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이상 사회
- 군주와 경대부의 갈등
- 예치를 통한 화해.
- 조선 왕과 사대부와 갈등 해결책으로 사대부가 주장.

공자가 꿈꾸었던 세계는 서주 시대처럼 귀천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 신분제 사회에서 ‘인‘이라고 불리던 귀족층들은 ‘민 民‘이라고 불리던 피지배층을 온정으로 다스리고, 반대로 직접 생산자였던 피지배층은 귀족층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가 보았을 때 피지배층이 귀족층을 존경했던 이유는, 귀족들이 예에 입각해서 평화롭게 공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귀족층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 분열은 군주와 경대부 사이의 갈등으로 첨예화한다. 공자는 군주와 경대부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서주 시대의 예를 복원함으로써 충분히 봉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귀족층들은 다시 한 번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피지배층들의 자발적 존경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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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사상에서 경대부와 민중 그리고 왕권의 향배
- 경대부의 착취 행위를 성문법으로 규제
- 민중과 군주의 이익, 귀족의 손해




만약 경대부들이 자신의 봉토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민중에게 지나치게 세금을 거둔다면, 이제 민중은 성문법에 의지하여 경대부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법적으로 경대부들과 민중은 아무런 차등이 없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법적 효과가 군주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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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11세기에 상나라 변방에 살았던 상족 이외의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주족을 중심으로 상나라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동맹군이 구성되는데, 이때 상나라를 공격하는 동맹군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 바로 강족이었다. 결국 상나라 사람들의 불길한 예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강족은 주족과 함께 상나라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에는 주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후 고대 중국 사회에서 강족의 영향력은 결코 시든 적이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정치적·문화적으로 가장 강대했던 제 齊나라가 바로 강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 P40

그래서 그들은 강상을 대표로 하는 강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래 살았던 중국 서쪽을 떠나서 중국 동쪽, 즉 황해 黃海를 바라보는 지금의 산둥 성 山東省 쪽으로 옮겨가게 했다. 비록 말로는 강상을 제 齊나라의 군주로 봉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것은 정치투쟁에서 실각한 강족을 자신들 주족의 생활 터전에서 거의 축출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족에 대한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에 주족은 강족이 새롭게 정착하게 된 제나라와 자신들의 주나라 사이에 노나라와 위 衛나라를 겹겹이 만들고 그 군주의 자리에 자신들의 동족을 부임시켰을 정도였다. - P44

고대 중국에서 ‘인‘과 ‘민‘, 혹은 ‘백성‘과 ‘민‘이 각각 상이한 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주나라의 통치가 왜 예와 형刑이란 두 가지 수단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다. 예 禮가 통치 계급, 즉 동성 同姓 의 귀족들이나 이성 異姓의 귀족들을 포함한 지배층 내부에 통용되는 행위규범이었다면, 형 즉 형벌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던 민중, 즉 민民에게 적용되던 가혹한 형법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주나라는 ‘예‘라는 행위규범만으로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했던 이상적이고 훌륭한 사회가 결코 아니었다. 예기 禮記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이런 의문에 응답해줄 흥미로운 구절이 나타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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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 남유대왕국이 아시리아를 대체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이다(기원전 586년). 이때도 많은 이들이 신을 버렸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바빌론에 끌려갔던 사람들 사이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신이 폐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새로운 신 관념이 태어났다.  - P212

그것은 국가의 패배를 신의 패배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로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수성의 부정이었다. 종교의 탈주술화는 이때 생겨났다. 이것을 초래한 것은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나 지식인이었다.
- P213

유대교는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형성하는 교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에세네파와 같은 교단에서 현저하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교단도 유대교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바빌론 포로의 단계에서 생겨난 것도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즉 국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야훼를 믿는 집단으로서 새롭게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유대민족이 되었다. 즉 유대교는 유대민족이 선택한 종교가 아니라, 역으로 유대교가 유대민족을 창출한 것이다.15)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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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민주주의 대 이소노미아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자인 빈곤자가 소수의 부유계급을 억누르고 재분배에 의해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노미아란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자유가 평등인 원리이다. 이것은 사회가 자유유동적인 상태에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폴리스 안에 불평등이나 전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소노미아는 근본적으로 유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소노미아는 씨족사회의 구속을 부정함과 동시에 거기에 존재한 유동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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