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가 나에게 증정한 내돈 내산 책이닷ㅎㅎㅎㅎㅎ)




나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장편소설 미들섹스결혼이라는 소설두 편을 읽었고 그 후 작가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신간으로 이 단편집이 나왔을 때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사실 나는 단편 취향이 아니라서 단편집은 잘 사지도 읽지도 않지만 이 작가의 단편이라면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정도로 장편을 꽤 인상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편집을 다 읽어본 결과 기대와는 다르게 썩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도 여러 편 있었다. 물론 좋았던 것도 있었고. 그러니까 좋았던 것과 별로였던 것이 골고루 들쭉날쭉 섞여 있다고나 할까.

 

 

먼저 이 작가의 장편 소설을 읽었으면 친숙할 단편이 두 편 보인다. “항공 우편신탁의 음부”. 

항공 우편결혼이라는 소설속에서 짝사랑으로 마음 아파하다가 친구 래리와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여행가는 미첼이 등장한다. 작가가 미첼이라는 캐릭터를 장편소설을 쓰기 전에 어떻게 구상하고 있었는지 살짝 들여다볼 수 있어서 흥미롭긴 했다. 하지만 모호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신탁의 음부에서는 미들섹스에서 주인공에게 여성으로 살 것을 진단했던 박사가 다시 등장한다. 근데 이 단편은 좀 너무 징그럽고 상상하기 싫어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가 않다. 너무 어린 아이가 그렇게 달려드는 장면은 정말이지.......

 

베이스터는 통통 튀는 시트콤 같은 느낌의 단편이 될 뻔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공포물이 되어버렸다. 이런 결론을 내놓고 발랄한 톤이 끝까지 유지 된다는 게 너무 섬뜩했다.

40살에 잘나가는 방송국 PD인 미혼의 토마시나는 아이를 낳고 싶어서 정자만 얻고자 한다. 우월한 유전자의 남자들을 물색하던 중 드디어 모든 조건이 만족스러운 남자를 찾아냈다. 그런데 이미 누구의 정자를 받아서 아이를 가질 것인지 합의가 다 된 이 상황에 키가 163cm라 우월한 유전자로 선택받지 못한 전 남친이 끼어든다. 그는 받아놓은 정자에 몰래 심술 맞은 짓을 해버린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나레이터인 전 남친이 너무 소름끼치고 결말도 저걸 어쩌나 싶어서 참 심란하면서 약간 불쾌하기까지 했다. 토마시나 입장에서는 진짜 너무 뜨악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이 단편집 중 가장 최근작은 2017년에 나온 신속한 고소인데, 이거 읽으면서도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인도계 미국인 소녀 프라크르티는 16살인데도 벌써 부모님이 정한 인도인 결혼 상대자가 있다. 프라크르티는 그렇게 결혼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계략을 꾸민다. 처음 보는 중년의 물리학 교수 매슈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진 후 강간으로 고소를 한다는 엄청난 일을 계획한 것이다. 프라크르티는 16살이라 성인이 상대일 경우 강간으로 고소가 가능하다는 것까지 다 알고는 매슈에게 접근한다.

여기서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근데 굳이 왜?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라는......이 소설에서 말하길 이렇게 해야 프라크르티는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으면서 처녀성을 잃었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그래서 정략결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며 앞으로도 쭉 부모님이나 그 누구도 프라크르티를 시집보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인도남자들도 그녀와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나?

여전히 설득이 안 된다. 정략결혼이 싫으면 가출을 하든지, 부모를 설득하든지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지 너무 급발진이잖아 이건! 굳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타의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어야 한다고 남을 이용하는 짓을 하는 소녀 캐릭터를 어떤 독자가 좋게 볼 수가 있나?

이건 너무 작가의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중간 없이 극단으로 폭주해버린 느낌. 명문대 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영특한 소녀가 저런 큰일을 저지른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 가면서 이런 설정을 굳이 했어야 하는 작가의 의도가 심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이게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어서 책을 덮고 나서 굉장히 찝찝했다.

 


좋았던 단편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고음악”. 음악학 박사과정에 있던 부부가 아이가 생기자 생활고 때문에 자신들의 꿈을 접고 남자는 피아노 레슨을 여자는 인형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에 치여 살아간다. 둘 다 지금의 삶이 힘들고 꿈을 포기한 게 후회스럽지만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일. 할부를 갚지 못해 압수 위기에 처해 있는 남자의 악기 클라비코드의 운명처럼 이 부부의 삶도 희망 없이 먹구름이 끼어있다. 우울한 생활감이 가득한 이야기였는데 현실적인 이야기라 꽤 마음에 들었다.

