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화 매체들이 상반기에 뽑은 추천작들 순위에 이 영화가 꼭 들어있다. 제목도 희한한 영화 'RRR(2022)'은 인도 영화이다. 인도 영화하면 흔히 떠올리는 춤과 노래로 범벅이 된 3시간짜리 영화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인도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RRR'은 이제까지의 인도 영화 최고 흥행기록도 경신했다. 영화는 인도 국내에서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도대체 이 영화에 무슨 마력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1920년대의 인도. 영국 관료 스콧과 그의 부인 캐서린은 곤드 부족를 방문한다. 캐서린은 '말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유로 납치한다. 그 일에 분노한 부족의 전사 빔은 말리를 구출하기 위해 델리로 떠난다. 한편 제국 경찰로 복무하는 인도인 라주는 출세를 위해 동족들을 탄압하는 데에 앞장선다. 빔과 라주는 죽을 위험에 처한 소년을 함께 구하게 되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아직까지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하는 두 남자. 하지만 말리를 구하려던 빔을 라주가 체포하면서 둘의 우정은 깨어질 위기에 처한다. 결국 사형이 확정된 빔, 라주는 뜻밖에도 빔을 살려주고 그 일로 라주는 투옥된다. 라주 덕분에 말리와 함께 탈출할 수 있었던 빔은 우연히 라주의 여동생 시타를 만나게 된다. 시타로부터 라주의 과거를 듣게된 그는 라주를 구하기 위해 감옥에 잠입하는데...

  감독 S. S. Rajamouli는 실존했던 인도 독립의 영웅 두 사람을 빔과 라주로 형상화했다. 현실에서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인도 독립 투사들은 영화 속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나온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신화적 서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라주는 인도 신화의 라마(Rama), 빔은 비마(Bhima)신의 특성을 지닌다. 빔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 라주는 제국 경찰을 공격한다. 놀랍게도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총이 아니라 '활(!!!)'이다. 그는 오로지 활쏘기만으로 일당백의 무력을 발휘한다. 신화 속에서 라마신은 숲의 지배자로 늘 활을 들고 다닌다. 빔이 보여주는 천하무적의 힘은 비마신의 무력과 통한다. 역사 속 인도의 독립 투사는 인간을 넘어선 신화 속 영웅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RRR'은 인도 관객들에게 시쳇말로 '국뽕'이라 부르는 애국심을 맹렬하게 자극한다. 영국 관료와 영국인들은 악마화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스콧과 캐서린은 잔혹한 인물들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 빔과 라주가 거기에 맞서는 방식은 지극히 인도적이다. 인도인들에게는 영국의 총칼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영화는 인도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신화 속 이야기를 차용해서 종교적인 감성을 극대화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는 오늘날 인도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민족' '종교'라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단단한 뿌리처럼 엉켜있다.

  현재 인도의 국가 수반 나렌드라 모디힌두 민족주의(Hindi Nationalism)를 내세우며 집권했다. 인도에서 힌두 원리주의와 결합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타종교, 특히 이슬람과의 분란을 격화시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 'RRR'의 서사는 인도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인도인의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이 영화가 인도에서 초대박 흥행 성공작이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서양 관객들, 특히 미국에서 'RRR'의 영화적 감수성이 먹혀들었다는 점은 나에게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나름 까탈스러운 미국의 영화 비평 매체들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평을 써놓았다. 정말로 그들에게는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이다. 헐리우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빔과 라주는 이국적 영웅으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RRR'이 거둔 엄청난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이 영화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소비되는 양상은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관객들은 'RRR'이 지닌 인도 현실 정치의 맥락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때깔 좋은 인도 액션 시대극 한 편을 3시간 동안 즐겁게 감상했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서사는 더 가깝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영화 속 인도와 영국의 관계는 일제 치하의 조선과 일본을 떠올리게 만든다. 빔은 독립투사, 라주는 일제 앞잡이 조선인 순사로 치환된다. 그렇게 식민 지배의 기억을 지닌 제 3세계 국가들의 관객들은 'RRR'의 시대극 감성에 물든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낯선 Tollywood 영화(Telguru어로 제작된 인도 영화)는 인도라는 국가를 넘어(Rise), 전 세계 관객들을 향해 포효하며(Roar), 인도 영화 수출의 혁명적 발판(Revolt)을 만들어 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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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을 잃은 여성: 밤의 여인들(夜の女たち, Women of the Night, 1948)

