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암울한 초상


  "나 좀 죽게 네가 도와줘."

  뇌졸중으로 거동이 힘들어진 아버지는 딸에게 그렇게 부탁한다. 갑작스럽게 그 말을 들은 딸은 놀라움과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François Ozon 감독의 '다 잘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 2021)'는 매우 민감한 윤리적 주제를 다룬다.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를 원하는 아버지 앙드레의 요청을 과연 딸 에마뉘엘은 수락할까?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Emmanuèle Bernheim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남겼다. 작가의 부친은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과정을 통해 삶을 마감했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딸 에마뉘엘이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은 안락사와는 좀 다른 개념의 죽음이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직접 치사량의 약물을 삼켜야 한다. 지난 9월 13일에 스위스에서 타계한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도 그렇게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3명의 사람이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그러한 방식의 죽음이 갖고 있는 윤리적 논란과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프랑수와 오종은 깔끔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가족이 속한 계층적 배경이 '중산층'이라는 데에 있다.

  에마뉘엘의 아버지 앙드레는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이며, 어머니는 조각가이다. 에마뉘엘도 작가로서 나름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병고는 이 가족의 삶에 불편을 끼치기는 하지만 뒤흔들 만한 재앙은 아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모친은 비서를 두고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는 안락사로 삶을 끝내고 싶어한다. 딸은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를 확인하고 현실적인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스위스의 관련 단체를 알아보고, 만약을 대비해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조언도 듣는다. 정해진 이별의 날짜를 앞두고 아버지는 가족과 지인을 불러 호화로운 만찬을 즐긴다. 손주가 연주하는 음악회에도 참석한다. 마침내 아버지와 두 딸이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곳은 앰뷸런스 안이다. 노인은 홀로 낯선 곳에서 죽기 위해 떠난다.

  프랑수와 오종의 이 영화는 조력 자살에 대한 영상 팸플릿(pamphlet)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관객은 성장(盛裝)을 한 모습으로 침대에 오롯이 누워있는 앙드레를 본다. 그 최후를 참관한 이는 에마뉘엘에게 전화를 건다. '모든 게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선택할 수 없는 이 죽음에는 당연히 큰 돈이 든다. 또한 법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당신이라면 이런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건가요? 또한 당신의 가족이 그런 마지막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 그 질문에 내포된 근원적 성찰은 단순히 윤리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세상에는 부유한 앙드레가 선택한 '조력 자살'의 방식과는 다른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가난과 외로움, 병고에 시달린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더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다 잘된 거야'는 계층과 죽음의 문제를 '가족애'라는 주제로 안전하게 환원시킨다.

  가스파 노에(Gaspar Noé)의 영화 '소용돌이(Vortex, 2021)'는 그 지점에서 더 사실주의적으로 파고든다. 영화는 노부부의 마지막 날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가스파 노에는 질병과 불안이 가족 내부에서 어떻게 파괴적으로 기능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집안과 바깥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일상의 세계와 유리된다. 심장병이 있는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살피는 데에 무력하다. 그들 부부의 유일한 아들은 마약중독자이다. 그 아들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는데, 애 엄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던 아들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도 버겁다며 부모 앞에서 흐느껴 운다. 아들이 요양원을 알아보는 사이에 부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친다.

  "도대체 왜 죽어요? 산다는 건 좋은 거잖아요." 'Everything Went Fine'에서 앰뷸런스 운전 기사는 앙드레에게 그렇게 묻는다. 앙드레는 허허로운 표정으로 그 남자를 응시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죽으러 가는 노인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Vortex'에서 거리의 약쟁이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늙는 것과 약쟁이가 되는 것, 둘 중에 넌 뭘 선택할래?" 두 가지 모두 쉽게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는 뜻일 게다. 그 영화들을 보고서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본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렇게 영화는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続・忍びの者(Shinobi no Mono 2: Vengeance, 1963)

新・忍びの者(Shinobi no Mono 3: Resurrection, 1963)



닌자 영화에 투영된 계급과 사회의 문제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소설의 주인공인 이시카와 고에몬(石川 五右衛門, Ishikawa Goemon)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부패한 관료와 부자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의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에게는 로빈 후드 같은 반영웅(antihero)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만든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암살 시도였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에몬은 어린 아들과 함께 팽형(烹刑, 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닌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이 후대 창작자들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복원되었다.   

