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뽑은 2022 올해의 영화


1. Aftersun(2022)


  31살이 된 딸은 자신이 11살 때에 아버지와 떠난 터키 여행을 회상한다. 오래전 여행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알려주는 뜻밖의 진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슬픔과 감동으로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낄 것이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ftersun2022.html

2.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

  1923년 아일랜드 내전을 배경으로 한 부조리극.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서 오랜 우정을 이어온 두 남자. 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은 뜻밖의 파란을 불러온다. 배우들의 놀라운 열연,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서 관객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banshees-of-inisherin2022.html

3. Tár(2022)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 지휘자 타르는 경력의 정점에서 갑자기 추락한다. 어떻게 타르는 무너져 내렸을까? 영화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어두운 내면을 깊이있게 성찰한다. 이 영화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여진도 감지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  

4. Armageddon Time(2022)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돌아본다. 그가 지나온 소년 시절은 1980년대의 시대상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rmageddon-time-2022.html


5. The Fabelmans(2022)

  칠순을 훌쩍 넘긴 스티븐 스필버그가 털어놓는 그 자신의 진짜 이야기. 마법과도 같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인생에 갑자기 들어왔고, 그것이 소년의 운명을 바꾸었다. 'The Fabelmans'는 가족이 그의 영화 세계에 미친 영향, 스필버그에게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 Compartment No. 6(2021)

  재능 넘치는 핀란드 감독의 독창적인 영화. 이 영화는 1990년대 소련 붕괴 직전의 사회상을 러시아의 자연 풍광과 겹쳐놓는다. 판이하게 다른 두 남녀 주인공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게되기까지의 과정은 놀랍고 감동적이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mpartment-no-62021.html


7. Boiling Point(2021)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을 배경으로 그려낸 원 테이크 영화(single take film).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방장의 동선을 따라가는 일은 현실 속에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민낯과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boiling-point2021.html

8. 소설가의 영화(2022)

  홍상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쨌든 흥미있음을 증명해주는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ovelists-film-2022.html


다큐멘터리

9. Cow(2021)

  Luma라는 이름의 소를 통해 육식의 미래를 성찰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luma-cow2021.html

10. The Rehearsal(2022)

  단연코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이 6부작 다큐 시리즈는 가상의 리허설을 통해 인간 심리의 복잡한 층위를 탐구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the-rehearsalhbo-tv-series-season-1.html

11. Ascension(2021)

  다큐는 중국의 소매 상품 집산지인 저장성 이우(義烏)를 비롯해 중국 각지에 자리한 공장의 생산 공정을 담아낸다. 매우 건조한 이 다큐는 우리 내면에 자리한 물질에 대한 욕망,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ascension-2021.html

12. Attica(2021)

  1971년에 일어난 미국 아티카 감옥 폭동(Attica uprising)을 5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이켜 살펴 본다. 다큐는 사건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당시 촬영 필름들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아티카 사건이 지금의 미국 사회에 갖는 의미, 미국 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도 살펴볼 수 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leave-no-trace2018-bait2019.html



그 밖의 주목할만한 영화

1. Sundown(2021)

  부유한 중년의 남자가 마주하게 된 생의 마지막 순간. 멕시코로 떠난 그는 과연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ndown2021.html

2. Playground(2021)

  새 학교로 전학온 어린 남매가 마주한 엄혹한 현실. 따돌림과 폭력, 상처와 눈물. 운동장은 즐거운 곳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투쟁의 장이 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playgroundun-monde-2021.html

3. Yuni(2021)

  인도네시아 영화의 새로운 바람. 감독은 여고생 Yuni가 겪는 시련을 통해 인도네시아에서의 여성 인권, 사회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yuni2021.html

4. The Cathedral(2021)

  독특한 관점의 가족 영화. 딱딱한 내레이션과 절제된 연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TV 자료 화면이 소년의 성장기를 구성한다. 소년의 이야기는 감독 Ricky D'Ambrose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에게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는 반짝거리는 창의성과 진정성이 공존한다.

5. Nitram(2021)

  호주에서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다. 총기난사범 Nitram의 내면을 따라가는 일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그럼에도 그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nitram2021.html

6. Pebbles(2021)

  인도 영화에 있는 노래와 춤, 액션은 이 영화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난한 소년이 마주한 차갑고 어두운 현실이 인도의 메마르고 거친 풍광과 함께 펼쳐진다. 결코 지나치기 어려운 작은 보석과도 같은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pig2021-pebbleskoozhangal-2021.html

7. Turning Red(2022)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포장하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turning-red-2022.html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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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카인주(Rakhine State)는 미얀마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주이다. 리카인주에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도 아라칸족(Arakanese)이,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도 로힝야족(Rohingya), 그리고 여러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라카인주의 어느 마을, Hla라는 이름의 산파(産婆)는 신참 조수 Nyo Nyo를 수련시키는 중이다. Nyo Nyo는 로힝야족으로 이슬람교도이다. Hla는 불교도로 자신의 진료소를 갖고 있다. 2016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라카인주는 준전시() 상태에 처해 있다. 학살을 피해 이미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로 떠났다.

