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20대 초반의 청년 크리스 맥캔들리스가 알레스카의 숲속에서 죽은 채 발견 되었다. 4달가까이를 혼자서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다가 결국엔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고 혼자 죽어간 것이다. 맥캔들리스는 스스로 그 숲에 찾아갔고 야생에서 살아보겠다는 꿈을 위해 4달을 맨몸으로 버텼다. 최소한의 생존 도구들만 챙겨 갔지만 알래스카의 야생에서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맥캔들리스의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그 청년이 너무나 어리석었다고 비난했다. 자연을 우습게 보고 젊은 객기를 부린게 아니냐는 것이다. 맥캔들리스의 준비성 부족과 오만함이 가져온 비극이라며 청년의 죽음에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초반 이 책을 읽을땐 맥캔들리스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무모할까? 애초에 감당도 못 할 야생으로 들어가는게 아니지! 알래스카 숲속이 무슨 애들 장난인가? 하는 생각으로 쉽게 그 죽음을 손가락질 했다.


 

하지만 저자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말을 건낸다. 크리스 맥캔들리스가 알래스카로 가기전의 삶을 추적해 20대 청년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가득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바람대로 로스쿨에 가는것 대신 무전여행을 다닌다. 그러면서 야생에 대해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며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똑똑하고 재능이 많으며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애정을 듬뿍 쏟았던 한 노인은 맥캔들리스를 양자로 삼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저녁 초대로 처음 만나 몇시간이나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며 인상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던 노부인도 있었다.



이토록 그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왜 혼자서 알래스카 오지에 가서 생활하려고 했던 것일까?
저자는 그게 젊음의 열정이 과도하게 표현된 예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20대 젊은 시절 미친짓을 한다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숙한 젊음은 그게 호르몬의 농간이든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든 아무튼 열정폭발의 단계를 거치지 않느냐고.
저자도 젊은 시절 알래스카의 산들을 등반하며 그 열정을 분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위험해서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아서 살아 남았다고.
저자는 맥캔들리스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고 함부로 이 열정가득한 청년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캔들리스를 비난하는 많은 어른들도 자신들이 미숙하고 바보같은 행동들을 하던 무모했던 그 시절을 이 청년이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몇년전 여행을 갔을 때 인생 처음으로 사막에 가게 되었다. 나는 그곳이 참 좋았다. 뜨거운 태양과 황무지가 펼쳐지는 풍경도 물론 좋았지만 이런 시각적인 느낌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많은 간접 체험을 해봤기 때문에 어느정도 예상하던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좋았던건 고요함이었다. 이런건 정말 예상도 못 했었다.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아니 몇 날 며칠이고 있고 싶었다. 이런 고요함과 함께라면 혼자 남겨져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경험을 미루어 이 책을 읽다보니 만약 맥캔들리스처럼 열정 넘치고 행동력 강한 청년이라면 내가 느꼈던 그런 고요함 비슷한 자연의 강한 이끌림을 좇아 어디든 가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남을 쉽게 비난하기는 쉽다. 그 사정들이 무엇이었는지 한 인간의 성향이 어땠는지 그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벌어진 상황만 보고 어리석다 치부해버리는 건 너무나 쉽지만 각박하다. 

알래스카 오지에 가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다 보니 목표를 위한 고집스러운 열정이 보였고 그리고 젊음이 보였다. 젊다고 모두 그처럼 위험한 모험을 불사하지는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젊음이 맥캔들리스가 했던것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뿐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젊음이란 것엔 무모함을 조금씩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게 죽음의 극단까지 가지는 않았더라도 젊음은 어느순간 엉뚱한 용기로 표출되기도 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그런 이해에서 이 책을 덮을 즈음엔 맥캔들리스의 도전에 내가 했던 처음의 비난이 누그러지는 경험을 했다.
너무 젊었던 그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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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랜즌의 새 소설이 번역되어 나왔다길래 반가운 마음에 사두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책장에 묵혀두기만 하고 있었다. 사실 묵혀둔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책이 있다는 것 자체도 거의 잊고 있었는데 요근래 갑자기 책장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거다. 그래서 읽게 됐다.ㅎㅎㅎ



