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강변 호텔(2018)'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영환(기주봉 분)은 오랜만에 두 아들과 만난다. 그가 자식들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환은 죽음의 예감을 느끼고 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까지 찍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시인은 지금 강변 호텔에 머물고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호텔 주인이 시인의 팬이었다. 주인은 영환에게 아무 부담없이 호텔에 와서 지내라고 초대했다. 그 호텔에는 손을 다친 젊은 여자 아름(김민희 분)이 머물고 있다. 아름은 연인과 결별한 후유증에 시달리는듯 하다. 그런 아름을 위로하기 위해 아는 언니(송선미 분)가 찾아온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겨울 강변의 풍경, 시인의 불길한 예감은 괜한 것일까?

  근래에 들어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최근작인 '당신 얼굴 앞에서(2021)'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여배우가 등장한다.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은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주인공이다. 홍상수의 영화들도 감독 자신처럼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강이 보이는 호텔방에서 몸을 일으키는 영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두 아들 경수와 병수를 만날 생각이다. 도착을 알리는 큰아들 경수의 전화, 영환은 객실로 올라오겠다며 방번호를 알려달라는 경수의 청을 완곡히 거절한다. 부모 자식간이지만 자신의 공간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영환과 두 아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환은 사랑 때문에 젊어서 처자식을 내친 인물이다.

  "미안한 것 때문에 인생을 같이 할 수는 없는 거야"

  늙은 시인은 가족을 나 몰라라 했던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옹호한다. 영환의 모습에서 홍상수 본인의 현실이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감독은 젊은 여배우와 함께 하기 위해서 가정을 떠났다. '강변 호텔'의 영환은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현실의 여배우는 그대로 영화 속 '아름'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환과 같은 호텔에 투숙중인 아름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객실에서 상처를 드레싱하는 모습을 보니, 손등에 화상 자국이 나있다. 이 여자는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유부남과의 불행한 사랑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로하려고 찾아온 선배 언니는 그 남자를 맹비난한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아름은 담담하다. 오히려 남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자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 진짜로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랑과 죽음. 홍상수는 '강변 호텔'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갑작스런 죽음의 예감에 영환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간 소원했던 자식들을 불러 모으며 영정사진도 찍는다. 죽을 때가 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인다. 카페에 있는 커다란 화초를 보며 잎이 말랐으니 물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남자는 이제까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왔다. 여자 때문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내팽개치고 살아온 것을 보면 그렇다. 이제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려하는 존재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한 마리이다.

  홍상수는 언젠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서 복기(復棋)하는 것일까? 영환은 아들들 앞에서 당당하다. 차남 병수의 이름에 담긴 뜻을 주욱 풀어서 알려주는가 하면, 두 아들의 인생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큰아들 경수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혼 소식을 숨긴다. 여자 친구가 없는 작은 아들 병수는 아버지에게 여자가 무섭다고 말한다. 정작 자신도 여자 문제로 젊은 날을 부산스럽게 보냈던 아버지는 한탄한다. 두 아들은 이상하게도 그 원인을 호랑이 같은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사실 시인의 아내가 무서운 호랑이처럼 되어버린 것은 남편의 변심때문이며,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는 데도 말이다. 이 기형적인 가족의 이야기에서는 뭔가 서글픔이 베어져 나온다.

  노시인과 두 아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강변 호텔의 또 다른 투숙객 아름은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아름은 선배 언니 연주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방에서 누워서 보낸다. 마치 다친 동물이 조용히 굴을 찾아 들어가 상처가 낫길 기다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강변을 은세계로 만들어버린 눈이 두 여자와 시인을 이어준다. 영환은 눈길에 산책을 나온 아름과 연주의 미모를 칭찬하며 말을 건넨다. 거리를 두려던 두 여자는 영환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를 누그러뜨린다.

  홍상수에게 있어 '우연'은 그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법칙이다. 영환과 두 여자의 만남 이전에 그들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연주는 호텔에 도착해서는 주차된 어떤 차를 보고 흠칫 놀란다. 아름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는 연주는 자신이 과거에 사고를 냈던 차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차는 경수 형제가 타고 온 차였다. 연주의 추측은 나중에 두 여자가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순두부집 앞에서 경수의 차를 발견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홍상수의 영화 안에서 모든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우연'의 구름은 그들을 단단하게 휘둘러 감는다.