  공산주의자였던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이시카와 고에몬이 보여준 그 저항의 삶에 주목했다. 민중의 편에 선 의적은 최고 통치자에 맞서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작가는 이시카와 고에몬을 최하층 민초들의 저항의지를 대표하는 닌자로 그려냈다. 원작자의 의도는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감독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이 연출한 영화 '忍びの者(Shinobi no Mono)' 1편과 2편의 고에몬은 지배 계급의 하수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주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1편에서 고에몬은 산다유의 협박과 회유를 받고 오다 노부나가 암살에 나선다. 하지만 고에몬의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 이 일로 오다 노부나가는 닌자 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산다유와 닌자 공동체의 최후를 목도한 고에몬은 필부의 삶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평범한 농부로 살고 싶었던 고에몬의 꿈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지 못한다. 고에몬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아내와 아이를 잃는다. 그는 복수를 위해 다시 닌자가 된다.

  2편에서 고에몬이 속한 닌자 공동체는 승려를 중심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뭉쳐있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 장각의 황건적은 태평도(太平道)로 민중을 끌어모았다. 영화 속 닌자 공동체의 모습은 전국 시대의 혼란기에 일본 불교 또한 체제 저항 세력과 결탁했음을 추측케 한다. 주목해야할 점은 닌자 집단에 합류한 이들이 굶주리고 가난한 하층 계급 천민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세상을 뒤바꾸기 위해 닌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닌자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절멸에 이르는 탄압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에몬의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그에게는 잔혹한 형벌이 주어진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전복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2편의 마지막에 고에몬은 펄펄 끓는 가마솥 앞으로 끌려간다. 3편이 시작되면 고에몬은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복 핫토리 한조가 고에몬을 구한다. 그는 고에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적하는 도구로 쓰려고 한다. 과연 고에몬은 핫토리 한조의 뜻대로 움직일까? 고에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게 되지만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 원한 때문이다. 닌자 고에몬이 돈이나 허황된 대의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이런 고에몬이 4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선다. 고에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의 닌자로 활약하면서 몰락해가는 도요토미 일족을 살리는 일에 앞장선다. 이 웃지 못할 반전은 영화사 다이에이의 초대박 흥행작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엿가락 늘이기 식의 연작을 강행하면서 캐릭터의 일관성과 원작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는 실종되었다. 다이에이는 원작을 포기하고 4편부터는 독자적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4편과 5편에서는 '키리가쿠레 사이조'라는 새로운 닌자가 등장한다. 6편에서는 사이조가 죽고 그 아들 사이스케가 나온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닌자의 모험담이 이어졌다. 나는 6편까지 보고는 이 닌자물의 완주를 포기해 버렸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시리즈물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주연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의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이다. 다이에이는 그 뛰어난 배우를 데려다가 밑빠진 시대극에 재능을 소모시켜 버렸다. 이치카와 라이조의 필모그래피가 1960년대에 지나치게 빡빡하게 채워져 있는 것은 영화사의 그런 욕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른 일곱 살에 요절한 이 배우는 암으로 병사했다. 나는 그 이유가 한편으로는 혹사에 가까운 연기 여건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닌자가 나오는 시대극 팬이라면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시리즈물은 한번은 거쳐가야할 관문이다. 이 연작 영화의 원작자는 닌자가 그저 검은 옷을 입고 신출귀몰하는 암살자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들은 시대의 격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한 민초들이었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1960년대 고도 경제 성장 시대 일본 노동자들의 모습을 자신의 소설 속 닌자에 투영했다. 오늘날 서구 영화 속 닌자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고 과장된 이미지적 차용으로만 묘사된다. 언젠가 나올 새로운 닌자 영화에 지금 시대의 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담기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 영화 '폭력의 거리(暴力の街, 195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0.html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영화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shinobi-no-mono-1962-8.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닌자(忍びの者, Ninja)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대략 12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닌자의 역사는 중세 시기 일본의 정치적 격변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종의 정치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 닌자의 주요 업무는 '정보 수집'이었다.