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한창민 지음 / 오픈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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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해전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전시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신선했다. 스마트폰 사진은 그냥 SNS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전문사진작가가 아닌 이의 전시라는 점이다.  

 

사진의 수준을 떠나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물론 예술성을 따지는 것은 보류하고(예술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심미적인 것만을 따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예술사진전이라고 가서 보면 단순한 아름다움 보다는 메세지에 충실한다. 혹은 대상, 오브제의 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경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저자는 스마트폰 사진 찍기의 기본으로 그리드(안내선)을 이야기한다.

기준선이 있으면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피사체를 사진의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일부러 수직과 수평을 무너뜨리거나 구도를 기울이게 해서 사진에 긴장감을 부여하거나 생경한 느낌을 주는 등 의외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파격적 효과를 연출하는 데도 격자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는 사실이다. (30쪽)

 

예전에 사진을 좀 찍어볼까 할 때 관심을 둔 것이 반사된 모습이다. 사람도 결국은 눈이라는 시각정보를 뇌가 해석해낼 뿐, 그게 실제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본다고 안다는 것 하는 것 모두가 사실은 어떤 필터링을 거친 것이다. 어떤 프레임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인데, 거울이 아니더라도 유리창, 스테인레스 벽, 물 등이 다 사물을 비춰낸다. 저자도 이런 부분을 강조한다. 셀카에서 그런 점을 드러낸다. (두번째 사진)

 

세번째 사진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한 오마주다. 찰나의 순간, 사진의 핵심중의 하나가 아닐까. 우연이 만들어낸 순간.

 

 

   

사진의 예술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사진이 못하는 의미가 아니다. 아주 좋다. 특히 그의 사진을 통해 스마트폰 뿐 아니라 카메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스마트폰 사진에 조금 더 의미있는 사진을 찍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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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사진찍기 - 사진을 잘 찍는 또 하나의 카메라
김현수.박용수.안태영 지음 / 아홉번째서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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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득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Tip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똑딱이 시절을 생각하고 찍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제시되는 Tip은 화면에 그리드 안내선을 켜두라는 것이다. 카메라 설정에 들어가보니 안내선을 설정할 수 있다. 화면이 9개의 칸이 나온다. 구도, 평형을 잡는 법 부터 배웠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하면 사진 한 페이지에 설명 한 페이지라는 점이다. 빛을 달리 했을 때 사진이 어떻게 찍히는 지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건물은 어떻게 하면 잘 담아낼 수 있는지 Tip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행을 가거나 관광지에 들렀을 경우 날씨가 아주 맑은 날 꼭 사진 속에 넣어 함께 찍고 싶은 건물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눈높이와 수평적인 위치에서만 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건물이 전체가 나오게 하고 싶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텐데요, 이런 경우 건물의 크기에 따라 앵글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거나 구도에 변화를 살짝 주어도 훨씬 입체적인 건물을 찍을수가 있게 됩니다. 첫 번째로 자신과 건물이 멀리 있을 때는 건물과 하늘의 비율이 13 정도 로 적절하게 나누어 찍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물이 자신의 눈높이와 수평 에 맞추면 건물 밑바닥의 땅 부분이 거북하리만큼 많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 다. 이럴 때는 시선을 위로 향하여 건물을 올려다보는 구조로 촬영하는 것 이 좋습니다. 유의할 점은 건물의 가장 밑바닥을 화면의 가장 하단에 위치 시켜 땅의 거추장스러운 부분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그리고 화면의 왼쪽과 오른쪽 끝은 건물의 모서리를 맞추어 촬영해 보길 바랍니다. (52)


하지만 건물이 너무 멀리 있는 경우 위에 설명한 방법대로 찍기에는 화면 하단에 건물이 너무 작게 들어가고 반대로 하늘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사진이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건물은 멀리 있는 그 상태로 두고 건물과 자신의 사이에 함께 포함해 촬영할 다른 피사체가 있는지 찾아보 세요. 건물은 멀리 있으 므 로 원경으로 생각하고 건물과 자신의 사이에 중간을 채워줄 적절한 피사체를 찾아서 함께 촬영하면 조금 더 원경과 중경의 조합이 되어 입체적인 느낌으로 바뀌게 됩니다. (54쪽)

 