위대한 실험고음악과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이 나온다. 젊은 시절엔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문예지에 시도 실린 꿈 많고 유망한 시인이었던 주인공이지만, 현재는 의료보험도 들어주지 않는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보온이 거의 되지 않는 오래된 집, 맞벌이 부부라 늘 지저분한 집안 풍경, 난방비 아끼려고 난방을 거의 틀지 않아 추워서 친구네로 피신해버리는 아이들, 이 모든 궁핍한 상황이 이제 중년의 주인공을 자꾸 비참하게 만든다. 그래서 범죄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게 된다. 하지만 결론은 예상대로 처참하다.

이 단편 또한 젊은 시절 좌절된 꿈과 닥쳐오는 생활고라는 냉정한 현실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는 소설이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작가는 꽤 할 말이 많고 또 잘 쓰는 분야인거 같다. 그래서 꿈꾸는 시간이 지난 후 지독한 현실이 닥쳐올 때의 씁쓸하고 우울한 정서를 담아낸 이야기들엔 공감이 가고 울림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여기 실린 모든 단편이 내 마음에 쏙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보니 스멀스멀 장편에 대한  갈증이 밀려온다.



작가님 이제 슬슬 장편소설 낼 시기가 오지 않았나요? 두툼한 장편을 내 주세요

작가님은 아무래도 장편이 훨씬 좋은 거 같아요^^




일단 초기작 "처녀들, 자살하다"나 구해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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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고 있는데 망고가 오길래 같이 찍자 했더니 그건 또 싫다며 딴짓 중인 녀석과 간신히 함께한 책 사진)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인기순위에 계속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이 올해 초에 처음 나왔는데 아직까지도 순위에 올라가 있는 거 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인기소설이란 뜻이겠지. 그래서 호기심에 나도 읽었다.

나는 이때까지 작가 크리스틴 해나의 작품은 한권도 읽은 적이 없어서 바로 이 소설로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소감이 어떠냐하면 글이 일단 굉장히 직관적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이었다. 슬프면 슬프고 화나면 화나고 나쁜놈은 되게 나쁜놈이고 착한 사람은 끝까지 착하다. 여기에는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어떤 숨겨놓은 속임수도 없고 따라서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 누구한테 마음이 가는지 어디에 분노해야 하는지 아주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읽으면서 감정의 동요는 있을지언정 어떤 모호함이나 비유를 찾아내기 위해 동반되는 스트레스는 없는 편이다.

때문에 약 450페이지의 장편을 비교적 금방 읽을 수 있고 읽으면서 금방 스토리에 빠질 수 있으며 쉽게 작가가 의도하는 감정에 도달할 수 있다. 중간중간 눈물 찔끔찔끔 흘리고 콧물 훌쩍훌쩍이며 읽었다는 말이다. 이게 인기 소설이 된 이유가 바로 이래서구나 싶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곡창지대이자 대평원지대에서 가뭄과 모래폭풍으로 땅이 황폐화되고 농부들이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던 1930년대이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같은 시대이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분노의 포도에서 대가족이 모래폭풍을 피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과정과 캘리포니아에서 낮은 임금과 부자들의 욕심으로 더 굶주리게 된 농부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과정을 이 소설에서도 비슷하게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 와중에는 당연히 분노의 포도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와 확연히 다른 점은 이 소설은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구성원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이다. "The Four Winds"에서의 남자는 가장 힘든 시기에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리고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여자는 가족의 가장이 되어서 아이들 두 명을 이끌고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 싸운다.

그러니까 25살에서부터 40살이 될 때까지의 엘사라는 한 여자의 삶을 따라 가면서 그녀가 인생의 고비를 하나씩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그저 고통을 침묵 속에서 삼키기만 하는게 여자의 미덕이라 여기던 엘사는 점점 고된 상황 속에 처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4번의 큰 전환점을 넘어가면서 점점 더 크게 세상에 나의 목소리를 높여가는 과정, 즉 엘사라는 여성의 각성과 성장을 "분노의 포도" 시대를 관통하면서 담아내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와서 "분노의 포도" 시대를 소환해낸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이 소설을 집필한 시기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전세계가 난리가 난 때였다고 한다. 그 최악의 시기에 미국에서는 인종문제까지 겹쳐서 사회가 걱정에 휩싸여 있을때에 1930년대 대공황과 가뭄과 모래폭풍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행해지던 혼돈의 시기를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것이다.