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던 다이묘들은 경쟁자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닌자를 고용했다. 말하자면 닌자는 하청을 받고 일하는 사업자였다. 그들의 신분은 미천했다. 닌자는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천민 집단의 사람들로 무리를 지어 산골 지역에 은거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일감이 주어지면 비밀리에 활동해서 수익을 올렸다. 수집한 정보로 적들을 교란시키고, 때론 납치와 암살 같은 범죄도 저질렀다. '무사도(武士道)'를 따르는 사무라이들이 대놓고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닌자들은 떠맡았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1962)'의 도입부에는 산다유가 이끄는 닌자 무리가 등장한다. 깊은 산 속에서 밭을 일구며 사는 그들은 경계 경보가 울리자 일사불란하게 모인다. 그들 가운데 주인공 이시카와 고에몬도 있다. 우두머리 산다유는 오다 노부나가 타도를 내세우며 닌자들을 압박한다. 그런데 이 늙고 병약해 보이는 우두머리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는 밤에 비밀 통로로 빠져나와 다른 곳의 은거지로 향한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산다유는 또 다른 닌자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왜 이런 이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 고에몬은 산다유의 젊은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 둘의 모습을 엿보는 산다유의 음흉한 미소에 고에몬의 험한 앞날이 예고되어 있다.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忍びの者(Shinobi no Mono)'라는 소설을 잡지에 연재했다. 센코쿠 시대(戦国時代)의 닌자(Ninja)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사 다이에이(大映)는 발빠르게 영화화에 착수했다. 주연은 다이에이의 간판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감독은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가 내정되었다. 그것은 이후에 이어질 8부작 닌자 시리즈 영화의 첫걸음이었다. 영화는 계속해서 초대박 흥행 기록을 이어갔다. 주인공 닌자 이시카와 고에몬은 3편을 끝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새로운 닌자 사이조를 내세워 시리즈를 이어갔다. 6편에서는 사이조가 죽고 그 아들 사이스케가 등장한다. 감독은 바뀌었지만, 이치카와 라이조는 배역만 달리할 뿐 계속 출연했다. 이 영화는 이치카와 라이조의 인기와 명성에 기대고 있었다.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으로 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 일곱, 이후 이치카와 라이조는 영화사 다이에이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1962년에는 결혼도 했는데, 상대가 다이에이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의 양녀였다. 이제 이치카와 라이조에게 영화는 가족 사업이 되었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그는 쉴 새 없이 영화를 찍었다.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은 이치카와 라이조가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였다. 1962년에 시작한 닌자 시리즈물은 1966년까지 이어졌다. 1969년에 이치카와 라이조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뜨자 시리즈는 8편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그즈음, 영화사의 명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1970년에 '忍びの者 9편'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1971년에 다이에이는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忍びの者(Shinobi no Mono)'는 다이에이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1, 2, 3편의 원작자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닌자를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그려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발호할 때에도, 그리고 패전 이후에도 늘 박해의 대상이었다. 연극과 미술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던 그는 역사 소설로 눈길을 돌린다. 시대물은 검열의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소설을 연재한 곳은 공산당 잡지 '적기(赤旗)'였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권력자들의 역사 속에서 닌자는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지배 세력은 닌자를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그 계급적 불평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고함을 드러낸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다이묘 권력자와 닌자로 치환된다. 소설이 쓰여진 1960년대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에 접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닌자의 삶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운을 투사한다.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였던 원작자가 왜 역사 속의 닌자를 새롭게 부각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영화 '忍びの者 1편'의 고에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고에몬은 갑작스런 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닌자는 여러가지 비술을 사용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폭약을 비록해 독극물, 여러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그들의 직업적 가치를 높였다. 고에몬의 아버지는 바로 그 폭발물 제조의 비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평범한 농부의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추지만 결국 비명횡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산다유의 아내가 사고로 죽자 고에몬은 도망길에 오른다.

