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1993년간 부족 현황에서 1-4규모 기업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가장 많았던 반면에 5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많았다. 즉 499인 이하 기업은 숙련 기능자가 가장많이 부족하였고, 500인 이상의 대기업은 미숙련 기능자가 부족한 대조적인 현상을 보였다.
그런데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과 숙련 기능자의 부족은 서로 상당한차이가 있다. 미숙련 기능자는 직업 훈련원이나 공업계 고교의 졸업자들이 해당되므로, 이들 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양성 인원의 절대수가부족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생산 기능직으로의 입직을 기피해서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련 기능자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이들 인력이 부족한 것은 이들이 타 직종으로 전직했거나 회사를 옮겨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 P297

1990년대 공고 확대 정책이나 「2.1 체제」 실시는 이러한 기능 인력부족 현황을 토대로 분석함으로써 그 성격과 타당성을 점검할 수 있다.
노동부의 정의에 따르면 숙련 기능자는 6개월 이상의 기능 습득을 요하는 기능 직종에서 3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자이고, 미숙련 기능자는현재 교육 중에 있는 자이므로, 공고 학생이나 갓 졸업생은 미숙련 기능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990년대 인력 정책에서 공고 확대는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다. 현장 실습을 1년으로 한 「2.1 체제」 역시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 확대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위의 인력 부족 현황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공고 확대를 통한 미숙련 기능자 양성은 노동 시장의 어려움에 맞게효율적으로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숙련 기능자를 공급하려면공고 재학 기간과 현장 경력을 고려할 때 적어도 6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공고, 일반계 고교 직업교육과정, 직업 훈련원 등의수용 능력을 늘리는 정책이 1992년의 조사에서 정책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응답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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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바야 팝카, 소련 서기장의 특별파일


서기장으로서 고르바초프는 정권의 가장 끔찍한 비밀을 관리했다.

비밀은 줄로 묶어 밀랍으로 봉인한 큼직한 봉투 안에 보관되었다. 이런 봉투가 2000여 개 있었는데, 서기장 집무실 복도 아래쪽에 한때 스탈린이 차지한 크렘린 아파트의 벽장에 전체 봉투를 잘 정리해 두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소바야 팝카”, 즉 특별 파일이었다. 오소바야 팝카에는 아주 은밀한 서류가 담겨있어서 한 장만 보관하고 회람했다. 서류를 열람한 사람은 서명을 남겨야 했다. 오소바야 팝카에 담긴 봉투 다수는 서기장만 열람하거나 서기장의 위임을 받은 사람만 열람할 수 있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1번 봉투 속 한 개 항목에는 수치스러운 진실이 담겨 있었다. 폴란드 장교 학살이 스탈린의 직접 명령에 따라 이행되었다는 것이다. 타자로 작성해서 베리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해당 문건은 “다양한 반혁명 조직”에 소속되었다고 의심되는 폴란드 장교와 폴란드인에게 최고형, 즉 총살형을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이 문건 상단에 서명했고 다른 정치국원의 서명도 첨부됐다. KGB 의장이 흐루쇼프에게 보고한 또 다른 육필 문건에는 카틴숲 외에 두 곳에서 학살한 폴란드인의 정확한 수치가 적혀 있었는데, 2만 1853명이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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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선거에 의한 첫 인민대표회의

150년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첫 번째 진정한 의회인 인민대표회의를 승인하자, 이 예언 중의 많은 부분이 실현되었다. 퀴스틴의 말을 빌리면 “토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토론의 시대”는 인구 2억 8000만의 나라를 사실상 마비시킨 말의 홍수 형태로 나타났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이 13일간 그때껏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언론 자유 축제에 참여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캄차카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광부, 공장장, 정부 관료가 크렘린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보느라 산업 생산량이 급감했다. 토론은 TV로 생중계되어서 정부의 검열 문제가 없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인민대표회의 제1차 회의를 주도한 개성이 강한 인물 중에도 특히 두 사람이 두드러졌다. 한 사람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이고, 또 한 사람은 안드레이 사하로프였다. 두 사람은 격렬한 토론에서 양극단에 서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기보다 개성이 충돌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가슴 깊은 곳에 조국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러시아 차르들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르며 세상을 다 바꿔야 한다는 강박을 수 세기 동안 품었지만, 두 사람은 소련이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 세계 주류 문명의 일원이 되길 원했다. 문제는 그런 원대한 목표를 어떻게 이루는가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모든 개혁가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도 같은 문제였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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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두 모델 : 정치 먼저, 경제 먼저

고르바초프는 경제 개혁에 앞서 정치 개혁을 추진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와 대조적으로 중국 지도부는 시장 경제로 극적으로 큰 걸음을 내디뎠지만 시민의 자유는 계속 제한했다. 서로 다른 두 개혁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했다. 고르바초프의 방중 기간에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은 경제적 진보와 정체된 정치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였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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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착취되는 제국주의

일반적으로 수익성이 좋은 국제 무기거래도 소련에는 남는 장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아프리카, 중동,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 정부는 모스크바로부터 받은 산더미 같은 무기 구매에 지불할 대금을 사실상 경화로 낸 적이 없었다. 이념적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한 소련 지도부는 자국의 손실을 “사회주의자 연대”를 위한 것으로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리시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방’과의 무기거래가 무슨 의미인지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계속 늘어나는 빚이었다. 상환 일정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는 끝없는 협상은 결국 일체 상환할 수 없다는 협박으로 점철되었다. 그러고는 끈질기게 ‘동지애’에 호소했다.”150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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