  전쟁은 전장터의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가혹하다. 미조구치 켄지(溝口健二)의 영화 '밤의 여인들(Women of the Night, 1948)'에는 전후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이 그려진다. 그것은 별다른 상상의 여지없이 '매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후사코(타나카 키누요 분)는 전쟁에 끌려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픈 어린 아들을 보살피는 데에 온 힘을 쏟는 후사코. 하지만 여자는 남편의 전사 소식에 이어 아이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후사코에게 호감을 가진 쿠리야마는 후사코를 비서로 채용한다. 한편 후사코는 전쟁통에 소식이 끊겼던 여동생 나츠코를 우연히 만난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후사코는 쿠리야마가 나츠코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했음을 알게 된다. 그 일로 쿠리야마를 떠난 후사코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거리의 여자가 되는데...

  미조구치 켄지를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밤의 여자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이 강렬한 사회 고발 영화에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후사코는 패전의 후폭풍 속에 내던져진다. 남편과 아이의 죽음에 이어 가난은 이 여자를 옥죈다. 돈푼깨나 있는 후리야마의 내연녀에서 매춘 여성으로 급전직하하는 후사코의 삶. 추락하는 것은 후사코뿐만이 아니다. 댄스홀의 여급으로 살던 나츠코는 언니의 남자를 빼앗더니, 매독에 걸린 상태로 임신까지 하게 된다. 후사코의 어린 시누이 쿠미코는 가난한 집을 뛰쳐나왔다가, 건달에게 겁탈당한다. 이후에 쿠미코는 거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올케 언니 후사코와 만난다. 미조구치 켄지는 세 여성들의 처절한 추락의 여정을 매우 건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밤의 여인들'은 전쟁이 여성, 특히 하층 계급의 여성에게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전사와 질병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를 겪은 가난한 여성들은 성을 파는 노동자가 된다. 그럼에도 미조구치 켄지는 영화 속 여성들의 선택을 사회구조적인 악순환의 틀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으로 바라본다. 후사코는 자신과 여동생을 유린한 쿠리야마에 대한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 후사코가 그것을 되갚는 방식은 매우 자기파괴적이다. 거리의 여자가 되어 '세상의 남자들에게 성병을 퍼뜨리는 것'이다. 후사코의 여동생 나츠코의 도덕적 타락은 강간에 의한 자포자기의 결과로 비춰진다. 이는 매춘을 하게 된 쿠미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조구치 켄지는 이 영화에서 매춘 여성들의 삶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로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그가 그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온정적이지 않다. 매춘부들은 어디까지나 구제와 치유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락한 내면에 대한 절실한 자기 반성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후사코는 쿠미코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울부짖는다. 과연 그들에게 돌아갈 진정한 집이 있는가? 애처롭게 부둥켜 안은 두 여자가 기댄 곳은 무너져 내린 성당의 외벽이다. 크레인 쇼트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비춰진다. 성녀(聖女)와 창녀(娼女).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미조구치 켄지를 결코 페미니스트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 몰락하는 유곽의 풍경: 수치의 거리(赤線地帯, Street of Shame, 1956)

  미조구치 켄지는 유작이 된 '수치의 거리(Street of Shame, 1956)'에서 다시 한번 매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화가 개봉된 1956년은 이 영화의 일본어 제목 '적선지대(赤線地帯)'의 운명이 결정된 해였다. 전후 일본에 주둔하게 된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 개혁 조치들 가운데 큰 부분이 바로 성 매매 산업이었다. 1946년에 공창제(公娼制)가 폐지된다. 그 이후에 기존의 사창가는 '적선 지대'라는 명칭으로 경찰 관할 구역이 된다. 그러던 것이 1956년에는 의회에서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그 역사적 사건 직전에 개봉된 '수치의 거리'는 소멸 위기에 처한 유곽의 풍경을 담는다.