  라카인주에 남아있는 로힝야족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라카인주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로 인해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Hla는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로힝야족을 돕기 위해 Nyo Nyo를 조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Hla는 동족들로부터 불교도가 로힝야족을 돕는다는 비난과 위협을 받는다. 그 때문에 진료소 운영도 어려워진다. 과연 Nyo Nyo의 산파 실습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미얀마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 Hnin Ei Hlaing는 5년에 걸쳐서 Hla와 Nyo Nyo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불교도인 Hla이 로힝야족 Nyo Nyo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연대의식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Hla의 말과 행동에서는 인종차별적 태도가 드러난다. Hla는 Nyo Nyo에게 'kala'라고 거리낌 없이 부른다. kala의 원래 뜻은 '남부 아시아 출신(South Asian descent)'이지만, 현재는 로힝야족을 멸시하는 '검은 얼굴(Black face)'이란 뜻의 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흑인(Black people)에게 깜둥이(N-word, negro)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Nyo Nyo는 Hla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진료소일을 돕고 있는 Hla의 남편은 TV에서 정부가 만든 프로파간다 방송을 주로 시청한다. 그 방송은 로힝야족이 미얀마 국민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있으며, 그들은 마땅히 축출해야할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Nyo Nyo는 Hla의 진료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산파 실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가 불교도의 이슬람교도 진료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Nyo Nyo는 자신의 진료소를 열려면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대도시 양곤에는 Nyo Nyo의 여동생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픈 Nyo Nyo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로힝야족의 라카인주 밖으로의 이동은 금지되어 있다. 그 즈음, Nyo Nyo는 셋째 아기를 임신하고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한다. Hla는 그런 Nyo Nyo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Nyo Nyo가 산파일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며 비난한다.

  Nyo Nyo가 처한 상황은 핍박받는 소수 민족 여성의 현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라카인주는 로힝야족에게 삶의 터전이 아닌 폐쇄된 게토(ghetto)로 그곳에서 로힝야족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로힝야족 남자들은 제대로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농사를 지을 땅도 빼앗겼다. 다큐는 라카인주의 로힝야족이 실업과 마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린다. Nyo Nyo의 남편도 직업이 없다. Nyo Nyo는 국제 NGO단체에서 지원하는 마이크로 파이낸스(Micro-finance)사업을 맡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리고 마침내, 무리하게 빚까지 내어가며 자신의 진료소를 연다. Nyo Nyo의 집 마당에 세워진 진료소 겸 잡화점은 로힝야족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자신의 진료소를 갖게 된 Nyo Nyo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Nyo Nyo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Nyo Nyo의 마을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고 포연(砲煙)이 안개처럼 마을을 감싼다. 다큐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여자는 함께 웃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그들의 웃음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이미 라카인주를 떠난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하다. Nyo Nyo를 비롯해 라카인주에 남은 로힝야족의 미래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자라난다. Nyo Nyo는 자신의 어린 막내딸이 언젠가 라카인주를 떠나 대도시 양곤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길 꿈꾼다. 로힝야족 산파 Nyo Nyo가 꾸는 그 꿈의 시작에는 불교도 산파 Hla가 있었다. Hla가 Nyo Nyo와 맺고 있는 인본주의적 연대(solidarity)에는 로힝야족에 대한 오랜 인종차별, 증오와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다. 다큐는 분쟁 지역(conflict zone) 라카인주의 두 산파의 관계를 통해 미얀마의 인종적 갈등과 복잡한 정치 현실을 가늠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두 산파 Nyo Nyo와 H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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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바라본 전후의 일본 사회와 태양족


