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색소 결핍증을 앓고 있는 노이는 늘 눈이 내리는 피요르드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산다.철없는 아버지와 떨어져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노이는 비범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에 자신을 끼워맞추며 사는 것은 답답하고 괴롭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주유소에서 일하는 아이리스는 친구가 되어주고 모처럼 노이는 활기를 띠지만, 잦은 결석과 기이한 행동으로 학교에서는 퇴학당한다. 마을의 묘지지기로 일하게 된 노이는 어느날, 마을의 점쟁이로부터 죽을 거라는 점괘를 듣는데...

  영화의 배경은 아이슬란드의 시골마을이다. 주인공 노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지루함이 가슴으로 와닿는다. 하얀 까마귀란 별명으로 불리게 만든 육체의 질병과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이는 거대한 피요르드와 눈들로 가득한 자그마한 마을은 노이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노이는 생일날 할머니가 준 사진 속의 열대 해안과 검은 피부의 원주민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서 현실과 쉽게 융합되지 못하는 노이의 모습은 어찌보면 부적응자나 몽상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정상적인, 또는 평범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때론 평범함을 살아낸다는 것이 극심한 고통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영화는 노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또 할 수 있을지 몰라 괴로워하던 노이는 점쟁이의 불길한 점괘를 듣고 불안해져서 어떻게든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직접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자금 마련을 위해 마을의 작은 은행을 털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차를 타고 도망치다 결국 유치장에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유치장에 갇힌 노이가 문을 두드리며 발버둥을 치다가 얼마안가 낙심하고는 차가운 침대에 웅크린 장면은 마치 그가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마음 속으로 꿈꾸는 것들을 해보고, 또 떠나고는 싶은데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자신의 유폐된 상태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노이.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작은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얼마 후, 눈사태라는 자연재해가 노이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가족과 마을의 사람들이 죽는 와중에 목숨을 건진 노이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는 남국의 부서지는 눈부신 파도와 원주민을 볼 수 있을까? 천재지변만이 한 사람의 일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준다는 설정은 억지스럽다기 보다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내리는 눈과 거대한 피요르드 같은 감옥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그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기껏해야 열대의 아름다운 사진을 반복해서 들춰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임을 떠올려 보면 노이의 슬픈 표정이 비단 그의 것만이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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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평가가 무척이나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또한 각각의 주관적인 시점에 따른 판단일 수 밖에 없다. 영화 클래식을 보고 내가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자주 검색하는 영화 사이트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이 영화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또는, "첫사랑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한다"는 다소 감성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얼마나 슬프길래 가슴을 저미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한번 보기나 하자고 -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영화를 무척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 마음먹었고 결국 보고난 후, 나에게 남은 것은 눈물이나 가슴저림이 아닌 씁쓸함이었다.

