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르트 아줌마. 그 회사에서는 오래된 그런 명칭 보다는 '프레시 매니저'를 내세우는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옆 도로에는 그 프레시 매니저의 전동 카트가 오전과 오후, 정해진 시간대에 서있다. 요즘같이 더울 때에도 여자는 아침 나절에 잠깐, 그리고 오후 시간대에도 꽤 오랫동안 카트를 세우고 있었다. 우리 동네의 그 매니저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가방을 둘러멘 아이가 학교가 끝날 때쯤에 전동 카트를 찾아온 것을 나는 몇 번 보았다. 아이는 다소 퉁퉁한 체격의 엄마를 꼭 빼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매니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그 모자(母子)의 다정한 모습은 혈육지친의 의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가 저렇게 엄마를 따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일이 고단하기는 해도 저 여자는 아들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겠구나. 나는 더운 여름날에 카트를 지키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엄마네 집에 들러서 엄마를 챙기고 돌아오는데, 전동 카트의 그 매니저와 아들이 보였다. 아이는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오면서 여자에게 큰소리로 뭔가를 말하는듯 했다.

  나는 그제서야 아이가 좀 남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 아이의 말하는 모습과 행동은 아이에게 지적 장애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아이는 엄마 옆에 앉아있기 위해 어디선가 의자를 하나 구해온듯 했다. 여자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뜻밖의 풍경을 마주한 나의 마음 한구석에 날카로운 돌조각이 콱, 하고 와서 박힌 것만 같았다. 

  그냥 아이가 좀 평범했더라면...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는 그 여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결코 가늠할 수 없다. 때론 평범함에 대한 열망은 커다란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내 모친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 엄마가 치매 환자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3년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형제가 끊임없이 타협해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타협의 시간이 끝나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매일의 일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온전했던 엄마의 언어능력과 수리 능력은 마치 풍화되는 돌멩이처럼 닳아 없어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씨가 부러워요.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은 치매 모친을 보살피고 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모친은 암투병 끝에 세상을 뜨셨다. 보살핌이 필요한 늙은 아기가 되어버린 엄마. 지인이 그런 엄마와 단 하루라도 지내본다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지인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안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커다란 그늘이 어떠한 것인가를 자식이 온전히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어머니를 먼저 보낸 지인은 그 그늘에 대해 나에게 말한 것이다.

  이 블로그에 오는 이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의 모친은 치매를 앓고 있구나. 참 힘들겠네.'

  어떤 이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부모는 치매 환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렇게 때로 타인의 고통은 얄팍한 자기 위안의 근거가 된다. 나 또한 이제껏 그런 위안을 찾은 적이 없노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치매를 앓는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런 위안이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사람이 짊어진 삶의 고통을 비교하는 일, 또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내 삶의 만족과 평안을 규정하는 일은 어리석음에 가깝다.

  내가 더이상 엄마가 치매가 아니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해지길 꿈꾸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는 것. 그것은 인생의 불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이들에게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여자가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아이는 엄마의 카트를 찾아온 동네 할머니들 옆에서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세상 속에서 잘 살아주길, 그 엄마가 앞으로도 아이와 함께 작은 행복을 찾아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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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메일 박스에는 매일 이런저런 뉴스레터가 들어온다. 그 가운데에서 요즘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 해외 뉴스는 마우이(Maui)섬의 산불(wildfire)이다. 도대체 무슨 산불이 섬의 대부분을 집어삼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걸까? 그리고 왜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는가? 나의 그런 궁금증에 미국의 대안 언론 'vox.com'은 명료한 설명이 곁들여진 기사를 보내왔다.

  원래 마우이의 산불은 연례적인 행사였다. 이 시기의 마우이는 건기에 해당하는 날씨이다. 건조한 날씨로 인해서 일어나는 산불은 이제까지 마우이 섬에 심각한 위협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여러가지 악조건이 겹쳤다. 첫번째 요인은 기후변화(Climate change)이다. 전지구적 기상 이변은 기후변화의 산물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마우이섬도 예외가 아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마우이섬의 건기는 더 길어지고 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 일어난 산불이 치명적인 재난으로 돌변한 데에는 '바람'이 한몫을 했다. 마우이 섬 인근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 지속적인 바람을 불어넣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는 속담은 매우 과학적인 명제이기도 하다. 바람과 만난 불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확산되었다.