  해외에서는 '소주 영화(Soju movie)'의 대가로 알려진 홍상수가 결코 술을 빠뜨리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소주 대신에 '막걸리'가 등장한다. 막걸리는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도 등장한다. '당신 얼굴 앞에서(2021)'에서는 예외적으로 '배갈'이 나온 적이 있다. 영환이 두 아들과 막걸리를 들이키는 동안, 아름과 연주는 바로 그 뒷자리에서 저녁을 먹으며 남자들의 철없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연주는 영화 감독 병수의 싸인을 받을까 계속 고민한다. 자신이 보기에 대중적이지도, 그렇다고 작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독을 그저 인기있다는 이유로 싸인을 받고 싶어한다. 도대체 그 싸인은 받아서 뭐에다 쓸까? 호텔의 프런트 여직원도 병수를 알아보고 싸인을 받아갔었다. 유명인의 자필 이름이 적힌 종이 쪼가리 한장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 실재에 대한 감각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예술가의 작업만이 전혀 낯선 타자를 창조적 세계 안에서 만나게 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관객은 영환이 아름과 연주 앞에서 자작시를 낭독하는 것을 본다. '이카'라는 가상의 공간과 그곳에 오게 된 두 여자, 덧니 소년이 등장하는 장문의 시는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시 속의 두 여자는 아름과 연주의 상상적 변형이다. 또한 덧니 소년은 영환이 우연히 보게 된 근처 주유소 직원 청년의 모습과 다름없다. 영환의 시는 예술가가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과 타자를 가공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렇게 시인은 강변 호텔에서 만난 두 여자, 낯선 청년을 자신의 시 속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묶는다.

  그러한 영환의 시처럼 '강변 호텔'은 홍상수가 자신의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영화적으로 변주한 작품이다. 영환은 호텔 사장으로부터 방을 비워달라는 말을 듣는다. 영환이 그 말을 들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영환의 팬이었던 주인은 더이상 영환을 보고 '설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영환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예술가에게 진정한 죽음은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가 아니라, 그 존재와 작품이 누군가에게 더이상 그 어떤 설렘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이다. 영환의 죽음은 홍상수에게 있어 언젠가 다가올 그 순간에 대한 묵시적 체험인 셈이다. 영환의 삶이 지상에서 끝나버린 순간, 호텔방에서 안온히 잠든 아름과 연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른다. 시인과 시인의 시가 머물렀던 시간은 타자의 내면으로 그렇게 흘러들어갔다. 홍상수의 이 영화 또한 누군가의 가슴에 그렇게 머물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리뷰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10-in-front-of-your-face-2021.html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ovelists-film-20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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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가 만들어낸 매혹적인 영화의 미로:

Les Vampires(1915-1916)에서 Irma Vep(1996)에 이르는 길
 


1. 진정한 팬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Irma Vep(1996)

  예전에 배우 장만옥이 프랑스 감독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둘의 인연이 이어졌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었다. 그들이 'Clean(2004)'을 찍었을 때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결혼 생활이 끝난 뒤였다. 영화 'Irma Vep(1996)'는 배우 장만옥과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이어준 오작교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2년 뒤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래서 그런지 'Irma Vep'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감독의 팬심이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절절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사 사무실. 홍콩 배우 매기 청(장만옥의 영어식 이름)은 이제 막 공항에서 오는 길이다. 매기는 르네 비달 감독의 영화 'Irma Vep' 출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사 사람들은 이 배우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마다 꼬여버린 일정, 일거리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느라 바쁘다. 매기는 빡빡한 촬영 일정 속에서 외국인 스탭들과 작업해야만 한다. 거기에다 매기가 맡은 Irma Vep역은 매기에게도 너무 낯설고 이상하다. 몸에 꽉 끼는 검정 라텍스 의상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감독은 어디가 아픈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촬영 스탭들 사이에 쌓인 갈등은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진다. 과연 매기는 이 괴상한 프랑스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을까?

