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 개정판
데이비드 콰먼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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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인수공통감염병에 대해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쉬운 문장으로 설명해 주는 책. 생생한 실제 사례들을 들어 전염병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글솜씨가 너무 좋아서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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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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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에서 채취한 피 몇 방울로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미리 검사해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기를 발명해냈다는 회사가 있다. 힘들게 주사바늘로 다량의 혈액을 채취할 필요 없이 단 몇 방울의 혈액만으로도 질병을 알아낼 수 있고 거기에다가 기기의 크기가 작아 휴대까지 간편해서 집에서도 쉽게 진단을 받아볼 수 있는 혁신적인 의료기기를 만들어내는 회사. 그것은 바로 19살의 스탠포드 중퇴생 엘리자베스 홈즈가 세운 스타트업 테라노스.

엘리자베스 홈즈의 첫 시작은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은 맞다. 공상 과학 같은 생각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피 몇 방울로 미리 병을 알아낼 수 있는 기기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할 수도 있는 혁신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테라노스는 거창한 아이디어만 있고 기술은 없는 거대한 사기였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테라노스를 세우고 약 15년 동안 기기를 발명했고 기술이 있다고 뻥을 쳐왔지만 실제로는 엉성한 오류투성이 기계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고 혈액 몇 방울만으로는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금발에 파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매력적인 젊은 여성 엘리자베스 홈즈가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로 테라노스의 장밋빛 미래를 발표하면 사람들은 그대로 그녀를 믿었다. 그녀에게 설득당했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쟁쟁한 투자자들은 테라노스에 앞다투어 투자를 했다. 결국 테라노스는 기업가치가 10조원에 달하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스타트업이 되었다.

진짜 기술도 없이 그저 엘리자베스 홈즈의 매력적인 이미지와 말발과 그럴듯한 거짓말로 테라노스는 승승장구했다. 이런 일이 이렇게 쉽게 가능하다니 참 기가 막혔다.

 

투자자들의 면면을 보면 자신의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은 굉장히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던데(루퍼트 머독,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등등) 이런 사람들도 이렇게 쉽게 속는구나 싶어서 놀랍기 그지없었다. 하긴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 속는 사람이 나쁜가 뭐......

그렇다하더라도 테라노스를 끝까지 놓지 못 했던 투자자들은 자신이 일단 믿기로 결정한 일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속성이 공통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자신의 결정은 틀릴 리가 없다는 과신으로 주변의 옳은 소리를 차단해 버리는 모습들 말이다.

일례로 조지 슐츠는 테라노스에서 일하다 그만둔 손자가 그 회사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고 할아버지가 속고 있다며 증거를 아무리 얘기해도 손자 말을 안 듣고 자신이 처음부터 믿기로 한 엘리자베스 홈즈를 끝까지 믿는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성공적인 커리어와 그로 인한 자기 확신이 오히려 어떤 상황에선 독이 되는 경우. 그러니 절대 과신하지 말지어다...라지만 말이 쉽지 어디 그게 그렇게 쉽나?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때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사람이라면 특히나 더. 그러니 인생은 역시 쉽지 않은 것 크흐~

 

 

쟁쟁한 이사진들, 정치인들과의 친분, 위협적인 변호사 군단을 거느리고 거짓의 모래성을 쌓아가던 테라노스는 이 책의 저자가 폭로한 기사로 드디어 그 민낯이 드러나고 만다. 기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테라노스에서 일하다 그만둔 양심적인 직원들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라노스 측은 기밀유지 문서에 직원들의 사인을 받아두고 퇴사한 후에도 회사에 관한 어떤 말도 못 하게 협박해 왔다. 무언가 낌새를 보이면 최강의 변호사들을 보내 퇴사자들에게 소송을 건다고 협박해서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내부고발자들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했고 테라노스는 드디어 무너졌다.

