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분의 법칙. 언젠가 읽은 시나리오 작법 책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20분 안에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한다'. Sony Picutres의 2021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The Mitchells vs. the Machines, 2021)'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기준을 살짝 넘어간다. 20분이 지나도록 이 애니메이션은 좀 심심하다. 미첼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로 그 중요한 20분을 흘려 보낸다. 그러다 23분이 될 때에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AI(인공 지능)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그렇다.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AI 로봇 군단에 맞서는 미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애니메이션의 도입부는 딸 케이티와 아빠 릭의 소원해진 사이를 부각시킨다. 영상물 제작을 좋아하는 케이티는 영화 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케이티는 가족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로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물으며 케이티를 실망시킨다. 상심한 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릭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대륙 횡단 여행을 계획한다. 케이티는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여행에 동참한다. 한편 기업가 마크 보우먼은 새로운 로봇 라인을 발표한다. 그런데 발표회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로봇들은 인간들을 마구 공격하고 포획한다. 그 시간, 공룡 테마 파크에 머물고 있던 미첼 가족은 로봇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는다. 아빠 릭, 엄마 린다, 딸 케이티, 아들 애런. 초능력자도 아닌 이 평범한 미첼 가족은 로봇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내러티브의 한 축은 미첼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또 다른 한 축은 로봇 군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AI PAL과 미첼 가족과의 대결이 차지한다. 복잡하게 꼬인 가족 모험 서사의 종착지는 당연히 로봇 군단의 패배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주제는 결국 '가족주의'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미첼 가족은 영리하고 무지막지한 로봇들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엄마 린다는 로봇들에게 붙잡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한 능력의 여전사로 변모한다. 모성애는 그 어떤 것도 파괴시킬 수 있는 절대 반지급의 능력이 된다. 아빠 릭은 혼돈과 파괴의 전장에서 딸과의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멀어진 부녀 사이를 복원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눈물겨운 가족애는 미첼 가족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인류를 로봇들의 마수에서 구해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가족주의'가 다가올 AI를 비롯해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필요한 가치인가? 아니, 그것은 인류가 처한 여러 어려움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로봇 군단과 맞서는 가족 모험 서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공 지능과 인류의 미래'라는 중요한 명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AI 로봇 회사의 수장 마크 보우먼 Meta의 CEO 마크 주커버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마크 보우먼은 청바지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새로운 로봇 라인을 프레젠테이션한다.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신제품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은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 IT 기업의 전통이 된지 오래이다.

  첨단 기술 혁명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새로운 AI 로봇을 소개하는 CEO 마크는 로봇이 사람들의 삶에 가져다줄 편안함을 강조하지만, 이는 곧 재앙으로 뒤바뀐다. 그것을 만들어낸 마크를 비롯해 그 누구도 AI 로봇을 통제하지 못한다.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된 인공 지능과 인류가 공존하는 미래가 결코 장밋빛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개발자들은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AI 로봇에게 많은 능력을 부여하고 있지만, AI의 판단은 인간이 전부 다 알 수 없는 블랙 박스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로봇 군단의 우두머리 AI PAL은 인간을 포획해서 멸절에 이르게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첼 가족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단절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미첼 가족은 함께 모인 식탁에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연결'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의 네트워크는 오히려 가족을 비롯해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 개인을 소외시킨다. 미첼 가족은 기계적 가상 연결망이 파괴된 상황에서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분열된 가족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로 뭉친다. 더 나아가 미첼 가족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를 로봇 군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가족주의'는 AI 시대의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지점은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인공 지능 로봇들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기능할 수 있는 AI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물론 미첼 가족은 기계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봇 군단과 그들의 가모장(家母長, 애니메이션 속에서 목소리를 담당한 이는 배우 올리비아 콜먼이다)은 파괴되었다. 가족은 평화로운 현실로 복귀했다. 그렇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역설적으로 다른 형태의 AI PAL과 로봇 군단이 등장하는 미래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인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러닝 타임 114분을 순식간에 보내고 난 뒤에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무겁고도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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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어떤 상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Jérémy Clapin의 애니메이션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J'ai perdu mon corps, 2019)'에서 주인공 나우펠에게 일어난 일이 그러하다. 바닥에 내려앉은 파리, 천천히 흐르는 피, 부러진 안경, 쓰러진 남자, 그리고 잘려진 그의 손. 화면은 흑백으로 변하고 어린 소년 나우펠과 그 부모가 보인다. 다시 컬러로 변환된 화면에서는 의학 연구소의 냉장고에서 손이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할 줄 아는 이 똑똑한 손은 거침없이 파리 시내를 질주한다. 고층 둥지에서 자신을 밀어내려는 비둘기의 목을 비틀고, 지하철 정류장에서는 라이터를 켜서 쥐떼의 공격을 막아낸다. 잘려진 손의 여정 위로 청년이 된 나우펠의 이야기가 컬러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흑백의 화면으로 겹쳐진다.