스마트폰 사진이라 하여 스마트폰 사진앱 조작법이 설명되기는 하지만(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유용하다.), 결국 본질적으로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있는 책이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 바로 일차적으로 구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구도는 사진을 감상하는 갤러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도를 통해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즉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힘을 더 강하게 인식시켜줄 수도 있습니다. (12쪽)

 

삼성친화적인지 갤럭시로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이 실려있지만, 스마트폰의 종류에 상관없이 사진을 찍는 Tip을 배우는 데 유용하다. 스마트폰 사진도 결국은 사진이다. 카메라처럼 다양하게 조절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구도, 좋은 프레임에서 좋은 사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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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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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의 삶은 언제 한번 주목받아야 한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간송 전형필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친일과 친일행적이 모호해져 버린 시대에 여전히 친일파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일제시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은 상대적으로 관심 밖의 일이다. 


책 <간송 전형필>은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과정을 그려낸 전기물이다. 작가가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일부 픽션이 있지만, 간송의 삶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네이버캐스트에서 간송전형필을 검색하면 책에 있는 많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굳이 줄거리를 적을 필요는 없다. 



간송전형필은 문화재를 수집함에 있어, 중개상이나 소장자가 부르는 가격보다는 간송이 생각하는 가치를 쳐서 준다. 때로는 그 가치가 기와집 수십채에 해당할지라도 가치가 있다면 아끼지 않았다. 


전형필은 서화 골동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취향보다는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도 좋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았고, 때문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다. (26)


간송이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 나선데는 주변 인물의 영향이 컸다. 먼저 사촌인 월탄 박종화의 영향으로 서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박종화는 간송에게 그런 뜻을 넌지시 전한다. 위창 오세창은 그에게 문화재 감식안과 더불어 우리 문화에 대한 시각을 가르친다. 


“내가 자꾸 묻는 건, 뜨거운 가슴과 재력이 있으니 한번 본격적으로 모아보겠다는 자네의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네. 그런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잘 아네. 그러나 나는 자네가 우리 서화 전적과 골동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키겠다는 건지 알고 싶네."

 전형필은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이제까지 서화 전적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세창은 잠시 전형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마침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 땅에 서화 전적과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은 많다네. 자네처럼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수집가도 제법 있지, 그러나 뜻을 갖고 모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네. 대부분 재산이 많거나 돈이 좀 생기자 고상한 취미로 내세우기 위해 모으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들은 수집벽이 식거나, 체면을 충분히 세웠다 싶으면 더 이상 모으지 않는다네, 그러나 자네는 조선의 자존심이기에 지키겠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하군.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네. 하하하” (82-83)


간송과 오세창의 대화처럼 간송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를 위해, 혹은 재산을 자랑하기 위해 문화재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년간 모시면서 간송이 다른 수집가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조선 초기 서화작품부터 체계적으로 수집하시는 걸 보면 위창 선생님처럼 책을 만드시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근역서화징)에 겨우 한두 줄 언급된 화가와 서예가들의 작품까지 애지중지하시는 보면,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심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서 외람되게 여쭙는 겁니다." 

전형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선생, 지나간 세월이 어디 좋을 때만 있었겠소? 그림이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중국 그림이나 글씨를 모방하던 때도 있었고, 그런 모방에서 벗어나려던 과도기나 영 . 정조 때와 같은 번성기도 있었지요.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암울하던 때도 있었고 내가 위창 선생 님의 수집품을 보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유명한 서화가의 명품과 명필만 모아서는 500년 조선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라오. 그래서 유명하지 않은 서화가의 작은 그림과 글씨도 작품 수준에 관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모으는 겁니다. (154-155)


간송은 자신의 전재산을 모아 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 

전형필은 박물관 만들 결심을 굳혔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이 하나 있었다. 좋은 그림, 좋은 글씨 좋은 도자기 좋은 책을 각각 100 점씩 박물관에 모으겠다는 꿈. 그래야 박물관을 통해 선조들이 남긴 문화의 궤적 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의 위치가 지금 이 자리가 아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04)


