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Rain People'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여자, 임신했어요(She is pregnant)."

  여자는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그렇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여자의 이름은 나탈리. 아내로서, 아이 엄마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낀 여자는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영화 'Rain People(1969)'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범상치 않은 초기작이다. 이 영화가 나온 해에 'Easy Rider(1969)'가 나왔다. 'Rain People'은 'Easy Rider'와 기이한 영화적 댓구를 이룬다. 길 잃은 청춘들의 일탈적 로드 무비와 집을 뛰쳐나온 가정 주부의 뒤틀린 여행기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어디론가 간절히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오는 날 아침, 나탈리는 식탁에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떠난다. 목적지도,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나탈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히치 하이킹을 하려는 젊은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을 'Killer'로 부르라며 해맑게 웃는다. 대학을 그만 둔 전직 미식 축구 선수와 집 나온 가정 주부는 그렇게 동행이 된다. '킬러'의 과거는 단편적인 몽타주로 제시된다. 그는 경기에서 뇌를 다쳤다. 대학 당국은 그에게 보상금을 쥐어주며 방출해 버렸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킬러에게 나탈리는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에게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점차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탈리는 어떻게든 킬러를 자신의 여정에서 밀쳐내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킬러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양계장의 막일꾼 정도면 킬러에게도 괜찮지 않을까? 뱃속 시커먼 양계장 주인에게 킬러는 좋은 먹잇감이다. 킬러는 양계장 주인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좋은지 나탈리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저 여자가 네 엄마야?" 나탈리는 그가 킬러의 돈과 노동력을 착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선다.

  나탈리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남편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탈리는 자신이 모질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아내의 옷도 맞지 않고, 엄마로서 살아갈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여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난 나탈리가 막연하게 꿈꾼 자유에는 성적인 일탈도 포함하고 있다. 킬러를 차에 태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킬러는 '남자'가 아니라 머리를 다친 '아이'였다. 배 속의 아기조차 버거워서 버리려고 하는 이 여자에게 킬러는 이미 태어난 아이와도 같다. 혈혈단신, 자신을 보살펴주던 어머니마저 잃은 킬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킬러는 나탈리를 엄마처럼 따른다. 그런데 이 낯선, 새로운 엄마는 킬러의 곁에 머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엄마 나탈리는 킬러를 양계장에서 빼내온다. 버릴 수 없는 어른 아이 킬러를 데리고 다니는 나탈리의 불안한 여정은 고든과의 만남으로 급변한다. 과속을 하던 나탈리는 고속도로 순찰대원인 고든에게 적발된다. 순전한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나탈리를 초대한다. 낡은 트레일러에서 어린 딸과 살고 있는 고든. 코폴라는 킬러의 과거처럼 고든의 과거도 몽타주 쇼트로 보여준다. 4년 전의 화재는 그에게서 임신 중인 아내와 집을 앗아갔다. 킬러와 나탈리, 그리고 고든까지 이렇듯 'Rain People'의 인물들은 모두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킬러는 나탈리를 겁탈하려는 고든을 막으려다가 죽는다. 나탈리는 킬러의 시신을 안고 흐느낀다. 죽음으로써 킬러는 나탈리의 진짜 아들이 된다. 나탈리는 자신과 남편이 함께 킬러를 보살피고 사랑해 주겠다고 말한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나탈리의 약속을 뒤로 하고 영화는 끝난다. '빗속의 사람들', 그들의 불안하고 슬픈 여정은 시대의 우울과 맞닿아 있다. 자유를 만끽했던 히피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으며, 민권 운동의 격렬한 열기도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의명분과 집단의 가치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기 시작했다. 'Easy Rider'의 폭주족들이 시작한 길 위의 방랑은 1970년대 자동차 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미국인들의 지난한 여정이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Rain People'로 그 서막을 장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1970년대 미국의 로드 무비(Road Movie)

바바라 로든의 Wanda(197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wanda1970-happy-old-year2019.html