  청년 나우펠의 현재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피자 배달부로 일하는 그는 매번 배달에 늦기 일쑤이다. 삼촌에게 얹혀 사는 나우펠에게 집은 길바닥 보다도 못한 곳이다. 비정한 삼촌은 나우펠의 몇 푼 안되는 일당을 빼앗고, 못돼먹은 사촌은 나우펠을 괴롭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우펠은 가벼운 접촉 사고로 마르티네즈 부인의 피자를 약속 시간보다 늦게 배달하게 된다. 현관 인터폰으로 배달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던 나우펠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호감을 느낀다. 그 여성의 진짜 이름이 가브리엘이며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우펠. 가브리엘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나우펠은 가브리엘의 삼촌 지지의 목공소에 일자리를 얻는다.

  잘려진 손이 필사적으로 향하는 목적지가 나우펠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진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이후로 나우펠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접촉이 차단된 채 살아왔다. 피아노를 치는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나우펠의 꿈은 그 비극적인 교통 사고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나우펠에게 가브리엘에 대한 사랑은 삶의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나우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심한 나우펠은 한순간의 실수로 손을 잃는다.

  도입부에 등장한 파리는 나우펠의 삶에 수시로 틈입한다. 어린 나우펠은 어떻게 하면 파리를 잡을 수 있냐고 아빠에게 묻는다. 파리에 대한 나우펠의 기묘한 집착은 결국 나우펠의 삶을 뒤틀리게 만든다. 붉은 눈의, 기분나쁘기 짝이 없는 이 파리는 어떤 면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불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것, 그리고 나중에 손이 잘리는 사고까지. 한편 파란만장한 도시 탐험 끝에 나우펠의 잘린 손은 잠자고 있는 주인의 곁에 다가간다. 우리는 나우펠의 손이 결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면 손은 왜 나우펠을 찾아온 것일까?

  잘려진 손은 그 자체로 삶에서 맞닥뜨리는 상실과 고통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비가역적(非可逆的, irreversible)이다. 그 어떤 것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같은 상태로 복원될 수 없다. 나우펠의 삶에서 부모를 잃은 교통 사고와 손이 잘리는 사건이 그러하다. 우주인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년은 파리 하층 주거지역에 사는 피자 배달부가 되었다. 거기에다 손마저 잃었다. 이 불행한 청년은 어디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할까? 잘려진 손은 현실의 도시 파리와 나우펠의 과거를 동시에 탐사한다. 흘러넘치는 부모님의 사랑,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들을 카세트 리코더에 담았던 소년 나우펠, 그리고 즐겨들었던 노래들... 손이 기억해낸 나우펠의 과거를 현재의 나우펠도 카세트 리코더를 다시 틀어보며 복기한다. 그렇게 해서 잘려진 손과 어린 나우펠의 기억, 청년 나우펠의 현실은 마침내 조우한다.