게다가 점점 여성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이 시대에, "분노의 포도" 시대를 다시 떠올렸다면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분노의 포도"가 남성 중심의 이야기라면 나는 그 배경을 가지고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겠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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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이 책 킨들에서
잠자고 있는 데
오늘 소환 해야겠네요

분노의 포도를 연상 시킨다니 !ㅎㅎ
망고님 벌써 초겨울
주말 따숩게 ^^

망고 2021-10-17 12:57   좋아요 0 | URL
후딱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ㅎㅎ 눈물 콧물 조심^^
스콧님도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이혼 과정에 있는 부부의 그간의 이야기를 참 지루하게도 써냈다.

결혼 생활에 대한 남녀의 분명한 입장차를 드러내 보인점은 나름 좋게 평가해 줄 수 있겠으나 문학작품을 읽을때 기대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나 공감의 감정이 일지 않는다.


내 부인은 너무 나쁜여자였어, 나처럼 착하고 모범적인 사람을 이토록 분노하게 하는 저여자야 말로 나쁜여자야 하며 친구들한테 등신같이 아내욕을 하고다니는 남자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 챕터에서 반전으로 일하는 여성이자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을 모두 소화해내느라 허덕이며 사는 여자의 입장이 드디어 등장하며 저 징징거리는 놈이야말로 지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는 찝찝한 점이 많다. 남편과 위기가 온다고 애들 친구 아빠와 불륜을 하는건 좀 아니지 않나?


별다른 서사 없이 인물들의 불평, 불만, 인생이 왜 이모양 이꼴이 되었을까? 따위의 우물거림을 쏟아내는 방식을 택하는 소설들에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은 위트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생각들이 가득한 문장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너무너무 지루한 투덜거림,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결혼 생활의 디테일들이 장황하게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게다가 너무 길어!! 


반쯤 읽다가 그동안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결말이라도 보려고 후루룩후루룩 영혼없이 읽으면서 마지막장을 덮긴 했다. 끝까지 이토록 재미가 없다니...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만약 이 소설의 의도가 찌질한 남자의 지루하고 자기 연민 가득한 징징거림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성공한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가 되었든 재미가 없는건 마찬가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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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미국 소설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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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이 난장판은 다 뭐지? 이거 소설 아니고 무슨 엄청 시끄럽고 뒤죽박죽인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애니메이션 한편 본거 같은데?’

필립 로스가 창조해 낸 거대한 농담 속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다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이다. 그리고 조금 정신을 차린 후 든 생각은 역시 작가라면 600페이지짜리 뻥 정도는 너끈히 쳐줘야 탁월한 이야기꾼 소리 듣는 구나 싶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미국 메이저리그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그리고 패트리어트리그 이렇게 세 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스미티라는 노인이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현재 요양원에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과거 스포츠기자 출신으로 그 역사의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스미티는 패트리어트리그의 몰락과 그것에 일조한 거대한 음모와 여전히 진행 중인 진실에 대한 침묵과 역사 지우기라는 범죄행위에 맞서서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위대한 미국 소설을 쓰기로 한다.

 

패트리어트리그 꼴찌팀 먼디스는 1943년 전쟁이 한창일 때 미 국방성에 홈구장을 팔아넘긴다. 홈구장 없는 팀이 된 먼디스는 전국을 돌며 원정경기를 다니는 유랑극단 같은 팀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의 거의 주인공급인 이 팀의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오합지졸에 선수로서 부적격한 신체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구단주가 오로지 돈 때문에 좋은 선수들을 다 팔아버리고 가장 선수 같지 않은 선수들만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의족을 단 포수, 한쪽 팔이 없는 타자, 난쟁이 다혈질 투수, 너무 나이가 많아서 경기 내내 졸고 있는 선수에 범죄자 출신 선수도 있고 관절이 아파서 공 던질 때 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선수에 14살밖에 안된 실력도 없는 꼬맹이에 진짜 별 이상하고 기이한 선수들이 왕창 모여 있는 팀이다.