일단 나는 이 소설 전에 나왔던 '인생수정'과 '자유'를 아주 좋게 읽었었다. 조너선 프랜즌은 소설을 아주 길게길게 쓰는 작가지만 읽다보면 그 긴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진지하지만 솔직한 구석들이 참 많아서 공감 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순수"는 그 전 소설들에 비해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일단 나는 여기 이 소설의 인물들에 설득당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 다 미친거 같은데 이걸 또 이렇게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은 느낌이 소설을 읽는내내 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속 인물들이 나는 너무 싫었다.

가장 비호감인 인물 안드레아스 부터 말하자면 일생을 어머니에 대한 애증에서 자유롭지 못 했던 인물이다.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부터 반항하다가 반체제 인사가 되고 어린 소녀들과의 문란한 잠자리를 하면서 한 소녀를 만나 살인자가 되고 그 살인을 평생 감추기 위해서 초조하게 살다가 결국엔 자기자신을 죽임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인물. 

결국 그가 했던 모든 사회적 행동들 사회 곳곳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정의를 실현시킨다는 공적인 그 행동들의 원천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었다. 어머니가 진실하지 못 했다는 증오, 그러나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욕망. 즉 한마디로 말해 애정결핍이 안드레아스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애정결핍은 관심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발전하고 진실한 세상을 위한다는 뻔지르르한 겉모습으로 위장해서 안드레아스를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인터넷시대의 최고 수혜자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게 유명인이 되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결핍은 안드레아스 자신을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만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그럼에도 이 인물에 동정이 가지는 않는다. 중년의 애정결핍 아저씨의 칭얼거림이 읽는내내 짜증이 나서였을까...



톰과 애너벨의 사연은 또 어떤가... 아 진짜 이 커플은 혈압 상승이다.

부잣집 철없는 딸 애너벨과 그런 애너벨에게 압도 당해서 자신의 자아를 던져버리고 애너벨과의 합일된 사랑을 꿈꿨던 톰. 하지만 내 자신을 타인에게 맞추기만 하면서 사랑하는 커플이 행복할 수는 없는 법. 하여튼간에 이 둘은 어마어마하게 미친 사랑을 하다가 헤어진다.

특히 애너벨의 이야기는 톰의 입으로 말해지기 때문에 이 여자가 왜이렇게 미친건가 납득이 잘 안 가기도 했다. 대체 이 커플은 왜이러는 걸까 싶은 생각만 들었다.

결국 이혼을 하고도 계속 만나다가 애너벨은 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자취를 감춰버린다.

톰은 애너벨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고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다 주지 못 한다. 여전히 애너벨을 사랑하고 있다는 듯이......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같이 살면 지옥이 되어서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커플이라고 한다.

나는 이해가 안 가지만 비호감도로 따지자면 이 커플이 안드레아스보다는 좀 덜 하니 그래도 참고 읽었다. ㅎㅎ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란 핍.

처음 등장부터 대학 갓 졸업한 그녀가 중년의 유부남을 사랑한다고 해서 독자를 식겁하게 만들지만 다행히 그 유부남이 핍을 거부해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그러다가 안드레아스와 엮이면서 그를 또 마음에 두게 되는데 나는 제발 핍 그러지 말아라 하면서 책장을 조마조마하게 넘겨야만 했다. 다행히 핍은 결정적인 순간 제정신이 돌아와 안드레아스를 거부한다.

아무튼 안드레아스의 농간으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된 핍은 아버지를 찾게 되고 어마어마한 상속재산도 찾고 또래의 남자와 사귀기도 하면서 해피엔딩을 장식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퓨리티이고 그게 핍의 본명이라 나는 핍이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중년의 안드레아스나 톰에 대한 이야기는 풍부하다 못해 사족도 많은데 핍의 이야기는 참 간결하다. 그래서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는 정말로 대체 이 작품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안드레아스와 톰의 80,90년대 이야기로 이 책은 상당한 분량을 채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시절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또 잘 쓰는 분야인거 같아 보인다. 그래서 어쩐지 현재를 살고 있는 20대의 여자 핍을 억지로 끌고 와서 잠깐 맛만 보여주며 구색을 맞춘거 같은 느낌이 조금 들기도 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혼란한 세상에 그래도 퓨리티라는 희망이 자라나고 있다는 뭐 그런 밝은 이미지로...




