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으로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 덕분에 조선에 개신교가 자리 잡게 되었고, 그 개신교가 백성들에게 개화의 꿈을 실어주었다. 묄렌도르프는 개화파의 칼에 죽음의 위기를 맞은 민영익을 지혈하고 미국 공사 푸트에게 부탁했다. 미국 공사는 자신과 함께 미국에서 온 의사 알렌에게 민영익을 데려갔다. 알렌은 몇 번의 수술 끝에 민영익을 살려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에게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고, 이 소식을 듣고 민비도 알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명령했다. 알렌은 미국의 청교도 집안으로 조선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병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민비와 민영익의 도움으로 알렌이 원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이 설립되었다. 그것이 광혜원이었다. 광혜원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미국 선교사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광혜원은 현재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알렌이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병원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 스크랜튼 박사 등을 선교사로 파견했다. 조선은 제사를 거부하는 가톨릭을 사교로 단정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민영익은 미국 보빙사로 갔을 때 도움을 받았던 미국 감리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민비는 서양의 개신교를 민영익 때문에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개신교 등장이었다. 조선의 가톨릭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만들어졌지만, 개신교는 이렇게 갑신정변의 부록처럼 딸려왔다. -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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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 엔의 차관 도입을 옥균은 꼭 성공시켜야만 했다. 그 돈을 끌어들인다면 개화파는 고종으로부터 확고한 신임을 얻을 것이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도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옥균은 메이지유신이 유럽으로부터 도입한 차관의 뒷받침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개혁은 돈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구파들은 외국에 구속된다는 이유로 차관을 허용하지 않고 조선에서 새로운 돈을 찍자는 것이다. 돈만 많이 풀리면 물가가 폭등해 서민들만 죽을 것이고 경제가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묄렌도르프마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자고 주장했다. 청은 조선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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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왕권을 가진 백제계가 독점적으로 일본을 이끌고 있었는데 936년 신라가 멸망하면서 대규모의 신라 병력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기존의 백제계와 신라계가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권력을 나누며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180년 힘을 기른 신라계 무인들이 백제계 세력과 승부를 가리게 되는데 그 정점이 겐페이源平 전투14입니다.” -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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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원 씨(겐지)와 백제계 평 씨(헤이지)의 싸움에서 신라계 원 씨가 승리하면서 백제계 천황은 권력에서 밀려나고 일본에서 막부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마쿠라 막부입니다. 신라계 원 씨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쇼군이 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무인 정권이 탄생했고 천황을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남겼습니다.” -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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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표현의 자유 논증을 반박하다

마구잡이식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은 파시스트 운동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공론장에서이성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진실은 결국 이념의 시장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가능성을, 심지어 거짓과 기이한 가능성까지도 다 발표하도록 장려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장 유명한 철학적 변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1859년 저서 『자유론On Liberty』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상을 옹호한다.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 밀은 설령 거짓인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침묵시키는 것은 잘못된일임을 논증하는 일에 착수한다. 거짓인 의견을 침묵 - P112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오직 "[진리와] 오류의 충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인 믿음은 열띤 논쟁과 불일치 그리고 토론의 시끄러움 속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로소 지식이 된다.
밀에 따르면 지식은 오직 반대 입장들을 심사숙고한결과로서만 나타나며, 이는 실제 반대자들과의 토론이나 내부 대화를 통해 일어나야 한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참인 믿음마저도 단순한 ‘선입견‘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거짓인 주장이나 음모론에 대한 옹호까지 모든발언을 허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지식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많은 사람들은 밀의 『자유론을 ‘아이디어의 시장‘이라는 주제와 연관 짓고 있는데, 이 시장은 간섭 없이 놔두면 거짓을 몰아내고 지식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시장 개념과 같은 ‘아이디어의 시장‘이라는 개념은 소비자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아이디어 시장이라는 은유의 경우에는, 대화가 근거들의 교환에 의해 작동한다는, 즉 한쪽 당사자가 이유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 그렇게 결국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된다는 유토피아적 전제가 깔려 있

‘아이디어의 시장‘을 옹호하는 논증은 말이 "기술적, 논리적 또는 의미론적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치에서, 그리고 특히 파시스트 정치에서, 언어는 단순히 (또는 심지어 주로) 정보 전달에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된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아이디어의 시장‘ 모델을 이용하는 논증은, 한 사회가 비이성적인 원한과편견의 힘보다 이성의 힘을 더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면, 정치 선동가들은 공포를 심고 편견을 강조하며혐오하는 집단에 대한 복수를 촉구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 분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한 수사법을 이성적인 근거로 논박하려고 하는 것은 팸플릿으로 권총에 맞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 밀이 어떤 점에서 틀린 것일까?
의견 불일치가 있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일련의전제들이 공유되어야 한다. 심지어 결투에도 규칙에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당신과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의료보험 계획이 좋은 정책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파괴하고자 하는 무슬림 비밀 스파이라고 의심하고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 우리의 논의는 생산적이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바마의 보건정책의 비용과 혜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책들 속에기만적인 반민주적 의도가 감춰져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선전가들 또는 ‘정치 기술자‘들은 RT‘를 위한 전략을 고안할 때, 진지한 의견들과 엉뚱한 이론들을 섞어서 불협화음을 내게 하면, 생산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배경이 되는 기본 전제들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저명한 복음주의미디어 인사인 토니 퍼킨스가 2014년 10월 29일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 ‘워싱턴 워치‘에서 시사한 대로) 기후변화를 말하는 과학자들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기후정책에 대해 합리적인 논의를 거의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의견을 공론장에 허용하고 진지하게 고려할 시간을 주는 것은, 숙의를 통한 지식 형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낳기는커녕, 바로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한다. 책임의식이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언론이라면 이러한 위협 앞에서 진실을 보도하려고 노력하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해서 허황된 이론까지 모두 다 보도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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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출간된 듀보이스W. E. B. Du Bois의 걸작 『흑인의 재건 Black Reconstruction』은 재건기에 대한 당시의 공식 역사를 단호히 반박한다. 듀보이스가 보여주듯, 남부 백인들은 북부 엘리트들과 결탁하여 재건기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이는 새로이 선거권을 얻은 흑인 시민들이 가난한 백인과 연합하여 자본의 이익에 도전하는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공포가 부유한계층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 P49

듀보이스는 재건기가 얼마나 정의로운 통치 시기였는지를 보여준다.
흑인 의원들이 사리사욕으로 통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인 동료 시민들의 두려움을 수용하고 조정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흑인의 재건』은 백인 역사가들에 의해 대체로 무시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듀보이스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로 널리 인정되었다.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다 알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재건기에 대한 거짓 역사를 퍼뜨렸다.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북전쟁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들의 심리적 상처를 달래기 위해 학문을 이용했다.

역사학자들은 주새들 사이의 극명한 도덕적 차이를 덮어버린 안온한 역사관을 제공함으로써, 이전의 노예제에 찬성한 주들이 흑인의 시민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마저도 제거해버린 일을 정당화했다.
「흑인의 재건』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역사라는 프로파간다」이다. 이 장에서 듀보이스는 정치적 목표를 홍보하기 위해 역사적 학문성, 진실, 객관성이라는 이상에 호소하는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학의 학문적 규율을 훼손하는 것이라고듀보이스는 선언한다. 

듀보이스에 따르면, 진실과 객관성이라는 소중한 이상을 내걸고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거짓 서사를 주창하는 역사가들은, 역사를 프로파간다로 바꿔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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