  기후변화와 허리케인의 조합. 거기에 땔감을 더한 '풀'이 있다. 마우이 섬의 사람들은 원래 섬에서 자라고 있던 재래종 풀들을 제거했다. 그 풀들 대신에 심은 것은 빠르게 자라는 목초지용 풀과 조경에 적합한 잔디였다. 재래종 풀들 보다 더 잘 타는 그 풀들은 산불의 지속적인 연료가 되었다. 그러니까 2023년의 마우이 섬 산불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탐욕이 겹친 결과물인 셈이다. 8월 21일 현재, 마우이 섬의 산불로 인한 사망자수는 114명에 이르고 있다.

  마우이 섬이 불타고 있는 동안 남미의 에콰도르(Ecuador)에서는 대선 유세중인 후보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격으로 사망한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Fernando Villavicencio) 후보는 평소 마약 카르텔(Drug Cartel)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해 왔다. 총격의 배후에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있다는 후속 보도가 나오고 있다.

  콜롬비아의 마약 갱단은 자국내의 마약 시장 확장을 넘어 이웃 에콰도르까지 진출했다. 그들에게 있어 비야비센시오 후보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비야비센시오 후보는 지지율 5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유력 대선 후보는 아니다. 그럼에도 후환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카르텔은 그런 암살을 감행한 것일까? 현재 에콰도르 경찰이 전방위적인 수사를 펼치고 있기는 하다. 이 사건은 막강한 자금력과 무기로 무장한 마약 카르텔이 인근 국가의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카르텔'이란 단어는 이런 극악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우리나라 뉴스에서 보이는 '카르텔'이란 단어 사용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미국에서 요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이다. 그런데 그 영화 보다 훨씬 오래전 영화 한 편이 뉴스의 중심에 등장했다. 산드라 불럭(Sandra Bullock)이 주연한 영화 'Blind side(2009)'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러하다. 운동에 재능이 있지만 가난과 불운에 갇힌 흑인 청소년 Michael Oher는 선량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백인 중산층의 가정주부 Leigh Anne Tuohy는 기꺼이 마이클을 돕기로 한다. 마이클은 투오이 부부의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을 받아 미식 축구 선수가 되는 꿈을 이룬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산드라 불럭에게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고 14년이 지난 지금, 영화의 실제 주인공 마이클 오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서 봤던 이야기는 사실과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마이클 오어는 투오이 부부가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사실과 다르게 날조했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책과 영화로 부당한 이득을 얻었다고 말했다. 현재 오어는 투오이 부부를 상대로 법정 소송중이다. 이 소송과 관련된 뉴스들에서는 흥미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투오이 부부가 마이클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마이클이 가진 미식축구에 대한 재능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영화와는 달리 투오이 부부는 마이클을 정식으로 입양한 적이 없다. 투오이 부부는 책과 영화 제작으로 이어진 일련의 이벤트에서 상당한 금전적 댓가를 받았다. 문제는 마이클이 그 수익 분배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제까지 난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진실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뉴스는 영화가 어디까지나 가공된 현실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말 그대로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진짜가 아닌 '영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돈벌이가 될만한 이야기'에 대한 유혹이 진실을 왜곡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면 그것은 '사기극'이 된다. 개봉 당시에는 찬사를 받았던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이제 지난한 법정 소송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14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관객으로서 우리는 그 영화가 가리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사진 출처: voanews.com