*이 글에는 영화 '태양과 장미'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한여름의 바닷가, 피서 인파로 가득한 해수욕장에 한 청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다. 누군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바다로 몰려간다. 그러자 청년은 자리를 비운 누군가의 소지품을 잽싸게 훔쳐서 달아난다. 청년은 같은 또래의 불량배 친구들와 어울리며 절도 행각을 이어간다. 하는 일 없이 동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주먹다짐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다. 키요시의 모친은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마음을 다잡고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그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Keisuke Kinoshita) 감독의 영화 '태양과 장미(太陽とバラ, The Rose on His Arm, 1956)'는 전후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 사회를 응시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태양'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 '태양족(太陽族, Taiyouzoku)'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단어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가 1955년에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에서 유래되었다. 소설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하며 무절제한 향락에 빠진 청년 세대의 모습을 그렸다. 기성 세대에게 태양족의 출현은 충격이었지만, 젊은이들은 태양족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했다. 영화사들도 태양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태양과 장미'의 주인공 키요시를 '태양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하층 계급 불량배 청년의 모습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태양족'은 키요시의 모친이 가정부로 일하는 부잣집 아들 마사히로이다. 부유한 부모를 둔 마사히로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비싼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 마사히로가 키요시가 마음에 든다며 호의를 베푼다. 그는 키요시를 공장에 취직시켜주고, 자신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키요시를 끼워주기도 한다. 키요시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는 마사히로를 동경하면서도 증오하는 양가 감정을 갖게 된다. 이 영화의 이러한 갈등 구조는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영화의 원작은 Patricia Highsmith의 소설 'The Talented Mr. Ripley(1955)',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소설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태양과 장미'의 플롯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키요시와 마사히로의 관계에 내재된 갈등은 단순히 계급적인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마사히로의 입장에서는 가정부의 아들인 키요시와 어울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키요시는 마사히로가 왜 자신에게 잘해주는지 묻는다. 마사히로는 '키요시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라고만 답한다. 감독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생전에 명백히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동성애자였다. 영화 속 마사히로가 키요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묘한 욕망으로 얽혀있다. 어떤 면에서 마사히로는 감독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마사히로의 키요시에 대한 동성애적 갈망을 최대한 숨긴다. 대신에 계급적 우위에 선 마사히로의 가학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마사히로는 부자 친구들 앞에서 키요시를 놀리고 모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마사히로가 키요시에게 자신의 옷장에서 멋진 셔츠를 꺼내어 입게 할 때에 드러난다. 키요시는 싸구려 셔츠를 벗고 마사히로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마사히로에게 키요시는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다. 키요시는 마사히로가 쓰는 돈과 향락에 종속되어 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가난한 청년과 부유한 태양족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거기에 더해 전쟁의 여파가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키요시의 가족은 빈곤과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키요시는 부모가 팔라우(Palau)에서 지낼 때 태어났다. 2차 대전 시기, 일본은 아시아 곳곳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키요시의 부모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이 점령한 팔라우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패전과 함께 키요시의 가족은 돌아와야만 했다. 결국 암시장 상인이 되어 생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키요시의 아버지는 자살했다. 키요시의 모친은 그러한 비극적 가족사를 키요시에게 상기시키며 키요시가 사회의 일원으로 안착하길 소망한다. 하지만 키요시는 어머니가 바라는 정상적인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장미'는 키요시 가족의 희망을 상징한다. 키요시는 어린 시절에 병으로 죽을 뻔했었다. 기적적으로 아들이 목숨을 건진 후, 모친은 장미 꽃밭에 기쁨으로 쓰러졌던 일을 회상한다. 이후 키요시의 어머니에게 장미는 잊을 수 없는 꽃이 되었다. 하지만 모친은 지금 생계를 위해 두 딸과 함께 쉴 새 없이 종이 장미를 접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이 가족은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며 살아갈 뿐이다. 속썩이는 아들이기는 해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키요시는 팔에 장미 문신을 새긴다. 어쩌면 키요시의 그 문신은 어머니의 소망대로 살아가고픈 그 나름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키요시의 어설픈 태양족 따라하기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키요시는 자신과 가족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마사히로를 칼로 찌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에게 있어 계급 갈등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살의(殺意)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격렬함을 내포한다. 절망으로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 부친처럼 키요시도 같은 방식으로 삶을 끝낸다. 키요시의 팔에 새긴 희망의 장미는 그렇게 으스러진다.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남아있었으며, 전후의 놀라운 경제 성장은 빈부 격차를 더 크게 만들고 있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태양족 열풍에 가려진 전후 일본 사회의 그늘을 냉철히 응시한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0/legend-or-was-it-1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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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필드(Todd Field)가 그려낸 예술가의 어두운 심연(深淵)



*이 글은 영화 '타르(2022)'의 부분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페트라의 아빠야."