  닌자라고 해서 다 같은 닌자가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엄연히 계급이 있다. 산다유는 닌자 무리를 이끌면서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한다. 그가 비밀리에 두 개의 닌자 무리를 꾸려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닌자들 사이에 경쟁을 부추겨 성과를 내게 만들면 닌자들의 몸값은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닌자를 고용하는 다이묘들에게 더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다. 고에몬이 믿고 의지한 산다유는 그런 추악한 인물이었다. 영화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잔혹한 압제자로 묘사된다. 혼세한 시대적 상황에서 닌자 고에몬은 수탈과 착취의 제일 하부 구조에 자리한다. 과연 고에몬은 자신을 옥죄는 시대의 그물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그 뒤의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



*사진 출처: vintageninja.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에는 영화 '불꽃(炎上, 1958)'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머리의 앳된 청년이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다. 미조구치라는 이름의 수련승은 국보급의 사찰 취각사를 불지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영화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은 미조구치의 플래시백을 통해 그 방화 사건의 오랜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승려였던 미조구치의 부친은 세상을 뜨면서 친구 승려에게 아들을 수련승으로 받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렇게 미조구치는 취각사에서 지내게 된다. 빼어난 취각사의 정경은 미조구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취각사는 곧 미조구치에게 지켜야할 전부가 된다. 취각사가 보여주는 완전한 아름다움과 달리 미조구치를 둘러싼 현실은 거짓과 더러움으로 물든다. 덕이 높은 고승인줄 알았던 주지는 돈에 집착하며 젊은 게이샤를 내연녀로 둔다. 미조구치의 모친은 아픈 남편을 놔두고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난 적이 있었다. 미조구치는 어머니가 의탁할 곳을 찾아 취각사로 들어오자 그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절름발이 친구 토카리가 보여준 자신만만함은 열등감을 감추려는 위악에 지나지 않았다. 미조구치는 세상이 취각사의 절대적인 미와 순수가 존재할 수 없는 곳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 아름다움이 언젠가 변해 사라질 거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없애버리자. 미조구치의 취각사에 대한 비뚤어진 집착은 그렇게 방화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1950년 7월 2일, 7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교토의 사찰 금각사가 불탔다. 범인은 22살의 사찰 수련승 하야시 요켄이었다. 경찰에 의해 체포된 그는 재판 과정 내내 횡설수설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 범인은 7년형을 언도받았다. 하야시 요켄은 복역 중에 결핵에 걸렸고, 결국 26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그 사건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을 소설로 쓰기 위해 작가는 금각사와 방화 사건 관련 인물들 취재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금각사(金閣寺, 1956)'였다. '금각사'는 이전부터 쌓아온 미시마 유키오의 글쓰기 경력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영화사 다이에이(大映)는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이치카와 콘을 감독으로 내정했다. '금각사'의 탐미주의적 문학 세계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맡았던 와다 나토(和田夏十, 이치카와 콘 감독의 부인이었음)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이는 미시마 유키오였다. 그는 소설의 취재 노트를 통째로 건네면서 각색 작업을 격려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영화 촬영 현장도 참관했다. 소설과는 같은듯 다른 영화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은 원작자의 마음에 꼭 들었다(출처: ja.wikipedia.org). 

  원작 소설을 읽은 이라면 이 영화가 소설과는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금각사'는 교토의 '취각사(驟閣寺, 당시 금각사 주지는 절의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것을 반대했다)'가 되었다. 영화는 소설 속 미조구치의 성적 일탈은 최대한 배제했다. 그 대신 주인공의 내적 트라우마가 부조리한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한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벽한 순수를 열망하는 일은 필연적인 절망을 내포한다. 미조구치의 절망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원작 소설의 주인공이 불타오르는 금각사를 보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 '불꽃'의 미조구치는 죽음을 택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결말은 원작자 미시마 유키오의 내적 본질과 더 맞닿아 있다. 그의 단편 소설 '검(劍)'을 영화화한 '검(劍, Ken, 1964)'의 주인공도 검도에서 무오류성을 추구하다 실패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잘 알려진 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자위대의 궐기를 요구하다 할복자살했다. 그의 자기파괴적인 최후는 '검'의 주인공 고쿠부의 죽음에서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치카와 콘은 중층적인 플래시백으로 영화를 독특하게 만든다. 와다 나토의 빼어난 각색은 소설의 주제를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토카리 역을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를 비롯해 여러 중견 배우들의 훌륭한 조합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음울한 분위기의 영화 음악, 미니어처를 사용해 취각사의 화재 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낸 특수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무엇보다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든 이는 미조구치 역의 이치카와 라이조였다. 다이에이로 이적한 뒤에 모처럼 큰 배역을 맡게 된 이치카와 라이조의 그때 나이는 스물 일곱. 가부키 배우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그에겐 보잘 것 없는 배역만 주어졌다. 결국 그는 영화 배우로 활로를 찾았다. 순수한 얼굴 뒤에 숨겨진 상처와 불안정한 내면을 표현해내는 이 배우의 연기는 천재적이다. 이 뛰어난 배우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암으로 요절했다. '불꽃'의 비극적 결말은 이치카와 라이조의 짧은 생애와 겹치며 도저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폴 슈레이더 감독 '미시마-그의 인생(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198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mishima-life-in-four-chapters-1985.html

미스미 켄지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
'무숙자(無宿者, On the Road Forever, 1964)'와 '검(劍, Ken, 196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on-road-forever-1964-ken-1964.html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nakano-spy-school-1966.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무솔리니는 집권 이후 알바니아에 대한 야욕을 서서히 드러냈다. 경제적인 수탈로부터 시작한 합병 작업은 2차 대전의 혼란기를 틈타 알바니아 본토 점령으로 이어졌다. 1944년까지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 감독 Gianni Amelio '라메리카(Lamerica, 1994)'에는 그 역사적인 사건의 기억이 얄궂게 포개어져 있다.

