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너무 재밌었다. 여행 중에 경험한 일화나 감정들이 내가 예전에 미국 여행 중에 느꼈던 것과 겹치는 부분들도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았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영국인인 두 친구의 여행이다. 이 여행기를 쓴 조지와 조지의 친구 마크가 뉴욕에서 시작해서 자동차로 캘리포니아까지 대륙횡단 여행을 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부분은 마크가 비자 문제로 캘리포니아에서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가고 조지의 여자친구 레이첼이 영국에서 와서 조지와 합류해 뉴욕까지 다시 횡단여행을 하는 내용이다.

 

조지, 마크, 레이첼이 이 여행기의 주요한 등장인물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조세핀은 과연 누굴까? 바로 여행의 가장 중요한 수단 자동차. 바로 그 차의 애칭이 조세핀이다. 조지와 마크는 뉴욕에 도착하자 신문 광고를 보고 중고차를 한 대 산다. 바로 1989년형 닷지 카라반. 딱 보기에도 오래되고 상태가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뒷 창문에는 총알 구멍같은 것도 나있었다. 하지만 값이 싸고 차가 커서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려서 850달러에 그 의문스러운 차를 사고 만다. 원래의 차주인이 이 차를 조세핀이라 불렀고 그 이름 그대로 여행 내내 조지와 마이클도 부르게 된다. 하지만 그 조세핀이 우리 조세핀, 사랑스러운 조세핀이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행 시작부터 조세핀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차를 고치고 또 고치고 그렇게 다니면서 찻값보다 고치는 값을 훨씬 더 많이 지출하며 여행을 이어간다. 기특하게도 그렇게 차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어찌어찌 8개월간의 대륙 왕복 횡단을 무사히 마친다는 점이다. 차로 인해 생기는 고생스러운 일화가 읽는 사람에겐 적지 않은 재미를 주기도 한다.

 

미국의 시골 마을들 곳곳에 들러서 주차장에서 잠을 자거나 싸구려 모텔을 빌리고 작은 식당들에서 밥을 먹고 황량한 도로를 달리며 약 8개월간 거리 생활 비슷하게 하며 여행을 한다.

독특한 사람들과 이상하지만 재밌는 대화도 나누고 형편없는 시골 음식점에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이상한 음식을 줘도 그런대로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여행하며 이곳은 정말 이상하다 고쳐야 한다 등의 비판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대로 받아들이고 황량한 시골 마을에 대한 따스한 애정어린 시선도 느껴진다. 물론 유머도~ 그렇기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특히 여행중에 조지와 마크가 나누는 대화도 재밌었는데 그렇게 대화하다가 가끔씩 회상하는 두 사람의 어릴적 일화도 너무 귀엽고 웃겼다. 어릴 때 처음 조지가 마크네 집에 초대받아 가서 했던 실수나 하굣길에 둘이 소떼들한테 갇혔을 때 리코더를 불어서 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얼마나 웃겼던지. 이 두 친구의 우정이 참 좋았다.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의 도로를 달리던 생각이 났다. 평평한 풍경에 끝도 없이 나 있던 도로. 황무지 같지만 가끔가다 보이던 집들. 이곳엔 누가 살기나 할까 싶었던 고립감과 외로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늘 언제나 훨씬 컸던 미국의 자연. 생각보다 친절했던 사람들 등등.

그때 그 여행의 추억에 젖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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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는 냄새를 잘 못 맡기도 하고(..) 어디를 가거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 냄새를 기억 속에 간직한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살지 않았다. 근데 따지고 보면 나도 동물인데 의식을 못 하고 있다 뿐이지 냄새를 분명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긴 할 거다.

그래 생각해 보자... 내가 맡았던 냄새들... 어릴 때 놀았던 아파트 앞마당 잔디밭 냄새, 토끼풀 냄새, 어떤 잎에서 났던 사과 냄새, 학교 냄새, 여름 방학 냄새, 비올 때 놀이터 냄새 등등이 떠오른다. 오오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나도 냄새로 그 순간을 기억하기도 하는 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냄새를 찬찬히 소환해 본다. 떠오른다 떠올라 냄새도 기억도...ㅎㅎㅎㅎㅎㅎ

 

 

이 소설은 보통의 사람보다 월등히 냄새를 잘 맡고 잘 구분해 내고 잘 기억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에멀라인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냄새만 맡고도 위험을 느끼기도 하고 사람의 성격도 파악하고 거짓말인지 아닌지도 단번에 알 수 있으며 냄새가 색깔로도 표현이 되고 또 냄새가 에멀라인에게 말도 걸고 한번 맡은 냄새는 절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도 하고... 냄새능력자라고나 할까? 어쩐지 히어로물에 나올거 같은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지만 이 소설은 분위기가 서정적이고 동화 같기도 한 성장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에멀라인은 어린 시절을 외딴 섬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서만 지냈다. 섬 밖의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전기도 수도도 안 들어오는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인 채 자랐다.

