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자신이 궁금해하는 질문 하나를 지독하게 파고 든다. 'What is a Woman?' 남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의사와 심리학자를 비롯해 정치인, 교수, 그리고 저 멀리 케냐까지 가서 마사이 부족을 만난다. Justin Folk의 다큐 'What is a Woman?(2022)'은 6월에 미국에서 개봉된 후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다큐를 이끌어 가는 이는 미국의 보수 정치 평론가 Matt Walsh. 그는 '여성'이란 단어의 정의(definition)가 매우 궁금하다. 그런데 그 궁금증의 이면에는 non-binary(제 3의 성, 트랜스젠더나 젠더 퀴어에 속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

  Journey. 이 다큐는 성차(sex differences)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보수 정치 평론가의 도발적인 탐구 여정이다. 그는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이들, 특히 트랜스젠더를 LGBT Movements가 만들어낸 비현실적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억지 소리를 쏟아내지는 않는다. 과연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에 대한 매트 월쉬의 질문은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지하게 공명한다. 트랜스젠더이면서 성전환 수술 전문의가 된 의사, 페미니스트 성심리 상담가, 성전환시술인 호르몬 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내과 의사, 젠더 연구 전문가인 사회학과 교수... 월쉬의 인터뷰는 '젠더(gender, 사회적으로 획득한 성정체성)'의 실제적 근거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공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는 '젠더'를 터무니없는 허상으로 인식한다.

  케냐로 날아간 월쉬는 마사이족들과의 인터뷰를 자신의 신념에 단단하게 덧댄다. 마사이 족장은 'non-binary'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월쉬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사이족 사람들에게 그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트랜스젠더'는 기이한 이형적 존재로 새삼스럽게 각인된다. 이제, 보수 정치 평론가는 성 정치 운동을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기만극으로 확신한다. 그는 TV와 영화와 같은 문화 컨텐츠들이 LGBT에 대한 긍정과 호감의 메시지를 양산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한 환경이 특히 청소년들의 'gender dysphoria(sex와 gender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행감)'를 조장하며, 결과적으로 트랜스젠더의 삶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What is a Woman?'은 굉장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다큐임에도 여러모로 시사하는 부분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청소년들이 감수해야 하는 의학적 위험을 다룬 점이 그러하다. 호르몬 요법에 쓰이는 약물의 장기적인 추적 연구가 없다는 점, 또한 비가역적인 신체 변화를 가져오는 수술의 후유증이 관객에게 객관적 정보로 주어진다. 아마도 이 다큐는 LGBT 운동가들에게는 악의적이고 편협한 시각에서 제작된 한심한 다큐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언론과 평론가들이 이 다큐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출처: en.wikipedia.org).

  그러한 관점과는 별개로 종횡무진, 도발적 질문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자신의 논지를 설파하는 매트 월쉬를 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이 다큐가 취하는 접근 방식은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Roger & Me, 1989)'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시간주 플린트 출신의 백수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불굴의 의지로 GM의 수장을 만난다. 마이클 무어는 고향 플린트를 유령 도시처럼 만들어버린 GM의 공장 폐쇄를 따질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그 허망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무어의 여정은 미국 사회의 계층적 간극과 주변부의 황폐한 풍경을 담는다. 'What is a Woman?'의 매트 월쉬의 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성적 다양성 담론에 대한 보수 우파의 극렬한 공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6월 24일, 미국 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한 'Roe v. Wade(1973)'의 판결을 뒤집었다. 미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도 그렇게 제한받게 될 날이 올까? 어떤 관객들은 이 다큐를 보며 그런 음울한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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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Yuni(2021)'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중년의 부부가 Yuni의 집을 찾아온다. 여고생 유니는 이제 두 번째 청혼 신청을 받는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두툼한 돈봉투를 내민다. 결혼 전, 신부의 집안에 건네는 지참금이다. 남자는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면서 유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나라에서는 본부인의 동의만 있다면, 남자는 세 명의 아내를 더 둘 수 있다. 유니의 집안은 그리 넉넉치 않다. 유니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먼 도시 자카르타에서 일하고 있다. 할머니와 지내는 유니는 이제 고 3, 명석한 이 소녀는 대학에 가고 싶지만 학비 때문에 고민이다. 그런 가운데 연달아 혼담이 들어온다. 유니가 사는 곳에서는 두 번의 혼담을 거절한 여자는 영원히 결혼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다. 유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에게는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 인도네시아 영화. Kamila Andini 감독의 영화 'Yuni(2021)'는 인도네시아 시골에 사는 여고생 유니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속옷부터 시작해서 방안의 물건이며 소지품이 온통 보라색인 소녀와 만난다. 유니는 보라색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 보라색 물건이 눈에 띄기만 하면 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보라색 매니아 유니.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치렁치렁한 교복 치마와 흰색의 히잡(hijab)만이 허용될 뿐이다. 유니의 학교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의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조만간 여학생들이 처녀성(virginity) 검사를 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음악 동아리 활동은 이슬람적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금지당한다.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그게 유니가 처한 현실이다. 