  이제 나우펠은 고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홀로 서있다. 관객은 나우펠의 잘린 손목을 감싼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본다. 어떤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 그래도 바라보고 견디어내야만 하는 것. 이 청년이 하게 될 선택은 손의 필사적인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어째서 'I lost my hand'가 아니고 'I lost my body'인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제레미 클라팽의 이 기이한 잔혹 동화는 뜻밖의 여운을 남긴다. 'Blender'라는 3D 애니메이션 제작 도구를 사용해 2D와 3D를 합성한 기법상의 혁신도 돋보인다. 덕분에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손의 활약에서 풍부한 영화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잘려진 손'의 엽기적 모험담에는 인생의 진실과 함께 희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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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백화점에서 잠깐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다 들어간 곳이 아주 길고 좁은 복도였다. 유니폼을 입은 여점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직원들의 휴게실 같은 곳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의 가려진 곳에는 그런 공간이 있었다. Philip Barantini의 영화 'Boiling Point(2021)'는 관객을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 뒷편으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고성과 비난, 연민과 격려, 분노와 짜증이 공존한다. 앤디(Stephen Graham 분)는 런던의 고급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관청의 위생 담당 검사관에게 화가 치미는 소식을 듣는다. 검사관은 주방의 위생 상태 불량으로 안전 등급이 별 5개에서 3개로 강등되었다고 통보한다. 분노한 앤디는 주방 요리사들을 혹독하게 질책한다. 부주방장 칼리는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해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 손님들이 몰려들고 주방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과연 레스토랑 Jones & Sons의 직원들은 이 날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이 영화를 싱글 테이크(a single take), 즉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 무려 92분 동안 카메라는 끊기지 않고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이러한 촬영 방식이 주는 긴장감은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보일링 포인트'는 마치 리얼 타임 고급 레스토랑 탐험기 같다. 영화는 앤디의 출근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계속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앤디의 목소리와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이 사람은 무언가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검사관으로부터 받은 불쾌한 통보, 신참 요리사들의 실수, 거기에 레스토랑 매니저는 예약 손님을 너무 많이 받아놓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앤디를 진정시키는 것은 부주방장 칼리. 차분하고 이성적인 칼리는 앤디를 대신해 주방 직원들을 다독인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의 문제는 주방에서만 터지지 않는다. 매니저 베스와 서빙 직원들은 진상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플루언서(influencer) 고객은 메뉴에도 없는 스테이크를 해달라고 하고, 인종차별적인 백인 고객은 서빙하는 흑인 직원에게 적대적 감정을 표출한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성 손님들은 남자 직원에게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레스토랑 직원들의 유사 가족적인 연대감이다. 그들은 손님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들과 나누며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이것은 앤디가 이끄는 주방에서도 동일하다. 요리사들의 실수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앤디는 그들과 자신이 한 팀이라는 것을 잘 안다. 수석 셰프의 자리는 군림하고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방의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설거지를 담당하는 여자 직원은 게으름을 피우는 불성실한 동료에 대해 앤디에게 하소연한다. 이 여성의 서툰 영어 억양은 현재 영국에서 비숙련 저임금 노동을 떠맡고 있는 동유럽 이주 노동자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앤디는 직원의 불평불만이 주방을 마비시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앤디가 수석 셰프로서 보여주는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문제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동업자였던 셰프는 음식 평론가 애인을 레스토랑에 데려온다. 그는 앤디에게 빚독촉을 하며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힘든 것은 앤디 뿐만이 아니다. 매니저 베스는 손님들의 무리한 요구를 주방에 그대로 떠넘긴다. 부주방장 칼리는 베스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주방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레스토랑을 잘 꾸려가고 싶은 베스는 자신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화장실에서 눈물을 쥐어짠다. 칼리는 과도하게 밀려드는 주문과 다혈질 주방장 앤디를 보조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 디저트를 담당하는 요리사의 팔에 난 자해 흔적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그 상처를 발견한 동료가 그를 따뜻하게 포옹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보일링 포인트'의 등장인물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주방에서 끓어 넘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와 감정들이다.

