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그렇게 뭘 자꾸 흘려요?"
  "먹다 보면 좀 흘릴 수도 있지. 얘는 그걸 가지고 그러네."

  요새 들어서 엄마가 음식을 옷에 흘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가제 수건을 엄마의 목에 둘러주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시는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가제 수건을 두르고 엄마는 매일의 간식인 핫도그를 맛있게 드신다. 문득 노인 관련 다큐나 프로그램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요양원 같은 시설의 노인들은 식사 시간에 모두들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식판 옆에는 늘 작은 물병이 있다. 그것도 빨대가 있는 물병이다. 나이가 들수록 씹거나 삼키는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밥을 먹을 때 물을 조금씩 마시면 음식물을 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물병은 식사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 간식을 챙겨드릴 때 꼭 물컵을 같이 놓게 되었다.

  가제 수건을 매번 옷에다 고정하는 일은 불편하다. 어제는 생각난 김에 엄마의 턱받이를 하나 사야겠다 싶었다. 쇼핑몰의 검색창에 '턱받이'라고 써넣으니 두 종류가 뜬다. 하나는 유아용, 또 다른 하나는 어른용이다. '성인용 턱받이'로 다시 검색어를 입력해 본다. 그렇게 했더니 얇은 천 턱받이와 실리콘으로 된 제품이 나온다. 실리콘 턱받이는 내구성은 좋아보이는데, 나름 무게감이 있어보였다. 아랫부분에 길게 홈이 패인 그 턱받이는 마치 소의 목에다 거는 여물 주머니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방수처리가 된 폴리에스테르천 턱받이가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턱받이를 클릭하고서는 상품평을 주욱 읽어보았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필요해서 사보냈어요. 요양보호사가 좋아하네요.'
  '한꺼번에 넉 장 샀습니다. 번갈아가면서 쓰면 좋아요.'
  '부모님 간병할 때 이거 쓰면 정말 편합니다.' 

  그 상품평들을 읽고 있노라니 뭔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턱받이를 하고서 식사를 해야하는 노인들은 대개가 고령에, 몸이 아프고 불편한 이들이다. 나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턱받이를 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품평을 쓴 이들 가운데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너무 길어서 진짜 환자용 같아요. 괜히 샀어요.'

  그렇구나. 내가 원한 건 그 정도 사이즈는 아닌데, 그보다 좀 작은 건 없을까? 그런데 이 제품에는 선택할 수 있는 사이즈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단일한 사이즈만 있을 뿐이다. 나는 체크 무늬가 있는 턱받이 2개를 골랐다.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나름 무난해 보이는 색이었다. 나는 그 2개를 장바구니에 넣고는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그냥 주문 화면의 창을 닫아버렸다.