이 과정이 정말 짜릿하고 긴장감이 넘쳐서 마치 영화를 한편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그래도 제니퍼 로렌스 주연으로 영화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현실이 픽션보다 더 하다는 걸 또 이렇게 새삼 깨닫는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스티브 잡스를 똑같이 따라했다고 한다.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다녔고 애플이 맡겼던 광고회사에 테라노스의 광고를 맡기고는 매주 수요일마다 회의를 하는 것도 스티브 잡스를 따라한 거였다. 그녀의 남자 같은 바리톤의 낮은 목소리도 실제의 목소리가 아닌 꾸며서 낸 목소리라고 하니 아무래도 스티브 잡스를 목소리까지 베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하는 의심도 든다. 겉모습은 따라했지만 진짜로 중요한 알맹이는 전혀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그녀는 계속해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협박하며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역할을 연기했다.

불안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거짓말로 살아 갈 수 있을까? 19살부터 시작해서 30중반까지 그렇게 살았다는건데 어휴~ 간도 크다. 

여러모로, 안 좋은 의미로 참 대단한 인간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근황을 보니 코로나와 출산으로 연기 되었던 재판이 요즘 다시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벌써 감옥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재판도 안 했다니 또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지 사기가 아니라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동안 공개적으로 했던 그 많은 거짓말들은 다 뭐야? 

아무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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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주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68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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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는 집요하게 정상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정상성이란 그 나이 또래의 남자라면 거의 비슷하게 할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보통의 정상적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주류 집단에 소속되어 군중 속에서 안락하게 순응하며 사는 삶. 마르첼로의 삶의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근데 이런 정상적인 삶이란 것을 마르첼로처럼 굳이 의식하며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굳건히 결심하며 사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정상성이란 것은 그냥 살다보니 옆에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지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보편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그런 거 아닌가 말이다. 누가 마르첼로처럼 이토록 비장하게 정상적인 삶을 살겠다고 자신의 삶을 철저히 통제하며 사느냐 말이다.

 

마르첼로는 남들과 똑같은 담배를 사며 만족해하고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정상적인 것이라며 좋아한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 세력은 파시즘이라 스스로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논리를 세우며 정부 비밀 요원으로 활동한다.

근데 가만 들여다보면 마르첼로가 정상성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성에의 집착이 약간 좀 부자연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았고, 모든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몸짓으로 같은 상표의 담배를 사는 사람들, 심지어 빨간색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면 얇은 옷 아래 풍성한 엉덩이가 흔들리는 것을 훔쳐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남자들과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동작은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의도된 모방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101쪽)


여자를 훔쳐보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들이 하는 걸 보고 모방해야지만 할 수 있는 마르첼로는 과연 꽤나 금욕적이고 예의바른 남자라서 그런 걸까?


노인은 친밀한 몸짓으로 마치 여자에게 그러듯 남자의 팔이 아니라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란히 대기실 안을 걸으면서 매우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무심한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본 마르첼로는 갑자기 노인에게 미친 듯 한 증오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깜짝 놀랐는데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10쪽)


남자에게 다정하게 행동하는 노인에게 마르첼로는 왜 증오심이 생길까? 동성끼리 스킨쉽 하는 장면에 과하게 화를 내는 마르첼로는 대체 왜 그럴까?

 

마르첼로는 단추를 채우지 않은 상의에 총검이 흔들리게 둔 채 연인처럼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걸어가는 군인 두 명을 보며 그날 밤 처음으로 경멸과 매우 흡사한 감정이 생기는 걸 알게 되었다.  (419쪽)

 

거리에서 흐트러진 수많은 군인들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다가 유독 다정하게 걷는 저 두 군인들을 볼 때 마르첼로는 분노가 인다.

이쯤 되면 마르첼로가 집착하는 남성성이란 것에 묘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무릇 혐오란 두려움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던가? 마르첼로는 자신의 남성성에 자신이 없는 것을 넘어 내면에 어떤 의문이 내내 자리 잡고 있다는 두려움이 이 소설 곳곳에서 포착된다.