  영화의 어떤 점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만들려다 쏙 들어가게 만들었을까? 영화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역시 이건 영화구나, 라고 절실히 느끼게 했을까? 감독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와닿질 않는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고 매우 아름답게 포장되어있다. 놀라운 것은 주인공 준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떠안고 떠밀리듯이 가버린 베트남전의 전투신마저 엉성한 가짜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감독은 영화에서 몇분 되지도 않는 그 장면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하여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쏟아부었다는 후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사실성과는 먼 지점에 오히려 자신의 진지를 확고히 구축했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생명력을 획득하는 유일한 근거일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이 준 목걸이를 전투중에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을 다시 되돌아 가는 사람을... 이 세상은 순수함을 믿고 지키는 사람에게 댓가를 치루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준하의 두 눈을 댓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목걸이는 살아남는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여인의 딸을 우연히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될 때, 목걸이는 그 딸에게 건네어져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너무나 순수해서, 타락하고 물질화된 세상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이에게는 잃었던 감성을 일깨우고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이에게 그것은 그럴듯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설레이며 애태웠던, 그리고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첫사랑이 세월이 흐른뒤에 보여주는 모습은 세파에 찌든 주름 가득한 얼굴과 굽은 등, 허물어지는 어깨일 뿐이다. 준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뜸으로써 그것을 보여주는 대신에 클래식한 사랑이 담긴 추억의 상자를 남긴다. 과연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그러한 순수함에 일생을 몸담을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존재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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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유명한 애니메이터 유리 노르슈테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친숙하게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일단 그의 작품을 보고나면 작가와 러시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이 작품은 정교하고 유려한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이나 최근에 헐리우드가 내어놓는 박진감 넘치고 화려한 3D 애니메이션과는 다소 다른 지점에 서있다. 빛과 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의 그림체는 마치 샤갈의 그림이 보여주는 환상성과 베르메르와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타난 빛의 역동성을 영상으로 담아낸듯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은 전원 풍경에 대한 소박하지만 섬세한 묘사인데 이것은 러시아의 문학 작품과 예술 세계에 드리워진 회화주의적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기의 요람을 잔잔하게 흔드는 잿빛 늑대의 고요하고 투명한 눈망울, 축제에서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 모닥불과 어우러진 숲 속의 어두움과 같은 이미지들은 잊고 있었던 꿈 속의 노래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30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잊혀진 꿈의 기억을 불러 내기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살펴보면 제작년도가 1979년임을 알 수 있다. 울림과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고 매번 새롭게 누군가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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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의 딸로 태어난 키키. 13살이 되면 마녀가 되기 위한 첫수련을 받아야한다는 관습에 따라 키키는 부모님 곁을 떠나 자신이 머물 마을을 찾아 빗자루를 타고 떠난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램대로 마침내 바닷가 항구 마을에 도착해서 수련을 시작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는 세계에는 언제나 꿈과 희망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유효한 가치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도 그러한 꿈과 희망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영화는 소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성장의 과정을 순순히 풀어놓으면서 그것이 13살의 키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기를 지나온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키키가 마을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배달부 일을 하면서 겪는 크고 작은 일들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키키에게 이전과는 다른 눈뜸의 기회를 제공한다. 빵집 주인 오소노, 화가 우르술라, 남자친구 돔보, 온화한 노부인과의 교류를 통해 키키는 "수련"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직관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키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키키가 하늘을 나는 능력을 잊어버리고 상심해있을 때, 오소노와 우르술라는 그것이 일시적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키키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매우 섬세하고 따뜻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여성 캐릭터들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의 대사는 제한되어 있으며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야오는 여성이 가진 독특함과 뛰어난 특질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생명, 그것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계에 대해 보여준다. 키키가 위험에 빠진 남자친구 돔보를 구하기 위해 다시금 하늘을 날아올라 마침내 무사히 땅에 내려왔을 때, 아이를 가진 오소노가 산통을 느끼는 것은 그런면에서 보면 우연한 설정만은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고통과 시련이 우리 자신의 몫이 되었을 때 그것은 분명 아프고 괴로운 일이며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견디어 내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열린다. 13살 소녀 키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장의 첫 관문을 사뿐히 넘어 들어간다. 키키는 1년 뒤,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그 마을에서 잘 지내고 있으며 그곳이 너무 좋다고 쓴다. 키키가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데에는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키키에게 온 행운을 모든 이들이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더 혹독하고 기나긴 시간이 되기도 하며, 더러는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려는 하야오가 보내는 선물 상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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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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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누군가와 만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분이 물었다. 그 일을 목숨을 걸고 할 수 있겠느냐고, 그 일을 할 때마다 매 순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목숨"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서였을까, 새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과연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추구해야할 가치인지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목숨까지 내놓고 열정적으로 매달려야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은 아마도 한 사람의 생애를 바꿔놓을 것이며 그것이 가치있는 일이라면 그 위대함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전이 기술하는 체의 삶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한 인간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 말 그대로 목숨까지 내어놓고 걸어간 좁고 험한 길이 떠오른다. 한번쯤 한눈을 팔 수도 있으련만, 또는 더 편한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을 법한데도 그는 오로지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굳은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 길을 걸어갔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의 방법론은 지금의 시대와 사람들에게 통용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의 삶이 그토록 많은 이들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고 남는 것은 그가 택했던 방법론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던져버렸다"는 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분명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함과 열정의 최대치를 살다간 사람이다.

  두눈을 뜨고 최후를 맞은 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목숨을 걸고 스스로가 꿈꾸고 바라는 것을 위해 살 수 있겠느냐고. 오직 하나의 것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삶을 택하겠느냐고...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해내야할 일일 것이다. 체 게바라는 그 삶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직접 보여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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