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나루세 미키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클로드 샤브롤


원작 소설: Edward Atiyah, The Thin Line(1951) 



  1966년은 나루세 미키오에게 '스릴러의 해'였다.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뺑소니(Hit and Run, 1966)'는 이전까지의 나루세 미키오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궤적을 보여준다. '뺑소니'는 스릴러의 틀 안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와는 달리 '여자 안의 타인'에서는 주인공이 남성이다. 치정 살인 사건에 연루된 남자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음울한 결말까지 더해져 영화는 무겁기 짝이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Edward Atiyah'The Thin Line(1951)'을 각색한 것으로, 이 소설을 가지고 Claude Chabrol도 영화를 만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1971)'가 그것이다. 전자책으로는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없어서, 대신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원작의 세부적 내용을 추측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에는 서로 다른 감독의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간극이 존재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남자 주인공 샤를이 불륜 관계에 있는 여자를 죽이게 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변태적 욕망에 휩싸인 남자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가 죽인 여자는 친구 프랑수아의 아내이다. 클로드 샤브롤과는 달리 나루세 미키오는 살인 장면을 나중에 플래시백으로 제시한다. '여자 안의 타인'의 도입부 쇼트에는 길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꾸만 뒤를 쳐다보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도로를 걷는 남자를 사선 구도에 두고 따라간다. 몇 걸음 걷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어 피운다. 이 남자 이사오에게 무언가 안좋은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이 짧은 쇼트가 내뿜는 불길함을 우리는 잘 알려진 미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절규(The Scream)'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러한 사선 구도를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보여준다. 죽은 여자 사유리의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이사오를 발견하고 의심을 품는다. 자신이 얼핏 봤던 사유리의 애인이 이사오와 비슷했던 것. 그래서 여자는 사유리의 남편 스기모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간다. 그런데 스기모토는 이사오가 20년 넘게 알고 지내온 절친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일축한다. 스기모토가 아내의 친구를 배웅하는 장면에서도 사선 구도에 두 인물이 서있다. 여자는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옆을 지나가자 흠칫 놀란다. 남자의 외모가 이사오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탁 트인 대로변에서도 사선 구도 속의 인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느낌을 준다.

  이 영화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회화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경찰의 수사는 난항에 부딪혀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 이사오는 점차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마주하게 된다. 남자는 아내에게 불륜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천둥 번개가 치는 밤, 갑자기 집안의 전등이 나가고 아내는 촛불을 켠다. 그 순간, 이사오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촛불을 든 아내가 놀라움으로 서성일 때, 남자는 어둠 속에 잠겨있다. 이 장면은 촛불의 화가로 불리는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직까지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경쇠약에 걸린 이사오는 온천장에서 잠시 머무르고, 마사코는 남편을 보러 간다. 부부가 온천 근처를 산책할 때 이사오는 계곡에 떨어져 죽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 죽음의 선명한 이미지가 이사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곳을 지나쳐온 부부가 터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이사오는 숨겨왔던 자신의 일탈적 욕망과 범죄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역시 사선 구도로 찍힌 터널 시퀀스에서 부부를 감싸는 어둠은 그들이 마주하게된 진실의 무서운 심연처럼 보인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마사코의 삶은 이제 그 심연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이 낯선 스릴러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무언가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살인을 저지른 이사오의 내적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 또한 썩 그리 매끄럽지 않다.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주춤거린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샤브롤은 인물들을 부유한 중산층으로 설정하고, 촬영 세트 또한 화려한 고급 주택을 배경으로 찍었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타락과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려는 계층적 욕망을 묘사한다. 주인공 샤를은 친구 프랑수아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샤를에게 놀라운 평정심과 관대함을 보인다. '여자 안의 타인'에서 스기모토가 이사오의 고백을 듣고 뺨을 후려치는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스기모토도 나중에는 이사오를 용서하기는 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죄책감을 계급 의식과 긴밀히 결합시킨다. 샤를이 운영하는 광고 회사에서 일어난 범죄는 그것을 좀 더 명확히 드러낸다. 10년 넘게 일해온 늙은 회계 담당자는 거액의 회사 돈을 챙겨 달아난다. 그 남자가 횡령을 저지른 이유는 젊은 여자 때문이었다. 샤를은 결국 경찰에 잡힌 직원에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남자는 샤를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늙은 직원의 추악한 모습은 샤를에게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그 남자가 욕망과 범죄를 솔직하게 드러낸 것과는 달리 샤를을 둘러싼 견고한 계급적 세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친구 프랑수아와 샤를의 아내는 샤를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며 안온한 부르주아의 세계에 머물 것을 요청한다.