  매기가 찍기로 한 영화는 무성 영화 시절의 Louis Feuillade가 내놓은 'Les Vampires(1915-1916)'를 원작으로 한다. 그 무성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Irma Vep. 르네 감독은 자신이 매혹된 무성 영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싶어한다. 매기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동방의 뮤즈인 셈이다. 하지만 촬영은 엉키기만 하고 급기야 르네는 신경과민으로 더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와중에 매기는 영화 속 캐릭터에 빙의되는 심리적 혼란을 겪는다. 여배우는 Irma Vep 의상을 입고 다른 사람의 호텔방에 침입해서 목걸이를 훔친다. 그리고는 옥상에서 비를 맞으며 자신이 연기하는 Irma Vep처럼 내달린다.

  영화 'Irma Vep'는 영화 속의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감독의 정서적 붕괴, 여배우의 내적 혼란, 스텝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 싸움... 그들이 일하는 현장은 갈등과 긴장, 혼란이 뒤엉킨 일터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들, 창작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간극을 드러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장만옥을 내세워 그 여정을 이끌어 나간다. 그러니까 영화 속의 르네 감독은 아사야스의 영화적 분신인 셈이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찍다 말은 몇 분짜리 영상이다. 르네가 직접 편집한 영상 속의 장만옥, 아니 Irma Vep의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엉망진창으로 마구 스크래치가 난 필름 속에서 매기는 무시무시한 독기를 내뿜는 특촬물의 여전사처럼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마지막 장면에서 황당한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배우 장만옥도 웃지 않았을까? 그 지점에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 영화의 원작이 된 무성 영화는 과연 어떤 작품인가? Irma Vep는 누구인가?


2. Irma Vep의 탄생, Les Vampires(1915-1916)

  장만옥을 파리로 오게 만든 'Les Vampires(1915-1916)'는 10부작으로 이루어진, 러닝타임이 무려 7시간에 가까운 영화이다. 그래도 영화 'Irma Vep'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무성영화를 조금이라도 봐야할 것 같았다. 우선 1편만 봐야지. 그렇게 보기 시작한 것이 10편까지 주욱 내달리게 되었다. 마치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100년도 더 된 무성영화는 2022년의 관객을 무지막지한 속도로 끌어당겼다. 투박하고 촌스러운데도 이 영화는 정말 재미있다. 당시의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했던 이유를 대충은 알 것도 같다. 

  신문사 기자 필립은 파리를 뒤흔든 일련의 범죄 사건에 '뱀파이어단(흡혈귀와는 상관이 없고 이름만 그렇다)'이 있다고 의심한다. Irma Vep는 뱀파이어단을 대표하는 여성 범죄자로 강도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필립은 동료 마자멧과 함께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필립은 약혼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지만 굴하지 않고 뱀파이어단을 쫓는다. 한편 또 다른 거물 강도 모레노는 Irma Vep와 힘을 합쳐 파리의 밤을 지배하려고 한다. 필립과 마자멧의 대활약으로 모레노와 Irma Vep는 검거된다. 하지만 재빨리 조직을 수습한 뱀파이어 잔당들은 필립에게 복수를 다짐하는데...

  영화 'Irma Vep'에서 장만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검은 라텍스 의상은 'Les Vampires'의 주연 배우 Musidora가 입은 검정색의 전신 타이즈에서 나왔다. 그것을 입은 여배우의 육감적 몸매와 날렵한 움직임은 Irma Vep의 치명적 매력을 드러낸다. 강도와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 악녀는 팜 파탈(femme fatale)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Irma Vep는 비록 두목 Grand Vampire의 지시를 받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부하는 아니다. 실질적으로 조직의 범죄 전과정에 개입하며 주도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Irma Vep가 나중에 강도 모레노와 결탁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레노는 Irma Vep를 최면술로 조종하지만, 곧 그 미모에 매혹된다. 포로로 잡혔던 여자는 강도의 연인이 되며 범죄를 공모한다.

