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뉴스 화면이 보인다. 싱글맘 레슬리는 이제 막 복권에 당첨되었다. 상금 액수가 무려 19만 달러. 기쁨과 흥분에 휩싸인 레슬리는 당첨금으로 집을 사고 13살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외친다. 그로부터 6년 후, 레슬리는 장기 투숙 중인 모텔의 숙박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다. 잡동사니 짐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은 이 여자의 몰골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퀭한 눈빛, 비쩍 말라버린 몸, 너저분한 옷차림. 레슬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곳은 죽기보다 더 가기 싫은 곳이다. 고향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경멸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To Leslie(2022)'는 알콜 중독자 여성의 지난한 재활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밑바닥으로 전락한 하층 계급 여성의 삶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가까운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며 내내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 레슬리가 복권 당첨금을 날려 버렸는지, 어린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19살이 된 아들 제임스는 막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닌 아들은 엄마를 내치지는 못한다. 제임스는 자신의 집에서는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엄마에게 일러둔다. 하지만 그것이 레슬리에게 불가능한 일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레슬리는 아들의 집에서도 쫓겨난다. 유일한 짐인 작고 지저분한 분홍색 여행 가방과 함께.

  중독의 나락에 떨어진 이 여성이 범죄와 착취의 그물에 얽히는 건 시간 문제다. 굶주리고 잘 곳도 없으며 술을 갈망하는 레슬리에게 불순한 의도를 지닌 남자들이 다가온다. 술 한 잔, 햄버거 하나, 레슬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절실하다. 추행 당할 위기에서 용케 벗어난 레슬리가 다다른 곳은 허름한 모텔. 그곳 주인 스위니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 좋은 이 남자는 레슬리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술과 멀어지도록 돕는다. 하지만 술에 절은 삶의 관성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영향력 아래의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는 정서적 취약성을 지닌 하층 계급 여성이 알콜 중독의 악순환에 갇히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난한 싱글맘 레슬리에게 다가온 행운은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곧 사라진다. 여자는 집도 사지 못했고,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다.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레슬리는 이제는 다 커버린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공허한 울림과도 같다. 아들은 알콜 중독자 엄마를 거칠게 밀어낸다. 이 여자는 이제 사회의 제일 밑바닥으로 급전직하한다.

  그런 레슬리를 고향 친구와 지인들은 거리낌없이 조롱하고 모욕을 퍼붓는다. 영화는 알콜 중독의 수렁에 빠진 하층 계급 여성의 현실을 담담히 따라간다. 좌절된 꿈과 추락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 구부러진 삶의 길목에서 중독의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레슬리는 그 잘못된 여정을 돌이키려고 애를 쓴다. 겨우 술로부터 멀어진 레슬리는 우연히 보게 된 위스키병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 레슬리가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그 향을 맡을 때, 우리는 중독자에게 재활이란 그렇게 위태롭게 이어지는 과정임을 직관한다.

  감독 Michael Morris는 중독으로 삶이 망가진 레슬리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레슬리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원치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야할 때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 것. 레슬리가 힘겹게 스스로의 삶을 재건해내는 과정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생동감있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레슬리 역의 배우 Andrea Riseborough이다. 이 여배우는 알콜 중독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콜 중독자의 삶을 살아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핏기 없는 얼굴,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앤드리아 라이즈버러는 불안과 절망이 체화된 중독자 레슬리의 캐릭터를 온전히 구현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삶의 불안정성과 중독을 다룬 영화들

13, 000 피트의 앤(Anne at 13,000 Ft, 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anne-at-13000-ft2019.html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Come Back, Little Sheba(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come-back-little-sheba1952.html


***Ken Burns의 3부작 다큐 금주법(Prohibition, 2011)


1편
'A Nation of Drunkard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A Nation of Scofflaw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3편 '
A Nation of Hypocrite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3.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에는 영화 'Rat Fink'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살 청년 Schuyler Hayden은 영화에 출연해서 유명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초짜 배우에게 주연을 맡길 영화사는 없었다. 그래서 헤이든은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는 대로 돈을 그러모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Rat Fink(1965)'의 주인공 로니가 될 수 있었다. 스카일러 헤이든이 연기한 로니는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청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타를 가지고 화물 열차에 무임승차한 젊은 남자가 보인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단속반에 들킨 그는 달아나다가 기타마저 잃어버린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말 그대로 맨몸뚱이 뿐이다. 과연 이 무일푼의 무모한 가수지망생은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중년 여자를 유혹해서 훔친 돈으로 로니는 멋진 양복을 사입는다. 그리고 잘 나가는 클럽에 간다. 거기에는 이제 막 뜨고 있는 록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다. 로니는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수를 쳐다본다. 공연을 끝낸 가수가 마침내 차에 탔을 때, 로니는 차 안으로 담뱃불을 던진다. 미리 휘발유가 부어진 차는 폭발한다. 끔찍한 화상을 입은 가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로니에게서 정신병적인 징후가 감지된다. 이 사이코패스 가수 지망생은 그렇게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했다.