  어떤 감정의 파고가 잔잔하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서글픔'이었다. 단지 엄마에게 턱받이가 필요해졌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늙음'이란 단어가 던지는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왜 늙는다는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안겨주는가?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에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다가 자꾸만 음식을 옷에다 흘린다. 화장실이 급해서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속옷에다 실수를 해버린다. 잘 걷고 싶은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질질 끌게 된다... 그렇게 노인들은 신체능력이 떨어지면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힘들게 된다. '늙음'은 인간을 무력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연약한 아기들을 보살피는 일은 수고로워도 가치있는 일인 반면, 아픈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대개는 무의미한 중노동으로 여겨진다. 물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care work)'도 돈으로 충분히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는 엄마의 턱받이 하나를 주문하려다가 '늙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서글프고 괴롭고 싫은 것. 그 늙음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없다. 그건 마치 폭풍우 속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을 찾는 일과도 같다. 그저 이 악물고 젖은 옷으로 비바람 맞아가면서 신발 잃어버리지 않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수 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 변두리 동네의 어느 작은 주점. 주인 여자는 마흔을 좀 넘겼을까? 얼굴은 곱상한데 어딘가 그늘이 져있다. 여자는 나이든 동네 영감들 추근대는 것도 일상이라는듯 눙치며 받아넘긴다. '은희네'라는 가게 이름은 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자는 이 자리의 가게를 인수해서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가게 내부의 인테리어는 낡고 촌스럽다. 군데 군데 얼룩이 있는 자주색 소파며, 터진 가죽 의자는 튀어나온 스펀지 조각도 보인다. 어쩌면 유행에 뒤처진 그런 촌스러움이 오히려 사람들을 복작거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 가운데에 주인 여자의 정확한 나이나 고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그려본 이 주점은 가수 방실이의 '서울 탱고(1990)'에서 영감을 받았다. 방실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노래 속 여인에 대한 애잔함 속에 1990년대 서울의 주변부 풍경이 선연히 겹친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서울에 왔지만 인생의 불운이 겹쳐서 영락해버린 중년의 술집 여자. 이 여자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부서진 꿈의 잔해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웃음과 술을 팔 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심을 내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술이나 드시고 가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방실이의 '서울 탱고'가 보여주는 좌절과 관조의 정서는 이 노래를 향유하는 이들의 연령대와 겹친다. 중년의 청자들에게 인생은 더이상 이룰 꿈이 있거나 뭔가 대단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매일의 일상을 허덕이며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편안한 동네 술집에서 한잔 술에 그날의 피로를 잊는 것이 소소한 삶의 기쁨이 된다. '서울 탱고'에는 닳아버린 꿈의 자락을 붙잡고 살아가는 여자가 전면의 풍경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소시민이 '손님'이라는 배경으로 포개어져 있다. 이 노래의 정서에 공명하는 이들은 주점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울 탱고'가 나오기 2년 전인 1988년, 조용필은 자신의 10집 앨범에 '서울 서울 서울'을 싣는다.
이 노래에서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의 잔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올림픽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중진국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는 국가적 행사였다. 조용필은 올림픽 개최 도시 서울에 세련된 도회지 남성의 애수를 덧입힌다. 노래 속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는 해질 무렵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이 남자는 적어도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된 주변부 하층민은 아니다. 남자는 여유있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지나간 사랑을 회상한다. 아름다운 서울의 거리는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당시 서울의 풍경은 '서울 서울 서울'의 노래 속 아름다운 거리로 각인될 수 없었다. '달동네'로 부르는 전형적 서민의 주거지가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김동원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은 조용필의 노래가 보여주지 않는 서울의 그늘진 뒷모습을 직시한다. 그 다큐는 올림픽 때문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이들의 고통과 울분을 기록한다. 도시 개발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통제되지 않은 공권력은 서민의 삶을 짓밟았다. 상계동에서 내쫓긴 주민들은 경기도 부천으로 갔으나, 그곳마저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대중가요 속 서울의 이상화된 모습은 '서울 서울 서울'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길옥윤이 작사 작곡하고 패티 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1969)'는 그야말로 관제 가요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노래 속 화자는 서울의 거리에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곳에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화자에게 서울은 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은 헤어진 연인만저도 다시 돌아와야할 매력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이미자가 1968년에 발표한 '서울이여 안녕'은 어떤 면에서 '서울의 찬가'와 극도로 대비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노래의 화자는 아마도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앳된 아가씨이다. 여자는 서울에 간다며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서울에 왔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이미 돌아섰다. 변심한 연인에게 상처받은 여자는 서울을 떠나며 눈물을 흘린다. 노래는 서울에 오기까지 여자의 쉽지 않은 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이 시골 아가씨에게 결국 서울은 애달픔을 안겨준 비정한 도시가 된다. 서울은 가진 것 없는 이 시골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의 차가운 이미지는 '이별'이라는 상실의 사건과 겹쳐지며 증폭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서울'이란 도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강렬하게 투사된 곳이었다. 이미자가 노래한 '서울이여 안녕' 속의 아가씨는 1970년대 서울의 버스 차장, 여공, 가정부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방에서 상경한 하층민들은 서울의 시민이 되기 위해 분투했다. 1980년대에 서울은 이제 들끓는 물질적 욕망의 전시장이 된다. 서울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부동산 광풍의 진원지였다. 마민지의 다큐 '버블 패밀리(2017)'는 감독 자신의 가족사와 1980년대 서울의 부동산 개발사를 선명하게 겹쳐놓는다. 김운경 극본의 TV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서울의 밑바닥 인생들을 처연히 응시한다. 한석규가 열연한 '홍식'이란 인물의 비극적 최후는 서울이란 도시의 계층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서울은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힘든 생존의 터전이다. 자이언티(Zion.T)의 '양화대교(2014)'는 소년의 목소리를 빌어 그 삶의 고단함을 노래한다. 노래 속 화자인 어린 소년은 '양화대교'를 가슴저리는 추억의 장소로 회상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 기사이다. 늘 집을 혼자 지키는 어린 소년은 돈 버느라 바쁜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양화대교'에 있다고 말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다짐하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그 다리를 지나간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그렇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았다. 노래 '양화대교'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회색 도시에 소시민적인 행복, 가족애라는 따뜻한 색채를 덧입힌다.