불타고 있는 마우이 섬


대선 후보의 암살 사건 이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에콰도르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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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쯤의 일이다. 앞 베란다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문을 닫아도 스멀스멀 스며드는 비린내는 마침내 온 집안을 어시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누군가 앞 베란다에서 생선 손질을 하면서 물을 쓰는 모양이었다. 원래 앞 베란다의 우수관은 빗물만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몇몇 세대에서는 그곳에 세탁기를 놓고 세탁을 했다. 더러는 개를 키우는 집에서 배설물을 내려보내는 일도 심심찮게 있는듯 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앞 베란다에서 개 배설물을 처리하지 말라고 자주 방송을 한다. 그런데 생선 비린내라니, 이건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그냥 하루 저러고 말겠지, 하고 나는 넘겨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 지독한 비린내는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방송을 하던지 무슨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해보니, 우리 라인의 세대마다 전화를 해보기는 했단다. 아무튼 집안에 스며든 그 비린내가 사라지는 데에는 며칠이 걸렸다. 나는 생선과 같은 식재료를 부엌이 아닌 앞 베란다에서 손질하는 사람의 뇌구조가 참으로 궁금해졌다. 그 비린내 나는 물이 내려가는 아랫층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 입주민의 뻔뻔함과 무지가 역겨웠다.

  나는 아파트의 저층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흡연자의 담배 냄새 같은 불편은 일상이다. 밖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는 차라리 낫다. 지하 주차장과 이어진 우리 라인의 통로는 종종 너구리굴이 되곤 한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인간이 담배를 피우면서 가기 때문이다. 현관문으로 스며드는 담배 연기는 생각보다 독하다. 어떤 인간은 새벽 2시에 나와서 큰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더운 여름밤에 열어놓은 창문을 조용히 닫는다.

  빌런들. 이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수시로 그런 빌런들이 출몰한다. 그러던 것이 엊그제는 신박한 빌런을 보았다. 마루에 앉아있던 나는 뭔가 약하게 쾅쾅하는 소리를 들었다. 앞 베란다 쪽 바로 아래의 잔디밭에서 나는 소리였다. 머리가 허연 늙은 남자가 골프채로 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었던 쾅쾅 소리는 그 인간이 스윙할 때 골프채가 철제 난간에 부딛히는 소리였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 4시에 골프채의 성능이라도 시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골프연습장이나 필드에서 더 휘두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서 저러는 것인가? 그 인간이 스윙을 한번 할 때마다 잔디밭의 잔디가 패이면서 멀리 날아간다.    

  콘크리트 빌런의 대표적인 유형인 개 키우는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앞동에는 대형견을 키우는 집이 있다. 그 개는 그곳 아파트 입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들려도 컹컹거리면서 짖는다. 그 개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따로 있다. 다른 개가 지나가는 소리이다. 그 대형견이 산책 나온 다른 강아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채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 개가 다른 강아지를 위협하기 위해서 한번 짖기 시작하면 상대편 개도 짖는다. 그렇게 엉키는 시끄러운 개소리를 하루에도 여러 번 듣는다. 나는 그 개가 살고 있는 43평의 아파트가 대형견과 살아가기에 쾌적한 평수인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문제는 평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개로 인해 주위의 입주민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 나는 넓은 마당이 아닌, 콘크리트 집에 갇혀사는 개의 심정을 헤아려 보곤 한다. 아마도 답답해서 울분이 차오를듯도 하다.

  여름, 더운 낮에 애들이 놀이터에서 놀기는 힘들다. 그 아이들을 밤 9시, 10시에 데리고 나와서 노는 부모들도 있다. 누군가는 이제 자려고 하는 시간에 좀 조용히나 놀면 모른다. 신나서 악을 쓰고 놀이터를 헤집고 다녀도 그걸 흐뭇하게 쳐다본다. 나는 저 인간들 집의 아랫집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야밤의 놀이터 소음에 시달리는 나 보다는 기가 차고 분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밖에서 무슨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윗집에서 새시 거치대에 내놓은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인지 물이 유리창 밖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빌런들의 뇌에는 '남들'과 '상식', '눈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렇게 빌런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좀 괴롭기는 해도 때로는 흥미롭다. 오늘은 어떤 콘크리트 빌런들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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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자식이 몇 명인지 잘 모르겠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짧게 한숨을 쉰다.

