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당에서 꺾어 온 다알리아 앞에서~ 노란책 예쁘다)
나는 단편소설을 잘 못 읽는 편이다. 장편에 길들여졌는지 이상하게 단편을 읽으면 집중도 잘 안되고 읽고 나서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주로 단편을 읽어야 할 때는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e북을 사서 한번 훑고 마는 수준으로 읽는다. 이러니 더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래서 단편소설집은 잘 소장하지 않는 편인데 얼마 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작가의 다른 소설들은 어떨지 호기심이 마구마구 일어서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장대한 제목의 이 소설집을 샀다. 소설집 제목부터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내력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지레 짐작하기로 여기에는 뭔가 역사적인 큰 이야기를 하고 있겠다 싶었는데 내 예상은 역시나 늘 그렇지만 크게 빗나간 것이었다.
첫 번째에 실려 있는 “자본주의의 적”은 너무나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세상에 나서기를 극도로 불편해 하는 현남 가족의 이야기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기꺼이 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고로 뭔가를 가지려고 용쓰고 싶지 않다의 상태. 즉 현남 가족이 대표하는 바로 이런 욕망의 부재 상태가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화자인 현남의 소설가 친구는 명명한다. 너무나 조용한 사람들이라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모를, 눈에 잘 띄지도 않을 그저 희미하기만 사람들을 정의하는 단어로는 안어울리게 거창하고 위협적이라 오히려 하찮고 귀여운 “자본주의의 적”
이 소설집에서는 이런 전혀 무섭지 않은 자본주의의 적들을 수월찮이 만나볼 수 있다.
별 꿈도 없고 딱히 별 재능도 없고 특별한 취향도 없이 한국 시골마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미국 원어민 교사 스텔라의 이야기, 병에 걸려 다 죽게 생겼지만 고치려는 의지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매일매일 술만 마시는 기택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 현남 못지않게 자본주의의 적의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희미하게 사냐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소 퉁명스러운 톤으로 말하고 있지만 슬며시 던지는 시선은 푸근하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살아간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살아진다. 이런 삶이라도 뭐 어떤가 어쨌든 이래저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가 하는...
그리고 이런 욕망 없는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하고...물론 그 위로는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자의 자기반성의 순간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또 썼더라.
뭐지 이건? 욕인가 싶어 가만히 있으면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뭘 그렇게 써대.
역시 욕이다. 문제는 그런 욕을 먹고 내가 반성을 한다는 거다. 자폐가족에게 물든 게 분명하다. 반성의 수준에서 가만히 있으면 더 센 펀치가 날아온다.
정 쓰고 싶으면 혼자 써. 쓰고 버려.
별것도 아닌 걸로 자원 낭비하고 세상에 민폐 끼치지 말라는 거다. 이런 젠장. 내가 이래봬도 과작의 작가라고! 발끈하고 싶은 심정은 둘째요, 느닷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래, 그러면 될 걸 나는 왜 꼭 어딘가 발표해서 누구에게 읽히려고 하는 거지?
(33쪽)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긴 하다.
한때 빨치산이었던 여자는 지금 90넘은 노인이 되어 자꾸만 과거를 소환한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 치매에 걸려 원초적인 본능만 살아있던 짐승 같은 모습의 여동생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젊은 날 목숨 바쳐 싸웠던 사상이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하는 회한,
하지만 노인이 떠올리는 이런 기박한 기억들 속에도 간간이 끼어드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새하얀 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같은 것들.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에게 속삭였다는 말 같은 것들. “우리 멩꺼정 다 얹어줬응게 원 없이 살다 오시게”
슬프고 아름다운 단편이었다. 읽으면서 조금 울었네ㅠㅠ
진짜 재밌어서 내내 웃으면서 읽기도 하고 가슴 찡한 문장에 눈물 찔끔하기도 하고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들어서 흐뭇해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이 소설집 속 이야기들을 내 기억에 딱 붙잡아 둘 수 있겠다 싶었다. 너무 잘 읽었다.
그래서 또 한권의 정지아 작가 소설집을 주문했다^^
분명 난 단편소설 잘 안 읽고 잘 안 산다고 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ㅎㅎ얼른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