  '수치의 거리'에서 미조구치 켄지는 5명의 게이샤들을 내세워 각각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풀어낸다. 이는 매춘 여성의 삶을 거칠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밤의 여인들'과는 다소 차별화되는 점이다. 도쿄의 대표적인 적선지대 요시와라는 성 매매 금지법의 통과를 앞두고 혼란에 휩싸인다. 그곳에 자리한 '꿈의 나라'에는 5명의 게이샤들이 있다. 가장 잘 나가는 게이샤 야스미는 아버지의 보석금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하나에는 어린 아기와 병든 남편을 건사하기 위해 고달픈 매춘의 삶을 이어간다. 중년의 요리에는 결혼할 남자가 있지만 빚 때문에 게이샤로 남아있다. 과부 유메코는 시골에 장성한 아들이 있다. 유메코는 아들이 언젠가 자신을 부양할 거라 믿으며 유곽에서의 삶을 견딘다. 제멋대로인 미키는 돈을 펑펑 써대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영화는 5명의 게이샤들 못지않게 그들을 데리고 영업하는 '꿈의 나라'의 주인 내외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들은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안주인은 쓸모없는 일이라면 300년 동안 가업이 이어질 수 있었겠느냐며 경찰에게 항변한다. 그 남편인 사장은 자신들 덕분에 오갈 데 없는 게이샤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거라며 큰소리를 친다. 그들 내외가 꾸려나가는 '꿈의 나라'에는 착취와 사업의 이중적인 면모가 내재되어 있다. 이제 시대의 변화 속에 유구한 역사를 지닌 그들의 영업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미조구치 켄지는 냉정한 관찰자로서 적선지대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호오(好惡)를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다. 그가 성 매매 금지법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부분에 있어 감독 자신에게는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있기는 하다.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미조구치 켄지는 누이가 게이샤로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 또한 젊은 시절에는 여러 게이샤들과의 연애로 소란스럽게 보냈다. 빈곤과 매춘, 여성에 대한 감독 자신의 독특한 관점은 바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유곽(遊廓)으로 대표되는 성 산업에 대한 비판 보다는, 그것이 작동하고 기능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계급적 불평등이 내재해 있다. 미조구치 켄지는 성 매매 금지법이 그러한 현실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게이샤들이 머무는 '꿈의 나라'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꿈을 바스러뜨리는 곳이다. 유메코는 아들로부터 연을 끊자는 말을 듣고 미쳐버린다. 결혼을 하기 위해 도망갔던 요리에는 노예처럼 일하는 삶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돌아온다. 미키는 부잣집 딸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사창가에 내던진다. 하나에는 집세를 내지 못해 길바닥에 나앉을 남편과 아기를 두고 근심한다. 5명의 게이샤들 가운데 '꿈'을 이룬 이는 야스미 한 명뿐이다. 결혼을 핑계로 손님에게서 뜯어낸 엄청난 돈으로 야스미는 이불 가게를 차린다. 야스미의 그 꿈도 실은 손님이 횡령으로 마련한 부정한 돈에 의한 것이다.

  미쳐버린 유메코의 빈자리는 부모에 의해 팔린 시골 출신의 어린 게이샤로 메꿔진다. 희디흰 분칠에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가게 입구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신참 게이샤는 무얼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가게 언니들이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따라해볼 용기를 낸다. 문 기둥을 어색하게 잡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작게 손짓을 한다. 웅얼거리는 입에서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비감하고 서늘한 마지막 장면은 오랜 악습인 성 산업에 대한 통렬한 고발장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유작으로 남기고 미조구치 켄지는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 해에 의회에서는 마침내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그것은 이전까지 국가가 묵인해주던 민간의 사업이 범죄 조직인 야쿠자들의 관할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영화 '수치의 거리'에는 그 전환기의 암울한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영화 '밤의 여인들'에서 주연을 맡은 타나카 키누요(가운데 인물). 배우 타나카 키누요(田中絹代)는 여성 감독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영화 '여자들만의 밤(女ばかりの夜, Girls of the Night, 1961)'은 매춘 여성의 재활 과정을 인본주의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어떤 면에서 그 영화는 미조구치 켄지의 '밤의 여인들'에 대한 타나카 키누요의 영화적 응답인 셈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타나카 키누요 주연의 영화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ginza-cosmetics-1951.html

엄마(Mother, 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mother-1952.html

흐르다(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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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도 조, 무국적의 총잡이가 되다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拳銃は俺のパスポート, A Colt is My Passport, 1967)