먼디스팀의 경기는 늘 엉망진창 그 자체고 지는 걸 밥 먹듯이 하는데 상대팀들이라고 딱히 그리 멀쩡해 보이진 않는다. 흥행만 되면 뭐든 하는 미친 것 같은 다른 팀의 구단주는 난장판 경기를 주도하고 왕년엔 루키 선수들을 꼬시고 다녔던 미모의 구단주는 지금 패트리어트리그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다며 걱정한다. 과거에 패트리어트리그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혈질 투수와 정의로운 심판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경기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렇게 우당탕탕 덜커덕덜커덕하는 기괴한 패트리어트리그는 소련 스파이의 등장으로 빨갱이 색출이라는 광풍에 휩쓸리면서 종착점으로 달려간다. 스파이의 공작으로 먼디스팀 선수 전원이 소련 스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고 한바탕 심문과 구속이 집행되고 엉뚱한 영웅이 탄생하며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빨갱이 색출로 인기를 얻은 정치세력이 득세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패트리어트리그는 불명예스럽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도 못 한 채 아예 페이지가 뜯겨져 나가 버리는 운명에 처한다. 패트리어트리그의 홈 타운들은 그 도시이름마저 바꿔버려서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이젠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버린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라고 스미티는 말한다. 이 거대한 농담 같은 소설이 의도하는 바는 역시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에 대한 풍자다. 매카시즘에 대한 풍자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고 패트리어트(애국자)라는 리그의 이름이 거짓의 위력에 패하여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는 설정은 필립 로스가 미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장치다

구단주에 의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선수들은 자본이 가리키는 대로 살수밖에 없는 바로 미국의 시민들을 상징할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최약체의 선수들만 모여 있는 먼디스팀은 그야말로 권력자의 관심 저멀리 어딘가에 있는 서민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평소에는 관심밖의 오합지졸들이다가 권력이 필요할때 그 누구보다 이용해먹기 좋은 사람들로 변신한다는 현실을 이 소설이 빗대어 말해주고 있다. 누명씌워 희생시키거나 권력의 광고판 노릇을 하거나 이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런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산제물들은 없었던 것처럼 내숭을 떠는 역사에 작가는 조소를 보내며 이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리라.


 

 

이 모든 비판과 풍자를 야구를 통해서 전하는 작가의 에너지에 박수를 보낸다. 한편으론 야구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이런 소설을 썼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소설은 재밌게 읽었다. 필립 로스가 만들어낸 뻔뻔하고 천연덕스러운 뻥의 세계에 한껏 취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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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접어든 유명한 연극배우 액슬러는 갑자기 한순간에 연기의 재능이 사라졌다. 무대에서 더 이상 예전같이 연기를 할 수 없게 되고 관객들도 배우의 연기에 더 이상 감동하지 않는다. 마술같이 갑자기 그렇게 재능이 사라졌고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이에 액슬러는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자살충동을 느끼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싶었다. 현실에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하게 되면 우울증에 걸리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어떤 심정인지는 알 거 같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연기를 못 하게 된 후 정신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옆에 있어 줄 하나 뿐인 가족인 부인이 그 고통은 혼자서 감내하라며 그만 떠나버린다는 거다. 이것만 봐도 액슬러의 그간의 삶을 나는 좀 알거 같았다. 그는 연기가 자신의 인생의 전부라고 했다. 현실에서도 연기를 하며 살고 무대에서도 연기를 하며 살았다고도 했다. 현실과 무대 어느 쪽에서도 그는 배우였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관계란 것이 존재 할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가까이 있어야 할 가족에게 조차도 연기를 하며 살았다면 부인이 그가 가장 힘들 때 떠나버린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그동안 현실의 남편 역을 연기했을 뿐일 테니까...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혼자 적적하게 지내던 중에 다시금 그가 연기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한다. 친구의 딸 페긴과 사귀면서 돈 많고 성에 개방적이고 25살 연상의 너그러운 애인 역할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러자 다시 삶의 의욕이 솟는다. 페긴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도 있다는 희망까지 솟아난다. 하지만 원래 레즈비언이었던 페긴은 액슬러와의 이성애 실험에서 자신의 성향만 더 똑똑히 확인하고서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모든 희망이 꺾인 인물이라는 현실에서의 마지막 연기를 불태우고 있는 액슬러는 이제 비극적인 결말만 남겨두었다. 그는 기꺼이 스스로 그 결말을 연기하고 생을 마감한다.

 


삶을 하나의 커다란 무대처럼 연기를 하며 살았던 한 인간의 전락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연기가 현실이 되어버린 배우의 비극적인 삶이라고 해야 되나?

액슬러라는 인물이 두루 공감 받는 보편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통해 사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연기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라는 성찰까지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생을 연기하며 살았던 사람의 삶의 마지막은 옆에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텅 빈 무대 (사실은 다락방)였다는 결말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떤 명연기로도 옆에 사람을 둘 수는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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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고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망고 2021-09-19 13:35   좋아요 0 | URL
스콧님도 송편 맛있게 드시고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항상 소개해 주시는 좋은 음악 잘 듣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