오랜만에 길고긴 장편소설을 한 편 읽었다. 소설이 조금 불만족스럽긴 해도 호흡이 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었더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ㅋㅋ

인물들이 비호감이라고 불평하면서 읽긴 했어도 책을 덮고나니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아직 이 소설에서 감정이 다 빠져나오지 않았나보다.

긴 소설의 후유증이 바로 이런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한권 끝내면 뿌듯한 두툼한 소설.

조너선 프랜즌은 다음 작품도 이렇게 두툼하게 내 주시길. 아울러 분권 하지 않은 출판사 칭찬해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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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주의 작은 도시 엠파이어 폴스는 이곳의 오랜 유지인 화이팅가 소유의 직물공장이 사양길에 들어서자 도시도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장이 문을 닫고 20년 이상이 흘렀지만 도시는 여전히 쇠퇴를 거듭하고 있다. 인구는 줄고 좋은 직장은 없고 예전 직물공장이 흥했을때 몰려들었던 사람들 중 떠나지 못 한 사람들은 남아서 근근이 먹고 살고는 있지만 활기는 이미 죽어 버린 황폐한 도시.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42세의 마일스 로비.
그는 한때 어머니 그레이스 로비의 희망이었다. 그레이스는 아들을 쪼들리는 살림이지만 다른 도시의 대학까지 보내며 그가 쇠락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워낙 착하고 효자였던 마일스는 대학을 다니던 중 그레이스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병간호를 위해 고향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죽어가면서도 옆을 지키는 아들 마일스에게 제발 이곳을 떠나라고 비명에 가까운 애원을 하면서 눈을 감는다.
마일스가 그런 어머니의 간절한 유언에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에 남게 되는 배경엔 화이팅가의 미망인 프랜신 화이팅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죽기 전까지 프랜신의 가정부로 일을 해왔는데, 그레이스가 암에 걸리자 마일스를 불러들인 프랜신은 그녀 소유의 식당인 엠파이어 그릴을 맡아 관리하는 일을 그에게 권한다. 병든 어머니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동생인 데이빗 그리고 밖으로만 나도는 아버지 맥스 로비로 구성된 가족의 장남으로서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마일스는 프랜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엠파이어 그릴을 운영하며 20년이 흐른 현재, 마일스의 상황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20년을 함께 산 부인 제닌과는 이혼을 앞두고 있고 제닌과 바람이 난 피트니스클럽의 사장놈은 뻔뻔스럽게 엠파이어 그릴에 매일 드나들며 마일스에게 같잖은 조언을 하거나 근육자랑을 해댄다.
닌과 살게 된 사랑하는 딸 틱도 문제다. 엄마와 엄마의 애인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고 학교에서는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었다. 이런 예민한 사춘기 딸을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엠파이어 그릴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샬렌은 마일스의 영원한 첫사랑이자 짝사랑 상대다. 마일스가 10대일때 부터 열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현재도 여전히 마일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여자지만 샬렌에게 마일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자가 아니다.
프랜신의 딸 신디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구가 되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줄곧 마일스를 사랑해 왔다. 마일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신디에게는 친구이상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신디는 자살시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가 최근에 퇴원해서 마일스의 마음을 다시 무겁게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일스 자신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나 활기가 없어 보이는 그. 몸과 마음 모두 정체되어 있는 마일스의 상태는 부인 제닌을 못견디게 하였고 결국 이혼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닌은 막 별거상태에 들어갔을 때의 마일스와의 일화를 떠올린다. 엠파이어 그릴에서 퇴근하여 늘 그렇듯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려던 마일스. 하지만 이미 그 집은 제닌과 별거하기로 한 상태의 집이었고 침대에는 제닌과 그녀의 애인이 자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마일스는 부끄러움에 얼른 집을 빠져나가고, 혹시나 마일스가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 건가 싶어 공포에 떨었던 제닌에겐 황당함을 안겨 주었던 사건.
자신이 별거상태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타성에 젖은 삶을 살고 있던 마일스였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인 셈이다.



