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플레이리스트


흘러간 가요를 틀어놓는다
고운 얼굴의 남자 가수는
예정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
그 가수는 이제
목사가 되었다

빌리 조엘의 노래에 이어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가
나온다 마돈나의 얼굴이
다음 동영상에 뜬다
세상에 마돈나의 얼굴이
저리도 빛나다니 저 시절의
마돈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뭐니 뭐니 해도 한밤에는
릭 애스틀리가 제격이다
풋풋함과 흥겨움이 섞인
그의 노래들에는
1980년대와 젊음이
박제되어 있다
중년의 애스틀리는
그 노래의 발뒤꿈치에
다가서질 못한다
슬프게도

밤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가로등 켜는 일을
깜박한 관리소 직원은
숙면 중이다 불빛이
없는 놀이터는 괴물의
입처럼 어둠을 삼킨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저만치 가는
사랑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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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



어디선가 들리는
사이렌 소리
귀에서 소방차가
질주한다

오른쪽 발바닥의
테니스공
너덜거리는 근막은
끅끅거리며 운다

왼쪽의 얼굴은
24시간 전기가 흐른다
올챙이들이 드글드글
얘들을 어쩌면 좋니

목덜미에는 개미들이
집을 지었다 쉴 새 없이
오가며 물고 깨문다
긁어봐 긁어보라구
이래도 안 긁을테야

이 병동 환자들의
병명은 무엇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정답:
Tinnitus
plantar fasciitis
postherpetic neuralgia
prur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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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봄볕에 등이 데워진다
이제 겨울옷은 죄다
빨아서 넣어버려야지
아니지 꽃샘추위

호빵은 더이상
팔지 않는다
겨울까지는 안녕

한껏 핏대를 세운
손가락의 동창(凍瘡)
혈관의 봄은 아직
차오르지 않았다

학교 뒤편의 나무들은
두목(頭木)이 날아가
몸뚱이만 휑뎅그레

응달진 하늘을 보며
그 나무들의 뿌리를
가늠해 본다 살그머니
3월의 눈동자
연둣빛 물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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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흐린 오후
비가 흩뿌린다
팔랑개비처럼

회색 솜잠바를 입은
영감은 놀이터에서
달린다 장수를
위한 집념

아파트 1층
비를 피하던
여고생 둘
시시덕거리다가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는다

아픈 오른쪽
발을 질질 끌다가
내일 병원 예약을
떠올린다

여고생들이 사라진
자리 잘생긴 남학생
하나 우두커니

구석진 곳
만개한 매화는
볼품없는 봄비에
얼마나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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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밤


항히스타민제는
졸음이 오는 약이라
밤에 먹는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은 말똥가리
정신은 락스
냄새가 나는듯

가려움과 통증에
시달린 몸은
넝마 같다

낮을 지우기 위해
밤에 시를 쓴다

재능에는 절실함이
없다 재능만으로 쓴
시는 너무 매끄러워서
멀리 가지 못한다

좋은 시는
한 줌의 광기를
필요로 한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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