좌절된 욕망과 모험의 질주,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1970.html
    
히피 시대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hippie-movement-electra-glide-in.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1.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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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의 심연 속에서 탈주를 꿈꾸다,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나치 치하에서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가 가진 선전 선동의 힘을 잘 알았던 나치는 Ufa를 설립해서 영화 산업을 국가적으로 통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의 영화들이 모두 프로파간다(Propaganda)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나치는 영화 제작에 집요한 간섭과 검열을 강제했지만, 그에 맞서는 창작자들도 여럿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Helmut Käutner)도 그런 감독들 가운데 하나였다. 코이트너가 1944년에 만든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는 매우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헨드릭과 빌리는 자신들의 바지선으로 운하와 강을 오가며 화물을 운송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그들은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안나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두 친구는 안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바지선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서로 약속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육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소망과 오래도록 이어온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헨드릭과 빌리. 영화는 삼각 관계라는 진부한 틀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 여름에 촬영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영화를 찍은 곳이 독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헨드릭과 빌리의 바지선은 운하 근처의 대도시를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담아낸다.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끊임없이 배들이 오가는 강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폭격으로 일부 손상된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는 해도, 이 영화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로맨스 영화는 나치 치하의 독일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상업 영화들은 로맨스와 코미디 장르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헬무트 코이트너의 '다리들 아래로'도 그런 영화들 가운데 하나였다. 온나라가 총력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에서 나치는 이런 종류의 영화들에 쉽게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급과 상영이 보류되었다가 나치 패망 이후에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영화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 영화들은 이른바 '변절자 영화(Überläufer Film)'라고 불렸다.

  영화 '다리들 아래로'를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는 닫힌 현실로부터 탈주하려는 열망이다. 두 친구가 운행하는 바지선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돈다. 바지선 선원인 헨드릭과 빌리, 음식점 종업원인 안나. 이 하층 계급 노동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에는 도무지 눈요깃감이 될만한 번지르르함이 없다. 그럼에도 코이트너가 보여주는 이 사랑 이야기에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빌리는 안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헨드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꺼이 뒤로 물러난다. 약속대로라면 헨드릭은 배를 포기하고 떠나야 하지만, 빌리는 헨드릭과 안나를 바지선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빌리와 헨드릭, 안나는 바지선 위에서 행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세 명의 주인공들은 육지가 아닌 물 위의 삶을 택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전쟁은 막바지에 달했고, 필시 그것은 독일의 패배로 끝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 로맨스 영화에는 삶에 대한 의지, 자유에의 갈망이 느껴진다. 


