가 나타난다. 여자 나이 마흔, 유키코의 인생에 기회가 온 것일까?

  1951년이면 일본은 패전 후 이제 6년이 지났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도쿄의 거리에서 전후의 상흔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 하루오는 혼자 보내는 낮시간을 도심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하루오가 지나는 거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유키코가 이시카와에게 안내하는 도쿄 시내는 빌딩이 공사 중이며, 번화한 상점가는 인파로 붐빈다. 유키코가 일하는 술집 '벨 아미(Bel Ami)'의 손님들은 음주와 여흥을 즐긴다. 거기에는 여종업원들과의 '외박'이라는 매춘도 슬쩍 끼워져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성들은 대개가 불운한 처지에 놓여 있다. '긴자 화장'에서 유키코는 미혼모라는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자리한다. 쿄코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어쩔 수 없이 화류계로 흘러 들었다. '돈'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유키코는 술집 여주인으로부터 술집이 팔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술집 운영 때문에 만난 중년의 사업가는 유키코에게 대놓고 매춘을 제안한다. 유키코는 단호하게 뿌리친다. 유키코가 그런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친구 시즈에는 돈 많은 남자의 첩이 됨으로써 화류계 생활을 끝냈다. 쿄코가 유키코의 과거였다면, 시즈에는 유키코가 다다를 가까운 미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전쟁이 특히 여성의 삶에 가하는 엄청난 압력과 균열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아내로서, 여자로서(妻として女として, 1961)'에서 긴자의 술집 마담 미호(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유부남 대학 교수 케이지로와 오랜 불륜 관계에 있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 만나서 아이를 두게 되었지만, 케이지로는 아이들을 데려가 아내 케이코가 키우게 한다. 미호는 사랑도, 아이들도 품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살아왔다. 미호는 긴자의 술집을 목숨처럼 여긴다. 그런데 술집을 소유한 케이코가 그걸 처분하려고 하자 해묵은 갈등이 폭발한다. 이 영화의 미호처럼 화류계는 전후 경제적으로 취약한 하층 계급 여성들이 쉽게 진입하는 생존의 방편이었다.

  결혼을 통해 정상적인 가족 제도의 틀에 안착하고 싶다는 유키코의 소망은 이시카와와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유키코에게 찾아온 모처럼의 기회는 아들 하루오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날아가 버린다. 행운은 젊고 아름다운 쿄코에게 돌아간다. 유키코는 자신이 애송하는 싯구처럼 하늘의 북극성이 되어 자신을 지켜줄 남자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이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신에 아들 하루오가 유키코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긴자로 향하는 유키코의 발걸음은 날아갈듯 가볍다. 비록 멸시받는 직업이지만, 긴자의 거리에는 그곳에 의탁한 무수한 이들의 삶이 별처럼 흐르고 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화류계 여성의 고단한 삶과 그 내밀한 갈망을 전후 도쿄의 풍경 속에 펼쳐놓는다. '긴자 화장'은 나루세 미키오가 이후에 내놓을 여성 영화의 원형(原型)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멕시코의 외딴 시골 마을, 막달레나의 어린 아들 헤수스는 갑작스럽게 작별을 고한다. 헤수스는 동네 친구와 함께 멕시코 북부로 향한다. 석 달 후, 헤수스와 동행한 친구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막달레나는 이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아들의 생사를 알아내야만 한다. 북부 국경 지대, 실종자 수색 센터에서 막달레나는 아들의 불에 탄 가방을 확인한다. 담당 공무원은 막달레나에게 아들의 사망을 인정하라며 서류를 내민다. 막달레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아들이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아들을 찾는 막달레나의 고통스런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는 헤수스와 동네 친구가 왜 떠났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2006년, 칼데론 정부가 주도한 멕시코의 마약 전쟁은 멕시코 전체를 폭력과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약 카르텔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은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정부의 공격을 피해 카르텔들은 공권력이 취약한 지방으로 침투했다.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마약 카르텔들은 멕시코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와중에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었으며, 구조적인 빈곤과 폭력은 더욱 심화되었다.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은 갱단들의 조직 확장 과정에서 주요한 목표가 되었다. 마약 전쟁은 처음엔 멕시코 정부와 마약 카르텔과의 대결이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갱단들의 치열한 세력 다툼 속에 민간인 희생이 커지는 양상으로 고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 미국행은 생존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막달레나의 아들 헤수스도 그렇게 북쪽을 향해 떠났다.

  영화는 막달레나의 눈을 통해 국경 지대 실종자 센터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시체 안치소 같다. 컨테이너에는 시신이 담긴 검정색 Body Bag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가족의 행방을 찾는 이들이 길다란 줄을 이루며 기다린다. 담당 공무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냉담하게 그들을 대한다. 그곳에서 '실종'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국가 권력은 그저 사후 수습에만 급급한 무기력한 조직체로 비춰진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막달레나는 아들을 찾아나선다. 막달레나는 아들과 같은 버스를 탔던 남자가 살아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남자가 살고 있는 마을로 향하는 막달레나. 미국에서 이제 막 추방된 청년 미구엘은 동행이 되어준다. 미구엘은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막상 도착해 보니, 미구엘의 집은 불탔으며 어머니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미구엘은 절망한다. 고향은 갱단이 지배하는 유령 마을이 되어버렸다.