  "엄마, 잘 생각해봐. 몇 명인 것 같아?"
  "세 명인 거 같은데, 어디 다른 데에 또 한 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젠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그냥 웃어넘긴다. 그럴 때 나는 자식들 생일을 이야기해 달라고 엄마한테 말한다. 엄마는 그 생일들을 다 정확하게 말해본 적이 없다. 때로는 당신의 생일도 기억을 못하기도 한다. 엄마의 기억력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며칠 전, 엄마에게 온 우편물을 들여다 보다가 건강보험 공단에서 온 것을 발견했다. 공단에서 보낸 우편물의 내용은 이러했다. ***님께서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으셨는데, 그동안 이용실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필요하신 서비스가 있다면 이용하십시오... 엄마는 장기요양등급 5등급을 받으셨다. 치매 특별 등급으로도 불리는 이 등급에는 요양보호사의 방문요양 서비스와 주간 보호 센터 이용 금액의 부분적인 국가 보조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엄마는 등급 판정을 받으신지 2년이 지나도록 그런 서비스를 신청해본 적이 없다. 엄마가 그걸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엄마의 집에 오는 것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센터에서 어울리는 것도 엄마는 다 싫다고 하신다.

  나는 오전에 엄마의 집에 들러서 산책도 시켜드리고, 학습 교재를 가지고 인지 학습도 함께 한다. 중간 중간 간식도 챙겨야 한다. 5월에는 엄마가 손목 골절로 수술을 하셨는데, 깁스를 다 풀은 지금은 손가락 재활 운동이 필요하다. 병원에서는 손가락 재활 치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튜브를 보고 손가락 재활에 필요한 동작들을 찾아보고 엄마에게 필요한 재활 운동을 해드린다. 그러니까 요즘의 나는 요양보호사, 인지치료사, 재활치료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엄마의 하루하루는 Delete 버튼만 작동하는 컴퓨터의 키보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말한 것, 누군가와 전화 통화한 일, 식사할 때의 반찬 등등,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일에 엄마는 매번 실패한다. 그저 '몰라', 라고만 답하실 뿐이다. 나는 엄마에게 농담 삼아 '몰라 여사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엄마, 맨날 모른다고만 말하면 어떡해? 좀 생각을 해봐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런데 정말 생각이 안나는데? 그냥 머릿속이 하얘."

  요즘 나는 매일 엄마에게 자식이 몇 명인지, 자식들의 생일은 언제인지를 물어본다. 가끔은 엄마가 있지도 않은 자식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자식이 한 명 더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엄마에게 자식이 한 명 더 있다면 지금 우리 형제가 나누어 지고 있는 짐이 좀 가벼워질까 생각해본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과 마음의 고통이 n분의 1로 딱 떨어지게 나눌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언젠가 엄마의 기억력이 많이 나빠지게 되면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는 한데... 댁은 누구요?"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날이 오게 되면 좀 많이 슬프겠지. 그래도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적응하게 마련이다. 자식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자식의 존재를 말하는 엄마를 평온하게 바라보는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갈수록 나빠지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스러져 가는 엄마의 기억을 힘겹게 부여잡고 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수 밖에. 세상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치매 환자의 가족들이 무수히 많다. '우리 모두 힘내요, 파이팅!' 나는 그들에게 그딴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얼굴의 볼 수 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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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인 M은 전형적인 수재(秀才)였다. 공부를 잘했던 M이 무슨 장학금이며 표창같은 것을 자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공부 잘하는 그 선배가 무척 부러웠었다. 나는 과학 선생에게 그 선배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더랬다.

  "야, 너 M이 얼마나 어렵게 공부하는지 아냐? 걔네집 무지 가난해. 단칸방에서 식구들이 다 살아. 그런 곳에서 M이 공부를 한다고."