  'Les Vampires'의 매력은 여주인공 Irma Vep를 연기한 배우 Musidora의 놀라운 재능에만 있지않다. 이 영화를 당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만든 요인은 탄탄한 내러티브에 있다. 악의 화신과도 같은 잔혹한 범죄단과 그들의 뒤를 캐는 기자는 쫓고 쫓기는 게임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비운의 희생자들이 나오고, 극의 긴장은 고조된다. 최면술을 비롯해 독약, 폭탄과 같은 소재도 등장한다. 거기에다 배우들은 모든 스턴트 연기를 직접 해낸다. 높은 건물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차에서 뛰어내린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추격하는 장면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견고하게 확장되는 이야기의 벽돌이 된다. Grand Vampire의 죽음으로 궤멸된 줄 알았던 조직은 최종 보스 Satanas의 등장으로 건재를 과시한다. 이 악의 세력은 결코 쉽게 붕괴하지 않는다. Satanas의 죽음에도 Irma Vep가 후계자와 함께 조직을 재건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영화의 감독 루이 푀이야드는 정말이지 뛰어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10부작에 이르는 이 무성 영화 시리즈물은 파리를 배경으로 악이 지배하는 거대한 세계를 그려낸다. 거기에 Irma Vep라는 팜 파탈 캐릭터를 비롯해 '뱀파이어단'이라는 범죄 집단의 설정 또한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주로 귀족과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한다. 이들이 처단하는 대상에는 대법관과 경찰의 수뇌부 인사도 있다. 한마디로 뱀파이어단은 지배 계급과 자본가들의 대척점에 서있는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화 'Irma Vep'에서 중도하차한 르네 대신에 대체 투입된 감독이 매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일리가 있다.

  "Irma Vep는 파리 밑바닥 출신으로 막장 인생이라고. 그런 역을 홍콩 여배우가 하다니 말도 안돼. 그 여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배역과 아무런 개연성도 없다구."

  그렇다고 해서 'Les Vampires'가 계층 갈등을 중심에 둔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혁명으로 일찌기 자본주의에 눈을 뜬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의 경제 발전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당시 프랑스의 경제 체제는 소상공인 중심이었다. 거대 자본가의 출현이나 극심한 빈부격차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 내재된 계층 갈등적 요소는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나버린 '벨 에포크(Belle Époque)'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다. 그런 영화를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에 대한 팬심으로 80년의 시간을 거슬러 끌어 올려낸다. 이 독특한 영화 작가가 만들어낸 'Les Vampires'에서 'Irma Vep'에 이르는 영화의 미로에는 떨칠 수 없는 매혹이 자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 리뷰


Clouds of Sils Maria(201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clouds-of-sils-maria2014.html

Personal Shopper(201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personal-shopper2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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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는 여동생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친다. 여동생도 지지 않는다. 물건을 내던지며 자신을 때리는 오빠에게 달려든다. 그렇지만 남자의 손아귀 힘을 당해내기는 힘들다. 마당으로 밀쳐진 여동생은 그래도 흙바닥에 쓰러지지는 않는다. 급기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래, 차라리 날 죽여. 죽여보라구!' 두 사람을 말리던 노모와 여동생은 허탈함에 눈물만 훔칠 뿐이다.

  이토록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족극이라니. 다른 감독이라면 몰라도 이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의 1953년작 영화 '오누이(Older Brother, Younger Sister)'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했다. 나루세 미키오의 '안즈코(杏っ子, Anzukko, 1958)'도 무로 사이세이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오누이'의 이야기는 패전 이후, 일본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백발이 성성한 비쩍 마른 가장 아카자와 만난다. 그는 한때 직원을 70명이나 둘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전쟁 시기 하천 준설로 큰돈을 벌었으나, 이제는 무기력한 백수 가장이 되어버렸다. 늙은 아내는 강가의 낚시터 근처에서 구멍가게로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 부부에게는 삼남매가 있다. 첫째 아들 이노키치(모리 마사유키 분), 둘째 딸 몬(쿄 마치코 분), 막내딸 산(쿠가 요시코 분)이 그들이다. 도쿄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산은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러 온다. 집에는 남자와 사귀다 임신한 언니 몬이 와있다. 불같은 성미를 지닌 사고뭉치 큰오빠가 그런 여동생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이 영화의 일본어 제목 '오누이'는 바로 이노키치와 몬을 가리킨다.