노무라 타카시(Nomura Takashi) 감독



  여기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배우로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졌지만 그저 그런 단역들만 주어질 뿐이었다. 적당히 잘생긴 자신의 얼굴로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성형 수술로 개성을 가진 마스크를 만드는 거다. 시시도 조(Shishido Joe)는 광대뼈 부분에 실리콘을 넣은 새로운 얼굴의 배우가 되었다. 성형 수술 이후 그의 양볼은 마치 사탕을 두어 개 물고 있는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다람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독특한 얼굴 덕분이었을까? 그는 액션 영화에서 총잡이 역할로 잘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A Colt is My Passport, 1967)'는 시시도 조의 대표작이다.

  시시도 조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은 저격수 카미무라이다. 카미무라는 야쿠자 보스의 의뢰로 다른 조직의 야쿠자 보스를 암살한다. 그는 일이 끝나면 돈을 받고 외국으로 나가기로 되어있다. 하지만 조직은 카미무라를 적당히 써먹고 처리해 버리려고 한다. 카미무라는 파트너 슌과 함께 야쿠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부둣가 근처의 선술집으로 숨어든 두 사람, 그곳에는 거친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 미나가 있다. 미나는 카미무라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카미무라는 미나의 도움으로 밀항의 기회를 잡지만, 그러는 사이 슌은 야쿠자들에게 끌려간다. 슌을 풀어주는 대신 자신이 야쿠자들과 대면하기로 한 카미무라. 폐허의 매립지에서 고독한 총잡이는 야쿠자들을 상대로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총잡이와 일본 영화라니, 무언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그대로 모사했다는 인상을 준다. 엔리오 모리코네를 연상케 하는 영화 음악, 외로운 늑대처럼 방랑하는 총잡이, 그와 대적하는 악당, 그리고 마지막 결투까지 이것은 일본 스타일의 서부극이다.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된 데에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다. TV의 보급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 산업의 황금기는 점차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영화사 Nikkatsu(日活)는 그런 시대적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했다. 철저히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의 오락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시하라 유지로를 간판으로 한 태양족(太陽族) 영화부터 일련의 Borderless Action 영화를 제작했다. Borderless Action 영화는 말 그대로 웨스턴과 느와르의 장르적 요소를 과감히 차용한 무국적성을 특징으로 한다.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에서 카미무라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반영웅(anti hero)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사회와 그 어떤 접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파트너 '슌'이다. 슌은 카미무라를 '아니키(アニキ)'로 부른다. 이는 우리말의 '형님', 중국어로는 '따꺼(大哥)'의 어감이라고나 할까? 야쿠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호칭이기도 한 '아니키'에는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적 배경이 자리한다. 영어 자막에는 '아니키'가 여지없이 'Boss'로 번역되는데, 이 부분이 영 어색하게 읽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 그러므로 미나는 카미무라에게 슌이 친동생인지 물어보기까지 한다. 슌에게 '아니키'로 불리는 카미무라는 기꺼이 그 말에 합당하게 행동한다.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서 음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 영화는 전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룬 일본 사회의 그늘진 부분을 부각시킨다. 카미무라와 대척점에 서있는 야쿠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합법과 불법의 회색지대에서 기생하는 야쿠자 대부분은 하층민 출신이었다. 부둣가 선술집 미나의 경우도 일종의 차별적 천민 집단에서 나고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그 때문에 미나의 과거는 그곳을 매번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로 점철되어 있다. 카미무라처럼 미나도 떠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는 일본 너머의 바깥 세상이다.

  경계에 자리한 이들의 탈주 욕망. 이것이 좀 더 구체화된 모습으로 드러난 영화는 니카츠 제작 영화 '나는 기다린다(俺は待ってるぜ, I Am Waiting, 1958)'이다. 전직 권투 선수인 시마키(이시하라 유지로 분)는 브라질 이민을 꿈꾼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수감 생활의 고통스런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브라질행은 시마키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먼저 브라질로 떠난 형은 정착 후에 시마키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형은 감감무소식이다. 야쿠자에 의한 형의 죽음, 결국 시마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시마키 형제에게 닥친 비극은 일본 사회 하층 계급의 좌절된 욕망을 보여준다.  