간송미술관 ☜ 네이버캐스트


간송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문화재 수집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해방후에는 더 이상의 수집을 멈춘다. 물론 그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어렵게 모은 문화재가 한국전쟁으로 많은 작품이 흩어졌다. 그 작품을 다시 돈을 들여 모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나면서도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조형예술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한 검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수집한 간송의 소장품 중 서화가 지니는 의미를 간단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화뿐 아니라 전적을 함께 엄선해서 모은 점을 들 수 있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서화는 시작이 같은 뿌리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감상과 연구가 병존하는 전통문화의 바른 이해라는 입장에서 문헌사료와 유형문화재는 상호보완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림은 고려말과 조선왕조 전체, 20세기 근대 화단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화가들 모두를 체계적으로 망라해 수장한 점을 들게 된다. 간송미술관에서는 매해 봄가을 두 차례씩 특별전을 통해 소장품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특히 서화는 시대별, 장르별, 작가별-유파별 기획전을 열 수 있었다. 18세기 최고의 서화수장가인 김광국이 조선의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화첩으로 만든 <석농화원>과, 오세창이 모은 《근역화휘》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것은 의발전수의 상징 적 의미를 지닌다. 


셋째, 회화사적 의의가 큰 거장의 걸작 100선을 목표로 모은 점이다. 이는 간송미술관에서 연 기획전을 통해 분명해진다. 진경산수를 이룩한 정선, 남종문인화의 국풍화를 이룩한 심사정, 19세기 예원의 총수로 학예 양면에 족적이 큰 김정희, 조선 말기 화단을 최후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승업 등 개인별 전시와, 정선·심사정·조영석 등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세 사람의 사인삼재 , 풍속화의 쌍벽으로 사농공상 사회를 담은 김홍도와 한량과 기녀의 애정에 초점을 둔 신윤복, 장승업의 제자로 근대 화단의 시발인 안중식과 조석 진 등 2~3인 공동전시가 가능했다. 


물론 작품수로 보면 간송미술관의 작품수는 보잘 것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혜원 그림의 의미를 알아차린 점, 겸재 그림의 진수를 파악하고 연구결과를 낸 점 등을 들여 볼 때 간송미술관은 우리문화지킴이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간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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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 36 : 회화 -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옛 그림의 아름다움
백인산 지음 / 컬처그라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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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2016년까지 간송미술관의 작품들이 DDP 나들이를 했다. 사실 간송미술관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1년에 봄,가을 2주씩 두번만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이곳에 다녀온 이마다 작품 뿐만 아니라 주변환경을 들어 추천하였지만 실제 발검음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이 바깥 나들이를 하면서 같이 나온 책이다. 간송미술관의 회화 작품 36편이 책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의 그림을 주로 소개하는데, 소개된 그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그림도 소개된다. 그림아래 소개되어 있는 화가(문인화가도 화가로 보자면)들의 연대를 보면 1500년대에서 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의 그림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간송미술관의 많은 유물중에서 이들 그림을 선정한 이유는, 이것이 조선시대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래서 간혹 이 그림은 별론데 왜 넣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소위 잘 알려진 명작 뿐 아니라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넣은 겁니다.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그림을 통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17)

 

간송 전형필은 일제시대 옛 문화재를 소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돈을 사용했다. 그런데 단순히 수장가들 처럼 유명 작품 중심으로 구매하지 않고, 우리 문화를 잘 알려줄 수 있는(시대가 불화하여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작품들을 선별하여 구매하였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단순 수집가가 아니었던 것은 해방후에는 더 이상 작품 소장을 하지 않은 것인데, 더 이상 일제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송미술관은 단순히 옛 문화재를 소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연구에도 힘썼다. 겸재나 겸재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것이 그렇다. <간송미술36 : 회화>는 그 연구결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귀중한 작업이다.

 

<간송미술36:회화>는 조선의 그림 36점을 설명한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조선미술에 대한 다양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삼원 삼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일컬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원은 명확치 않지만 대체로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지칭하고, 삼재는 ‘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을 꼽는다. 다들 조선시대 회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가들인데, 공교롭게도 삼원은 모두 화원화가이고 삼재는 모두 사대부화가이다. ...