2. 폐허 위에서 돌아보는 나치의 폭정,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

  이제 전쟁은 끝났다.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연합군에 의해 나라는 둘로 나뉘었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 서독에 주둔한 미국. 이 두 나라가 영화 산업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찍부터 영화를 체제 선전의 효과적 도구로 파악한 소련은 동베를린에 남아있던 Ufa 스튜디오를 바탕으로 DEFA(Deutsche Film-Aktiengesellschaft)를 설립했다. 소련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독일인들을 재교육시키고 역사적 책임을 각인시키기를 원했다. 검열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동독 지역에서 영화 제작은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다. 그와는 달리, 미국은 서독을 자국의 헐리우드 영화를 배급, 상영하는 시장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서독 지역에서의 독일 영화 제작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헬무트 코이트너는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를 내놓았다. '잔해 영화(Trümmerfilm, Rubble Films, 1946-1949)'로 불리는 이 시기 일련의 영화들에는 패전 이후 독일이 직면한 여러 사회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 '우리들의 시대에'는 주인공이 자동차이다. 의인화된 차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폐차 직전의 낡은 자동차에는 이전의 주인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들과 흔적이 남아있다. 7개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독특한 차의 내력은 나치 독일의 흥망성쇠와 절묘하게 겹친다. 공장에서 멋지게 제작된 새 차가 만난 첫 번째 주인은 시빌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다. 시빌은 연인 스테판이 멕시코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심한다. 스테판과 헤어지고 오는 길, 시빌의 차는 길을 가득 메운 군중에 의해 나아가질 못한다. 때는 1933년 1월 30일, 그 날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시빌은 스테판이 멀리 떠나는 이유가 나치 때문임을 알게 되고, 차를 돌려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차의 두 번째 주인은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퇴폐 음악으로 찍혔다. 정치적 탄압을 받는 예술가의 좌절에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다. 오랫동안 액자 공방을 운영해온 노부부는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빌헬름의 아내 샐리는 유태인이다. 아내는 자신이 더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으니 이혼을 하고 남편이 모든 것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이 일어난다. 유태인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회당은 무차별적인 테러와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나치 치하 유태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절망한 부부는 결국 집에 불을 지르고 삶을 마감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는 연인들이, 그 다음으로는 소련 지역으로 부임하는 독일군 장교가 파르티잔에게 공격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의 여섯 번째 주인은 젊은 여자 수리공 에르나이다. 에르나는 연로한 남작 부인을 기차역에 데려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작 부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남작 부인을 구하려는 에르나의 선의는 경찰에 의해 저지된다.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혼모 마리와 군인 요제프이다. 요제프는 우연히 만난 미혼모 마리와 아기를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요제프는 탈영병으로 몰리고, 사살될 위험에 처한다. 다행히 선량한 군인이 요제프를 살려준다.

  이 영화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부분은 나치의 피해자로서 '선한 독일인'에 대한 묘사이다. 나치의 악행은 독일 국민들을 가해자의 위치에 세웠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어조로 모든 독일인들이 나치의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영화의 이러한 어조는 교묘한 책임 회피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던 헬무트 코이트너의 진정성은 그러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강력한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전후 폐허의 잔재에서 나치의 폭정을 되새기며, 그 시기에 스러진 죄없는 독일인들을 기념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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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어느 농촌 마을. 밭일을 하던 농부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어귀에서는 바퀴가 빠진 트럭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과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화면 위로 흐르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을의 과거로 떠나는 신호탄이 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은 종전 직전에 벌어진 농촌 마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곡 첫 부분인 '주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慈悲頌, Kyrie)'가 비감하게 흐르는 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영화 전편에 걸쳐 불길하고 음울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은 '무쿠리(ムックリ, Mukkuri, 아이누족의 전통 악기)'가 쓰였다. 그 음악과 함께 영화는 컬러 화면의 현재에서 흑백의 과거로 곧바로 진입한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젊은 군인이 귀향한다. 4년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이름은 히데유키. 그는 소노베 집안의 장남이다. 히데유키는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탄 상이군인과 마주친다. 전쟁에서 왼손을 잃은 그 남자 코이치는 히데유키의 여동생 키에코에게 청혼을 한 터였다. 히데유키는 코이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코이치는 중국에서 복무했던 히데유키의 부대 상관이었다. 히데유키는 코이치가 아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했던 만행을 떠올린다. 그런 잔학한 남자와 여동생을 결혼시킬 수는 없다. 코이치가 싫은 것은 키에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소노베 가족에게 그 청혼의 거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쿄의 공습을 피해 홋카이도로 온 소노베 일가는 이장 타카모리의 도움을 받았다. 코이치는 바로 그 타카모리의 아들이다. 이제 자존감에 상처받은 코이치는 비열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오즈 야스지로가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극으로, 나루세 미키오가 여성과 가족의 일상을 세밀하게 파고들 때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비판적 사회극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Twenty-Four Eyes, 1954)'는 소학교의 여선생과 제자들에게 닥친 전쟁의 여파를 통렬하게 그려낸다.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1963)'은 어떤 면에서 그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종전을 앞둔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폭력과 광기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말을 타고 마을 곳곳을 순찰하듯 돌아다니는 코이치는 군국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노베 일가가 마을의 농작물을 훔치고 다른 농부들의 밭을 망치는 원흉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렇게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갈등은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의 전황과 겹치며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불러온다.