  슌과 미나가 부산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것과는 달리, 카미무라는 황량한 매립지에 홀로 서있다.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총 한 자루뿐이다. 방탄 차량에 탄 야쿠자들이 카미무라를 향해 돌진한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결투. 마침내 고독한 총잡이가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적들이 죽었음을 확인한다. 절뚝이며 걷는 이 남자가 살아갈 세계는 이제 '일본'이 아니다. 총과 먼지 바람, 악당들, 그리고 언젠가 가게 될지 모르는 이국의 땅까지. 카미무라, 아니 시시도 조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로 Borderlss Action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각인된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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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Apocalypto
6편 Pretend Daddy

Season 1 완결

*이 글은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의 세부 항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양육 리허설의 파국: 5편 Apocalypto

  에피소드 5에서 네이선은 안젤라의 양육 방식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 안젤라는 아들 아담도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길 바란다. 유대인인 네이선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이제까지 안젤라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이선의 모친은 네이선에게 아담을 유대인으로 키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네이선은 아빠 역을 연기하는 자신에게도 아담의 종교 교육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안젤라는 네이선의 그런 의향에 동조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멜 깁슨의 감독 연출작 'Apocalypto(2006)'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안젤라를 보며 네이선의 표정은 굳어진다. 그 영화가 개봉될 당시, 멜 깁슨은 유대인 혐오 발언으로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네이선은 은밀하게 아담의 유대교 입문 교육을 진행한다. 그는 아담과 수영을 간다고 하고서는, 유대인 회당과 유대교인 가정 교사에게 데려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담의 머리에 물을 뿌려서 수영을 다녀온 것처럼 가장한다. 아담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일도 잊지 않는다. 사실 리허설의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동 연기자에게 리허설의 장면이라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괜찮은 걸까? 과연 아담을 연기하는 아역 배우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리허설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는 아동의 현실 인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이전에 6살 아담을 연기한 레미에게서 나중에 문제가 된다.


  네이선의 비밀 종교 교육은 가정 교사 미리암의 개입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미리암은 네이선에게 더이상 회피하지 말고 안젤라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네이선은 미리암의 도움을 받아 안젤라를 설득하고자 한다. 두 명의 강한 여자들이 각자의 신념을 내세워 대립하는 동안 네이선은 뒤로 물러서 있다. 이 리허설은 네이선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갈등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안젤라에게 대항하기로 결정한 일은 리허설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집에서 찍은 영상 속의 안젤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담의 엄마가 아닌 빈둥거리는 독신녀로 지내고 있었다. 네이선은 안젤라가 본인이 주인공인 리허설에 충실하지 않았다며 비난한다.

  "이 리허설의 진짜 주인은 바로 네이선 당신이에요. 내가 아니라."

  안젤라의 이 말은 어떤 면에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안젤라는 아이가 좀 더 큰 다음의 양육 과정을 리허설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네이선은 십 대 청소년이 된 아담을 감당할 수 없다며 6살 아이로 되돌렸다. 그는 안젤라의 양육 방식에 도전했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졌다. 네이선은 단지 평화롭게 그럴듯한 아빠 역을 리허설하기로 한 처음의 다짐에서 벗어나서 진짜 유대인 아빠 네이선으로 변모해갔다. 분명 네이선은 이 양육 리허설을 현실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중이었다. 안젤라는 그런 네이선의 리허설 세계에 결별을 고한다. 마침내 네이선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아담과 크리스마스 대신에 하누카(Hanukkah, 유대교의 축제)를 축하한다. 홀로 남은 네이선의 양육 리허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2. 리허설은 끝나지 않았다: 6편 Pretend Daddy

  엄마 안젤라가 떠나도 양육 리허설은 계속 진행된다. 이제 6살 아이는 9살로 바뀐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6살 아담을 연기했던 레미는 네이선과의 이별을 힘들어한다. 레미는 네이선을 계속해서 '아빠(daddy)'라고 부르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레미의 엄마는 싱글맘이었다. 그 때문에 어린 레미는 네이선과의 리허설을 감정적으로 진짜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네이선은 당황한다. 도대체 자신이 이 리허설에서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마치 심리적 해부를 하듯, 네이선은 자신과 레미를 찍은 영상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문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아이에게 거리를 두고 좀 더 냉정하게 연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진짜 6살 아이가 아니라 그 나이보다 성숙한 연령대의 배우를 썼다면 어땠을까? 네이선은 9살, 10대 청소년, 20대 청년 배우를 아담으로 분장시킨다. 심지어 인형까지 아담으로 분장시키고 매번 다르게 리허설한다. 그렇게 네이선은 레미와 보낸 시간을 복기해 본다.