  로니는 그 가수의 소속사 사장 폴을 찾아간다. 데모 음반 작업으로 로니의 재능을 확인한 폴은 기꺼이 계약한다. 돈과 명성이 로니를 따라오지만, 비뚤어진 내면을 지닌 록스타의 행로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로니는 무분별한 연애와 향락에 몸을 던진다. 팬으로 만난 어린 여학생 베티를 농락하고 차버린다.

  흑백 필름 속의 스카일러 헤이든은 눈부시게 빛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스타가 되겠다는 24살 헤이든의 꿈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영화 속 로니는 헤이든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잘 생긴 외모와 음악적 재능, 거기에 집요한 열망까지 더해져 로니는 록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Rat Fink'는 음반 산업과 스타 시스템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폴은 화상을 입어서 더이상 쓸모없어진 신예 스타의 자리를 재빠르게 로니로 대체한다. 가수는 하나의 상품이며, 그 가치는 얼마만큼의 많은 돈을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폴은 자신의 상품인 로니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로니는 그런 폴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시하려 든다. 로니는 폴에게 자신의 수익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폴의 아내를 유혹하기까지 한다.

  갑작스럽게 얻은 명성은 파괴적 성향의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로니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결국 로니는 낙태를 거부한 베티를 죽인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로니는 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폴이 떠난 빈 녹음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부감 쇼트는 바닥에서 울부짖는 로니를 작고 불쌍한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든다. 마침내 로니의 자동차가 기차와 부딪히는 순간, 근처 가게의 주크박스에서는 로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한 하층 계급 출신 록가수의 꿈은 그렇게 스러진다.

  그렇다면 로니를 연기한 스카일러 헤이든의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졌을까? 영화는 폭망했고, 이 영화는 원본 필름의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헤이든은 37살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떴다. 2017년, 기적적으로 발견된 필름으로 Blue-ray가 복원판을 발매했다. 그렇게 'Rat Fink'에는 재능있는 젊은 배우의 꿈과 비운의 인생이 겹쳐져 있다. 이 영화는 또한 흑백 필름이 가진 명징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빌모시 지그몬드(Vilmos Zsigmond)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촬영 감독이었다. 그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McCabe & Mrs. Miller, 1971), '허수아비(Scarecrow, 1973)', '디어 헌터(The Deer Hunter, 1978)'를 촬영했다. 'Rat Fink'는 그의 초기작으로 위대한 촬영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빌모시 지그몬드가 촬영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리뷰

The Sugarland Express(1974),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27살이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1970-sugarland-express-1974.html

Winter Kills(1979), 이 망해버린 영화는 촬영만 좋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winter-kills-1979.html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영화들 리뷰: 오랜 세월 필름이 유실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경우

Joseph L. Anderson 감독, Spring Night, Summer Night(196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1960-spring-night-summer-night1967.html

Barney Platts-Mills 감독, Bronco Bullfrog(196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bronco-bullfrog1969-private-road1971.html

Frank Perry 감독, Last Summer(196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last-summer1969.html

George Romero 감독, The Amusement Park(197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amusement-park1975.html


*****Rat Fink는 속어로 너저분한, 혐오스러운 사람을 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사랑에 드리운 군국주의의 그림자,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데이비드 린(David Lean) '밀회(Brief Encounter, 1945)'는 우연히 만난 중년 남녀의 짧은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각자 가정이 있는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일탈 대신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介) 감독의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에도 영화 '밀회'의 남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등장한다. 도쿄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노리코(타나카 키누요 분)에게는 아픈 남편 미치요가 있다. 남편은 병 때문에 도쿄 근교 바닷가에서 요양중이다. 어느 날, 미치요의 새 주치의 에마(미후네 토시로 분)가 집을 찾는다. 처음엔 단순한 호감이었던 노리코의 감정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간다. 미치요는 그런 아내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챈다. 갑작스런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에마도 마찬가지.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는 마침내 결단의 순간에 다다른다.