20년 동안 정체상태인 마일스처럼 엠파이어 그릴 또한 어떤 변화도 없이 늘 근근이 유지되어왔다. 수익이 나지 않는데도 프랜신은 엠파이어 그릴의 문을 닫지 않았다. 프랜신이 다른 사업체에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도 말이다. 이미 도시의 반 이상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프랜신이지만 사업에 있어서는 칼 같은 구석이 있어서 엠파이어 그릴 같은 적자상태의 식당은 당장에 팔아버렸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게 모두에게 의문이었다. 게다가 마일스에게 자신이 죽으면 엠파이어 그릴을 물려주겠다는 말까지 하며 식당에 계속 남아있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마일스의 동생 데이빗은 프랜신의 말을 믿고 꾸역꾸역 식당을 운영해가는 마일스가 답답하다. 식당을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소극적이고 그저 현상유지만 하길 바라는 프랜신에게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는 마일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프랜신이 반대한다면 다른 식당을 차리면 되는 것을 마일스는 그것 또한 망설인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진짜로 식당을 넘겨줄지도 의문인 프랜신의 말만 믿는 마일스에게 데이빗은 제발 눈을 뜨라고 대든다. 프랜신은 형을 그저 가지고 놀고 있는 거라고, 자기 손아귀에 놓아두고는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사실 마일스는 프랜신과의 만남이 늘 껄끄러웠다. 미묘하게 마일스를 떠보려는 듯,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말들을 하면서 마일스의 반응을 살펴보거나 그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구는 프랜신. 그녀 앞에 서면 마일스는 언제나 기분이 상하고 상처가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일스는 프랜신을 향한 일종의 고마움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릴 때 운전 교습을 시켜준 것과, 대학학비와 생활비, 어머니의 병원비를 도와주었다는 고마움에 더해 자신에게 엠파이어 그릴을 물려주겠다는 약속까지.
근데 과연 프랜신은 마일스에게 정말로 은인이었을까 아니면 마일스를 교묘하게 통제하길 즐기던 사람이었을까?



마일스와 어머니 그레이스와는 비밀이 있었다. 9살이던 마일스는 그레이스와 휴양지 섬으로 휴가를 가서 그레이스의 불륜상대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기억이 심지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마일스가 어른이 되어서도 매번 휴가를 그 섬으로 갈 정도로.
당시 어린 마일스가 보기에도 제멋대로 일탈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인 아버지 맥스 보다는 점잖고 매너 좋고 부유해 보이는 섬에서 만난 남자가 어머니의 상대로 더 잘 어울려 보였다. 어머니가 그 남자와 살기를 바랄 정도로...
하지만 섬에서 돌아와서 그레이스는 가족을 떠나지 못 했다.
마일스는 그것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늘 의문을 품고 있다. 그때 어머니와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어머니는 왜 떠나지 못 한 것인지 하는...



이 소설은 현재와 과거 회상이 교차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어린 마일스의 시선으로 엄마의 불륜을 회상하는 부분은 문체가 뭔가 참 아련하고 몽글몽글 하다.
섬을 떠나며 아빠한테 선물 받은 야구장갑을 리조트에 놓고 왔다는 설정은 마일스의 마음이 엄마의 애인에게 기울었다는 은유로 적절한 장치였고, 돌아와서 아빠한테 엄마와의 비밀을 얘기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아이답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나 엄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린 시선으로 걱정스레 지켜보며 고해성사하고 나온 엄마의 뒤를 밟는 대목도 인상 깊었다. 마일스는 그레이스가 강물에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뒤를 쫓았지만 정작 그레이스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가기위해 다리를 건넌다. 어린 마일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그레이스가 프랜신을 찾아 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대목이었다. 독실한 신자 그레이스는 불륜을 저지르고 마음이 괴로워 그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프랜신에게 용서를 구하러 갔을 것이다.