  원작 소설의 제목 'The Thin Line'은 영화의 주인공 이사오에게는 넘지 말아야 될 선(線), 즉 범죄에의 유혹을 의미한다. 그 선을 넘은 남자는 결국 아내의 손에 의해 영원한 잠에 빠진다. 어떤 면에서 나루세 미키오에게 '여자 안의 타인'은 자신의 영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넘어선 노감독은 특이하게 구부러진 길을 만들어 낸다. 이 영화를 짓누르는 죽음과 불안의 기운은 감독 자신의 내면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듬해 '흐트러진 구름(Scattered Clouds, 1967)'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나루세 미키오는 암으로 세상을 떴다. 63세의 나이였다.


*사진 출처: eiga-pop.com



**그림 출처: wikipedia.org

Georges de La Tour의 그림
Magdalene with the Smoking Flame


The Newborn Christ



Edvard Munch의 그림
The Scream



***나루세 미키오 영화 '뺑소니(Hit and Run,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hit-and-run-19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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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다큐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hertz whale'이라는 별명이 붙은 고래가 있다. 고래는 종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 대부분의 고래들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 대역은 40헤르츠 이하인데, 그에 비해 52헤르츠 고래는 상당히 높은 소리를 내었다. 이 고래가 어느 종에 속하는지, 이동하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1989년 이후로 52헤르츠 고래의 존재는 계속해서 감지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Joshua Zeman은 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52'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2021년작 다큐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는 바로 그 52헤르츠 고래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는 표면적으로는 '52'의 행방을 찾아나선 연구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고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훑어 나간다. 19세기에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석유의 발견으로 더이상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포경 산업은 번성했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6년에 해양 생물학자가 녹음한 고래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고래를 먹을거리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할 해양 생명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환경 운동과 함께 국제적인 NGO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활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래 무리가 자신들만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래 소리를 가장 전문적으로 연구한 곳은 미 해군이었다. 냉전시대에 소련 잠수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다양한 정밀 탐사 장비가 사용되었다.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는 가장 많이 탐지되었다. '52'의 존재도 그렇게 알려졌다. Blue Whale 종이라고만 추측되는 이 고래는 마치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파수로 소리를 내는 이 생명체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고래는 왜 혼자서, 그토록 높은 주파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Joshua Zeman은 52 헤르츠 고래를 찾는 여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처럼 풀어나간다. 대양의 무수한 고래들 가운데 특정한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같았다. 그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52'에 매혹된 남자는 탐사를 위한 제작비를 모으러 다녔고, 마침내 해양 생물학자들로 이루어진 탐사팀이 꾸려진다. 그즈음 '52'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고래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서 탐지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52'의 존재를 추적하는 이 다큐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있다. 최근작 다큐 'My Octopus Teacher(2020)'의 경우에는 다큐 제작자가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된 문어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직업적 경력과 가족 관계의 어려움에 처한 남자는 어느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다. 사적 다큐멘터리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이 기묘한 조합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도 그런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52'는 소통할 대상이 없이 홀로 높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가장 외롭고 특별한 고래가 되어버린다. 그 고래가 진짜 외로운지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52'를 찾아 나서는 이 다큐의 관점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다.

  결국 탐사팀은 '52'를 찾지 못하고 추적을 끝마친다. 하지만 이 다큐의 마지막에는 작은 반전이 들어있다. '52'가 내었던 소리로 응답하는 두 마리의 고래가 탐지되었다. 고래들은 무리마다 특유의 지역 방언(dialect)을 쓰는데, '52 헤르츠'는 그러한 고래 방언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소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는 무언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다. 다큐는 거대한 해양 생명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켜주어야할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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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듯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키요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찻집에는 그들 말고 다른 손님은 없다. 그때, 주인이 카운터로 나온다. 주인을 보더니 그 남자 켄키치(미후네 토시로 분)는 다시 침묵을 지킨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은 잠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 이제까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없었다. 곧 비가 그치고 그들은 찻집을 나선다. 영화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 남자 켄키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의 감정을 자연 현상과 결합시킨다.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욕망에 끌린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갈 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격한 감정의 떨림을 나뭇가지에 쌓인 두터운 눈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키요코와 신지는 결혼한지 5년이 되었다. 부부는 작은 잡화상을 하고 있지만 가게는 잘 되지 않는다. 궁리 끝에 가게 옆의 공터에 음식점을 내기로 한다. 키요코의 시어머니는 괜한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 한다. 어떻게든 삶의 활로를 찾아보려는 부부. 키요코의 친구 유미코에게는 은행원 오빠 켄키치가 있다. 켄키치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받은 키요코는 가게를 낼 꿈에 부푼다. 그즈음, 키요코의 큰동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온다. 곧이어 실직한 시아주버니까지 집에 들어앉는다. 시아주버니는 자신도 가게를 내겠다며 키요코에게 대출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시어머니와 큰동서는 은근히 키요코를 압박한다. 키요코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게이샤와 온천 여행을 갔다온다. 아내는 열불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돈'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인물들의 갈등은 돈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아내의 마음'에서도 키요코 부부와 시댁은 돈에 쪼들린다. 시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낸다며 혼수로 많은 돈을 썼다. 키요코에게 새 가게는 부부의 꿈이 담긴 곳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어렵게 빌린 대출금은 시아주버니 차지가 된다. 돈 때문에 상심한 부부의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남편이 밖으로 나도는 동안, 키요코는 친절한 켄키치에게 마음이 기운다.