  올해 서울시에서 새롭게 내놓은 서울의 시정 브랜드는 '서울, 마이 소울(Seoul, my soul)'이다. 언젠가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영혼의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서울의 방 한 칸'에 대한 끈질긴 근원적 욕망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소울은 너무나도 물질에 매몰되어 있으며, 그런 면에서 나에게 서울의 새로운 브랜드는 기묘한 울림을 준다.                  




*본문에 언급된 노래들의 가사


방실이- 서울 탱고(1990)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 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https://www.youtube.com/watch?v=ZqLrPLiqgGE


이미자 - 서울이여 안녕(1968)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님 찾아 바다 건너 천리 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아득한 옛날 어려운 일 이기고
백년을 같이 하자 맹세를 했는데
세월이 님을 앗아 나 혼자 울고 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DHNnpIL-JJ8


조용필 - 서울 서울 서울(1988)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한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가는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패티 김 - 서울의 찬가(1969)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얼굴
그리워라 내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하여도 내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건 비싼 사탕이 아니냐?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사탕 참 맛있구나. 엄마 어렸을 적엔 이런 사탕이 어딨어? 명절 때나 친척 어른들이 용돈 좀 주면 그걸로 뭘 사먹을 수 있었지. 동네 문방구에 가면 커다란 유리병에 눈깔사탕이 잔뜩 들어있었어. 그거 한 봉다리 사와서 조금씩 아껴먹었더랬지. 사탕이 얼마나 큰지 입에 넣으면 아주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거든. 그거 먹고 있으면 애들이 엄청 부러워했어. 애들은 조금만 떼어주라고 막 조르고 난리야. 그럼 사탕을 콱 깨물어서 조각을 내. 그걸 친한 애들한테 나눠주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비위생적이냐. 그런데 그땐 그게 더럽다는 생각도 못했어. 그냥 사탕 얻어먹을 수 있어서 애들이 좋아했더랬지.

  모든 게 다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사탕보다 더 귀했던 건 껌이었어. 애들 중에 누가 껌을 씹고 있으면 가서 그러는 거야. 나도 좀 줘. 그럼 씹던 껌을 조금씩 떼어서 주곤 했지. 남이 씹던 껌 나눠 씹으면서도 애들이 다들 즐거워했어. 원래 껌이 색색가지로 물이 들어있잖니. 근데 오래 씹으면 그 물이 다 빠지잖아. 그러면 어쩌는 줄 아냐? 크레파스로 껌에다 칠을 해서 씹었단다. 그렇게 몇 시간을 씹고 나서도 버리지 않아. 내 방의 벽에다 붙여놓고 다음날에도 또 씹었지. 아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지했던 시대였지 뭐냐.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즐거운 추억이 많아.

  물론 가난한 애들은 무척 많았어. 고아원에서 학교 다니는 애들도 꽤 있었구. 걔들은 뭘 잘 못먹고 다녔던 것 같아. 엄마는 집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으니까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하고 살았지. 그래도 시내 애들하고는 사는 형편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 언젠가 한번 시내에 사는 애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 장사를 하는 집이었던 것 같은데 집이 꽤 잘 살았어. 걔네 집에서 뭘 차려줘서 밥을 먹고 왔는데, 밥상이 우리집하고는 다르더라. 생활 수준의 차이란 게 느껴지더라고. 어린 마음에도 뭔가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 아,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 아이하고는 더 가깝게 지내질 않았지. 거리감을 느껴서 그랬던 거 같아.