  키에코를 덮치려는 코이치가 우발적으로 죽게 되면서 이 마을의 끔찍한 핏빛 전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들의 죽음에 광분한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노베 일가의 막내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마을 주민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살기는 기실 제국주의 일본에게 향해야하는 것이 맞다. 내레이터는 그 마을에서 11명의 남자가 전장에서 죽었다고 일러준다.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실성한 주민은 총을 들고 폭도의 무리에 합류한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무지와 뒤엉키며 '소노베 일가'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가난하고 힘없는 외지인 소노베 일가는 이제 공공의 적으로 척살의 대상이 된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 "

  어머니는 자신과 딸을 죽이겠다고 몰려오는 광란의 무리를 응시한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산골의 비좁은 길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펼쳐보이는 이 지옥도는 전쟁의 광기로 마비된 일본인들의 내적 폐허에 대한 은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학살은 침묵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패배한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입에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금기였다.

  흑백 화면 속의 끔찍했던 마을의 과거는 이제 컬러로 바뀐다. 힘을 합쳐 바퀴 빠진 트럭을 끌어낸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진다. 그들은 광란의 기억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했고, 망각이라는 선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일본의 진정한 패배가 반성없는 망각에 있음을 지적한다. 무고한 피가 스며든 홋카이도의 산천은 핏빛 전설을 품고 있다. 그 전설을 잊지 않고 들려주는 일. 영화의 사회적 책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아이누 원주민의 전통 악기 무쿠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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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 태종대는 해안 절벽의 비경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태종대에서 극적인 결투 장면을 찍은 홍콩 무협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으로 잘 알려진 정소동(程小東) 감독의 데뷔작 '생사결(生死決, Duel to the Death, 1983)'이 그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소림사 서고에 침입하는 일단의 닌자 무리가 보인다. 그들은 무술 비서를 찾아내어 재빠르게 사라진다. 홍콩 무협 영화에 일본의 닌자들이라니, 뭔가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때는 명나라 말기, 무림은 10년마다 열리는 중국과 일본 무사의 결투를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소림사의 보청운이, 일본에서는 신음파(新阴派) 무사 미야모토가 낙점된다. 소림사 문파는 무술 종주국의 위엄을 보이고 싶어한다. 한편 일본 신음파도 자신들의 무공이 중국에 뒤지지 않음을 입증할 계획이다. 각자 자신의 나라와 문파의 명예를 짊어진 청운과 미야모토,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닌자와 소림사 승려들의 화끈한 대결을 보여준다. 쇼브라더스(Shaw Brothers)의 무협 영화에서 무술 지도를 담당했던 정소동은 자질구레한 부연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검은 옷의 닌자들은 칼싸움에서 밀리자 폭약으로 자폭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 다음에 뜨는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 정소동의 이름과 함께 '생사결(生死決)'의 타이틀이 박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투. 소림사의 보청운은 이 결투에 나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청운에게 무술이란 자기 수련의 방식이지, 승부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청운의 주변인들은 그런 그에게 결투의 의지를 불어넣으려 애쓴다. 숲에서 사는 청운의 스승은 별다른 욕심도 없어보이는 걸인의 행색이다. 그런 그조차 청운에게 반드시 이기라고 말한다.