  얼핏 보기에 통속적인 이 삼각 관계에는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늘 누워서 지내는 미치요의 병은 전쟁터에서 얻은 것이다. 결혼 직후에 징집으로 끌려간 그는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 노리코는 주중에는 도쿄의 가게를 지키고, 주말에는 아픈 남편을 보살피러 본가로 돌아온다. 남편에 대한 노리코의 애정이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단단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리코는 에마가 지닌 생의 활력과 건강함에 순식간에 매혹된다.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젊고 매력적인 의사는 가지고 있다.

  노리코가 결혼한 여성이고, 그 남편이 자신의 환자라는 사실은 에마를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뜨린다. 그는 미치요를 낫게 해야한다는 직업적 의무감과 노리코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들 사이에 끼인 남편 미치요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떠날까봐 조바심을 내고, 경쟁자인 에마를 향해서는 점잖게 경고한다. 취미로 시를 쓰는 미치요는 자신처럼 시를 좋아하는 에마에게 아내에 대한 사랑의 시를 써서 보낸다. 노리코와 에마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선을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에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잠시 빼두었던 결혼 반지는 결국 다시 노리코의 손가락에 끼워진다. 늘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에마는 노리코가 선물한 멋진 구두를 딱 한 번 신었을 뿐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보여주는 이 사랑의 행로에는 욕망 보다는 도덕적인 의무감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다. '결혼 반지'는 남녀의 사랑에 새겨진 군국주의의 상흔을 미묘하게 포착해낸다. 전쟁에서 병을 얻은 남편은 무력감에 시달리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연민을 느낀다. 역시 징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던 에마는 전쟁 기간 중에 자신이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자를 찾았다고 노리코에게 고백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마침내 진정한 첫사랑에 눈을 뜨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남자의 간절한 소원은 사랑하는 노리코의 무릎에 엎드려 우는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헤어진다. '결혼 반지'가 전후 좌절된 사랑의 초상을 그려냈다면, 시노다 마사히로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2. 새로운 전후 세대의 사랑,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

  러닝 타임이 67분에 불과한 영화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은 매우 간결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영화는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비춰주는 크레인 쇼트로부터 시작된다.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를 주인공들을 가까이에서 찍은 핸드 헬드 쇼트로 순식간에 전환시킨다. 그들 뒤로는 공장의 거대한 굴뚝이 보인다. 이 감독이 보여주는 이러한 역동적인 화면 구성은 관객을 영화 속 인물들의 현실로 빠르게 끌어들인다. 바야흐로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고도 경제 성장 체제로 진입하는 길목에 서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경제의 하부 구조를 담당하는 노동 계급의 젊은이들이다. 

  케이코와 사에코 자매는 어촌 마을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자매는 공장에서 일한다. 사에코는 동료 노동자 코마쿠라를 언니에게 소개하고, 곧 둘은 연인이 된다. 케이코의 월급은 부모의 빚을 갚는 데에 나가버린다. 가난에 진력이 난 케이코가 집을 탈출할 방법은 결혼 뿐이다. 22살인 케이코에게 곧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다. 세일즈맨 사츠모토가 케이코의 부모를 통해 결혼 의사를 비춘다. 하지만 케이코의 아버지는 집안 빚을 대신 갚아줄 어촌 계장의 아들을 케이코와 결혼 시킬 심산이다. 가진 것 없는 코마쿠라의 걱정은 커져만 간다.

  영화는 변모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칙칙한 공장 풍경과 대비되는 화려한 도심의 세계도 있다. 새 구두 살 돈을 번번이 집안 생활비로 뜯기는 케이코는 원조 교제의 유혹에 흔들린다. 우연히 만난 동창은 그렇게 해서 맘껏 돈을 쓰고 있다. 케이코가 선망하는 모던 걸의 삶은 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공장 경리인 케이코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츠모토가 사준 새 구두에 케이코의 마음이 흔들린다. 과거에는 암시장 상인이었지만, 이제 그는 번듯한 회사의 직원으로 돈도 잘 번다.

  "언니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코마쿠라잖아!"