  어린 레미가 겪은 혼란만큼이나 네이선도 감정의 미궁에 빠진다. 네이선은 레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균열이 생긴 리허설의 세계를 수리하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만약에 엄마 역의 안젤라가 있었다면 레미가 겪은 혼란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비로소 안젤라의 중요성을 자각한다. 그리고 안젤라를 가혹한 방식으로 자신이 밀쳐냈음을 깨닫는다. 네이선은 안젤라를 찾아가 사과한다.

  레미가 조금씩 리허설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동안에도 네이선의 자아 성찰 리허설은 계속 된다. 그는 레미의 엄마로 자신을 분장시키고 9살 아담 역을 맡은 아역 배우 리암을 레미로 분장시켜서 리허설을 진행한다. 네이선의 이 리허설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기꺼이 여장까지 하고 양육 리허설의 문제점을 찾고 싶어한다. 그런 네이선의 바람은 놀라운 통찰로 이어진다. 네이선의 지독한 완벽주의와 뛰어난 아역 배우 리암의 재능이 만나 빛을 발한다. 네이선과 리암의 리허설은 마치 심리 정신극인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환자 내면의 문제점을 즉흥극을 통해 드러내도록 함)처럼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

  레미의 엄마가 된 네이선은 흐느껴 우는 아들을 부드럽게 달랜다. 아빠인 척 했던 남자(네이선을 지칭)가 결코 상처와 혼란을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그러한 네이선의 모습은 레미에 대한 부채의식을 드러낸다. "그도 결점이 있는 한 인간일 뿐이란다." 네이선은 레미 엄마 역의 리허설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한다. 아역 배우 리암이 연기한 레미는 네이선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을 따뜻하게 안는다. 네이선은 자신이 언제까지고 아들을 지켜줄 '아빠'라고 강조한다.

  "나는 엄마로 알고 연기하는 건데요?" '아빠'라는 단어에 당황한 리암은 속삭이듯 말한다. "아냐. 난 네 아빠란다." 리허설의 이 도발적인 결말은 짜릿한 감동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네이선의 'The Rehearsal'은 딜레마에 빠진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의 리허설이 리허설을 의뢰한 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이 리허설이 네이선 자신에게 매우 유용한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현실에서는 좀처럼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다. 거기에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이혼남의 상처, 갈등을 회피하는 평화주의자,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소망까지 포함되어 있다. HBO는 Season 2 제작을 확정지었다. 네이선 필더는 이미 Season 1의 6편으로 진정한 자신의 출세작을 만들어냈다.


*사진 출처: oregonlive.com


 

**The Rehearsal(HBO TV series Season 1, 2022)
  1, 2, 3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the-rehearsal-hbo-tv-series-season-1.html
  4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the-rehearsal-hbo-tv-series-season-1_29.html



***이 다큐 시리즈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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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아직 안된 거야?" 신문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는 아내를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여자의 속마음이 독백으로 흘러나온다. '매일 밥을 짓고, 미소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365일이 항상 똑같은 일상이다.' 하츠노스케(우에하라 켄 분)와 미치요(하라 세츠코 분) 부부는 권태기에 들어섰다. 집에서 남편의 관심사는 '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하루의 대부분을 식사 준비와 집안일로 동동거리면서 보낸다. 꼬리가 뭉툭한 길고양이 '유리'를 보살피는 것이 미치요의 유일한 낙이다. 아내 미치요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지 남편의 무관심뿐만이 아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은 미치요를 돈에 쪼들리게 만든다.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는 일도 익숙하다. 건너편 집에는 술집 마담이 살고 있고, 좀도둑들이 출몰해서 살림살이를 훔쳐가기도 한다. 미치요는 지루한 결혼 생활과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1년작 영화 '밥(Meshi, Repast)'하야시 후미코(林
芙美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는 영화가 개봉된 그 해에 세상을 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후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로 만들었다. 여성과 하층민의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작가의 소설은 나루세 미키오를 만나 깊이있는 울림을 낸다. 영화 '밥'의 주인공 미치요는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과 권태에 질식 직전이다. 그 때, 도쿄에서 남편의 조카 사토코가 온다. 사토코는 결혼을 재촉하는 고루한 아버지에게서 이제 막 도망나온 참이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는 미치요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에게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군식구가 하나 느니까 쌀독도 금새 바닥이 난다. 남편이란 작자는 아내의 고민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멋진 새 구두를 사고, 조카를 데리고 오사카 관광에 나선다.