조선시대의 허다한 문인화가들 가운데 이들을 유독 '사인삼재'라 통칭하며 중시하는 이유는 단지 기량이나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삼재라는 호칭은 각기 조선 후기 회화의 세 축이라 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 조선남종화, 풍속화를 창안하여 조선 후기 회화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절정에 올려놓은 업적에 대 한 역사적 평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마땅히 진경산수화는 겸재, 조선남종화는 현재의 자리이다. 문제는 풍속화다. 연배로 보아서는 공재 윤두서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지만 공재의 풍속화를 보면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풍속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의관과 풍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선구적이나 한계가 보인다. 바로 기법의 문제이다. 공재의 풍속화는 여전히 중국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 중기 이전의 인물화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후배 문인 이규상은 "우리나라의 그림이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 관아재는 동문 선배인 겸재와 더불어 진경시대 인물 풍속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냈고, 그것은 곧 조선 후기 풍속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144-147)

 

몇 해 전 조선화공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론 픽션이지만)를 계기로 혜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단순히 드라마 때문은 아니다. 그 전 부터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제 시대 문화재를 거래하던 일본인들은 단원이나 겸재 못지 않게 혜원의 그림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풍속화에 한정된 혜원의 작품에 대한 평이 높지 않을 때 였다. (물론 그럼에도 간송은 혜원의 그림을 꾸준히 모았다.)

 

혜원의 그림에 우리보다 일본인들이 먼저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우리 것의 소중함을 몰랐다는 일반적인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겸재나 단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혜원이 홀대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혜원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심미안이 탁월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온전히 기호와 취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혜원의 그림이 지닌 화려한 색감과 감각적인 필치, 그리고 은밀한 선정성 등이 우리보다는 일본인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혜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미술 작품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혜원도 그렇다 2백여 년간 홀대받던 혜원과 그의 작품이 근대 이후 재조명 받은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혜원의 평판과 인기가 겸재는 물론 단원까지 압도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이 같은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혜원은 특이한 그림을 그린 일탈적 화가가 아닌, 우리 미술사의 한 복판에 우뚝 선 거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대성이나 현대적 감각을 운운하며 혜원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지만, 혜원이 이전의 어떤 화가도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고, 그 수준 또한 탁월했음은 분명하다. (258-259)

 

얼마전 인문학 대중화의 선두에 있던 이가 방송에서 오원 장승업을 극찬했다. 그런데 극찬한 작품이 오원의 작품이 아니었다. 과연 오원은 어떤 인물일까? 물론 오원에 대한 잘못된 설명은 2016년에 책은 2014년에 나왔으니 그런 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원의 그림은 왕실과 사대부, 혹은 부유한 중인층의 기호와 수요에 맞춰 그린 주문작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개성이나 감흥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화풍은 중국의 자취가 매우 강하게 묻어나며, 심지어 중국 그림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독자성과 창의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오원 개인의 역량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다. 대개의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오원의 그림도 시대적 산물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성리학은 물론 추사 김정희가 수용해 들인 청나라 고증학까지 외래 이념에 의해 압도당한 이념의 공백기이자 혼란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불학무식한 화공 오원에게 치열한 시대 정신이나 선구적 독창성 등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그는 탁월한 기량으로 별다른 의식 없이 시대적 기호와 수요에 적절히 부응했을 뿐이다. (290쪽)

 

이런 조선미술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닐 각 그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은 옛 그림을 보는 법을 기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이드를 제시한다. 꾸준히 이 책을 보면 우리 옛 그림을 보는 안목은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보고 덮을 책이 아니다.) 우리 그림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 관심의 폭을 확대하는데,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했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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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소담 - 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 간송미술관의 그림책
탁현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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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정담>과 <그림소담>은 편하게 옛 그림을 들려준다. 

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림소담>은 간송미술관의 그림을 통해 우리 옛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찬찬히 알려준다. (간단하게 후기를 남겨본다.)


우리 옛 그림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겸재가 그린 그림은 소나무에 앉아 있는 매미의 모습이다. 그냥 지나칠 만한 매미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성도 아름답지만, 매미와 소나무의 조화도 놓치기 힘들다. 



화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소나무 가지하나가 자연스레 휘었고, 여기에 매미 한 마리가 나뭇가지와 나란히 붙어 있다. 매미를 묘사하는 데 어느 부분 하나 소홀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투명 앞날개 안에 작은 뒷 날개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가지 끝에 솔잎을 그린 것을 보면 오래된 솔잎 떨기는 엷은 녹색으로 약간 번지게 해서 겹쳐 그렸고, 그 위에 새로 난 짙은 녹색 솔잎 하나하나를 가는 붓으로 그렸다. 그 결과 새로 난 솔잎의 파릇파릇함이 돋보이는 효과를 낸다.