  선배 M은 명문대 치대에 들어갔다. 학교 대의원 회의의 임원이라는 공통점으로 나는 M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M이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나는 몇 번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고서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나는 M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구글 검색창에 M의 이름을 입력하니 바로 검색 결과가 뜬다. M은 모교 대학병원의 조교수가 되어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었다. 뭐라고 썼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가 이룬 성취를 보니 기쁘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낸 메일에 M은 아주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인생의 성공이 외적인 지위나 이룬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뭔가 읽는 사람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재수없는 답장이었다. 나는 M의 그 말이 같잖은 충고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M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며칠 전,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구글 검색창에 M의 이름을 써넣어 본 것이다. 나는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그 쓸데없는 짓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M은 강남의 대형 치과의 대표 원장이 되어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촌스러운 외모의 M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단칸방에서 고군분투하며 공부하던 선배 M은 그야말로 인간승리-이 표현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를, 아니 그 단어 대신 입신양명(立身揚名)인가, 아무튼 진짜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그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M이 아직도 인생의 의미는 외적인 성공에 있지 않는다고 믿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3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의대 진학은 출세의 지름길이다. 그런 면에서 고 3때 같은 반이었던 L도 그것이 진리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의대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이과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내 문제는 의사라는 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형적인 '문과 머리'라는 데에 있었다. 나에게 어려운 이과 수학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어떻게든 수학을 잘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악전고투 끝에 패잔병으로 남았다. 결국 내신 1등급을 받기는 했어도 의대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던 L은 고 3때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는 L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집안에 의사나 판검사는 한 명 정도 있어야 한다고. 난 어떻게든 의대에 갈 거야."

  내신 2등급으로 L은 지방대 의대에 진학했다. L이 레지던트였을 때 나는 L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L은 남성 위주의 의사 사회에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이제 L은 대학병원 안과의 과장이다. 아마도 L의 부친은 집안에 의사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할 것이다.

  엊그제였나,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클릭하다가 S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S는 자신의 신작 소설을 홍보하고 있었다. S는 내가 들었던 시 창작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수업을 담당한 시인 선생은 S가 쓴 시에 대해 가혹한 혹평을 했더랬다.

  "이건 요설(妖說)이야, 요설. 이런 글은 뭐랄까, 문학의 바닥을 보여주는 아주 안좋은 글에 해당하지."

  시인 선생은 혹평했던 S와는 달리, H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H가 조만간 등단할 것이라고 했고, 그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2년인가 3년 뒤에 H는 등단했다. H는 이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인이다. 그런데 선생이 요설이라며 극악의 평을 했던 S도 등단했다. 나는 H도, S의 글도 다 싫어했다. 글로도 인간적으로도 둘은 내게 밉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 선생의 안목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런 나에게 S의 등단은 나름 충격이었다. 소설가로서 S는 몇 권의 책을 연이어 냈다. 저런 소설도 팔리기는 하네... S의 소식은 몇년 동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S는 이제 신작 소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영조(英祖)는 사도 세자에 대한 편벽된 미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귀를 씻는 일'이었다. 실록에는 사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영조가 귀를 씻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S의 신작 홍보 뉴스를 읽고 나니 나는 영조처럼 귀를, 아니 눈을 씻고 싶어졌다.  

  러프 컷(rough cut). 그것은 영화를 촬영한 원본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영화는 '편집(editing)'이라는 마법을 거쳐야만 한다. 편집 이전의 원본인 러프 컷에는 모든 것이 뒤엉켜 있다. 서사는 엉망진창이고 촬영 과정의 온갖 실수와 결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혼란의 도가니에서 에디터는 정교하게 불순물을 걸러낸다. 가끔 누군가의 인생 이력을 들여다 보노라면 편집자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뽑아낸 필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마도 나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M과 L, 그리고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의 S와 H의 이야기가 그렇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나,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아온 걸까?"

  내 인생의 러프 컷을 돌려보는 일은 뼈저린 회한을 동반한다. 장르는 불분명하고 서사는 개연성도 없다. 신의 손을 가진 편집자가 와도 그 러프 컷은 구제가 안될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잘 편집된 보기 좋은 영화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러프 컷 인생을 끌어안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러프 컷 자체가 영화로 나온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인생의 러프 컷에서 나름의 의미를 끌어내는 일은 오직 그것을 찍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언젠가 이 러프 컷을 내가 편집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뒤죽박죽이 된 필름들을 나만의 솜씨로 이어붙이다 보면 멋진 실험 영화 한 편이 탄생할 수도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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