  이쯤 되면 관객은 미치요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결론내릴 법도 하다. 모처럼 도쿄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미치요는 아내의 삶이 자신의 기대와는 어긋나 있음을 깨닫는다. 눈치 없는 조카 사토코를 도쿄에 바래다 준다는 명분으로 미치요도 친정으로 가버린다. 아차, 곰 같은 남편 하츠노스케도 무언가 마음이 뜨끔해진다. 아내는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미치요는 남동생과 올케, 엄마가 있는 친정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한다. 그런데 미치요가 친정집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사토코의 그 철없고 제멋대로인 행동과 닮아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달라진 미치요를 친정집 방안의 정경으로 보여준다. 처음에 깔끔했던 방은 옷가지며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여있다. 미치요는 늘어지게 잠을 자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돈도 아끼지 않고 쓴다. 아직까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사촌과 유쾌한 데이트도 한다. 미치요는 이혼녀로 살아갈 이후의 삶을 가늠해 본다. 

  '당신의 존재는 나에게 괴로움을 더해주었을 뿐이에요.' 도쿄에서 미치요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런데 편지를 부치러 갔다가 우체통 앞에서 망설인다. 헤어지는 것이 답일까? 혼자 살아가려면 직업이 있어야 한다. 패전 이후 일본의 경제는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상반되는 풍경들이 나온다. 하츠노스케가 접대받는 술집에서는 무희들의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직업 소개소를 찾아간 미치요의 눈 앞에서는 끝없이 줄을 선 구직자들이 보인다.

  발길을 돌이켜 하릴없이 강둑을 걷는 미치요의 옆으로는 젊은 연인들이 웃으면서 지나간다. 미치요와 남편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미치요는 그곳에서 친구를 발견한다. 미치요의 친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길바닥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전쟁터에서 실종된 남편을 기다린다는 이 친구는 혹시나 생환 소식이 나올까봐 아직까지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남편의 부재로 곤궁한 친구의 모습은 이혼을 생각하는 미치요에게 근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미치요에게 도쿄에서의 체류는 일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연 미치요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에 얽매인 피해자일까? 나루세 미키오는 오사카에 홀로 남은 하츠노스케의 모습을 통해 다르게 생각해 볼 만한 단서들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증권 작전 세력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적어도 이 남자는 일을 하는 데 있어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다. 미치요에게 자신과 조카 사토코의 허물없는 사이를 오해받기는 했지만, 여자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킬 줄 안다. 그는 도쿄의 새 일자리를 제안받고도 아내의 의향을 먼저 물어봐야겠다고 말한다. 하츠노스케의 그런 면면들은 그가 남편으로서 괜찮은 자질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하츠노스케는 아내를 만나러 도쿄에 온다. 미치요는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까? 원작 소설을 미완성으로 남긴 하야시 후미코가 어떤 결말을 원했을지는 알 수 없다. 제작사 도호(Toho)는 영화의 결말로 '이혼은 안된다'는 방침을 밀어붙였다(출처: ja.wikipedia.org).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시 일본 사회의 습속에서 '이혼'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미치요는 결국 남편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는 기차에 탄다. 이 결말은 한편으로는 여성 주인공이 인습적 가부장제와 불행한 결혼 생활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넣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치요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미치요는 기차의 창문 밖으로 차마 부치지 못한 결별의 편지를 찢어서 날려버린다. 그리고 옆자리의 잠든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이 아내는 이제 그 남자를 삶의 동반자로 새롭게 인식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흥행에 성공한 영화 '밥'으로 전후에 이어진 슬럼프에서 벗어나 전성기에 들어서는 문을 연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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