화면 왼쪽 솔가지는 거의 생략하고 솔잎 떨기만 강조해 매미가 붙어 있는 가지로 시선 을모으는 동시에 화면 왼쪽을 채웠다. (163-164)



역시 겸재의 그림 중에 하나이다. 책 <그림소담>에 있는 많은 그림들이 눈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떤 그림은 그림의 아름다움에 또 어떤 그림은 세밀함에. 이 그림은 수묵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성 내 가옥들은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지만 멀리 남산과 관악산의 능선은 어슴푸레 잡히고 키 큰 나무숲도 거뭇가뭇 드러났다. 하늘과 안개는 여백으로 비워두어 먹보다 종이 바탕이 더 많은데 과감한 여백 덕분에 안개 낀 달밤 한양 풍광이 박진감 넘치게 다가온다. 이로써 비우면서 완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하지만 안개 낀 달밤이라도 이렇게 보이지 는 않을 것이다. 겸재는 생략하고 단순화 해 안개 낀 달밤이 주는 인상만 그린 것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템스 강의 안개 낀 풍경을 그린 방식과 비슷하다. 진경 산수는 실재와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은 빼고 필요한 부분은 강조하는 생략과 확대를 적절하게 섞는 화풍이다. 겸재는 이런 방법을 극대화 해 서울의 안 개낀달밤을 가장 덜 그렸어도 가장 사실감 넘치는 그림으로 완성했다. (79-80)



<고화정담>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혜원이나 단원의 그림은 그림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시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당시 유행했던 옷 맵시를 찾아볼 수 있고, 집은 어떻게 꾸몄는지, 그리고 놀이문화는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 있는 선비는 자줏빛 띠를 가슴에 매고 호박을 이어 갓끈 삼아 호사를 다했으니 멋쟁이 선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정 멋쟁이는 장침에 편안히 기대어 오른 손으로는 부채를 잡고 왼손으로는 연죽을 들고 음악에 몰두한 풍채 좋은 저 선비다. 호박 갓끈을 왼쪽 귀에 돌려 맨 저 모습을 보라. 이것이 당시 한양 귀족들의 일급 맵시다. 가슴의 붉은 띠는 한복 끈 치레의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마당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돌을 두 단으로 쌓아 나무를 심는 조경 방식은 지금도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는 전통 방식이다. 연못도 흙을 파내고 사방을 돌로 둘러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인다. 이 그림에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인들이 야외에 나갈 때 항상 돗자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좋은 장소를 발견하면 자리를 펴서 유흥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31-33)


책은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등 잘 알려진 이들 외에도 이인문, 김득신 심사정 등 조금은 덜 알려진 이들의 그림도 소개한다. 옛 그림에 대한 틀을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옛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좋은 가이드 북이다. 


게다가 간송미술관은 작품의 보존 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뚜렷한 결과를 낸다. 유명한 작품들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연구하여 정치적 암흑기라고 하는 시대에서도 문화의 꽃을 피워냈음을 증명해낸다. 특히 '진경 시대'에 연구는 우리 옛 문화 연구의 좋은 길잡이를 마련했다.  


한 시대 문화는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뿌리가 이념이라 면 꽃이 예술이다. 꽃이 풍성하고 생기 있다는 것은 뿌리가 튼튼하고 둥치와 가지 모두 건실하다는 뜻이다. 만약 식민 사관에서 말하듯 조선 후기가 당쟁에 골몰해 어지러운 시 기였다면 어떻게 겸재와 단원 같은 뛰어난 화가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숙종 대부터 정조대에 이르는 125년간의 우리 문화 황금기를 최완수 선생은 1996년에 '진경 시대'라 이름 붙였고, 이로써 우리는 오랜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 문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되었다. 공론을 주도하는 식자층 일부에서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1990년대중반 간송미술관에서 탄생한 '진경 시대'란 개념은 간송 선생의 문화재 수집만큼이나 값진 것이었다 간송 선생이 우리 미술품을 목숨과 같이 아 끼며 지켜낸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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