  냉정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 아이에게 말하는 사람은 금발의 중년 여성이다. 여자의 딸 페트라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자신을 페트라의 아빠라고 소개하는 이 여자의 이름은 '리디아 타르'. 베를린 필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여성 수석 지휘자이다. 영화의 도입부, 뉴요커 페스티벌에서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는 타르는 길고 화려한 이력으로 소개된다. 커티스 음악원 졸업, 빈 대학교 음악학 박사, 페루 원주민 마을에서 5년을 보내면서 민속 음악 연구, 2013년에 베를린 필 지휘자로 선출, 에이미와 토니 오스카 그래미 수상... 눈부시게 빛나는 타르의 경력은 이 여성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짐작케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어지는 음악계 관계자들과의 대화는 타르의 세속적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은퇴한 마에스트로는 타르의 든든한 지원자이며, 동료 지휘자는 타르의 음악적 통찰력을 배우려고 비굴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지휘자를 내치고 자신의 사람으로 바꾸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제까지 남성들이 주류였던 지휘계에서 타르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지휘자로서 타르의 경력에는 '여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 여자는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스스로를 '아빠'로 소개한다. 

  뉴욕에서 돌아온 타르가 베를린의 집에서 마주하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아프고 불안해 보이는 동거인 샤론이다. 샤론은 타르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현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타르가 열렬히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은 딸 페트라. 페트라는 타르와 샤론이 입양한 딸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타르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교향악단을 지휘할 때의 타르도 온화한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악단을 휘어잡는 타르의 모습은 과감하며 힘이 넘친다. 매일 하는 조깅을 비롯해 복싱으로 신체를 단련한다. 이 여성 지휘자의 삶은 전형적인 남성, 가부장제의 세계로 규정된다.

  타르의 재능은 놀라운 경력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타르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타르는 '아코디언'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설립해서 여성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서클에서 타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타르에게 일상은 조화로운 소우주처럼 보인다. 치밀한 비서 프란체스카는 타르의 일정을 완벽하게 관리한다. 동거인 샤론은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타르에게는 악단을 장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그런 조력자들의 도움은 타르의 세계를 지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타르의 삶에 균열의 징후가 조금씩 감지된다. 프란체스카는 크리스타가 절박한 도움의 메일을 보내왔다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고 묻는다. 타르는 무시하라고 답한다. 그런데 크리스타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크리스타는 타르가 이끄는 '아코디언'의 회원으로 지휘 지망생이었다.

  그 즈음 타르는 작업실에서 기이한 환청과 악몽에 시달린다. 초인종 소리와 여자의 비명, 사이렌 소리... 타르의 정신적 불안은 크리스타에 대한 죄책감을 보여준다. 정치적 거래와 착취. 샤론은 타르가 베를린 필에 처음 와서 악장인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그렇게 접근했다고 비난한다. 타르의 비서 프란체스카도 마찬가지.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헌신을 부지휘자 자리로 보답받고 싶어한다. 타르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미끼로 포식자처럼 먹잇감을 물색했고, 거리낌없이 욕심을 채웠다. 크리스타의 죽음은 타르가 크리스타와 했던 거래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한다. 둘의 관계가 어그러지자 타르는 크리스타의 경력을 망치기 위해 비열한 술수를 썼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타르의 모습은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시발점이었던 인물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타르는 매력적인 첼로 연주자 올가에 대한 욕망을 따라간다. 하지만 올가는 타르의 추종자가 될 생각이 없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만 충실한 이 젊은 여성은 타르에게 굴욕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감독 토드 필드는 퀴어 무비(queer moive)에 최근 몇 년 동안 문화 예술계를 휩쓴 미투 운동의 후일담을 덧입힌다. 영화 속에서 타르가 쌓아온 경력과 음악적 성취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타르의 재능은 권력에 대한 들끓는 욕망과 결합했다. 결국 타르는 자신이 획득한 권력으로 타인의 삶을 착취하고 조종하는 데에 쓴다. 타르의 추락은 외적인 압력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결함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마지막, 베를린 필에서 쫓겨난 타르는 동남아시아의 작은 악단을 지휘한다. 그것도 정통 클래식이 아닌 새로운 비디오 게임의 음악을 시연한다. 관객들은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cospre) 룩을 하고 있다. 이 무지막지한 몰락에서 타르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마도 타르의 재능은 어떤 식으로든 타르를 구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 '타르'가 그 지점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러하다. 뛰어난 예술가가 지닌 인간적 결함을 우리는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예술가와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완벽히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한가? 토드 필드는 예술가와 창작 과정, 그 결과물 사이에 존재하는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면을 응시한다. '타르'라는 인물 그 자체로 현현(顯現)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토드 필드가 만들어낸 그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이 여배우의 놀라운 재능은 분명 다음 영화들에서는 '타르'를 잊게 만들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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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Aftersun(2022)'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영화는 저화질의 캠코더 화면으로 시작한다. 11살 소피는 아빠를 인터뷰하겠다며 캠코더를 들고 이리 저리 움직인다. 소피는 아빠와 함께 터키로 짧은 여행을 왔다. 이 여행은 소피에게도, 아빠 케일럼에게도 특별하다. 소피의 부모는 이혼했고 소피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아빠와의 여행, 소피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싶어한다. Charlotte Wells의 장편 영화 데뷔작 'Aftersun(2022)'은 관객을 1990년대 초반, 낯선 터키의 관광지로 데려간다. 30살의 아빠와 11살의 딸은 행복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저렴한 호텔에서 머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빠. 소피는 그저 아빠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기쁠 뿐이다. 하지만 딸을 먼저 재우고 테라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는 이 젊은 아빠의 뒷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이 감지된다. 케일럼에게 '아빠'의 역할은 무언가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딸과 함께 포켓볼을 하려는 케일럼에게 관광객인 십 대 청년들은 같이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소피를 케일럼의 여동생으로 오인한다. 기분이 상한 케일럼은 자신은 소피의 '아빠(dad)'라며 즉각 정정해준다. 소피와 오누이로 보이는 이 젊은 아빠 케일럼은 아마도 20대 초반에 '아빠'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된 직업도 없는 그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소피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느리고 무료하게 지나간다. 아빠와 딸은 늘어지게 소파에 누워있거나,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하지만 이 아빠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 한밤중에 바닷가로 달려나간 그는 마치 죽어버릴 것처럼 파도를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돌아와서 잠든 딸의 옆에 머문다. 그가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딸 소피 때문일 것이다. 석고 붕대를 한 그의 손이 어떻게 하다 다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손은 어떤 면에서 케일럼의 정신적 불안정성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방에 혼자 있을 때에 큰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기도 한다.    