어른이 된 현재까지도 마일스는 그레이스의 애인이 누구였는지 눈치 채지 못 했다.

하지만 최근 프랜신과의 대화 속에서 은연중에 받은 암시 때문이었는지 치매 걸린 늙은 신부가 그레이스에 대해 하는 험담 때문이었는지 신디와의 만남에서 그레이스와 신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본 때문인지 모든 상황이 마일스에게 눈치 좀 채라고 말하는 와중에 예전 직물공장의 전성기 시절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섬에서 만난 그레이스의 애인이 바로 C.B. 화이팅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공장의 소유주였고 프랜신의 남편이자 신디의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의 불륜상대였다니...
프랜신은 결국 복수를 위해서 마일스를 교묘하게 통제해 온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드디어 마일스에게 밀려온다.
그리고 프랜신이 복수했던 대상이 자신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그레이스는 프랜신의 집에서 일하게 된 후부터 점점 미모를 잃고 온 정신을 프랜신의 집안일에 빼앗겼다고 마일스는 회상한다. 마치 20년 동안 엠파이어 그릴 안에서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현재 모습같이 어머니 그레이스 또한 프랜신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자신을 잃고 피폐해져 갔다.
그레이스가 죽으면서도 마일스에게 제발 이곳을 떠나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프랜신 곁에 있지 말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된 것이다.
 
 

정체되어 있던 마일스의 삶도 이런 깨달음과 함께 이제 꿈틀대기 시작한다. 고소공포증이던 마일스가 분연히 일어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당의 페인트를 벗겨내는가 하면 프랜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식당을 차리려는 준비에 들어가기도 한다. 제닌이랑 바람이 난 피트니스클럽 사장과 팔씨름을 해서 한방에 제압하기도 하고, 경찰이지만 프랜신에게 고용되어 수족 노릇을 하는 지미 민티와는 격투를 벌이기도 하는 대목은 그동안 참고 참으며 살아온 마일스의 온화한 삶에 격랑이 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틱의 학교에서는 괴롭힘 당하던 학생이 총기 난사를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일스는 그길로 틱을 데리고 엠파이어 폴스를 떠난다.
목적지는 틱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마일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던 장소로. 바로 어머니와 C.B. 화이팅이 만났던 섬으로.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한 마일스 부녀는 아직 엠파이어 폴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틱에게는 친구와 선생님을 잃은 트라우마가 있는 곳이고 마일스에게는 프랜신의 마수가 언제 뻗쳐올지 알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도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버지 맥스의 방문으로 마일스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불쑥 찾아온 맥스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평소의 그 꾀죄죄한 모습에 뻔뻔한 언행, 약간은 부도덕한 행동 그대로였고 마일스는 그런 아버지와 늘 하던 대화를 나누며 가족이라는 안정감을 느낀다. 비록 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갈굼과 놀림으로 귀결되지만...


사실 맥스는 처음부터 C.B 화이팅과 그레이스의 관계 그리고 어린 마일스가 그 비밀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 모두를 알고 있었다. 페인트 공이었던 맥스가 가장 하기 싫어했던 일이 기존에 칠해진 페인트를 벗겨내는 작업이었는데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성향인 맥스는 그래서 그냥 페인트를 벗겨냄 없이 그 위에 덕지덕지 칠해버리곤 했다. 바로 이런 맥스의 버릇이 그의 삶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풀기 어려운 문제는 파헤치지 않고 덮어버리려는 성향 말이다. 과거의 그때도 맥스는 그레이스의 불륜을 그냥 덮어 버렸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맥스를 속없는 사람 취급하면 곤란하다. 이제까지 늘 그래왔듯 아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