  한편 일본의 무사 미야모토도 대결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다. 그의 스승은 변장을 하고 제자를 습격해 그 무술 실력을 점검한다. 스승은 제자의 칼에 죽어가면서 문파의 계명을 외우게 한다. 무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야 한다, 하시모토는 스승의 주검 앞에 승리를 맹세한다. 이렇게 두 명의 무사가 대결을 준비하는 동안, 무림과 막부에서는 비밀스런 공모가 진행된다. 막부의 쇼군은 중국의 선진 무술을 탈취해 일본 무술을 부흥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 무림의 하후파 수장은 소림파의 청운이 무림 대표로 나간 것에 불만을 품는다. 청운을 없애야 자신의 딸 승남을 결투에 내보낼 수 있다. 그는 막부에 협력한 댓가로 결투의 승리를 보장받아 하후파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청운과 미야모토의 대결은 이제 순수한 무술 승부가 아니며, 국가와 권모술수가 얽히는 장이 된다. 두 무사는 자신들을 둘러싼 음모에 저항한다. 미야모토는 결투의 진정성을 훼손하려는 닌자들을 처단한다. 그에게는 쇼군의 명령 보다 문파의 승리가 중요하다. 납치된 소림사의 사형(師兄)을 구해내 돌아가려는 청운을 붙잡는 미야모토. 그는 청운의 사형을 죽이고 청운을 마지막 결투에 불러낸다. 마침내 둘은 해안가 절벽에서 맞붙는다. 애국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이 홍콩 무협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 장면은 한국의 태종대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두 무인의 대결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무예의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태종대는 오롯이 무국적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생사결'에서 정소동은 현란한 와이어 액션과 정교하게 짜여진 무술의 합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눈속임이 없다. '생사결'은 무협 영화가 슬로 모션과 CGI로 뒤범벅이 되기 이전의 진정성을 대표한다. 폭약을 비롯해 거대한 연, 분신술을 이용한 닌자들의 싸움 장면에서는 정소동표 무협의 기발한 착상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추고 있는 미덕은 절묘한 균형 감각이다. 소림 무사와 일본 사무라이의 대결은 협소한 애국주의의 틀을 벗어난다. 두 주인공은 경계가 없는 '무(武)'에 속해있다. 그 세계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극한의 무자비함이 존재한다. 죽음을 앞둔 미야모토는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발등에 칼을 꽂고 몸을 지탱한다. 청운은 죽음에서 벗어났으나 왼손가락 둘과 오른팔을 잃었다. 이 처절한 결투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비감함을 남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강호(江湖, Jianghu)에 대한 지아장커의 현대적 해석 영화, 강호아녀(江湖儿女, 201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2015-2018.html

적룡 주연의 무협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magic-blade-1976.html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사무라이 시대극,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0/sword-of-doom-1966.html

시대극의 장인 미스미 켄지 감독의 영화, 무숙자(無宿者, 1963)와 검(劍, 1963)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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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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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모킹 재킷(Smoking Jacket)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담배 피울 때 입는 옷이다. 서구 영화 속에서 대저택의 주인이 서재에서 입는 편안한 실내복을 생각하면 된다. 벨벳과 실크 소재로 만든 이 옷은 매우 고급스럽다.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 1930-2008)희곡 '관리인(The Caretaker)'에서 노숙자 데이비스는 공짜로 스모킹 재킷을 얻는다. 거리에서 떠돌던 노숙자가 상류 계층이 입는 스모킹 재킷을 걸친 모양새는 영 어색하기만 하다. 데이비스에게 그 재킷을 가져다준 사람은 애스턴이다. 그는 건달에게 흠씬 얻어맞을 뻔한 데이비스를 구해주었다. 애스턴은 오갈 데 없는 데이비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재워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호의인데, 데이비스는 신발이 닳았으니 괜찮은 구두 하나 내놓으란다. 끊임없이 욕설과 상스런 말을 내뱉는 데이비스. 그런 노숙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는 애스턴. 그리고 애스턴의 동생 믹. 해롤드 핀터는 비좁은 방에서 이 세 명의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로 3막의 희곡을 만들어 냈다.