  영화 속에서 앤디는 흰색 텀블러에 든 음료를 수시로 들이킨다. 주방의 열기가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의 끝부분에 가서야 그가 텀블러에 들이붓는 것이 '보드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방은 결코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불행한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먹는 이들이 과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보일링 포인트'는 고급 식문화 산업에 조소(嘲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내는 근원적 풍경은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지불하는 댓가는 합당한가?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침탈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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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문화적 다양성을 포장하는 특별한 방법:

메이의 새빨간 비밀(Turning Red, 2022) 

 


  남자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중편 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비슷한 일이 13살 소녀 메이에게도 일어난다. 메이는 벌레가 아닌 붉은 털을 지닌 레서 판다(Lesser panda)로 변한다.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에 메이는 혼비백산할 지경. 그런데 신기하게도 붉은 판다였던 자신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메이에게 일어난 것일까? 중국계 캐나다인 애니메이터 Domee Shi 감독의 '메이의 새빨간 비밀(Turning Red, 2022)'은 13살 소녀의 일상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도미 시가 2018년에 내놓은 10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 'Bao(중국어로 '만두'라는 뜻)'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다. 그 단편은 장성한 아들과 멀어진 엄마의 내면을 응축적으로 담아내었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서 도미 시는 13살 소녀 메이의 삶으로 들어간다.

  '헬리콥터 맘(helicopter mom)'. 메이의 일상은 엄마의 철두철미한 계획표에 의해 진행된다. 엄마 밍은 메이가 미래의 UN 사무총장이 될 거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착하고 순종적인 메이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메이는 그런 엄마를 따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사춘기,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비밀을 엄마한테 말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동네 오빠, 즐겨듣는 아이돌 그룹 4*Town의 노래... 딸의 일상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살피는 엄마에게 메이의 비밀은 곧 탄로난다. 밍은 딸이 좋아하는 남학생을 찾아가 모욕을 주고,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메이는 그런 엄마가 미우면서도 두렵다. 그런 와중에 메이는 붉은 판다로 변신하는 일을 겪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노라면, 이민자 2세 출신인 도미 시가 지닌 '정체성'이라는 화두의 무게가 느껴진다. 단편 'Bao'에서 중년 여성은 만두를 먹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모양의 만두를 발견한다. 여자는 아기 만두를 애지중지 키운다. 소년에서 어른이 된 만두는 점점 엄마와 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아들 만두. 눈물을 흘리며 붙잡아도 소용이 없자 엄마는 아들 만두를 꿀꺽, 삼켜버린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중년 여성이 마주한 정체성의 위기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의 관객이라면 이러한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적 가족주의 문화에서 부모는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매우 끈끈한 유대 관계를 이어간다. 그 독특한 부모 자식 관계의 틀은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헬리콥터 맘인 밍은 메이를 과도하게 통제하고, 메이는 그런 엄마의 착한 딸이 되려고 기꺼이 노력한다.