  동생 사에코는 사츠모토와 결혼하겠다는 언니의 결심을 질책한다. 공장 노동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친구 미요코도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요코의 행복 선언은 오래가지 못한다. 케이코와 사에코는 미요코의 남편이 미요코에게 낙태를 종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돈이 없다. 결국 자매는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미요코와 마주친다. 그 장면은 하층 노동 계급이 처한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에 이르는 사람은 케이코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은 '우리들의 결혼'이다. 시노다 마사히로는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 자리한 빈부 격차, 계층적 갈등을 '결혼과 연애'라는 주제로 변주해낸다. 케이코에게 돈은 낭만적 사랑을 압도하는 중요한 명제이다. 그와는 달리 동생 사에코는 사랑없는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에코에게 가난은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케이코는 새 구두를 신고 멋진 정장 차림으로 사츠모토와 함께 떠난다. 사에코는 뒤늦게 자신이 코마쿠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입부와 절묘한 댓구를 이루듯 영화의 마지막은 출근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코마쿠라와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 사에코의 모습이다. '우리들의 결혼'은 경제 발전이 가속화시킨 전후 세대의 분화, 가치관의 혼란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나루세 미키오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

밥(Meshi, Repast,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repast-1951.html

아내(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아내의 마음(A Wife's Heart,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wifes-heart-1956.html

안즈코(Anzukk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104분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89분




1. 애국 영화 속 전복된 젠더 이미지,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그의 부친 김필순은 의사로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게 되자 김필순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압박도 커져갔다. 결국 김필순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영화계로 흘러들게 된다. 준수한 외모의 그에게 운이 따른다. 그가 출연한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인 김염(金焰)은 그렇게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쑨위(孫瑜) 감독의 1935년작 영화 '대로(The Big Road)'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기근을 피해 길을 떠나는 한 가족을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죽고, 10년 후에는 아이의 아버지도 길에서 죽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부모를 잃은 아이 진(김염 분)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진은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건설 현장 인근의 식당에는 유쾌하고 발랄한 두 아가씨 딩샹과 자스민(리 리리 분)이 있다. 진과 동료들은 두 아가씨들과 친분을 쌓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잠시, 일본군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도로 건설 현장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그들이 짓는 도로는 중국군의 진군을 위한 것이다. 일본군과 내통한 지역의 유지 후는 도로 건설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진과 동료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후는 그들을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장제스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일본군 보다도 공산당의 존재를 더 위협적으로 인식했다. 영화 '대로'에서 일본군의 존재는 '적군'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로 제시된다. 그 검열의 배경에는 항일 의식을 고취하려다가 일본을 도발시키게 되면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국민당 정부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일본군을 일본군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 기이한 영화가 당시 관객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군과 내통한 부자 후는 악인으로 묘사되며, 그에 의해 핍박을 받는 진과 동료들은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것은 일본군의 공습에 의해 진과 동료들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으로 명료해진다.

  국민당 정부의 시책에 따르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로'에는 감독 쑨위의 전복적 젠더 관점이 드러난다. 서로의 몸을 친밀하게 쓰다듬는 딩샹과 자스민의 관계는 느슨한 동성애적 연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남성들이다. 내성적인 딩샹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깝다면, 자스민은 좀 더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식당을 찾은 노동자 손님들 앞에서 자스민은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묘사한다. 남자들은 자스민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외모에 매혹된다. 그럼에도 자스민의 노래는 남성들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스민의 강인한 면모는 후의 감옥에 갇힌 진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격동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로맨스에 매달리는 수동적인 캐릭터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도로 건설로 중국군의 항일 투쟁에 기여하는 진과 동료들처럼 여성들 또한 그 전선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필요가 있었다. 쑨위 감독의 여성에 대한 흥미로운 젠더 설정은 '대로(1935)' 이전 해에 만든 영화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자스민 역의 리 리리(黎莉莉)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는 '스포츠 정신'과 '국가'라는 무형의 개념과 긴밀히 결합된다.


2. 여성의 신체에 투사된 국가,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오늘날 중국이 약한 이유는 신체를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린 잉(리 리리 분)은 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왔다.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왈가닥 시골 아가씨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린 잉은 해골처럼 마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하이에 존재하는 빈부 격차는 야윔과 비만에 대한 묘사로 드러난다. 그 두 가지 모두 올바르지 않은 병적인 상태이다. 조화로운 신체에 대한 린 잉의 열망은 중국의 부국강병과도 직결된다. 우선 자신의 신체부터 단련하기로 마음먹은 린 잉은 체육학교에 진학한다.