  오누이의 치고박는 육탄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또 있다. 몬이 슬립 차림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우물가에서 몬은 물수건으로 목과 어깨를 천천히 닦는다. 이때 그 얇은 슬립이 흘러내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관객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씻은 후, 몬은 그 차림 그대로 마룻바닥에 누워서 잠이 든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에서 여성의 육체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렇게 선정적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있었던가? 정말이지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팬들에게는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 남매의 갈등은 여동생이 사귀던 대학생 오바타가 집을 찾아온 것을 계기로 증폭된다. 몬은 집을 떠나 소식이 끊겼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타는 몬의 부모를 만나러 온다. 크게 화를 낼 것 같았던 아버지는 별 말 없이 오바타를 보낸다. 그런데 이노키치는 그럴 수가 없다. 그는 돌아가는 길의 오바타를 붙잡고 후드러팬다. 이노키치는 아기였던 몬을 등에 업고 키웠으며, 17살이 될 때까지 같은 방을 썼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장면을 몬에 대한 이노키치의 근친상간적 욕망이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서구의 평론가도 있다. 물론 그 대사가 상당히 뜨악하게 들릴 법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남매 사이에 성적인 긴장감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노키치는 왜 그토록 여동생에게 분노하는가? 어떤 면에서 그것은 도덕적인 수치심과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몬의 직업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적어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산이 사귀는 남자의 집안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집을 떠났던 몬이 3개월 후에 다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몬의 직업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화려한 기모노 차림의 몬을 보며 동네 여자들은 수군거린다. 트럭을 타고 가던 남자들은 환호한다. 몬은 막내 여동생에게 자신이 일하면서 만난 남자들이란 죄다 시시하고 못믿을 존재였다고 털어놓는다.

  그런데 몬이 화류계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패전 이후 몰락한 집안 때문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영광에만 도취되어서 사는 패배자이이다. 석공으로 일하는 큰오빠는 버는 돈을 술과 도박, 여자에게 써버린다. 불쌍한 엄마는 구멍가게를 힘겹게 꾸려간다. 산은 언니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는 이 가족의 현재에 음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노키치의 몬에 대한 분노는 자신을 비롯해 가족의 무너져 내린 삶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일 수 있다. 몬은 그러한 오빠의 간섭과 물리적 폭력에 대항한다. 이노키치와 치고받는 몸싸움은 몬이 가족의 과거,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쿄로 돌아가는 몬과 산의 모습이다. 비록 도쿄에 살고 있지만, 시골 본가에서만 얼굴을 보는 이 소원한 자매는 다정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언제 다시 집에 돌아오냐고 묻는 동생에게 언니는 말끝을 흐린다. 언니만 가족과 서서히 결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은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조산사(助産師)'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중이다. 안정적인 소득만이 산에게 대도시에서의 삶을 보장해줄 수 있다. 이제 이 자매의 삶은 시골이 아닌 도쿄에서 이어질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이 생경한 가족 멜로는 자매가 서있는 평화로운 시골길의 풍광에서 끝난다. 이후 나루세 미키오는 오누이가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그러한 세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안즈코(杏っ子, Anzukko, 195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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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와 영화, 그리고 접혀진 현실의 이야기:

All Winners, All Losers(2018), Azadeh Masihzadeh 감독

A Hero(2021), Asghar Farhadi 감독



1. 여정의 시작

  여학생은 유명한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는 자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감독은 하나의 주제를 제시했다. 타인의 귀중품을 습득한 후에 댓가없이 돌려준 선행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독이 제시한 뉴스 매체 기사를 보고 그것을 참조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친구가 그 지역에서 화제가 된 어떤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hokri라는 이름의 죄수가 휴가를 나왔다가 돈가방을 발견해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교도소에서 촬영 허가를 받고, 미담의 주인공 Shokri를 인터뷰했다.