마르첼로가 동성애자인지는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다루진 않지만 성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이 있었던 흔적은 보인다. 그가 정상성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들 때문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가 무겁게 가지고 있는 동성애 기질에 대한 고민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13살 무렵 곱상한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 여자아이 같다고 놀림을 당하던 마르첼로는 어느 날 집에 가던 길에 아이들에 의해 강제로 치마를 입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그때 리노라는 남자가 마르첼로를 구해주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마르첼로는 리노의 차에 타게 되고 리노는 총을 주겠다고 유혹해 마르첼로를 집에 데려가 강간 하려 했다. 그때 마르첼로는 리노를 총으로 쏴 죽이고 도망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사건은 마르첼로를 내내 지배한다. 리노를 죽였다는 원죄에 더해 리노의 차에 올라탔다는 것, 리노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 대해서 자신도 다 알 수 없는 부분이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늘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비정상성이라는 의문을 떨쳐내기 위해 정상성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성이라는 것이 마르첼로의 머릿속에 얼마나 지독하게 들어차 있는지는 마르첼로와 줄리아의 결혼 후 첫날밤의 일화에서 맛볼 수 있다.

줄리아는 마르첼로와의 첫날밤을 치르기 전 고백을 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늙은 변호사가 어린 그녀를 강제로 범했고 그 관계는 몇 년간 계속되어 왔다고 마르첼로가 첫 남자가 아니라고. 마르첼로는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아의 고백을 들으면서 화가 나거나 동정심 같은 감정은 일지 않으면서도 줄리아가 이렇게 고백하는 게 바로 정상성이지 않느냐며 내심 흡족해 한다. 자신은 리노와의 일을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데 반해 줄리아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줄리아의 정상성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거다. 마르첼로는 이런 정상성의 여자와 결혼 한 자신은 정상성의 완성을 위해 아기를 생산하는 것에 매진하면 된다는 기이한 논리를 편다.

 

난 다른 모든 남자와 같은 남자야. 난 사랑을 했고, 여자와도 관계를 가졌고, 또 한 사람을 만들었어

 ( 227쪽)


첫날밤을 치른 후 매우 뿌듯한 마르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굉장히 정상적이지 않은 마르첼로의 사고의 흐름. 너무나 모두와 같은 남자이고 싶은 마르첼로의 우스운 집착.

 

정상성을 위해 파시스트 정부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마르첼로는 파리로의 신혼여행 중 대학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를 암살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한다. 그런데 교수의 집에 방문한 마르첼로는 교수 부인인 리나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된다. 리나에게 사랑의 감정이 들자 마르첼로는 흥분한다. 자신이 그토록 가장하고 싶었던 정상성이 리나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획득된다는 것이 마르첼로를 안달나게 만들었다. 리나와의 사랑이 성공한다면 사랑하지 않지만 정상성 때문에 결혼 했던 줄리아도 버리고 정부 비밀요원 일도 다 버릴 수 있다고 마르첼로는 생각한다.

나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드디어 정상이 되었다! 마르첼로의 진심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지만 리나는 동성인 줄리아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마르첼로는 자신의 사랑이 응답 받을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한다.

확신하지 못 하는 남성성 때문에 정상성을 갈망해야 했던 마르첼로 인생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여자는 하필이면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였다는 이 아이러니.

마르첼로는 다시 정상성 추구라는 습성으로 돌아온다. 정부의 비밀요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시간이 흘러 줄리아와의 사이에서 6살 난 딸을 둔 마르첼로는 이제 20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파시즘 정권이 무너지는 현장을 본다. 그가 추구해왔던 정상성이란 것이 공식적으로 비정상성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 이때 마르첼로는 정상성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가족들과 도망을 치는 와중에 정상성이라는 집착을 끊어내고 새로운 삶에 대해 낙관하던 마르첼로는 다시 시작된 전쟁의 공습을 받고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파시즘 정권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던 그 어리석은 시대의 인간군상을 이야기 하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파시즘에 순응하는 인물을 내세워 당시 정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비정상인지를 보여주면서 파시즘을 비판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마르첼로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확실하게 자신할 수 없어서 오히려 과도하게 집착하는 남성성 이라는 특징과 내재된 폭력적 기질이 만나면 파시스트가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것이 파시스트의 커다란 자격 요건일지도 모른다는 짓궂은 암시를 주기도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인물의 사색이 주가 되는 소설로 문장이 단번에 싹 읽히지 않아서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도 있고... 내 이해력 문제인가 번역의 문제인가ㅠㅠ