오두막집 한쪽 면은 작은 서랍들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그 서랍 속에는 작은 병이 봉인된 상태로 하나씩 들어있고 그 병 속에는 종이 한 장씩이 들어있었다. 그 종이들 각각에는 바로 아버지가 모아놓은 냄새가 스며있었다. 즉 냄새를 사진처럼 종이에 담아 보관해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냄새를 찍어내는 기계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그 기계를 꺼내서 작동시키고 그 순간의 냄새가 종이에 찍혀 나오면 병 속에 담아 서랍 안에 보관했다.

에멀라인이 성장하여 1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점점 더 서랍속 병들에 집착하게 된다. 냄새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 하고 계속해서 우울해 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고 있던 아버지를 에멀라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소중한 병들을 바닷속에 전부 던져버리게 되고 그 행동을 알게 된 아버지는 에멀라인을 말리려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결국 아버지는 죽고 섬에는 어린 에멀라인 혼자 남게 된다.

 

육지로 나오게 된 에멀라인은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성씨도 모르고 생일도 모른다. 다행히 바닷가에서 민박집을 하는 마음씨 좋은 부부가 에멀라인을 돌봐주게 되고 학교도 다니면서 13살에 처음으로 섬 밖의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게 새롭고 적응이 쉽지 않은 와중에 학교에서 피셔라는 소년과 친구가 된다. 피셔는 에멀라인이 냄새로 세상을 읽듯이 시각으로 세상을 읽는 아이다. 피셔가 그런 능력을 갖게 된 이유는 피셔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집에서 피셔와 그의 어머니를 학대하던 아버지로 인해 피셔는 늘 긴장 상태에서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관찰력이 생겨났던 것이다. 에멀라인과 피셔는 감각기관은 다르지만 어쨌든 감각으로 세상을 느낀다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피셔는 아버지의 학대로 결국 가출해서 도시로 나가게 된다. 한편 에멀라인은 그동안 계속 추적해 오던 아버지의 과거를 드디어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고 자신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래서 연락이 없는 피셔와 한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도시로 나간다.

 

결국 도시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 빅토리아를 찾은 에멀라인은 어머니 또한 그녀처럼 냄새에 대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그 능력을 활용하여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도록 유도하는 냄새를 만들어서 매장에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에멀라인도 회사에서 냄새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한다. 호화로운 아파트와 자신만의 연구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생활에 에멀라인은 점점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고 강단있는 어머니를 닮고 싶어 한다. 회사에서도 에멀라인만의 능력으로 새로운 향기를 개발하면서 어머니한테 인정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섬에 들어가 숨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에멀라인은 어머니에 대한 진실도 알게 된다. 아버지가 섬에서 에멀라인에게 들려주곤 했던 냄새사냥꾼과 그를 홀리던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멀라인은 다시 어머니를 떠나 사랑하는 피셔와 바닷가 마을로 돌아간다.

 

 

섬에서의 어린시절, 육지의 바닷가에서의 중고등학생시절과 성인이 되기 바로 직전까지의 도시에서의 생활을 겪으며 에멀라인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웠다.

평범치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의 영향 아래에서의 삶을 겪어본 후 에멀라인이 선택하는 삶은 외딴 섬도 번잡한 도시도 아닌 바닷가 민박집이다. 에멀라인을 따뜻하게 보듬어준 양부모가 있는 곳 말이다. 냄새를 추억으로 간직하려고만 하던 아버지의 방식도 냄새를 적극 이용해서 돈을 버는 어머니의 방식도 아닌 냄새는 그냥 냄새인 채로 둘 수 있는 곳에서 에멀라인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에멀라인은 깨닫는다. 좋은 향기만 있다고 그것이 좋은 냄새는 아니라고 그 안에 슬픔과 아픔의 냄새가 함께 공존하고 있을 때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의 냄새가 섞이는 이 모든 일들을 경험한 후 에멀라인은 삶의 진득한 냄새를 알게 된 것이다.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동화같은 분위기로 조용하고 차분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설이었다. 냄새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 같은 것도 아이디어가 넘쳤고 문체도 예뻤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바다냄새가 맡고 싶어졌다. 소금 바람 냄새도. 모래냄새도.