모든 게 밝혀진 현재 맥스는 아들에게 고백한다. 그레이스가 C.B 화이팅을 자신보다 먼저 만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현재 아들인 마일스와 손녀인 틱은 세상에 없었을 거라고... 그동안 아들과 손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이제 마일스와 틱 그리고 맥스는 함께 엠파이어 폴스로 돌아간다.
분명히 마일스는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정체된 삶을 살던 마일스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일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은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마일스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마일스가 끝까지 모를 비밀의 반전은 에필로그에서 드러난다. 바로 화이팅가의 비극의 전말.
딸인 신디를 친 교통사고의 범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인 C.B 자신이었다는 사실.
C.B와 그레이스가 헤어지게 된 건 C.B가 자신의 딸인 신디를 버리고 그레이스와 마일스와 자신 이렇게 딱 셋이서만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는 데에서 그레이스가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C.B는 딸 신디와 부인 프랜신 모두에게서 도망가고 싶어했다. 그토록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읽으니 프랜신의 그 마녀같은 삶이 이해되기도 했다. 남편은 바람나고 딸은 남편이 차로 쳐서 장애를 입고 그런 사실은 또 영원히 비밀로 묻어두어야 했고, 게다가 딸이 보는 앞에서 남편은 자살했다.
프랜신도 참 고난의 삶이었겠다 싶었다.




이 소설은 사실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다. 게다가 그 등장인물들 각자의 사연이 모두다 끌려나와 독자에게 펼쳐져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애정을 가지게 한다.
마일스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지미 민티 조차도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약간 동정하게 될 정도다. 그만큼 작가가 인물들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이해 가능한 인물로 창조해 낸 점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쇠락하는 도시와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전반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깔고 있는 소설이지만 곳곳에 포진한 위트있는 문장들과 인물들이 처해있는 재밌는 상황들 때문에 이 소설이 마냥 무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Nobody's Fool"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 작가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장 든든하게 밑바닥을 받치고 있다.
무겁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가 있고 그 모든 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따뜻한 느낌이라서 소설을 읽는 내내 안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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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소설이었다면 여기 나오는 부모들 욕을 실컷 하면서 이 책에 대해 말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 책의 장르는 저자가 직접 겪은 경험담을 엮은 회고록이다. 이게 실화라니...
저자가 겪은 어린시절의 고생은 백프로 부모때문이다. 정말 분노가 끓어 오른다.
하지만 이 책에 깔린 정서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애정이다. 그래서 쉽게 욕을 못 해주겠다. 남의 부모를 욕하는 상놈에자슥이 되는거 같아서...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한국의 알라딘이라는 사이트에서 내가 쓰고 있는 이 페이퍼를 읽어볼 확률은 절대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끔찍한 어린시절을 겪어내고 저자는 멋지게 성장한다. 그 고생을 하고도 삐뚫어지지 않고 총명하게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랬기때문에 이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저자가 이루어낸 인생이 결코 문제 많은 부모 때문에 방해받기만 한 건 아니라고 그런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부모지만 저자가 어린시절 겪은 부모의 양육방식에는 나름대로 기억할만한 아름다운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고 ...... 


정말 그 부모에대해 할 말이 많지만 저자가 이토록 그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데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물론 저자는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회고록을 쓰는 시점에 와서는 그런 부모를 이해했던 거 같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점은 세상엔 정말 너무도 다양한 삶이 있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며 점점 더 나빠지는데도 그걸 그냥 방치하면서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 

저자의 부모는 결국 노숙자까지 되는데도 그냥 또 그렇게 살아간다.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없이.
자식들의 도움도 거절하고 '너의 부모가 노숙자인게 뭐가 어떠니?' 하는 식으로 여전히 자신들의 삶의 신념(이라고 쓰고 고집이라 읽는다)을 굳건히 떠벌리면서...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다. 그 자식들은 얼마나 속이 터져나갔을까...