그래서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별4개닷

 


(책은 깔끔하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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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버스의 극장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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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 새버스는 아주 매우 굉장히 극도로 추잡스러운 인간이다. 64세의 작고 뚱뚱하고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굽고 수염을 길게 기른 이 노인은 52세의 드렌카와 13년 동안 불륜관계에 있으면서 온갖 드럽고 기이한 섹스에 탐닉하며 살아왔다.

젊은 시절엔 인형극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관객 성추행으로 체포된 적이 있고 그 후 대학에 출강하다가 자신보다 나이가 세배는 적은 학생과의 노골적인 폰섹스가 발각되어 망신살이 뻗쳐 강단에서 잘리고 몇 년째 백수로 고등학교 교사 아내의 월급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위인이다. 젊을 때부터 머릿속에는 강렬한 성적 욕구가 가득 차 있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는데 64세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미키 새버스의 영혼의 단짝인 듯한 드렌카는 그의 변태적인 욕구를 모두 만족시켜 주고 더 나아가 그보다 더 과감한 행위를 즐기는 듯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암으로 죽고 만다. 그때부터 미키 새버스는 드렌카와의 섹스가 사라진 이상 자기 자신도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매일 드렌카의 무덤에 찾아가 울고 무덤에 대고 저질 변태 행위를 하다가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던 중 젊은 시절 인형극을 할 때 알았던 친구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키는 자신이 스스로 죽기 전에 친구의 죽음을 한번 봐보자 하는 심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러 30년 만에 뉴욕에 온다.


미키 새버스가 지금의 아내 로즈애나와 뉴욕을 떠나 한적한 소도시로 옮겨가 은둔하듯 살아왔던 이유는 30년 전 그의 첫 번째 아내 니키의 실종 때문이었다. 예쁘지만 심약했던 니키는 미키의 극단 배우였는데 어느 날 무대에 오르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날이후 그는 니키를 찾으려고 뉴욕을 헤매고 다녔고 결국 어디에서도 니키를 찾지 못 하자 더 이상 뉴욕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뉴욕에 있으면 계속해서 니키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뉴욕에 오자 니키 생각에 더 울적해지기만 하고 죽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던 미키는 또다른 옛 친구 노먼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노먼의 딸의 방을 사용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게 된다. 노먼의 대학생 딸의 물건을 뒤져 팬티를 훔치면서 욕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삶의 의욕이 다시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미친 변태 노인! 게다가 노먼의 아내까지 꼬실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열리자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며 흥분한다.

그러나 미키가 딸의 팬티를 훔친 걸 알게 된 노먼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쫓아내게 된다.


좌절된 성욕은 다시 죽음을 불러낸다. 미키는 이제 진짜 삶을 끝내고자 새버스 가족들이 묻힌 묘지를 찾는다. 그 묘지에서 자신이 묻힐 무덤 자리와 비석 값을 묘지지기에게 지불하는 촌극을 연출하는데 이 부분은 정말 진지하게 웃기는 장면이었다.

이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다로 가서 죽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 순간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친척 아저씨 피시의 집을 찾아 가게 된다. 100살의 노인이 된 피시는 미키를 기억하지 못 하지만 미키는 이 우연히 나누게 된 대화에 고무된다.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좋았다고, 죽어야 하는 게 싫어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100살 노인의 말. 죽으려고 하는 미키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노인의 소회.


그리고 피시의 집에서 미키는 어머니가 형 모티의 유류품을 모아 놓았던 상자를 발견한다.

그 상자에는 전쟁에서 죽었던 모티의 물건들과 편지 그리고 그의 관을 감쌌던 성조기가 있었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미키는 모티의 상자를 이대로 남겨 두고는 죽을 수 없다고 결심하며 부인 로즈애나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상자를 집안에 안전하게 두고 로즈애나의 비위를 맞춰주며 살겠다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미키 새버스

그러나 또다시 미키의 계획은 좌절된다. 로즈애나는 이미 남편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이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미키는 드렌카의 무덤을 찾아가고 드렌카가 살아있을 당시 함께 했던 변태행위를 무덤에 대고 하다가 그녀의 경찰 아들에게 딱 걸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죽음의 위기.