  도미 시는 중국계 캐나다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메이의 엄마 밍은 집안의 가모신(家母神) 선예를 사당에 모시며 섬긴다. 메이가 붉은 판다로 변한 내력에는 이 가모신의 신화적 과거가 얽혀 있다. 전쟁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자식과 마을을 지켜야했던 선예는 하늘로부터 비범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해서 붉은 판다는 메이의 집안 여성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삶 속에서 강인한 동물신의 능력은 숨기고 억눌러야만 한다. 메이의 엄마, 이모들, 할머니까지 그들은 모두 붉은 판다의 힘을 장신구 속에 봉인한다. 이 여성 혈족들은 메이도 자신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붉은색은 상서로운 색이야. 메이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중국인들에게 붉은색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붉은 판다는 그렇게 중국의 가족주의와 페미니즘 서사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붉은 판다'는 중국계 이민자 여성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하는 정체성의 상징일 수도 있다. 가족의 주관하에 메이는 붉은 판다의 힘을 봉인해버리는 의식을 치룬다. 그러나 그 의식의 마지막 순간에 메이는 엄마와 이모, 할머니가 걸었던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인 메이는 자신이 충분히 붉은 판다의 힘을 통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창조력일 수도, 민족적 정체성일 수도 있다. 메이의 그런 선택은 소녀에서 여성, 한 인간으로서의 눈뜸이 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13살 소녀의 사춘기는 분명한 문화적 경계선을 가지며, 젠더적 각성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내게는 서구 백인의 주류적 가치관을 충실히 반영해온 디즈니가 이런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물론 디즈니의 주요 관심사는 문화적 다양성이 아니라 '돈'일 것이다. 중국은 매우 거대하고 매력적인 시장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그 시장의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기획, 제작해 왔다. 올해 미국에서 크게 흥행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의 멀티버스(Multiverse)에는 중국 문화와 아시아인에 대한 조잡스런 패러디가 가득하다. 경박한 이 영화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가 어떻게 미국 관객에게 먹혀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해 하는 중이다. 결국은 전통적인 가족주의로 서툴게 봉합되는 이 영화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재미' 밖에 없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와 비슷한 측면에서 '메이의 새빨간 비밀'도 분명히 중국계 이민자 문화에 대한 한정적이고 진부한 고정 관념에 매여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겉으로만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할리우드의 번지르르한 수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 시는 거기에서 '즐거움'과 '감동'을 무난하게 이끌어 낸다. 영화 속에서 부드럽고 끈적거리게 늘어지는 4*Town 아이돌의 노래는 충분히 중독적이다. 메이가 수시로 변하는 붉은 판다, Lesser panda의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중국계, 캐나다인, 여성 애니메이터가 첫 장편의 무난한 출발을 뛰어넘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나름 기대가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한국계 미국인 영화 감독들의 작품 리뷰

정이삭 감독, 미나리(Minari, 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Justin Chon 감독, Gook(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la-justin-chon-gook2017.html

Andrew Ahn 감독,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ndrew-ahn-spa-night2016-driveways2019.html

Julian Kim, Peter S. Lee 공동 감독, Happy Cleaners(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hyphen-happy-cleaners2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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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4부



쇼치쿠(Shochiku, 松竹) 영화사의 이상한 모험

우주 대괴수 기라라(宇宙大怪獣ギララ, The X from Outer Space, 1967), 니혼마츠 카즈이(二本松嘉瑞)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 니혼마츠 카즈이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 사토 하지메(佐藤肇)



4. 지구 멸망의 비관적 세계관: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


  '우주 대괴수 기라라(1967)'를 만든 그 이듬해, 니혼마츠 카즈이 감독은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을 내놓았다. 영화는 '원자 폭탄의 발명은 인류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대학살(Genocide)'이라는 영어 제목이 암시하듯, '곤충대전쟁'에는 비관적 세계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지구 멸망의 단초가 되는 것은 '독충'이다. 핵폭탄을 싣고 베트남으로 향하던 미군 수송기는 곤충 무리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아남 군도에 추락한다. 미군 수뇌부는 비밀리에 생존자와 핵폭탄의 행방을 조사한다. 두 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한 명의 생존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미군의 죽음이 독충과 관련있다고 믿게된 곤충학자 나구모 박사는 독충의 근원지를 찾아나선다. 마침내 나구모 박사는 살인 곤충을 만들어낸 장본인과 마주하게 되는데...