어쨌든 책은 재미있다.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독특한 경험담을 바로 이책에서 읽어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회고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한다면 인생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이해가능한 고생담이었다면 '회고록이 다 그렇지' 하며 심드렁할텐데 이 책은 정말 너무나 이해불가인 독특한 부모가 아이들을 고생시키기 때문에 저자의 성공을 간절히 응원하게 된다. 잘 커줘셔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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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프레스턴의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온두라스의 동쪽 모스키티아라는 지역에는 수백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열대우림이 있다. 나무와 온갖 식물들로 빽빽한 그 곳은 너무나 원시적인 자연 그대로의 밀림이라 사람이 접근할 엄두도 못 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오래전부터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었다. 그 밀림이 원래는 번성한 도시였고 수백년전 그 도시의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 때문에 그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곳을 사람들은 '시우다드 블랑카' 바로 백색도시 라고 불렀다.

처음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했을때 그 도시를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전설이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서구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보물을 찾겠다는 도굴꾼들과 잃어버린 도시를 찾고 싶은 모험가들이 이 모스키티아의 밀림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려 왔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밀림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아놓고 그럴듯하게 그 주변의 소문을 수집하고 다른 지역 유물을 빼돌려서 증거로 내밀며 드디어 잃어버린 도시를 발견했다고 떠벌리는 사기꾼들도 꾸준히 있어왔다.

이 책에서는 온두라스가 미국의 바나나 기업가에게 경제와 정치가 농락당한 근현대사를 언급하는데, 그와 비슷하게 서구열강의 사람들이 한 나라의 유적지를 보물찾기의 대상으로 여기며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녔던 기록 또한 다루고 있다. 읽고 있자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모험가든 도굴꾼이든 아무리 설쳐도 정작 모스키티아의 밀림 속을 제대로 탐험해 봤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곳이 너무나 울창한 자연이라 사람이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온두라스의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워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 세계 곳곳의 발견되지 않은 유적지들을 찾아내는 라이다라는 기술이 주목받게 된다.

오래전부터 모스키티아의 읿어버린 도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의 영화제작자는 라이다 기술을 이곳에 적용해 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라이다는 온갖 식물로 덮인 모스키티아의 밀림 속 지형에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닌 사람이 만든게 틀림없어 보이는 건축의 흔적들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모스키티아의 잃어버린 도시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고고학자들과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 언론인들, 다큐멘터리 제작팀, 온두라스의 군인들과 학자들 등등이 원정대를 꾸리고 모스키티아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정확한 지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밀림을 헤치고 두 다리로 걸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원정대는 풀과 나무들로 꽉 막혀 바로 몇미터 앞도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그 엄청난 숲을 헤치며 걸어간다. 불과 100미터를 가는데도 몇시간이 소요되는 고된 여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여정엔 당연히 무시무시한 뱀과 우글우글대는 온갖 벌레들도  빼놓으면 안된다.

모스키티아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원정대를 보고도 경계하지 않고 다가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다.

밤이 되면 모기들과 작은 날벌레들의 습격으로 고생하고 뱀은 어디에서도 나타나고 재규어가 텐트 주위를 어슬렁대고 나무위에는 거미원숭이들이 원정대를 쫓아내려고 소리를 질러대는 곳.

그러나 저자는 이런 울창한 자연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곳이었다 말하고 싶었던거 같다. 산같이 솟은 빽빽한 나무들과 숲의 소리들은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을 테니... 문명으로 돌아올때 아름다운 밀림을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 한다.

근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나는 저런곳엔 못 가겠구나 하고. 가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잃어버린 도시를 찾는다거나 온갖 모험얘기는 책으로나 읽고 싶은 거다.

특히나 저자가 밤에 볼일을 보려고 일어나 후레쉬를 땅에 비추니 수천마리의 새카만 바퀴벌레가 길을 덮고 있었다는 구절을 읽고 있자니 너무 소름이 돋는 거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서 나는 저런곳에 데려다 놓으면 1초도 못 버틸거 같단 생각을 했다.

원정대는 라이다에 나온 지표면의 흔적들을 찾아가서 피라미드나 건물터, 거대한 광장 같은 것들을 직접 확인한다. 모스키티아의 밀림 속에는 정말로 수백년전에 도시가 존재 했던 것이다.