  여름만 되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있어.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아이스케키라고 들어봤니? 설탕 넣어 얼린 얼음 과자 말이다. 그걸 애들이 팔았거든. 체구는 조그만 애들이 지들 몸의 반만한 커다란 나무 상자를 어깨에 메고 다녔지. 그 애들은 학교도 안가고 그렇게 여름 한철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거야. 한여름 대낮이 좀 더우냐.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아이스케키 사요, 아이스케키'하고 외치는 거야. 애들 얼굴은 더위에 빨갛게 익어버리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이야기 하면 마음이 좀 아파.

  오늘이 몇일이냐. 아이구, 벌써 그렇게 날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내일이 9월 1일이지. 오늘은 바람도 불고 날도 그렇게 덥지 않구나. 이제 여름도 다 가고 가을이 오겠구나. 좀 있으면 추석이네. 엄마 어렸을 적엔 추석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강강수월래를 했었어. 동네에 가장 잘 사는 집이 있었거든. 그 집 마당이 엄청 컸어. 거기 다들 모여서 명절날 저녁에 강강수월래도 하고 놀았어.

  그 집엔 엄마 친구도 살았어. 복순이라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착한 친구였어. 그렇게 마음씨 고운 애는 없었단다. 근데 그 친구 생각하니까 막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왜 그러냐고? 걔가, 그러니까 복순이가... 중학생 때쯤에 복순이 귀가 멀어버리더라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갔던 것 같아. 정말 착하고 좋은 애였는데. 어찌 그리 되었는지. 시집은 가서 잘 살았을까? 근데 엄마도 그 후 소식은 몰라.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아무튼 복순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슬퍼지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


난 내 영혼을 갈아넣으면서 매일 죽도록 일하고 있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야
그 결과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거야
매일 지친 몸을 이끌고 집구석에 들어가고 있어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야
나나 당신이나 다 같은 처지 아닌가
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게 현실이 아니길 바라
아,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우린 말야 새 시대에 낡은 영혼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리치먼드의 부자들은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고 싶어해
우리의 생각, 우리가 하는 일
그 작자들은 우리가 결코 모를 거라 믿는 것 같아
그러나 우린 그 속셈을 알고 있지
우리의 빌어먹을 월급은 세금으로 족족 나가버리지
이게 다 리치먼드의 부자놈들 때문이라니까

정치하는 것들 말야 불쌍한 광부들이나 돌보라고 해
아, 물론 광부들도 생각하고 외딴 섬에 갇힌 누군가도 잊어서는 안돼
하느님, 먹을 게 없어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버리지 마세요
정부보조금 타먹으며 돼지처럼 살찐 인간들도 외면할 수는 없겠죠

만약에 말이야, 댁이 키 160cm에 136kg의 몸뚱이를 가졌다면
내가 낸 세금은 당신이 쓰레기 같은 초코과자를 사는 데에 퍼주면 안된다고
젊은 애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내던지고 있어
이 빌어먹을 나라가 계속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거야

번역: 푸른별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컨트리 가수 Oliver Anthony는 8월에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를 발표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이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들은 후 당신의 반응은 다음 중 무엇인가?

1번: 부자를 싫어하는 걸 보니 전형적 좌파주의자의 노래군.
2번: 아냐. 이 노래는 퍼주기식 복지 정책을 비난하고 있어. 그러니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어울리는 노래야.
3번: 글쎄. 뭔가 말하고 있기는 한데 그 메시지가 우파쪽인지 좌파쪽인지 모르겠는 걸.
4번: 노래에 정치적 신념 따위가 중요해? 그냥 마음에 들면 좋은 거고 안들면 별로지. 어쨌든 노래 괜찮은데.
5번: 이 정신나간 가사는 뭐야. 리치먼드의 부자는 뭐고 광부는 왜 나와? 이런 노래를 누가 들어?