  오랜 가부장적 전통은 유니 또래의 소녀들에게 남자에 예속된 삶을 강요한다. 유니의 동급생 가운데에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학생도 있다. 조혼(早婚, child marriage)은 인도네시아 사회의 커다란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 인도네시아에서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의 숫자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른다(2018년 통계 기준, 자료 출처: https://reliefweb.int). 2019년, 인도네시아의 혼인법 개정으로 부모의 허락 하에 여성이 결혼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에서 19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높은 조혼율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조혼은 여성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며, 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가정 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만든다. 이러한 조혼과 일부다처제는 특히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에게 무거운 굴레가 된다.

  유니와 친해진 미용사 수치는 자신이 이혼녀가 된 이유를 들려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수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결국에는 이혼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유니의 절친 사라는 사귀던 남자 친구와 함께 있다가 그 장면이 사진에 찍혀서 협박을 당한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혼전의 연애 관계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여성과 그 가족은 불명예의 상황에 놓인다. 결국 사라는 남자 친구와 생각지도 못한 이른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사라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은 결코 기쁨의 눈물이 아니다. 사라가 꿈꾸던 미래와 자유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겉으로 보기에 유니는 평범한 여고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틈만 나면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 떨고, 연모하는 문학 선생님 때문에 어쩔 줄 모른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학생 요가와는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니가 바라는 밝은 미래는 점점 더 멀어진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으려는 계획도 틀어졌다. 두 번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유니는 그 지역의 암묵적 전통에 저항한다. 견고한 가부장제와 종교적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유니의 몸부림은 보라색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유니에게는 꿈과 열정의 색인 보라색은 실은 그곳에서 '과부(widow)'를 상징하는 색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유니보다 더 안좋은 처지에 놓인 사람은 문학 교사 다마르일 것이다. 다마르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챈 유니에게 청혼한다.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다면서 다마르는 유니에게 애원한다. 인도네시아에서 LGBT의 인권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들 대부분은 가족의 요구에 순응하고, 사회적 낙인을 피하기 위해 결혼 제도에 안착한다. 감독 카밀라 안디니는 'Yuni'를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의 성적 차별과 폐쇄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유니와 같은 하층민 여성들은 조혼과 일부다처제, 가정폭력과 같은 어려움과 마주한다. 동성애자인 다마르는 어쩌면 평생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 요가는 유니에게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며 매번 시를 써서 전한다. 그 시들은 인도네시아의 위대한 시인 Sapardi Djoko Damono(1940-2020)의 것이다. 카밀라 안디니는 특히 시 'Rain in June'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출처: womenandhollywood.com). 영화의 마지막, 유니의 결혼식 날에 폭우가 쏟아진다. 그 비를 맞으면서 보라색 예복을 입은 유니는 맨발로 걸어간다. 인도네시아에서 우기는 일반적으로 10월에 시작한다. 6월에 내리는 비는 예외적인 일이다. 퍼붓는 비가 꽃이 피기 직전의 나무에 마구 밀려든다. 아직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유니가 겪는 감정적인 시련은 '6월의 비'로 형상화된다. 영화 'Yuni'는 인도네시아의 주변부, 십 대 소녀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Sapardi Djoko Damono의 시 'Hujan Bulan Juni(Rain in June)'