게다가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돌로 만든 재규어형상의 조각품들과 도기 등 한무더기의 유물들도 발견하는 성과를 낸다.

이 책은 이런 발굴 상황을 사실대로 묘사하는데 나는 읽으면서 좀 밋밋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거다.

밀림을 헤치고 가서 유적지를 확인했고, 이 오목한 지형엔 울창한 초목을 걷어낸다면 예전 도시의 넓은 광장이 나타날  것이고, 저쪽 평평한 지대에선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뭐 이런식의 서술들 말이다.

이게 사실이고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대했던건 이런거다.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돌계단을 밟았더니 보이지 않던 문이 열렸고 그 문 안은 또 다른 수수께끼의 미로이며 뭔가를 만지면 저주가 내려서 원정대원의 누군가가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병에 걸려 죽고 등등등

영화나 소설에서 고고학자라는 주인공들이 나와서 고대문명의 미스터리를 풀어 가는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봐 온 나머지 나는 정작 현실에서의 중요한 발견이 픽션같지 않다며 은근히 실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사서 읽게 된 이유도 혹시나 저런 픽션같은 현실이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 책의 제목을 보라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라니. 분명 제목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맞긴한데, 이 제목에서 풍기는 냄새는 뭔가 인디아나존스의 한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미신적 전설을 따라가는 류가 아니다.

원정대는 신기술을 도입해서 지도를 제작하여 자연을 헤치고 가서 드디어 약 오백년 전에 이곳에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게 다다. 여기에 어떤 신비한 음모론 따위는 없다.

약간의 실망감은 여러 사실적인 추론과 흥미로운 정보들이 뒤이어 나오며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도시는 버려졌는가 하는 추론들 말이다.

여전히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여러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 저자는  서구 세계의 침범으로 인한 전염병의 창궐이 그 이유일 것이라  말한다.

모스키티아는 스페인 정복자들도 굳이 들어가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정복자를 피해 그곳 사람들이 도시를 버렸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된다.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오면서 함께 가지고 왔던 전염병들이 대륙을 휩쓸었고, 모스키티아의 오지 도시에까지 그 전염병은 확산 되었을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이 병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라 생각했고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그 이후 이곳은 아무도 들어가 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 추론을 뒷받침 하는 것이 원정대가 발견한 유물 무더기들이다. 귀한 물건들이 사람이 일부러 쪼개고 훼손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물건의 정령을 풀어준다는 의미의 일종의 제례의식이었다고 한다.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도시에서 일부 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의식을 치룬 뒤 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림의 환경 특성상 발굴한 유물들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도 불가능한 현재, 옛날 모스키티아에서 정확히 언제 어떤일이 벌어졌었는지는 여전히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유물들의 정확한 연대는 그 주변 문명들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유사성으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밀림에서 돌아온 저자는 어쩌면 기생충을 연구하면 모스키티아에서 도시가 버려진 시기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계기는 저자를 포함한 원정대원들 대부분이 리슈만편모충에 감염되어 치료를 받게 된 상황으로 발생했다. 치료중에 이 기생충이 모스키티아에서 고립되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 변이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기생충이 얼마동안 고립되어 있었는지를 연구하면 모스키티아에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시기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을 던진다.

리슈만편모충 치료가 상당히 고되고 위험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이 기생충이 모스키티아 도시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저자의 집념이 참 재밌으면서도 대단하다 싶었다.

온두라스의 역사는 스페인점령기 이후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 시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마야문명이 아닌 온두라스의 토착 문명은 발굴도 연구도 미진한 상태인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키티아의 잃어버린 도시의 유적지를 발견한 것은 온두라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 옛날에 모스키티아의 도시를 버린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온두라스 이곳저곳에서 정착해서 살았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서 연구한다는 건 온두라스인들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라고.

앞으로 나도 온두라스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또 무엇을 발견했는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소식이 들려오면 귀를 쫑긋하고 듣게 될 거 같다. 온두라스의 역사와 자연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관심있게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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