미키 새버스는 과연 이번에는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미키 새버스는 대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에 집착하고 비정상적으로 성욕을 드러낼까? 왜 이렇게 비뚤어지고 역겹게 행동할까? 왜 이렇게 정상적인 삶에서 도망치며 살까?

자신이 실패자라고 자책하면서도 왜 자꾸만 변태 속성을 감추지 못 할까?

살기 위해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이 소설은 700페이지에 걸쳐 미키 새버스라는 인물을 보여 주고 있다.


미키의 다섯 살 많은 형 모티는 2차 대전 중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그 이후 미키의 어머니는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는 삶을 산다. 그전에 하던 모든 생활을 멈추고 멍하게 슬픔에 젖어 사는 삶을. 90살이 되어 죽을 때 까지 큰 아들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 하고 살았다

미키는 그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17살에 배를 타는 선원이 되어 세계 여러 항구를 떠돌아 다녔고 곳곳의 창녀들과의 섹스에 탐닉한다. 이때부터 미키에게 죽을 정도의 슬픔을 피하기 위한 해결책은 바로 그짓이 되었다. 끊임없이! 설사 부인이 있어도 한눈을 팔아재끼며 원초적인 본능을 찾아다니는 삶은 그가 어머니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살아도 산 거 같지 않은 반송장 상태. 슬픔이 달라붙어 멈춰있는 상태로 둘째 아들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어머니 같은 삶을 그 안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그는 성욕을 도구로 삼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열정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부인 니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애착관계가 너무 깊어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 했다. 죽은 어머니 옆에서 시체를 살아 있는 사람인양 대하며 며칠을 보내던 니키는 장례식을 치르고도 계속해서 어머니를 그리워 하다가 실종된다. 미키의 인생에서 그의 어머니 다음으로 두 번째로 사라져버린, 끝내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 했던 여자.

두 번째 부인 로즈애나는 어린 시절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히던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큰 충격을 겪었다. 그 충격은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가 미키가 어린 여대생과 추잡한 짓을 했는데도 그를 내치지 못 하게 한다. 자신이 미키를 버리면 돈 없고 늙고 병든 그가 아버지처럼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점점 술독에 빠져들다가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색정광 드렌카. 암으로 죽어서 진짜로 미키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여자.


이토록 미키가 살고자 매달려 왔던 여자들은 그의 인생에서 점점 사라졌다

형의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슬픔 때문에 죽어 있는 상태여야 했던 그를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했던 여자들은 모두 떠났고 결과적으로 그를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인생에서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64살 먹은 늙은 몸뚱이와 관절염과 가난 그리고 치욕뿐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 무엇인가가 남아있다.

로즈애나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커다란 분노가 일고 드렌카의 아들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아직 펄떡펄떡한 감정이 살아있다

이런 강렬한 분노, 죽음의 공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미키 새버스는 과연 죽을 수 있을까?

대답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하겠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씨발 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가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증오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데.     (723)

 

결국 이 소설은 미키 새버스라는 불결한 호색한이 죽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기 위해 장황하게 쏟아내는 살고자하는 욕망을 풀어 놓은 요설이었다. 살아갈 이유가 없어? 염병 화가 나서 못 죽겠네 그냥 살고 말자!

 

 

 

700페이지가 넘는 이 두툼한 소설은 불쾌하고 강렬하고 혼란스럽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큰소리로 외치고 분노하는 압도적인 문장들에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가 뒤에 남겨진 어질러진 잔해들 때문에 심란해지는 느낌의 소설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성적인 묘사들은 너무 노골적이고 기형적이라 야하다기 보다는 이제 그만해 미친놈아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역겹고 지루하다. 미키 새버스라는 비호감의 인물을 작가는 이런 식으로 계속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놈은 정상이 아니다 이놈은 미친놈이다 이놈한테 동정심을 느끼지 말라고

그런데 이 소설은 이런 비호감의 인물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강력한 문장의 힘이 있다. 분노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화를 낼 지점에 가서는 엄청나게 화를 내는데 또 인물을 감싸고 있는 배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들은 너무나 뛰어나서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게 한다.