바다...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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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10분 정도만 가면 호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댐으로 생긴 인공호수다. 왔다 갔다 하면서 자주 호수를 본다. 산책길에 나서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큰 감흥은 없다. 늘 보던 풍경이라 그런 거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호수를 지나가면서 뭔가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는 거다. 가령 호수 밑바닥과 호수 표면의 온도차로 인해 물속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라던가 부영양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생기는 현상인가 라던가 호수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기록하는가 라던가 사해와 갈릴리해가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상식이라던가 등등을 마구마구 얘기하고 싶어지는 거다. 뭐 좀 읽었다고 바로 이렇게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꼴사납긴 하다.

호수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쓴 이 책은 나처럼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책 한권 읽고 바로 머릿속에 지식이 쌓였다며 뽐내고 싶어 할 만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다. 호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학적인 현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서 뿌듯한 마음도 들게 한다.


 

사실 이 책은 호수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 호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내내 일깨워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당연하지만 자주 잊곤 하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인류의 역사가 호수 환경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준다. 호수 밑바닥의 퇴적물을 채취해서 연구해 보면 호수가 간직하고 있는 지구의 사건, 사고가 훤히 보인다는 사실이 참 경이로웠다.

아무리 오지의 고립된 호수라도 연구해보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가령 핵무기 실험이 한창일 시기에 나온 방사능 물질은 전혀 상관없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호수 퇴적층에서도 발견된다는 식이다.

 

이토록 호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 초반의 뉴욕주에 있는 블랙 호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주에서는 블랙 호수의 고유종인 송어를 보존한다는 구실로 호수에 독을 풀었다. 외래종인 물고기들은 독으로 싹 죽이고 송어를 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호수의 퇴적물을 연구해 본 결과 외래종이라고 알고 있던 물고기의 DNA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이 호수에 있었다. 블랙 호수에는 송어뿐만 아니라 다른 물고기들도 고유의 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호수에는 치명적인 독을 풀어버린 후였다. 과학적인 연구 없이 예전의 기록만으로 블랙 호수엔 송어만이 고유종이라고 땅땅 결론을 내고 보존이라는 나름대로 좋은 의도로 벌인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러한 실수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오로지 정확한 분석과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호수를,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읽으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책 읽는 내내 인간과 자연 그리고 과학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산책하다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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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루시 골트 이야기는 정말 너무 좋아서 읽으면서 계속 감탄했었다. 그래서 새로운 소설이 번역 되었다 길래 두근두근 하면서 책을 사서 당장 읽어 내려 갔다. 그런데......그렇게 믿었건만 윌리엄 트레버! 이번 소설은 좀 별로였다.

서정적인 문체는 여전했고, 문장 사이사이에 여기저기 끼어드는 회상으로 조금씩 힌트를 주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독특한 스타일도 여전했다.

문제는 펠리시아와 힐디치라는 두 캐릭터의 매력에 있었다.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캐릭터는 힐디치다. 그가 엄청나게 구역질나는 악인이긴 하지만 내용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작가도 힐디치에 대해서 얼마나 입체적으로 묘사해 주는지 모른다. 그가 살인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의 일상, 펠리시아를 만나고 나서 변화하는 모습 등등 힐디치에 대해서는 정말 친절하게 속속들이 알려준다. 약간 동정심이 생길정도로......

반면 펠리시아는 너무 착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다. 이렇게 끝까지 캐릭터를 유지하다가 기가 막히게도 힐디치를 용서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힐디치의 마지막을 알게 되고나서 그거면 됐다라고 하면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거다! 너무 답답했다.

끝까지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힐디치가 벌인 일들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여전히 거리를 떠돌면서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 의지한다.

책 뒤의 해설을 읽어보니 작가는 이 책을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고 한다. 선은 악이라 부르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접한 후에야 눈에 보인다며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주변에 선이 보이는 이유가 그래서라고 한다. 작가의 의도는 잘 알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감동할 수 없었다. 악을 보고 나서야 선이 보인다라는 여정을 밟아 나가는 와중에 왜 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슬픈 사연도 있다라는 길을 지나가야 했는지 자꾸만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왜 스스로 벌을 했으니 그거면 되었다가 되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책을 덮고 나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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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간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 마고 샤프가 맺는 관계는 상식 밖의 행동이고 부도덕하기도 해서 정말 저럴 수가 있나 싶게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는 마고 샤프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에 앞서 이 인물이라면 그런 관계를 맺기도 하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인물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집중력 있는 시선에 결국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마고 샤프는 23살 대학원 1년생때 밀턴 페리스 교수의 신경심리학 연구소에 발탁되어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뻘 되는 페리스 교수의 불륜상대가 된다.

