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는 러시아 여성의 공식적인 이름이다. 여권이나 정부가 발급하는 서류에는 이렇게 이름을 적는다. 하지만 일상에서 이렇게 원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원래 이름으로 부르면 딱딱하게 느껴져서다. 대부분은 그녀를 ‘까쨔(Катя)’라고 부를 것이다. 친구들끼리 혹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편한 자리에 이런 식으로 부른다.

만약 예카테리나가 내 여자 친구라고 해 보자. 그녀와 단 둘이 집에 있을 때, 그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로맨틱한 분위기일 때, 나라면 그녀를 ‘까츄샤(Катюша)’로 부를 것이다. 내 친구에게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한다면 “어제 ‘까테리나(Катерина)’와 밥을 먹었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유치원생끼리 서로를 부른다면 ‘까찌까(Катька)’다. 이 호칭은 아이들끼리 서로 놀려먹는 듯한 뉘앙스다. 어른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 ‘민수’라는 이름을 ‘만수’라고 부르는 식이다. 할머니가 손녀를 부를 때는 ‘까쩨니까(Катенька)’라고 한다. ‘우리 예쁜 똥강아지’ 같은 어감을 담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중에서


한국 문화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과 역할, 친척 관계나 친근감을 나타내는 호칭 시스템이 매우 발달되어 있고, 일상에서 널리 사용된다.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실례일 경우가 많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이런 호칭 관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으로 부르면 되지만 한국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직책 같은 사회적 지위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회사에서 만난 ‘이 대리님’은 밖에서도 ‘이 대리님’이다. 승진하면 직책도 바꿔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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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한국 문화가 가부장적이라고 하지만 러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다. ‘미투’ 확산에 대한 반응이 그 증거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 비서나 부하 직원에게 부적절한 제안을 하거나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은 법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남녀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이렇게 수용한다. 오히려 이런 사건이 공개되면 여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비서로 취직했을 때 뭘 기대했나? 비서가 그런 거지 뭐.”, “어린아이도 아니고 남자 상사가 그럴 몰랐나?”, “이런 게 싫었으면 남자가 없는 직장에 들어가든가.”, “거부를 제대로 안 했으니까 그렇지.” 이게 러시아 사회의 분위기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때도 반응이 똑같았다. “클린턴, 그래도 남자구만.” 이 정도였다. 이런 일로 대통령을 탄핵한다면서 미국을 비웃었다.

여성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에서는 성 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남자가 권력을 이용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 스캔들이 터지면 둘이 눈이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니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미투 운동’은 러시아에서 보면 그냥 해프닝 정도에 불과하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짓거리하고 있네.” 이런 평가를 내린다. 그들을 조롱하면서 ‘쟤네들보다는 우리가 더 좋은 나라’라고 정신 승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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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소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가혹했다. 아니 여성에게 오히려 더 가혹했다고 하는 게 맞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시스템은 바뀌었다. 문화적으로 가부장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올라갔고, 정치적 권리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 시스템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녹아 있지 않았다. 소련 시절 여성들은 국가에서 원하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남녀의 신체적 차이는 상관없었다. 남자와 똑같이 공장에서, 건설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남자들도 힘들다고 꺼리는 일을 똑같은 할당량을 받아 몸을 갈아가며 해치우고 집에 와서는 또 집안일을 해야 했다. 여성들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사회적 배려가 실제로는 배려가 아니었다. 가부장제 문화는 그대로 둔 채 바뀐 시스템에서 여성들의 부담은 오히려 배가됐다. 당시 여성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집에서 가사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게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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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푸틴이 정권을 잡고 나서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0년대 초중반은 세계 경제가 호황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특히 석유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급격히 올랐다. 산유국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석유 판매가 러시아 GDP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가 상승 덕분에 러시아는 하루아침에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세계 최대 산유국과 엇비슷한 수준의 돈을 벌어들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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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이 당선됐다. 소련 시절 예카테린부르크 시와 주에서 활동을 했던 그는 똑똑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많은 당원의 지지를 받았고, 공산당 안에서 빠른 속도로 승진했다. 그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너무 흐지부지하다고 비판하며, 보다 더 강하고 개혁적으로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경쟁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옐친은 탱크를 앞세워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후 공산당을 해체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너무도 나약한 나머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고, 결국 그대로 물러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스스로 하야했다. 옐친은 전국에 대통령 선거를 공포했고, 1992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하루아침에 새로운 러시아의 첫 대통령이 됐다.

소련의 흔적이 희미해질 무렵, 새로운 러시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들이 겹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생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불법 또는 탈법적인 방법으로 국가 재산을 사유화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부를 갖게 된 옐친 대통령 측근들,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효과가 사라진 개혁들. 정치 세력들의 투쟁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하락한 사회 구조. 말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실제로는 비리를 저지르고 국가 예산을 횡령하기 바쁜 정치인들.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민주주의’와 ‘비리와 부패’는 동의어였다.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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