  지금 미국에서는 바로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가 온 나라를 헤집어 놓고 있다. 노래는 나오자마자 곧장 Billboard Hot 100의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 역사상 어떤 노래가 다른 차트에 오르지 않고 바로 빌보드 1위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노래의 가사가 매우 정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8월 23일, 밀워키(Milwaukee)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는 이 노래가 당당히 울려퍼졌다. 후보들은 바이든 정부의 퍼주기식 복지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서 이 노래는 그 울분을 표현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앞의 질문에 어떤 답을 골랐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당신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노래의 가사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1984'에서 그려낸 빅 브라더(Big Brother)의 현실 버전인가? 모든 것을 소유한 부자가 쥐락펴락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평범한 소시민. 그런 구도로만 본다면 이 노래는 좌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일 것이다. 노래의 가사는 부자들만 비난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나라를 좀먹는 모리배로 그려진다. 그들의 정치는 그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올리버 앤서니는 일갈한다. 

  그런데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노래를 부른 올리버 앤서니도 그들이 누구인지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미국의 지도에서 리치먼드를 찾아본다. 리치먼드(Richmond).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주도인 이 도시는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과거 남부 연합(Southern Confederacy)의 수도였다. 그렇다. 노예 제도를 두고 미국이 피터지는 내전(Civil War)을 했을 때, 리치먼드는 남부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미국에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리치먼드 북쪽에만 있을까? 왜 올리버 앤서니는 하필 '리치먼드'라는 도시를 골랐을까? 어떤 면에서 남부 출신인 이 가수에게 있어 익숙한 세계는 남부를 아우르는 지형적 경계에 국한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노래 가사의 리치먼드 북쪽은 명백한 계급적 상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형상화하기 위해 끌어온 지형적 표지물로 보는 편이 맞다.    

  리치먼드와 같은 지형적 표지는 앤서니가 호명하는 '광부들(miner)'에도 내재되어 있다. 이 노래에서 언급되는 광부들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대표하는 거주민이다. 미국의 남서부에서 북부를 가로지르는 이 광대한 산맥은 개척시대부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냈고, 그곳에 일꾼으로 써먹기 위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그러다 광산업이 흥하기 시작하자 백인 이주민들이 몰려왔다. 곧 흑인들은 이전의 원주민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 광산업이 쇠락하자 많은 이들이 그곳을 떠났다. 남은 이들은 가진 것 없는 백인들 뿐이었다. 애팔래치아는 잊혀진 곳, 빈곤과 무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이 노래가 '광부들'을 하층민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애팔래치아의 역사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가난한 '광부들'보다 더 안좋은 취급을 당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160cm의 키에 136kg의 몸을 가진 사람이다. 가사의 묘사대로라면 그 사람은 고도비만에 정부의 수급보조금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이 즐기는 간식은 '퍼지 라운드(fudge rounds)'라는 과자다. 당분과 싸구려 초콜릿으로 범벅이 된 이 과자를 사먹는 이들은 성실한 월급쟁이의 삶을 질식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 세금을 퍼주는 정치인들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공화당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이 이 노래에 환호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파주의자들은 복지 정책이 가난한 이들은 삶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비만과 나태함으로 묘사되는 하층민은 이 노래에서 그렇게 조롱당한다.

  그렇다면 '외딴 섬의 누군가(an island somewhere)'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은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엡스틴이 은거하면서 그런 추악한 범죄 행각을 벌인 곳이 그가 소유한 섬들에서였다. 올리버 앤서니가 가사에서 언급한 '섬'이 엡스틴의 그 섬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외딴 섬의 누군가'는 '광부들'과 계층적 동일선상에 놓인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유린된 약자, 피해자들이다.   

  이 노래를 두고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격화되자,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은 '비당파적인(nonpartisan)' 사람이라고 밝혔다(출처: en.wikipedia.org).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의 노래가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울려퍼질 것을 예상했을까? 2013년에 뇌를 다치는 사고를 겪은 후, 그의 삶은 많은 면에서 불안정해졌다. 제대로 된 직업은 얻을 수 없었고, 정신적으로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한 개인적인 좌절을 겪은 백인 컨트리 가수는 자신의 경험을 남부 토박이의 체화된 신념과 결부시켜 노래를 만들었다.