Tak ada yang lebih tabah
Dari hujan bulan juni
Dirahasiakannya rintik rindunya
Kepada pohon berbunga itu
Tak ada yang lebih bijak
Dari hujan bulan juni
Dihapuskannya jejak-jejak kakinya
Yang ragu-ragu di jalan itu
Tak ada yang lebih arif
Dari hujan bulan juni
Dibiarkannya yang tak terucapkan
diserap akar pohon bunga itu

------------------------

No one is more patient
From the rain of June
Withheld her longing
To the flowering tree
No one is the wiser
From the rain of June
He removed his footprints
The hesitant in the street
No one is wiser
From the rain of June
He left the unspoken
absorbed the roots of the flower tree

원문 출처: https://steemit.com/art/@suhaimich/indonesian-poetry-maestro-sapardi-djoko-dam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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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자신을 교육부의 '노예(slave)'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경찰관 크로포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크로포드는 남자에게 거듭 맥주를 권한다. 호주의 내륙 오지(outback) Tiboonda, 학교 교사 존 그랜트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를 이제 막 떠나왔다. 그에게는 6주 동안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주어졌다. 시드니로 날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는 인근 소도시 Bundanyabba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술집에서 만난 이 경찰관은 친절한듯 보이지만 그 태도는 꽤나 위압적이다. 존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룻밤을 술집 말고 달리 보낼 데가 없다.

  그가 크로포드의 소개로 들어간 음식점 한 켠에서는 동전 도박장이 열렸다. 두 개의 동전을 던져서 둘 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에 따라 돈을 따는 단순한 도박. 남자들은 도박장의 열기에 취해있다. 존은 심심풀이로 도박에 참가한다. 행운의 여신이 연달아 미소를 짓는다. 단숨에 400달러를 따낸다. 좀 더 운이 따라준다면, 그를 교육부의 노예로 만든 1000달러의 보증금을 갚을 수 있다. 휴가비까지 탈탈 털어서 도박판에 건다. 그가 도박장을 나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담배 몇 개비와 약간의 동전이 전부였다. 존 그랜트는 말 그대로 분단야바에 발이 묶인다. 과연 그는 여자 친구가 있는 시드니에 갈 수 있을까...

  Ted Kotcheff 감독의 영화 'Wake in Fright(1971)'는 호주 출신의 작가 Kenneth Cook의 동명 소설(196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케네스 쿡은 자신이 머물렀던 Outback의 소도시 Broken Hill(영화에서 가상의 도시 분단야바로 형상화됨)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썼다. 그는 내륙 오지의 황량한 환경과 그곳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소설은 그러한 케네스 쿡의 날것 그대로의 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143쪽 가량의 중편 소설을 충실히 재현한다. 시나리오 작업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인 Evan Jones가, 감독은 캐나다 출신의 Ted Kotcheff가 맡았다.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두 사람은 호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으나, 이 이방인들의 눈으로 바라본 호주 내륙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사실적이다.

  동전 도박으로 파산한 존은 남은 돈을 그러모아 맥주 한 잔을 들이킨다. 그 술집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 하인즈는 존에게 호의를 베풀며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존은 하인즈의 집에서 거친 광부 조와 딕, 알콜 중독자 의사 닥을 만난다. 무지막지하게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곧 친구가 되고, 캥거루 사냥에 가기로 의기투합한다. 이 네 사람이 캥거루 사냥에서 보여준 잔혹함과 광기는 야만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장면은 실제로 캥거루 사냥꾼들을 섭외해서 찍었다. 캥거루들은 난사된 총알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고, 칼에 의해 난도질 당한다.