  쑨위 감독은 배우 리 리리를 위해 영화 '체육 황후'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리 리리를 위한 맞춤 영화인 셈이다. 당시 무성 영화계의 독보적 스타였던 여배우는 이 영화에서 건강한 체육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리 리리가 연기한 린 잉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뛰어난 단거리 선수로 거듭난다. 그런 린 잉의 뒤에는 젊고 잘 생긴 코치 윤이 있다. 윤은 제자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매우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린 잉을 대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다. 국가라는 이상적 관념과 결합한 린 잉의 신체는 잘 단련되어야 하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전한 스포츠 정신도 깃들어야 한다. 윤은 린 잉이 화장품으로 얼굴을 꾸미는 것조차 반대한다.

  '체육 황후'는 실질적 내전 상태에 처한 국민당 정부가 필요로 하는 여성상을 잘 보여준다. 쑨위는 체육 학교의 아침 일과를 면밀하게 제시한다. 기상한 여학생들은 체조를 시작하며, 일사불란하게 세면장으로 향한다. 린 잉의 빛나는 치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양치질 장면은 보건위생에 대한 공익 광고처럼 보일 정도이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이론적인 것을 비롯해 실질적인 훈련이 이어진다. 린 잉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체육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연이은 우승으로 자만해진 린 잉은 기존의 절제된 생활에서 벗어난다. 또래 운동 선수와의 연애, 음주가무의 유혹에서 린 잉을 구해내는 사람은 윤이다. 심기일전한 린 잉은 전국 체육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노린다.

  로맨스의 경로에서 이탈한 영화는 주인공 여성의 성공 신화로도 직진하지 않는다. 린 잉의 급우는 승리에 대한 지나친 갈망으로 신체를 혹사하다가 경기 도중 사망한다. 그 죽음을 본 린 잉은 충격을 받는다. 1등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고 느낀 린 잉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일부러 놓친다. 왜 린 잉이 1등의 왕관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이 영화가 설파하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은 승리와 타이틀에 대한 집착에 있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절제에 있다. 그리고 이는 전시중인 국가가 국민에게 바라는 덕목이기도 하다.

  쑨위는 '체육 황후'를 통해 이상화된 국가 이미지를 여성의 신체에 투사한다. 분명히 그것은 프로파간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여성의 몸이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온전한 생의 활력을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린 잉의 진정한 성취는 체육 황후의 왕관이 아닌, 신체의 훈련을 통해 습득한 통제의 감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녀는 패자가 아니며 주체적인 여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김염(金焰, 1910-1983)의 경력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 이후에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배우이며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두 번째 부인 진이(秦怡)와는 달리 김염은 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잘못된 위수술 후유증으로 중년 이후의 삶이 망가져 버렸다. 거기에다 그의 가족은 문혁의 광풍에 휩쓸리면서 큰 고통을 받았다.



리 리리(黎莉莉, 1915-2005)의 배우 경력은 매우 순조롭게 이어졌다. 리 리리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는 후학들에게 연기를 지도했다. 리 리리의 아들은 중국 군부의 실력자 예젠잉(叶剑英, 마오쩌둥 사후 임시 국가 부주석의 지위에 오름)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문혁의 피바람을 이 여배우도 피해갈 수 없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青)은 자신이 배우였던 시절에 잘 나가던 리 리리에 대한 미움을 갖고 있었다. 홍위병에 의해 머리를 삭발당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문혁 시기를 견딘 리 리리는 나중에 복권되었다.



쑨위(孫瑜, 1900-1990)는 미국에서 영화 제작 교육을 받은 엘리트 영화인이었다. 그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시절에 정권 친화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마오쩌둥에 의해 비판받은 '우순의 삶(The Life of Wu Xun,1950)'은 쑨위의 경력에 치명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친 교육개혁자 우순은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에 반동분자로 몰렸다. 그런 인물의 전기 영화를 만든 쑨위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화계에서 잊혀진 인물로 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인은 손녀딸과 함께 대보살 고개에 다다른다. 손녀딸이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노인은 작은 석탑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손녀딸 더는 고생시키지 않게 얼른 이 늙은 몸을 데려가 달라고 되뇌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방랑승의 복장을 한 남자는 일순간에 칼을 휘둘러 노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손녀딸 오마츠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아무 이유 없이 노인을 죽인 살인자의 이름은 류노스케(나카다이 타츠야 분). 사무라이인 그는 뛰어난 검술을 지녔으나, 그 영혼은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는 막부 말기,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피와 광기에 사로잡힌 검귀(劍鬼) 류노스케의 행적을 따라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1860년 봄, 사쿠라다몬 사건(桜田門外の変, The Sakuradamon Incident) 직후'라는 자막이 뜬다. 그 사건은 막부 대신 이이 나오스케가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한 일을 가리킨다. 사쿠라다몬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후 막부파와 천황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막부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侍, Samurai Assassin, 1965)'는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대극이다. '대보살 고개'는 '사무라이(1965)'에서 이어지는 막부 말기 시대극 연작같은 느낌도 준다. 천황파의 공세 속에서 막부파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1863년, 막부를 옹위하기 위해 '신선조(新選組)'가 결성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