  어렵사리 완성된 4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나중에 수업시간에 제출했다. 2년 뒤에 여학생은 감독이 제작하고 있다는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살이 붙여진 극영화였다. 감독이 만든 그 영화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여학생은 감독을 상대로 표절 소송을 냈다. 감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학생을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테헤란 법원에 접수된 이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단 하급심은 감독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기각했다(기사 출처: hollywoodreporter.com).

  여학생의 이름은 Azadeh Masihzadeh, 그의 다큐는 'All Winners, All Losers(2018)'이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는 자신의 영화 'A Hero(2021)'에서 표절작의 오명을 떨쳐내기 위해 분투중이다. 파르하디는 이미 세상에 보도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취했을 뿐이라며, 표절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기사 출처: deadline.com).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표절 여부를 판단하려면 마시자데의 다큐와 파르하디의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행히 마시자데는 자신의 다큐를 유튜브에 직접 올려놓았다(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개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2. 다큐와 영화, 같은 점과 다른 점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를 이해하려면 이란의 독특한 혼인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바로 'Mehrieh'라는 관습이다. 우리말로 '애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일종의 혼인 지참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에서 신랑이 될 사람은 신부에게 일정한 금액에 해당하는 금화를 약속한다. 그것은 원래 이슬람 율법의 관습에 따라 신부에게 혼수를 사도록 주는 돈이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이혼할 때를 대비해서 아내가 받게될 일종의 위자료 성격을 띄게 되었다.

  'Mehrieh'는 결혼전에 신부에게 실제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서 대부분 상징적으로 높은 액수가 매겨진다. 때론 이란의 일반 노동자가 평생을 일해도 갚지 못할 금액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신부에 대한 신랑의 애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혼할 때 발생한다. 남자가 혼인식때 약속한 그 금액을 여자에게 지불하지 못하면 그는 범법자가 된다. 말 그대로 감옥에서 '썩어야만 한다'. 2017년에 그렇게 이란의 감옥에 수감된 남자 죄수들은 무려 2200명이 넘는다(기사 출처: thehindu.com).

  다큐에서 미담의 주인공 Shokri는 그 mehrieh를 이혼한 아내에게 지불하지 못해서 감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그의 원래 직업은 건물의 페인트칠을 담당하는 도장공(塗裝工)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솜씨 좋은 그를 여러 공공건물의 도장일에 써먹었다. 이는 영화 'A Hero'의 주인공 솔타니가 죄수이며 도장공이라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솔타니의 죄목은 쇼크리와는 달리 사기죄이다. 솔타니는 처남의 돈을 아주 크게 떼먹었다. 처남은 그 돈을 갚기 위해 딸의 지참금까지 날렸고 그때문에 솔타니에게 이를 갈고 있다. 나는 파르하디가 mehrieh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을 변경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관습은 이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기 때문이다.

  다큐 속 쇼크리가 처한 역경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남자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는 휴가를 나왔다가 우연히 돈가방을 발견한다.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은 쇼크리는 전단지를 발견 장소 주변에 붙여놓는다. 그리고 근처 은행에 가서도 그 사실을 알렸다. 자신의 연락처는 교도소로 기재해놓았다. 그 부분 또한 영화는 그대로 차용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는 죄수의 연인이 돈가방을 발견했다. 현실의 쇼크리가 발견한 돈가방은 곧 주인을 찾았다. 교도소에서는 그 미담을 기사와 방송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쇼크리는 유명해졌고, 그가 갚지 못한 Mehrieh를 위해 자선단체에서 모금을 하기도 했다. 영화 속 죄수 솔타니도 쇼크리의 여정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간다. 솔타니에게는 더 딱한 사정이 있는데, 이혼남인 그에게는 말을 더듬는 어린 아들이 있다.

  그렇게 거액의 돈가방이 주인을 찾아간 미담의 완결본에서 다큐와 영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쇼크리의 이야기를 취재하던 마시자데는 그 미담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었다. 무엇보다 가방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었다는 과정이 석연치가 않았다. 교도소와 은행 관계자들의 증언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마시자데는 그 돈가방을 찾아간 여자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주어진 정보라고는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자라 야쿠비'라는 이름 뿐이었다. 그렇게 자라 야쿠비를 찾는 마시자데의 여정이 다큐의 후반부를 채운다.