  1990년대의 알바니아, 두 명의 이탈리아인이 알바니아를 찾는다. 지노의 상사 피오레는 알바니아에 신발 공장을 짓겠다고 공언한다. 사실 피오레는 합작 사업을 핑계로 눈먼 정부 보조금을 받아내려는 사기꾼이다. 바지 사장으로 내세울 알바니아인을 찾던 피오레는 요양원에서 아픈 노인 스피로를 데려온다. 이탈리아로 급하게 돌아간 상사를 대신해 지노는 스피로와 함께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스피로는 지노를 피해 도망친다. 과연 이탈리아인의 신발 공장 사기극은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청년 지노에게 알바니아는 후진국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거리에는 실업자와 거지 아이들이 들끓는다. 어렵게 스피로를 찾아낸 지노, 그는 시골 마을 휴게소에 들렀다가 잠깐 주차해둔 차의 모든 부품이 사라졌음을 발견한다. 지노에게 알바니아는 총체적인 부정부패와 범죄가 횡행하는 나라이다. 스피로와 함께 하는 지노의 여정은 바로 그 피폐한 알바니아의 현실에 대한 영상 보고서나 다름없다. 휴게소에는 커피는 물론이고 그 어떤 음식도 팔지 않는다. 그곳 사람들은 먹고 살 방도를 찾을 수 없다. 알바니아인들은 어떻게든 이탈리아로 가고자 한다.

  지노는 스피로를 비롯해 알바니아 사람들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가난하고 더럽고 무능한 사람들. 지노의 우월 의식은 한때 알바니아를 점령했던 이탈리아 제국주의자들의 관점과 다를 바 없다. 지노가 알바니아인으로 알았던 스피로는 바로 그 제국주의의 피해자이다. 알바니아 침공에 징집된 이탈리아 군인 스피로, 아니 미켈레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50년을 타국에 매여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스무 살이라고 말한다. 미켈레의 머릿속 시계는 전쟁이 끝난 1944년에 멈춰있다. 미쳐버린 늙은 군인은 어떻게든 시칠리아로 돌아가려 한다. 거기에는 아내와 그가 떠난 직후에 태어난 아들이 있다.

  뜻하지 않게 사업이 엎어지고, 가진 돈이 다 떨어지면서 지노의 행색은 자신이 경멸하던 알바니아인들처럼 변해간다. 알바니아 경찰은 지노를 사기 혐의로 체포하고 추방 명령을 내린다. 그는 이탈리아로 향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거대한 무리 속에 섞인다. 지노의 얼굴은 수심으로 그득하다. 지노에게 고국은 별 달리 기대할 것이 없는 곳이다. 낯선 나라 알바니아에서 한탕 사기로 인생 역전을 노렸던 지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와는 달리 알바니아인들에게 이탈리아는 '꿈의 나라'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카'가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는 기이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은 난민선에 탄 알바니아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찬찬히 보여준다. 카메라에 잡힌 그 얼굴의 주인공들은 실제 알바니아 난민들이다.  

  파시즘으로 뒤틀려버린 알바니아의 전후 역사는 공산 독재자의 철권 통치로 이어졌다. 1990년에 공산 정권이 몰락한 이후, 빈곤과 부패의 악순환에 빠진 알바니아 국가 시스템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알바니아인들은 생존을 위해 무작정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지속적인 난민 사태가 발생했다. 거듭되는 추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 난민 문제는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영화 '라메리카'는 음울하게 접혀진 이탈리아 현대사의 한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펴본다. 거기에는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알바니아 공산 독재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스피로는 무너진 건물벽에 낙서처럼 써진 엔베르 호자의 이름을 무솔리니로 읽는다.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두 명의 이탈리아인, 스피로와 지노의 여정을 통해 이탈리아의 국가 정체성을 탐색한다. 동시에 영화는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책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