  호주 뉴 웨이브 영화의 신호탄이 된 Nicolas Roeg'Walkabout(1971)'은 백인의 시각으로 호주 자연의 원시성을 이상화한다. 영화 'Wake in Fright'에서 자연은 경외와 찬미의 대상이 아니다. 황량하고 거친 오지 내륙의 풍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우리'라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외지인은 차별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통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본성은 일탈 행위에 무감각해진다. 존 그랜트는 처음엔 야바의 모든 것에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술집을 꽉 채운 남자들의 폭음, 도박장의 미친듯한 열기, 광부 조와 딕의 역겨운 언행, 의사임에도 술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닥의 삶. 그런데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존의 지성은 그곳에서 순식간에 야만적 폭력으로 대체된다. 존은 그렇게 '야바'의 사람으로 변해간다.

  호주 내륙의 이 오지 도시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술과 도박, 사냥과 같은 오락이 극대화되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호주 Outback 사람들의 초상은 결코 과장되거나 과거의 것이 아니다. Pete Gleeson의 다큐 'Hotel Coolgardie(2016)'는 내륙 오지 마을의 주점을 배경으로 그곳 주민들의 상스러운 민낯을 드러낸다. 폭음, 무자비한 살육, 성적 일탈(존과 닥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존 그랜트는 거지 노숙자의 신세가 되어 거리를 헤맨다. 어떻게든 시드니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에 몸을 맡긴다. '시드니'라는 글자가 박힌 트레일러의 기사는 존에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그곳은 시드니가 아니다. 마치 반복되는 악몽처럼 존은 다시, 야바의 역 앞에 서있다. 이 영화의 제목 'Wake in Fright'는 원작 소설을 여는 구절에서 따왔다.

  "May you dream of the Devil and wake in fright.
  (당신이 악몽을 꾸고, 공포 속에서 깨어나길!)"


  오래된 저주의 문구. 원작자 케네스 쿡에게 Broken Hill에서의 삶은 그 저주 같았을까? 호주인들이 쿡의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호주에서 이 영화는 빠르게 잊혀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4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폐기 직전의 원본 네거티브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기사회생했다. 놀라운 귀환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존은 야바행 기차 객실에서 신나게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백인 일행을 지나친다. 존이 앉은 자리 건너편에는 조용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원주민이 앉아있다. 그 기차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호주라는 국가를 나타낸다. 기차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백인들,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원주민, 그리고 그들 바깥에는 결코 정복되지 않은 자연이 자리한다. 주인공 존 그랜트의 여정은 호주인의 어두운 내적 심연과 맞닿아 있다. 원작자 케네스 쿡은 문명화된 도시의 외관 속에 교양인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호주인들에게 조소를 보낸다. 영화는 호주인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호주 자연, 그 원시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아내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 리뷰

1부 호주 뉴 웨이브의 신호탄, Walkabout(197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The Last Wave(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sunday-too-far-away1975-last-wave1977.html

3부 발굴된 호주 여성의 서사, My Brilliant Career(197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ustralian-new-wave-3.html

4부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 서사:
Breaker Morant(1980), Bruce Beresford
Gallipoli(1981), Peter Weir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breaker-morant1980-gallipoli1981.html


***다큐 'Hotel Coolgardie(201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hotel-coolgardie2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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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의 공창제(公娼制)를 폐지시켰다. 종래의 사창가는 특수음식점 거리로 부르며 경찰의 관할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곳의 명칭이 이른바 적선지대(赤線地帯)이다. 청선지대(青線地帯)는 외형은 일반 주점과 음식점의 간판을 내걸었으나 암암리에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했다. 적선과 청선으로 나뉘어 관리되던 일본의 성매매 산업은 1956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성매매 방지법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Suzaki Paradise: Red Light, 1956)'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듬해에 제작된 그의 영화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에도 그러한 시대 배경이 삽화적으로 제시된다.