  영화 'A Hero'에서도 솔타니의 미담은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채권자인 처남은 그 모든 것을 솔타니의 자작극이라 여긴다. 형기가 감면된 솔타니는 출옥후에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취직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취업 담당자는 솔타니에게 미담이 진짜라는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돈을 받아갔다는 여자는 찾을 길이 없고, 졸지에 미디어에 의해 영웅이 된 솔타니는 거짓말장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놀라운 이야기꾼인 파르하디 감독은 솔타니의 몰락을 치밀하고도 촘촘히 묘사해 나간다.

  파르하디의 전작들 '아름다운 도시(The Beautiful City, 2004)'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를 보면 이 감독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고통스런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A Hero'의 솔타니는 다시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말을 더듬는 아들을 내세워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가 처한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솔타니는 그것을 결국 포기한다. 이 남자의 선의는 곧 매도당하고 잊혀진다.

  그렇다면 다큐 속 소크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마시자데는 돈가방의 주인 자라 야쿠비를 찾아 첩첩산중의 시골 마을까지 찾아간다. 놀랍게도, 자라 야쿠비는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은 너무나도 가난한 양치기 집안의 며느리였다. 자라 야쿠비와 그 가족들은 마시자데에게 돈가방 이야기를 듣고 금시초문이라며 부인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소크리는 사기꾼인가? 마시자데는 미담으로 풀려났던 그가 다른 돈 문제로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다큐를 끝마친다.


3. 표절인가, 창작인가

  영화 'A Hero'가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의 주요한 부분을 차용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파르하디가 표절을 했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파르하디는 다큐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의 영화는 진실과 거짓의 미묘한 간극, 진실을 호도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 그와는 달리 마시자데의 다큐는 이란 사회의 부조리한 관습과 불투명성을 부각시킨다. 원재료는 거의 비슷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른 셈이다.

  그럼에도 파르하디가 권력적 위계를 이용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마시자데가 자신의 인턴으로 일할 때, 다큐의 아이디어에 대한 양도를 강요했었다(출처: en.wikipedia.org). 일개 인턴 학생과 세계적 명성을 지닌 감독, 그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나는 이 사태를 야기한 파르하디의 처신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르하디가 같은 분야의 동료로서 마시자데의 다큐와 그 원저작성을 존중해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창작자의 자존감에 상처를 받은 마시자데는 투지를 불태우며 소송에 임하고 있는듯 하다. 현재 영화 'A Hero'는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표절 의심작이라는 꼬리표도 함께 달려 있다.