  클라이브 도너(Clive Donner) 감독 '관리인(The Caretaker, 1963)'은 해롤드 핀터의 동명 희곡 'The Caretaker(1960)'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러닝타임 1시간 45분. 좁은 방에서 도대체 세 명의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어떻게 시간을 채워가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재적인 극작가 핀터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애스턴의 호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데이비스의 행태는 뻔뻔함 그 자체이다. 애스턴이 구해온 신발에 끈이 없다며 불평하고, 끈을 찾아서 주니까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한다. 애스턴이 데이비스의 잠꼬대 때문에 잠을 못잤다고 하자, 옆방에 사는 외국인들이 내는 소리라며 억지를 쓴다.

  왜 애스턴은 무례한 노숙자 데이비스를 인내하는가? 아마도 그 단서는 애스턴의 방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이 떨어지는 천장에는 양동이가 매달려 있다. 방에는 오래된 신문과 폐지 뭉텅이가 높다랗게 쌓여있다. 오만 잡동사니로 채워진 그 방은 겨우 몸을 움직이고 침대에서 잠만 잘 수 있다. 애스턴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들려준다.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갔던 그는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 치료에 동의한 사람은 애스턴의 모친, 그 일 이후 애스턴은 사회와 담을 쌓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동생 믹은 형과 같이 살지는 않지만, 가끔 들러서 형을 챙긴다. 믹은 형의 방에 낯선 손님, 아니 침입자가 왔음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애스턴의 비좁고 어지러운 방은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데이비스가 쏟아내는 인종차별적 언사는 전후 영국으로 유입된 외국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사회의 최하층 극빈자 데이비스는 잠깐 함께 살던 아내가 도망간 이후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저속하고 야만적으로 행동하는 이 노숙자는 자신의 불만을 모두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 말끝마다 늘어놓는 Sidcup은 그가 만들어낸 견고한 망상의 체계를 입증한다. 데이비스는 Sidcup에 자신의 신원을 증명해줄 모든 서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남자는 '맥 데이비스'라는 이름 말고도 '버나드 젠킨스'라는 이름도 쓰고 있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남자 데이비스는 애스턴의 영역을 점차로 침범해가며 애스턴을 착취하려고 든다.

  데이비스가 꼭 가겠다고 말하지만 결코 가지 않을 'Sidcup'처럼, 애스턴의 환상은 언젠가 지을 '창고'로 표현된다. 동생 믹은 형이 살고 있는 건물을 멋지게 리모델링할 꿈을 가지고 있다. 같이 살지도, 거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 이 형제는 데이비스의 존재를 매개로 소통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관리를, 믹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인테리어 공사를 제안한다. 데이비스는 애스턴을 배제하고, 자신보다 권력의 우위에 선 믹에게 기댈 궁리를 한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데이비스가 믹에게 애스턴을 '정신이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한 이후로 무너진다.

  믹은 데이비스를 사기꾼으로 부르며 떠나라고 말한다. 애스턴 또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드는 데이비스를 거부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가 풍기는 썩은 내와 잠꼬대를 견디지 못한다. 데이비스는 자신에게서 구린내가 난다는 것을 끝까지 부인한다. '냄새'로 표현되는 계층간의 근원적 이질감은 결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냄새와 계층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를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Parasite, 2019)'에서도 볼 수 있다.

  니콜라스 뢰그(Nicolas Roeg)의 효율적이고 정교한 촬영, 물 떨어지는 소리를 비롯해 끊임없이 신경을 긁는 Ron Grainer의 독특한 사운드, 믹 역의 Alan Bates를 비롯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이 모든 것이 영화 '관리인'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관리인'에는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정체된 분위기,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 과거의 환상에 매몰되어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병리적 인간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사무엘 베케트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3)'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데이비스가 가려는 'Sidcup', 애스턴이 지으려는 '창고', 믹이 꿈꾸는 '멋진 건물', 그 세 명의 인물들이 원하는 것들은 디디와 고고가 기다리는 '고도'와도 같다. 해롤드 핀터는 방향성을 상실한 전후 세대의 내면적 공허를 부조리극 '관리인'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Nicolas Roeg 감독의 영화 'Walkabout(197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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