  전후 일본 영화사에서 나루세 미키오가 성취한 '여성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은 독보적이다. 그에 비한다면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이 그려낸 전후 일본 사회와 여성에 대한 영화적 탐구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 '풍선(風船, The Balloon, 1956)'은 이 감독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전쟁 미망인으로 술집 여종업원이 된 여성은 부자 애인에게 버림받자 죽음을 택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윤리적 과오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풍선'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풍경과 하층민의 삶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이 영화는 전후의 경제적 풍요가 가져다준 탐욕과 내면의 타락을 직시하게 만든다.

  '풍선'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의 시선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향한다. 영화의 주인공 츠타에와 요시지는 당장 수중에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한 연인들이다. 남자와 여자의 행색에서는 궁핍함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들은 딱히 갈 곳도 없다. 여자가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자 남자가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들이 내린 곳은 적선 지대, '스자키 파라다이스'라는 출입문의 큰 글씨가 보이는 곳이다. 조만간 시행될 매춘 방지법 때문에 이 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츠타에와 요시지는 적선 지대 외곽에 자리한 작은 주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오토쿠라는 중년의 여성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츠타에는 사람 좋은 오토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일자리를 부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츠타에가 오토쿠의 주점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이 여자의 과거를 짐작케 한다. 손님들을 유혹하는 츠타에 때문에 요시지는 속을 끓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그는 소바 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돈푼깨나 있는 라디오 상점 주인 오치아이의 등장은 가난한 연인들을 불화로 이끈다. 오치아이의 돈에 끌린 츠타에는 스자키 파라다이스 거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요시지는 상심한다. 아마도 그에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닐듯 하다. 소바 가게의 착한 여종업원 타마코는 그런 요시지를 따뜻하게 대한다.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하층민의 삶을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그려낸다. 빗물이 떨어지는 오토쿠의 집 안방, 당장 내다버려도 아깝지 않을 요시지의 낡은 구두, 여름에도 낡은 겨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츠타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삶. 비록 삶은 구차스럽고 너절해도, 마음 속 정념의 불길까지 꺼진 것은 아니다. 돈을 따라간 츠타에는 요시지를 잊지 못하며, 요시지는 타마코에게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다. 오토쿠는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4년째 일편단심 기다린다.

  이 영화에서 카와시마 유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다리' 쇼트들은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오타쿠의 가게 다락방에서 함께 누워있는 츠타에와 요시지의 다리가 덩굴처럼 얽힌다. 요시지가 츠타에를 찾으러 한여름 거리를 헤매는 장면에서는 힘없이 질질 끌리는 요시지의 다리가 보인다. 마침내 그들이 재회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려고 할 때, 츠타에의 게타와 요시지의 낡은 구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가 하면, 오토쿠는 가게 밖을 서성이는 남자의 다리를 보고 남편이 돌아왔음을 알아챈다. 카와시마 유조는 신체의 일부분인 '다리'에 삶과 정념의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마지막, 오토쿠의 아들은 아빠가 사준 장난감 칼을 잃어버렸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칼은 스자키 파라다이스를 가로지르는 강물에 유유히 떠내려간다. 파라다이스 입구의 다리에 서있던 타마코는 그 칼이 떠가는 것을 바라본다. 오토쿠의 짧게 끝난 행복의 시간, 타마코의 요시지에 대한 덧없는 연모의 마음도 그렇게 강물에 흘러간다.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는 남녀의 질긴 정념(情念)의 타래를 스산한 적선 지대의 풍광 속에 펼쳐놓는다.