  결국 표절 여부는 최종적으로 테헤란의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영화 'A Hero'가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에서 나왔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두 작품을 둘러싼 배경에는 창작과 표절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자리한다. 나에게는 그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 못지않게, 현실의 접혀진 부분을 탐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감상이 되었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다큐의 감독 Azadeh Masihzadeh(오른쪽), 미담 기사의 인물 Shokri(왼쪽)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 리뷰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 200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shahr-e-ziba-beautiful-city-2004.html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eparation-of-nader-from-simin-2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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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이후의 벵골 분할 시기, 캘커타의 난민촌에 사는 니타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니타의 아버지는 난민촌 학교의 선생이지만 그일은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니타의 큰오빠 샹카르는 엄격한 스승 밑에서 Raga를 익히는 중이다. 여동생 기타와 남동생 만투는 아직 학생이다. 대학원생인 니타는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하며 번 돈을 모두 집안 살림에 보탠다. 가족들은 니타만 보면 돈 이야기를 한다. 큰오빠는 이발비를, 여동생은 새옷을, 남동생은 축구화를 사달라고 보챈다. 니타는 너그럽게 형제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엄마는 쓸데없이 돈을 쓴다며 니타를 닥달한다. 정작 니타는 낡은 샌들을 신고 다니다 끈이 끊어져 맨발로 걸어 집에 들어온다.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 감독의 영화 '구름에 가린 별(The Cloud-Capped Star, 1960)'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니타 가족은 벵골 분할 이후 동파키스탄에서 캘커타로 이주해온 힌두교 난민 가족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벵골 지역은 반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국은 벵골 지역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1905년에 이른바 벵골 분할령(Partition of Bengal)을 내놓았다. 벵골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분할은 철회되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Amritsar massacre)로 이어진다. 영국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47년, 마침내 인도는 독립한다. 그러나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갈등이 터져나온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의 독립에 이어, 동벵골 지역에 파키스탄의 자치주 동파키스탄(나중에 방글라데시로 독립)이 세워졌다. 그렇게 되자, 동벵골 지역의 힌두교도들은 한순간에 고향을 잃고 인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난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캘커타였다. 말이 독립국 인도의 국민이었지, 벵골 난민들은 인도 사회에서 극심한 차별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리트윅 가탁은 '구름에 가린 별(1960)'을 시작으로 '사랑스런 간다르(Komal Gandhar, 1961)', '강(Subarnarekha,1962)'으로 이어지는 분할 3부작(Partition Trilogy)'을 만들어냄으로써, 벵골 난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비록 난민촌에서 어렵게 살고 있지만, 니타 가족의 계층적 배경은 중산층에 해당한다. 니타의 아버지는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니타 또한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중이다. 이 가족의 계층적 몰락은 가장인 아버지의 갑작스런 발병에서 시작한다. 실성한 아버지는 곧 집안에서 유령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니타는 가장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다. 학업도 포기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한다. 니타의 부양 대상에는 연인 사낫도 포함된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가난한 연인은 니타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는 니타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결코 보답받지 못한다. 니타의 엄마는 니타에게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고, 여동생 기타는 언니의 연인을 가로채 결혼한다. 큰오빠는 봄베이에서 유명한 Raga 연주자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니타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부서진다. 급기야 니타는 결핵에 걸린다. 그럼에도 사고를 당한 남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일을 쉬지도 못한다. 니타는 자신을 착취하는 뻔뻔한 가족 구성원의 행태를 오롯이 감내한다.

  리트윅 가탁은 서서히 망가져가는 니타의 영혼을 보여주기 위해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인도의 전통 음악 Raga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샹카르는 틈만 나면 라가를 부른다. 주로 신과 자연을 찬미하는 라가의 가사는 역설적으로 이 가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니타가 샹카르에게 기타의 결혼식에서 부를 라가를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비감하면서도 아름다운 라가의 선율이 흐르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굉음이 들린다. 클로즈업 되는 니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니타가 느끼는 내면의 고통은 그러한 소리에 의해 형상화된다. 

  가탁의 사운드에 대한 실험적 시도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니타는 샹카르의 품에 안겨 울부짖는다. '나는 살고 싶어요!' 니타의 처절한 외침은 남매가 앉아있는 언덕 너머 사방천지의 산들에 울려퍼진다.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는 산에 반향되는 소리의 궤적을 따라간다. 어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가족 멜로 드라마는 이러한 사운드와 음악의 활용으로 독창적인 영화가 되었다.

  샹카르는 요양중인 니타에게 가족의 낡은 집이 멋진 2층 집으로 개축되었다고 알려준다. 몰락했던 피난민 일가는 샹카르의 성공을 통해 세속적 욕망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든 니타에게 그 집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과연 니타에게 닥친 비극은 누구의 잘못 때문일까? 샹카르가 니타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 그는 난민촌 입구에서 동네 아가씨와 마주친다. 샹카르는 새삼 니타의 모습을 떠올린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느라 니타의 청춘은 부서져버렸다. 오래전의 니타가 그러했듯, 가난한 아가씨도 걷다가 샌들 끈이 끊어진 것을 발견한다. 아무렇지 않게 끈을 접어넣고 걸어가는 그 뒷모습에는 벵골 난민들의 고단한 삶이 투영되어 있다. 리트윅 가탁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니타의 고통 속에 벵골 분할기의 역사를 아로새겨 넣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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