  감독 페르난다 발데즈(Fernanda Valadez)는 막달레나의 여정에 초자연적인 공포 분위기를 덧입힌다. 미구엘과 함께 걷는 들판, 남자의 마을에 가기 위해 건너는 호수, 인적이 드문 멕시코 시골의 풍광에는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마침내 막달레나가 만난 원주민 남자는 어렵게 입을 뗀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남자는 가족이 통역을 해주고, 그것이 영화의 자막으로 뜬다. 그런데 그가 갱단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건지게 된 과정을 말할 때는 그 어떤 자막도 나오지 않는다. '악마'들의 행위로 묘사된 무시무시한 폭력과 살상의 이미지는 언어가 없어도 직관적으로 인식된다.

  영화의 마지막, 막달레나는 아들의 생사를 확인한다. 분명 아들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막달레나는 자신이 알던 아들의 모습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막달레나는 아들을 잃었다. 영화 'Identifying Features(2019)'는 오늘날 멕시코에 만연한 구조적인 폭력의 실상을 고발한다. 공권력의 부재 속에 하층민들은 죽거나 다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운 좋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 막달레나에게 닥친 비극은 마약과의 전쟁으로 시작된 죽음의 긴 행렬이 여전히 멕시코 국경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바바라 로든의 역작, Wanda(1970)

  여자는 남편과 헤어져 여동생의 집 소파에 대책없이 앉아있다. 이혼 법정에서 두말없이 이혼에 동의하고 아이들 양육권도 포기한다. 봉제 공장에서는 남들보다 느리게 일한다고 해고당한다. 시간이나 때우려고 영화관에 갔는데, 잠깐 잠든 사이 지갑을 도둑맞았다. 화장실 좀 쓰려고 늦은 밤에 들어간 술집, 바텐더는 여자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다. 그런데 여자가 바텐더로 알고 있는 남자는 이제 막 진짜 바텐더를 죽인 강도 살인범이다. 여자가 골칫덩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 영화의 제목 'Wanda'는 이 여자의 이름이다.

  비운의 여성 감독 Barbara Loden의 유일한 장편 연출작인 영화 'Wanda(1970)'는 매우 기괴한 느낌을 준다. 여자 주인공은 무기력하고, 삶에의 의지도 없고, 자존감도 낮다. 완다의 여정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위의 여성이 어떻게 착취와 범죄에 노출되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다. 완다는 먹을 것, 잘 곳 때문에 아무 남자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남자들은 완다를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만 볼 뿐이다. 강도 살인범 노먼은 완다에게 모욕을 주며 복종을 요구한다. 급기야 완다는 노먼의 은행 강도 범죄 행각에 마지못해 동참하며 공범이 된다.

  배우였던 로든은 이 영화에서 완다 역을 맡았다. 영화 속 완다가 보여주는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에는 바바라 로든 자신이 겪었던 정서적인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Wanda'는 어떤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와 일맥상통한다. 카사베츠는 하층 계급 여성의 정신적 불안정성이 야기한 알콜중독을 보여준다. 그보다 선구적 초상으로서 로든은 학대와 착취, 범죄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불안한 여성을 그려낸다. 완다의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몰락은 실제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낸 느낌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에게 'Wanda'는 기분 나쁜 공포 영화로,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최악의 여성 캐릭터로 각인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들어있다. 완다의 정서적인 문제는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가정 바깥으로 밀려난 이 불행한 여성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로든의 개인적 경험과 결합한 완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의 현실이다. 'Wanda'는 어려운 복원 과정을 거쳐 2010년에야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다. 48살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뜬 로든은 복원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 찍힌 'a film by Barbara Loden'을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듯하다.
  

2. 의외로 잘 뽑아낸 태국 영화, Happy Old Year(2019)

  이제 막 스웨덴 유학에서 돌아온 진은 엄마와 오빠를 설득해 집정리에 나선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진은 살고 있는 집의 1층을 작업실로 쓸 생각이다. 오빠는 흔쾌히 진의 뜻에 따라주지만, 엄마는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며 반대한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의 '정리 대작전'이 시작된다. 진은 집안 대부분의 물건을 버리기로 생각하고 검정색 쓰레기 봉투에 과감히 넣어 버린다. 하지만 진은 곧 그 많은 물건을 '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과연 진은 무사히 집정리를 마치고, 그토록 꿈꾸는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

  '정리'에 대한 책이나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그 핵심이 '버리는 기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억'과 같은 감정적 가치가 부여된 물건이라면 그걸 버리는 건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된다. 영화 속 진이 마주한 혼란과 괴로움도 거기에 있다. 어떤 면에서 진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은 자신이 냉정하게 내친 남자 친구 아임의 카메라,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피아노를 두고 고심한다.

  어떻게든 그 물건들을 좋은 방식으로 처리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하고 싶다, 고 진은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진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간다. 카메라를 돌려주려고 다시 만난 전남친과는 복잡한 감정의 파고를 겪는다. 진이 아버지를 잊기 위해 팔아버린 피아노 때문에 엄마는 큰 상처를 받는다. 엄마에게 그 피아노는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진의 과거는 정리되지 않으며, 그 모든 기억과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나와폰 탐롱라타라닛(Nawapol Thamrongrattanarit)은 진의 '물건 버리기 여정'을 통해 관계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진은 자신이 바라던대로 화이트톤의 미니멀리즘으로 정돈된 새 작업실에 앉아있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진은 물건으로 꽉 차있던 원래의 공간을 떠올린다. 거칠고 서툴게 밀쳐낸 과거의 추억과 그 흔적은 여전히 진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리에 대한 여러 조언들이 각각의 챕터들을 이끌어 가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정리의 비법에도 불구하고, 다소 낯선 이 태국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