 

 

실험실에서 페리스가 그녀를 꼭 집어 칭찬할 때면, 마고는 힘없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거리고 커다란 행복감으로 심장이 뛴다. 마고는 줄곧 모범적인 여학생으로, 딸로 살아 왔기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그녀는 순결한 딸이다. 당신이 그녀를 믿으면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다.

(65)

 

 

하지만 이런 관계가 늘 그렇듯 교수는 다른 여자한테 관심이 옮겨가고 마고는 버림받는다. 사실 페리스 교수는 제자들의 연구를 훔쳐서 자신의 것으로 발표하고 이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막강한 권력과 인맥을 이용해 좋은 자리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복하며 젊은 여자들을 이리저리 사귀고 다니는 유의 사람이다. 이런 것을 마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의 실체가 어떻든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마고 샤프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페리스 교수 덕에 연구소에 들어왔고 교수까지 되었으니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고 샤프는 페리스 교수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순결한 딸이 된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마고의 페리스 교수에 대한 사랑은 어쨌든 내쳐지고  마고는 슬퍼한다. 그 슬픔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 한다.

하지만 연구대상인 기억상실증 환자 엘리후 후프스에게만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그는 현재의 일을 70초밖에 기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마고가 페리스 교수와의 감정을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고백하면 그는 친절하게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준 다음 그 일을 다 잊어버린다. 손상을 입은 뇌는 기억을 저장하지 못 한다.

 


E.H.가 마고를 안아 위로해준다. 이제껏 이런 식으로 마고 샤프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마고 샤프와 엘리후 후프스가 이토록 친밀하게 몸을 맞대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단둘이 었었던 적이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과 지금 하는 행동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마고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뛰는데도 이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녀의 얼굴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캐시미어 울과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가슴 속에는 기억상실증 환자의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아름다운 영혼.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129)

 

 

이렇게 마고의 사랑은 엘리후 후프스에게 옮겨간다. 늘 현재를 사는 사람, 사고를 당하기 전인 37살에 기억이 멈춘 사람, 언제나 상냥하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엘리는 마고를 기억하지 못 한다. 그는 늘 처음만난 사람으로서 마고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고 마고는 똑같은 자기소개를 반복해야 한다. “저는 마고 샤프에요하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이 반복에 어쩌면 마고는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엘리는 70초 마다 처음 만나는 마고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는 페리스 교수처럼 마고를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마고는 엘리와 공식적으로는 연구대상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상대로 30년을 함께한다. 마고는 엘리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우리가 서로 부부라고 속인다. 그러면 엘리는 그 말을 믿고 당장 마고에게 사랑하는 여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70초가 흐르면 모든 걸 잊는다. 마고는 이런 식으로 엘리와 사랑을 했다.

마고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없다. 그녀에게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녀 자신이 30년 동안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내버려뒀다. 그 연구의 대상은 바로 기억상실증 환자 그녀가 사랑하는 엘리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입장에서는 30년 동안 열렬히 사랑을 한 셈이다.

 

 

기억상실증에 관한 메모 : E.H. 프로젝트(1965~ 1996)

그녀는 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녀는 그를 만다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녀는 그를 만다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들이 처음 만난 지 31년이 되던 해, 마침내 그녀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그는 이미 그녀를 잊었다. (9)

 

 


나는 사실 마고 샤프의 사랑이 너무도 허망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마고가 했다는 사랑이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사랑은 그녀가 마고 샤프이기 때문에 하는 거다. 그녀는 외골수다. 과학자로서 연구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지독한 외골수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페리스 교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에 동참하지 않았다. 또한 엘리에 대한 혼자만의 사랑도 얼마나 지독한 외골수인가.

 

이런 인물을 작가는 진득하게 따라가면서 그 외양에서부터 심리까지 상세하게 펼쳐 보여준다. 그렇게해서 마고 샤프라는 개연성이 창조되었다. 마고 샤프니까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납득이 갔다. 그래서 점점 엘리와의 관계에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마고에게 섬뜩함을 느끼다가도 아무리 해도 상대방에게 응답받지 못 한다는 외로움이 그녀에게 보일 때 참 슬프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성향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인물과 함께 했다. 이런 인물을 보는 건 역시 마음이 안 좋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마고 샤프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이 사랑은 똑똑하게 하지 못 했다. 감정이란게 그렇게 작용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한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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