  나는 이 노래가 당파적이라기보다는, '남부'라는 지역성과 신념 체계에 더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고 본다. 외국인으로서 나는 미국에서 '남부'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책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에게 남북 전쟁은 패배와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남부인들에게 그 전쟁은 그들이 외친 올바름에 대한 가치가 짓밟힌 역사적 사건이었다.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남부인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노예 제도에 대한 옹호는 뿌리깊은 인종 차별과 직결되었다. 남부인들만이 공유하는 신념의 체계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리와 배타적인 정치의식 속에서 배양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하느님(Lord)'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화자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올리버 앤서니가 이 노래 이후에 발표한 'I Want To Go Home'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종교는 삶을 견디게 만들어 준다. 올리버 앤서니는 정치인들과 부자들은 어리석으며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약자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외친다. 그것은 결코 당파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노예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르짖던 남부의 사람들은 이제 정의로움과 공정에 대한 자신들만의 독자적 감각을 계발했다. 세금은 게으른 빈자에게 물쓰듯 쓰여져서는 안된다. 타락해버린 리치먼드의 부자들과 정치인은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는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뼛속 깊이 남부인의 내면에 호소하는 남부 찬송가처럼 들린다.         


*사진 출처: whiskeyriff.com




**Oliver Anthony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qSA-SY5Hro



***'Rich Men North Of Richmond' 가사 전문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 wish politicians would look out for miners
And not just minors on an island somewhere
Lord, we got folks in the street, ain't got nothin' to eat
And the obese milkin' welfare

Well, God, if you're 5-foot-3 and you're 300 pounds
Taxes ought not to pay for your bags of fudge rounds
Young men are puttin' themselves six feet in the ground
'Cause all this damn country does is keep on kickin' them down

Lord,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22598 2023-08-29 02:45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노래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푸른별 2023-08-29 09:34   좋아요 0 | URL
han22598님 반갑습니다. 흥미있는 노래라서 한번 글을 써보았네요. 노래가 들어보면 가수의 진정성이랄까, 그런 게 느껴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IDF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나는 2004년부터 매년 빠지지 않고 이 다큐 영화제를 챙겨서 보아왔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EIDF가 쌓아온 내공이 있을 텐데, 내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이 영화제에서 활기나 창의성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시의성도 실종되었고, 다양한 주제의 다큐를 다루는 포용성도 옅어졌다. 아마도 올해는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EIDF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한 해가 될듯 하다.

  EIDF 기간 동안 상영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D-Box의 유료화(2021년부터 시행)는 매우 유감스럽다. 나는 'Festival'이 가진 환대와 참여의 정신을 EBS가 돈벌이로 환산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축제 기간 동안에는 관객이 출품작들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 덕분에 나는 본방송으로 열심히 출품작들을 챙겨서 보기는 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보았던 다큐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이니나와(Ininnawa: An Island Calling, 2022)
   Arfan Sarban, 인도네시아


  라비아는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펴왔다. 라비아는 은퇴를 준비하면서 딸 미미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려고 노력한다. 미미는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핀다는 사명감과 두 아이의 엄마로서 느끼는 모성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다큐는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부각시킨다. 두 모녀가 보여주는 직업적 연대의식과 감정적인 유대는 척박한 현실에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미미가 주민들, 특히 여성들의 질병을 진료하고 출산을 돕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는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의료인이 보건 정책에서 담당하는 특수한 위치를 보여준다. 평이하지만 나름의 울림을 가진 다큐.


2. 침묵의 집(Silent House, 2022)
  Farnaz Jourabchian, Mohammadreza Jourabchian, 이란


  파르나즈와 모하마드레자 남매는 자신들이 살아온 집의 역사를 탐구한다. 100년이 된 그 집을 통해 관객은 격동기 이란의 사회상을 관조한다. 3대에 걸친 가족의 고난과 시련은 '이란 혁명'이 보통의 이란 사람들에게 미친 미시사적 파장을 보여준다. 사진과 영상물을 비롯해 풍부하게 축적된 가족의 기록은 다큐의 사실성을 더한다. '침묵의 집'은 사적 다큐의 지평을 역사적, 정치적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매우 잘 만든 다큐이다.