  소피는 아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렇지만 무엇이 아빠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 어린 소피는 알지 못한다. 소피는 아빠가 옆에 없는 시간을 십 대 청소년 관광객들을 관찰하면서 보낸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그들의 모습은 소피에게 낯설면서 신기하다. 소피는 또래 소년과 입맞춤을 하기도 하고, 두 청년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관객은 11살의 소피가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을 본다. 그 집에서는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소피가 아기가 있는 여성 동거인과 살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터키 여행은 소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시작임을 짐작케 한다.    

  영화는 중간 중간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는 케일럼과 그런 그를 쳐다보는 젊은 여성이 있다. 케일럼은 딸 소피 몰래 관광지의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물론 케일럼은 딸과 모든 시간을 하지도 않았고, 딸의 요구에 무조건 응하지도 않았다. 관광객을 위한 노래 자랑 시간에 소피는 케일럼에게 무대에 나가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하지만 케일럼은 딸의 제안을 거절한다. 소피는 혼자 가라오케에 맞추어 쓸쓸히 노래를 부른다. 케일럼은 그런 소피를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때 소피가 부른 노래는 R.E.M.의 'Losing My Religion'. 이 노래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국 남부의 속어로 'lose religion'은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뜻이다. 노래는 짝사랑하는 사람의 괴롭고도 절망적인 심정을 담았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빠 케일럼에 대한 소피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빠와 딸은 곧 다시 화해하고 관광지에서의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낸다.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 시간, 케일럼과 소피는 웨이터에게 부탁해서 둘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다. 검은색의 필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둘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변한다. 그 폴라로이드 필름처럼 관객은 나이트클럽의 케일럼을 바라보던 젊은 여성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정신을 잃고 미친듯이 춤추는 아빠 케일럼을 소피는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소피는 아빠를 끌어안지만, 곧 소피는 아빠를 놓친다.

  31살이 된 딸은 11살에 아빠와 함께 찍은 홈비디오를 본다. 조악한 화질 속에 담긴 아빠와 딸의 시간은 마침내 봉인에서 풀려난다. 어느 시점에서 아빠는 어린 딸의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딸은 그 아빠를 흔들리는 홈비디오 화면과 불완전한 기억의 방에서 그리움으로 불러낸다. 서른 살의 아빠가 맞닥뜨려야 했던 인생의 무게와 불안, 고통과 외로움을 딸이 이해하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1살의 소녀가 알 수 없었던 것을 이제 31살의 소피는 바라보고 느낀다.

  영화 'Aftersun'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했던 시간은 파편화되고 모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관객은 소피가 깨닫게 된 아빠 케일럼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영화의 그러한 불친절함은 놀랍게도 영화가 가진 위대한 본질과 연결된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retrospection). 영화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나는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고,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느꼈다. 감독 Charlotte Wells는 혈육지친(血肉之親)에 대한 내밀한 이해와 사랑을 매혹적인 영상 태피스트리로 직조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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