  죄없는 순례자 노인을 죽인 일은 류노스케의 내면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음을 입증한다. 류노스케는 검술 문파 사이의 평가전에서 상대방을 가차없이 죽인다. 대결 전에 남편을 위해 져달라는 부탁을 하러 간 오하마는 류노스케에게 겁탈당한다. 그 일로 류노스케는 아버지와 문파로부터 쫓겨난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 들어가고, 오갈 데가 없어진 오하마는 류노스케와 함께 하며 아들을 낳는다. 살기를 내뿜는 류노스케의 칼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운명도 뒤흔든다. 할아버지를 잃은 오마츠는 처음엔 영주의 시녀가 되었다가, 결국은 유곽에 팔려 게이샤가 된다. 형을 류노스케에게 잃은 효마(카야마 유조 분)는 복수를 위해 시마다(미후네 토시로 분)의 문하에 들어가 검술을 연마한다.

  영화의 원작자 '나카자토 카이잔(中里介山, 1885-1944)'이 미완성으로 남긴 소설 '대보살 고개'는 불교적 세계관인 '연기(緣起)'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악업을 쌓아나가는 류노스케의 행로를 따라간다. 그의 칼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 순례객 노인과 오하마의 남편은 죽일 이유가 없는데도 죽였다.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 남자는 급기야 자신의 아이를 낳은 오하마까지 죽여버린다. 그런 류노스케의 살인귀적 본성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각광을 받는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영화 속 신선조는 천황파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암살을 일삼는 폭력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세리자와와 콘도 이사미는 신선조 내부의 권력을 두고 투쟁한다. 세리자와는 류노스케를 자신의 사냥개처럼 부린다.

  '대보살 고개'가 보여주는 막부 말기의 혼란상은 새로운 시대로의 개벽을 위한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배 계급 내부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을 뿐이다. 신선조의 후원 요청을 받은 영주는 막부파와 천황파 모두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 냉소적인 영주는 시녀 오마츠에게 살벌한 게임을 제안하면서 의미심장한 비유를 한다. 그는 막부와 천황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들을 받치는 사무라이들은 그 무게 때문에 가라앉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낡은 권력의 껍질이 이제 벗겨지고 있다면서, 영주는 단검으로 오마츠의 기모노를 오비(허리끈)부터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8분에 이르는 류노스케의 혈투이다. 류노스케는 자신이 죽인 무수한 이들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힌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광분하며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 콘도 이사미의 수하들이 들이닥친다. 폐쇄된 공간 속에 오로지 피와 비명과 죽음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에도 막부 시기 축적된 '무(武)'의 단말마적 최후이기도 하다. 죽어가면서도 류노스케는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오카모토 키하치는 이 무시무시한 악인 사무라이의 살기를 정지 화면(freeze frame) 속에 가두면서 영화를 끝낸다. 영화 '대보살 고개'는 악인 류노스케를 통해 죽음이 횡행하는 막부 말기의 폭압적 체제 변화를 통렬하게 부각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에도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고샤 히데오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주연의 '어용금(御用金, Goyokin,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goyokin-1969.html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shinsengumi-1969.html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사회 비판적인 현대극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The Elegant Life of Mr. Everyman, 196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3.html

나카다이 타츠야는 시대극을 비롯해 현대극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1958)'에서 이치카와 라이조와 함께 출연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대보살 고개'에서 무사 하마 역을 연기한 카야마 유조는 배우 우에하라 켄의 아들이다. 그는 배우 보다는 가수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카야마 유조 주연의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scattered-clouds-1967.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