  나루세 미키오는 서서히 엉클어지는 키요코의 일상을 작은 소품으로 드러낸다. 손톱깎이를 찾던 키요코는 그것을 큰동서가 전혀 엉뚱한 곳에 두었음을 알게 된다. 고루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도 버거운데, 시아주버니 내외와 그 딸까지 들어앉았다. 꿈꾸던 가게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람난 남편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키요코의 무심함은 떨어진 단추를 달아달라는 남편의 요구를 일축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키요코가 빨래를 하지 않아서 남편은 입었던 셔츠를 또 입어야할 판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이 부부를 이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해 보인다. 이 부부의 시작을 추측해볼 수 있는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유미코는 오빠 켄키치에게 키요코가 별다른 애정없이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키요코의 말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유미코의 결혼이 늦어지는 것을 켄키치가 걱정하자, 키요코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유미코가 현명한 거에요. 생각없이 한 결혼은 나중에 두통거리가 될 뿐이니까요.' 그러한 것을 볼 때 키요코의 결혼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에게 있어 애정은 결혼 생활의 절대적인 조건인가? 그렇다면 키요코는 남편을 떠나는 것이 맞다. 남편은 함께 온천 여행을 갔던 게이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는 상심한 키요코에게 자신을 떠나 켄키치와 새로운 출발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신지가 키요코에게 그 말을 하는 장소는 그들 부부가 새로 음식점을 내기로 한 공터이다. 부부의 꿈이 깃든 그곳에서 키요코는 이제 고통스런 결별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켄키치가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키요코는 자신을 좋아하는 켄키치의 마음을 안다.

  키요코는 결국 남편의 곁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아내(妻, Wife, 1953)''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의 여주인공들은 가부장제적 인습에 스스로를 가두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키요코의 결심은 그 여성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키요코는 새로 개업한 가게를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키요코는 부부가 함께 꾸었던 미래를 떠올린다. 아내는 이제 남편을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부부는 다시 한번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영화 '아내의 마음'은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초상으로는 드물게 희망의 빛을 드리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mifuneproductions.co.jp



***나루세 미키오 영화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untamed-1957.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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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통령의 시간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그날 저녁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준비한다. 중계 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대통령은 책상 위를 세차게 내려친다. 파리 한마리를 잽싸게 죽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얼른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 장면은 백주 대낮에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 사건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게 비춰진다. 이날 TV 화면에 비친 대통령은 확신에 차있으며 미국민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9월 11일 당일 대통령 부시의 행적은 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Adam Wishart의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은 바로 그날,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복기한다. 부시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당시 부통령 체니, 국가 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보좌진들의 생생한 증언,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9/11 테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검색 가능하다. 이 다큐는 이제까지 알려진 9/11의 세부적인 항목에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에, 대통령 부시의 관점에서 그날의 일을 재구성한다. 9월 11일 새벽,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을 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행사가 기획되어 있었다. 참관 수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좌진은 믿기지 않은 테러 소식을 접한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알려야만 했다. 수업중 귀엣말로 보고받은 대통령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로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령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소식을 접한 보좌진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부시와 참모진들의 행적은 처절한 도피 같았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뉴욕은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데, 대통령을 비롯해 백악관의 그 누구도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TV 방송사들이 그 모든 상황을 발빠르게 보도하고 사건 현장을 지켰다. 대통령과 보좌진조차 TV 중계 화면을 무엇보다 의지했다. 대통령 전용기의 전파 수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도 한몫했다. 전용기의 부시와 그 참모들은 백악관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모든 상황을 지휘해야할 대통령은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지 못했다. 부시는 백악관에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보좌진들은 위험하다며 말렸다. 그들이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며 군사 기지를 전전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TV 방송국의 앵커는 도대체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 거냐며 비꼬았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전용기 안의 부시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대로 된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고, 보좌진은 대통령의 안전이 담보되는 곳을 찾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것은 백악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은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회의를 한다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갑자기 많이 몰린 사람들 때문에 지하 벙커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나중에는 모두들 졸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총체적인 무능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압도하는 공포에 휩싸인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어떤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한된 정보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소통 과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난 부시가 어떻게 정책 결정권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가를 흥미롭게 부각시킨다. 그는 백악관에 돌아오고 나서야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그가 의지하고 믿는 최측근 참모들이 그에게 투사로서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었음이 분명하다. 부시의 주변은 전형적 주전론자인 매파 관료들이 득시글거렸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 선포는 그런 가운데에서 나왔다.