3. B급 며느리(선호빈, 2017)

  EIDF 2023에서 눈에 띄는 편성은 '다시 보는 다큐시네마'라는 섹션이다. 이것은 프로그램의 빈곤함을 메꾸려는 무성의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 상영작으로 선정된 'B급 며느리'는 나름의 주제 의식을 갖고 있지만 시의성을 갖지는 못한다. 차라리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2018)'를 보여주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다큐는 부동산 공화국이라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여전히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백래시: 디지털 시대의 여성 혐오(Backlash: Misogyny in the Digital Age, 2022)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영상학적인 다큐.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온라인상의 협박과 괴롭힘에 대해 증언한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은 실제 현실의 범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온라인 혐오 범죄의 가해자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시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다큐.


5. 사빈 바이스, 한 세기의 기록(Sabine Weiss, One Century of Photography, 2022)

  사빈 바이스(1924-2021)는 프랑스의 여성 사진 작가이다. 남성들이 주류였던 사진계에서 바이스는 끈기와 창의성으로 자신의 사진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다큐는 자신의 진정성과 시대 정신를 사진에 녹여낸 바이스의 작품 세계를 관조한다.


6. 버퍼존(The Bufferzone, 권성윤, 2023)

  길 잃은 다큐. 이 다큐는 네팔의 치트완 국립 공원을 둘러싼 여러 관점을 보여준다. 야생 동물 보호와 원주민들의 삶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이 작품은 주제의 선명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 108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빈곤한 다큐 미학을 여실히 입증하는 작품. 


7. 안개 속의 아이들(Children of the Mist, 하레 지엠, 2021)

  EIDF에서 반드시 주목할 작품이 있다면 이 다큐이다. 베트남 소수 민족 소녀의 성장기는 여성이 견고한 인습의 벽과 마주하는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다큐에 대한 리뷰를 나는 이전에 썼었다.

리뷰 링크: 소녀의 어린 시절이 끝나갈 때, Children Of The Mist(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3/04/children-of-mist2021.html



8. 그녀의 키친, 쉬 셰프(She Chef, 2022)

  재능있는 젊은 셰프 아그네스의 이야기. 관객은 요리에 대한 열정을 지닌 아그네스가 자신만의 요리 경력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아그네스는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인간미 넘치는 동료들은 아그네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아그네스는 마침내 페로 제도의 소박한 식당에서 자신이 꿈꾸던 요리의 세계를 만난다.  


9.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EIDF 20주년 회고작. 이 다큐에 대한 리뷰는 작년에 작성했었다.

리뷰 링크: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것: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eidf-2022-1-2021-2021.html


10. 세자리아 에보라, 삶을 노래하다(Cesaria Evora, 2022)
   Ana Sofia Fonseca, 포르투갈


  카보베르데(Cape Verde)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의 삶을 만난다. 다큐는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 속에 스며든 카보베르데의 정서,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팬이라면 이 다큐는 거를 수가 없다.


11.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다움,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Disarming Beauty, 2022)
   Natacha Giler, 프랑스


  '밀로의 비너스'는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다큐는 이 조각상을 둘러싼 역사적, 미학적 관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관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시대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하는 과정을 만화경처럼 볼 수 있다.


12. 콜 미 댄서(Call Me Dancer, 2023)

  20살, 인도 뭄바이에 사는 평범한 대학생 마니쉬는 춤의 매력에 빠져든다. 대학을 그만 두고 댄스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마니쉬. 다큐는 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꿈을 가진 청년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겪는 역경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극적인 구성을 가진 다큐. 마니쉬는 결국 춤꾼으로 불릴 수 있을까? 답은 다큐 속에 있다.


13. 안녕 내 사랑(Bella Ciao, 2022)
    Giulia Giapponesi, 이탈리아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민요 'Bella Ciao'는 언제, 누가 부르기 시작한 것일까? 다큐는 노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기 위해 파르티잔들은 자유를 향한 열망을 이 노래에 담아 불렀다. '노래의 사회사'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다큐. '안녕 내 사랑'은 재미와 유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