  '곤충대전쟁'에는 당시 일본이 바라본 국제 관계의 역학이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미국은 오만한 패권 국가로 비춰진다. 미군 수사대는 무죄한 섬 주민을 미군 살해범으로 몰아간다. 그들이 나구모 박사를 비롯해 일본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강압적이고 무례하다. 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통치를 받았다. 그 시기에 일본이 미국에 대해 갖게된 두려움과 증오의 감정이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시무시한 핵폭탄을 사용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국가로 그려진다. 또한 영화는 '냉전(Cold War)'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다. 독충을 만들어낸 이는 나치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 애너벨이었다. 이 유대인 여성은 무자비한 살상과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애너벨과 그 추종자들은 공산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제 영화 속에서 대결의 주체는 미국과 공산국가로 확장된다.  

  독충의 가공할 살상력은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독충에 단 한번 물리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며, 그들은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한다. 나구모 박사는 독충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독충에 물리는 생체 실험을 감행한다. 박사는 이 살인 곤충이 단지 독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임을 알게 된다. 곤충들은 인류를 징벌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 결코 웃지 못할 지구 멸망의 대 시나리오는 사토 하지메 감독의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기장은 피의 바다를 떠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비행기 창문에는 새들이 부딪히며 죽는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붉은 덩어리와 충돌한 비행기는 외딴 산기슭에 추락한다. 불시착한 비행기 승객들은 그곳에서 뜻밖의 존재와 마주한다. '흡혈귀 고케미도로(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명백한 계승자이다.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거침없이 침탈해서 좀비처럼 만들어 버린다. 돈 시겔(Don Siegel) 감독의 이 영화는 냉전 시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우주선의 생명체는 점액질의 물체로 인간의 몸에 스며든다. 그렇게 인간의 몸을 빼앗은 외계인 고케미도로는 '인류를 멸망시키러 왔다'고 선포한다.

  '곤충대전쟁'이 폭력과 살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흡혈귀 고케미도로' 또한 전쟁의 광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영화 속에서 부패한 정치인은 무기판매상과 공생의 관계에 놓여있다. 무기판매상은 사업을 위해 정치인에게 뇌물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 공유한다. 남편을 베트남전에서 잃은 미국인 여성은 네이팜탄의 흉터를 보여주며 전쟁에 대한 증오심을 토로한다. 영화는 원폭의 참상을 목격한 일본의 전후 트라우마가 반전(反戰), 더 나아가 지구 멸망에 대한 어두운 전망과 조응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외계 문명의 침입자 고케미도로는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에 대한 심판자와도 같다.

  '곤충대전쟁'과 '흡혈귀 고케미도로'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며 끝난다. '곤충대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자가 뱃속의 아이와 무사히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생존한 두 명의 승무원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믿지 못한다.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다. 지구 밖에서는 고케미도로의 우주선이 대기중이다. 과연 당시 일본 관객들은 두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명한 점은 쇼치쿠 영화사의 이 대담한 모험이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쇼치쿠는 이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가 기나긴 침체기를 견뎌낼 동아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니혼마츠 카즈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곤충대전쟁'이 끝을 장식했다. 사토 하지메 감독은 TV 시리즈와 특촬물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다. 쇼치쿠의 짧은 일탈은 그렇게 끝났다. 오늘날의 관객은 그 독특한 영화들 속에 전쟁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본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승객들이 칸사이 사투리(関西弁, かんさいべん)로 대화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롭게 들린다. 비행기가 그쪽 관서 지방 공항에서 승객들을 태운 듯.

***Kathy Horan은 '곤충대전쟁'의 애너벨,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미군 미망인 닐 부인으로 출연했다. 외국인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흔한 일이었던 모양.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에서는 1960년대 일본 영화에 자주 출연한 흑인 배우 Chico Roland를 볼 수 있다. 그다지 연기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주일 미군 출신의 이 배우는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검은 태양(Black Sun)'에서는 주연 배우 자리를 꿰찼다.



쿠라하라 코레요시(蔵原惟繕) 감독, 검은 태양(Black Sun, 196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black-sun-1964.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1-house-of-terrors-1965.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2-house-1977.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3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3-x-from-outer-space-19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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