필립 로스는 이것을 자신의 소설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아끼지는 못 하겠고 -내가 필립 로스 소설중 제일 좋아하는 건 미국의 목가- 그냥 필립 로스다운 문장을 양껏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은 꽤 좋았다.

 

꿈에 나올까 겁나는 미키 새버스.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야지ㅎㅎㅎ



(띠지가 있는게 더 예쁜 책. 띠지 벗겨내면 휑하게 비어서 띠지를 꼭 둘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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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지음, 장성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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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67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소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론가들이나 출판 관계자들에게는 꽤나 좋은 평을 받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 작품성이 널리 퍼지진 않아서 몇 부 팔리지 않은 비운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소설 전반에 걸쳐서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는 동성애적 요소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들춰내서 분석하지도 않았고 알아채지도 못 했다고 하니(모른 척 한 것이겠지만) 1960년대에 나오기에는 꽤나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2000년대 들어서야 작가 애니 프루가 쓴 '작품해설' 덕분에 재평가 되어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애니 프루는 어쩌면 이 소설에 영감을 얻어 브로크백 마운틴을 집필한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토록 책 자체로도 사연이 많은 이 소설은 읽기 전부터 내 기대감을 한껏 끌어 올려놓았고 부푼 가슴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너무 좋았다. 기대이상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책이 정말 만족스럽고 이런 이야기를 읽는 게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두꺼워서 계속해서 읽어내려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완벽한 결말이지만 이것보다 더 장황한 묘사도, 더 많은 사족도 기꺼이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이 소설의 이야기도 인물들도 문장들도 다 좋았다.

 

이 소설은 긴장감으로 꽉 채워진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목이 바싹 마르는 갈증을 느꼈는데 이것은 추리소설 같은 장르를 읽을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느낌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피가 마르는 느낌, 정신적인 피폐함으로 몸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느낌의 긴장감이랄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이런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매력적이지만 사악한 악당 필이 내뿜는 여성과 여성스러운 남성에 대한 혐오감은 최고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비밀을 실수로라도 내뱉을까봐 술조차 마시지 못 하는 남자의 진심은 수면 아래에서 도사리고 있는 은근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로즈는 필의 괴롭힘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약자의 모습으로, 피터는 속을 알 수 없는 예민함으로 필의 대척점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온화하지만 둔한 조지는 형과 아내 사이의 악의와 두려움을 중재하지 못 하고 방관하는 입장이라는 것에서 또 한축의 느슨한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거기에 몬태나주의 광활한 풍경과 인간의 노동력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거친 자연이 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데에서 오는 긴장감도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인물과 풍경의 묘사가 대단히 뛰어난 점도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서서히 조여 오는 긴장감도 이런 뛰어난 묘사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다고 본다.

특히나 동성애자지만 그것을 부인하고 숨기려 하는 필을 거친 자연을 누비는 누구보다도 가장 터프한 남자로 묘사하면서도 언뜻언뜻 비치는 단편적인 모습 속에서 진실이 또아리 틀고 있는 듯 힌트를 주는 묘사를 하는 점은 참 절묘한 부분들이었다.

 

 

조만간 이 소설로 만든 영화도 나온다고 하니 얼른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영화가 문장이 아름답고 묘사가 좋은 소설을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상상하던 풍경을 화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을 거 같다.

아무튼 주말동안 너무 좋은 소설을 읽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책 표지는 마음에 안든다. 제목 글씨도 눈에 잘 안들어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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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영화로 나오는 군요 별 🖐이라니 기대 됩니다 ^ㅅ^

망고 2021-10-27 12:54   좋아요 0 | URL
12월1일에 넷플릭스 공개래요^^소설은 진짜 좋았어요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