*사진 출처: pen-online.jp  요시지 역의 미하시 타츠야(
三橋達也)와 츠타에 역의 아라타마 미치요(新珠三千代). 두 사람은 카와시마 유조의 영화 '풍선(1956)'에서도 함께 출연해서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들 리뷰

막말태양전(幕末太陽傳, 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women-are-born-twice-1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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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환갑을 앞둔 아키 여사는 5남매를 두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 이야기가 나온다. 시세가 얼마인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막내딸 하루코가 계산기를 찾으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루코는 대략의 감정가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받게될 돈을 계산한다. 하루코의 셈법을 듣다 보면, 당시 일본 민법에서 여성 배우자의 상속분은 3/1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1960년작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돈'과 긴밀히 얽혀 있다. 어머니 앞에서 태연히 유산 상속분을 이야기하는 자식들. 어머니 아키 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딸, 아내, 어머니'의 가족 구성원들은 돈과 관련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장남은 아내의 삼촌이 하는 공장에 투자하면서 형제들 모르게 집을 저당잡혔다. 둘째 딸 카오루는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분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다. 큰며느리 카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툭하면 사업 자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삼촌 때문에 괴롭다. 이 가족에게 큰딸 사나에(하라 세츠코 분)가 가진 백만 엔의 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나에는 남편의 보험금을 받는다. 큰오빠는 투자 좀 하겠다고, 여동생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3분,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완성판 가족극 같다. 영화 속 아키 여사의 자녀들은 큰딸 사나에를 제외하고 매우 계산적이고 냉정하다. 유이치로는 처삼촌의 부도 때문에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동생들에게 알린다. 그러자 동생들은 자신들의 상속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이치로가 폭탄 선언을 한다. "그럼 난 어머니 모실 수 없다. 의무도 똑같이 나누어야 맞지 않냐?"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이 가족극은 쓸쓸함과 비감함이 느껴진다. 전후의 세대는 경제적 풍요 속에 물질적 가치에 경도되었다. 전통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여지없이 충돌한다. '딸, 아내, 어머니'에 나오는 가족의 모습에는 급변하는 일본 사회의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가족 영화가 아니라 노인 문제에 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오루의 잔소리쟁이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분가 선언에 분노하며 양로원으로 가버린다. 영화 속 양로원의 모습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고령층 인구의 복지 문제가 서서히 대두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카오루의 시어머니는 아키 여사에게 '이런 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자린고비 시어머니는 그곳의 요금이 꽤 높다는 점도 언급한다.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의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이며, 그것은 나중에 아키 여사의 괴로운 고민거리가 된다. 

  나루세 미키오는 세대 갈등과 가족주의의 균열을 그려내면서도, '여성의 삶'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이어간다.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삶은 남성에게 매여 있다. 과부가 된 사나에는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집요한 재혼 요구를 받는다. 여성의 사회적 기능은 오로지 가족 내부의 '딸, 아내, 어머니'의 자리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사나에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젊고 매력적인 농장주 대신에 부유한 중년의 남성과 재혼한다. 엄마를 함께 모시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딸은 가족의 어려움을 짊어진다. 한편 큰며느리 카즈코는 삼촌의 파산 때문에 남편이 겪고 있는 곤란에 미안함을 느낀다.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카즈코의 결정은 아내로서 남편과 그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영화 속 여성들은 가족주의가 부여한 규범과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개인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인 막내딸 하루코는 변화의 기점에 서있는 여성인지도 모른다. 하루코는 엄마의 거취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으며, 큰언니의 재혼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데에 안도한다. 희생, 배려, 의무... 이러한 가치들로부터 하루코와 같은 세대의 여성은 점차로 중립적이 되어갈 터였다.

  영화의 마지막, 아키 여사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동네 영감과 마주친다. 손주인줄 알았던 아이는 영감이 용돈벌이를 위해 돌보는 이웃집 아이였다. 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키 여사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다. 아이를 부드럽게 어르는 그 모습은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양로원을 알아 보던 이 어머니는 아직 누구와, 어디에서 살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영화는 닫힌다. 나루세 미키오는 '딸, 아내, 어머니'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여성의 삶을 정교하게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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