  오직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웰만이 외교적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한다고 직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부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시는 부친이 감행했던 이라크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전쟁을 통해 강한 미국,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 아버지처럼 아들 부시는 이제 새로운 전쟁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참이었다. 부시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대국민 담화와 테러 현장 방문은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그러나 부시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거대한 수렁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이었다. 그 전쟁은 무려 20년이나 이어질 터였다. 미국은 힘겹게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뺐고, 그곳의 상황은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악화되었다. 많은 미군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죽어나갔다. 오직 거대 군산 복합체 기업들만이 득을 보았을 뿐이다. 다큐의 인터뷰에서 부시는 그 결단의 순간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그는 그것만이 미국민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이 9/11에 대한 최고의 다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다큐는 당시 미국의 통수권자였던 부시의 입장과 그 정책 결정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2001년 9월 11일, 그날 대통령 부시의 여정은 국가 비상 사태에서 지도자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다큐의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부시의 리더십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통치 체제가 가진 투명성이 새롭게 다가왔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의 모든 행적과 결정 과정이 명확한 기록과 증언으로 남았다. 다큐에 담긴 그러한 사실은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사진 출처: telegraph.co.uk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ther-soldier-son2020.html

Hell and Back Again(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hell-and-back-again2011.html

Restrepo(201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restrepo2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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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섭다. 영화 '뺑소니(ひき逃げ, 1966)'의 주인공 쿠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 비극은 남편이 불운하게 세상을 뜬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났다. 쿠니코의 아들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부잣집 운전기사로 재판에서 약소한 벌금형을 받았다. 쿠니코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쿠니코에게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본 뺑소니 운전자는 줄무늬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는 것. 쿠니코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지만, 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을 할 뿐이다. 쿠니코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계층적 배경을 지닌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쿠니코는 전형적인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쿠니코의 과거는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매춘부였던 쿠니코는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비록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쿠니코에게 아들은 삶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자식잃은 어미의 가슴은 복수심에 불탄다.

  쿠니코의 아들을 사고로 죽게 만든 키누코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남편 카키누마는 자동차 회사의 중역으로 키누코와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 키누코는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달아난 것은 동석한 애인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운전기사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키누코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누코의 삶. 하지만 키누코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쿠니코는 곧 그 집안에 흐르는 냉기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한다. '이상한(変な, 영어의 strange에 해당하는 뜻) 집구석이야.' 쿠니코는 야쿠자 남동생에게 그 집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키누코의 집은 진공 청소기를 비롯해 당시로서는 최신식 가전 제품과 세련된 서양식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키누코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이 여자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다. 키누코는 애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부잣집 마나님 키누코의 불행한 삶은 자식 잃은 가난한 여자 쿠니코의 눈을 통해 관찰된다.  

  영화는 전후 일본 사회의 심화된 계층적 격차를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키누코의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 운전기사는 고용주 카키누마에게 돈을 요구한다. 징집으로 전쟁에 끌려갔던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늦게 풀려나는 바람에 마흔이 넘어서 취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그가 부양해야할 처자식의 미래는 불안정해졌다.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의심한 쿠니코는 그의 집을 찾아가 진실을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전경에는 운전기사와 쿠니코를, 뒷배경에는 두 아이와 병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를 보여준다. 그 장면은 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과 함께 돈 때문에 부유층의 윤리적 과오를 뒤집어쓰는 하층 계급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는 키누코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복수극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나루세 미키오는 쿠니코가 그러한 상상을 떠올릴 때, 과다노출 처리함으로써 인물을 빛 속에 가둔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는 이전의 그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의 내면은 점차 강박적이고 황폐하게 변해간다. 영화 '뺑소니'는 이 감독이 정교한 멜로 드라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연출에서도 나름의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연출작은 '흐트러진 구름(Scattered Clouds, 1967)'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뺑소니(Hit and Run, 1966)'는 그가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찍은 작품이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잘 정돈된 전성기 멜로 드라마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가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감독의 다양한 영화 세계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 '뺑소니'에서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을 스릴러 장르에 녹여낸다. 아이의 비극적 죽음으로 얽히게 된 두 여성의 삶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쿠니코 역을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오랫동안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이 영화는 타카미네 히데코와 나루세 미키오가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allcine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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