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북페이백 경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농경사회형 세계관 vs. 상인

장인 집단이 벌인 시위의 본질적 의도는 소작농 집단의 시위처럼 당시 존재하던 사회계약을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권력의 근본적인 균형 상태나 이를 지탱하던 온정적 가부장주의에도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정황을 통해 귀족, 사제, 그리고 (때때로) 소작농 집단이 공유한 ‘농경사회형‘ 세계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세계관에서는 위계질서와 안정성 그리고 상호 의무감이 가치 있게 여겨졌다. 

이 세계관을 언제나 공유하지는 않았던 특정 카스트도 존재했다. 바로 상인 집단인 이들은 씨족사회 전사 집단보다는 소작농 집단에게 훨씬 위협적인 존재였다. 상인 집단이 점차 힘을 키우자 소작농들은 국가의 징세에 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인 집단의 확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물수취에 기반한 농경사회형 제국, 아카드

기원전 2300년경에 이르러 이 전사 유목민들과 농경 기반 도시 문화 세력들이 사상 최초로 힘을 합해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형성했다. ‘공물 수취‘에 기반한 ‘농경사회형 제국(agrarian empire)‘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으로 알려진 국가를 처음 세운 이는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ofAkkad)‘다. 정착 농경사회와 유목민 지역을 나누는 경계 지역 출신의 진군왕(marcher lord)‘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들을 정복했다. 전사 지주 지배 엘리트들이 통치하는 농경사회형 제국은 이후 4,000년 넘도록 전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 체제는 1912년 중국의 청나라,
1917년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1923년 중동의 오스만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위력을 떨쳤다. 물론 유럽 왕가들이 해외 영토에 거느렸던 제국의 흔적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근근이 명맥을 유지한 사례가 있다.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르주 뒤비의 전사와 농민!

그리고 신의 평화

기사도의 출현

이들이 몸에 겨운 채 전사로서의 직분을 놓는 동안 다른 이들의 삶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혹했다. 농업과 교역은 기사 집단의 패도적 행태에 타격을 받아 위축되었다. 심지어 지체 높은 귀족들과 황들도 그칠 출모르는 무질서 상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큰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강력한 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이 파괴적 광란 상태를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현대인들이 보기에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당시 기준에서 단 하나의 희망은 교회에 있었다.

 당시 지라르라는 한 지방 주교가 있었다. 지라르는 당대 고위 성직자들처럼 귀족 집안의 자제였다. 

물론 당시 교회도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측면에서는 기사단 무리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평화 증진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 권력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 영역을 관장하는 권력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보유한 제일의 무기는 바로 십계명의다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지어다" 를 어긴 죄로 영원히 그치지 않는지옥불을 내리겠다는 위협이었다.

1024년에 이르기까지 지라르는 플랑드르 백작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전사 기사단의 막무가내식 통치가 사회를 파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강력한 설득전을 폈다. - P39

두에에서 열린 대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도처에 만연한 폭력과 혼돈의 책임 소재를 두고 서로를 비난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지라르와 왈테, 플랑드르 백작은 한 가지 합의에 이르렀다. 다름 아니라 ‘신의 평화‘가 수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내릴 것이니 이 시간 동안은 공격과 약탈을 중지해야 하며, 오로지 왕의 남자들만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금지령을 거역한 이들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거나 수도원에 유리된 채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터였다.
- P40

캉브레의 지라르가 11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순회하며 설파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문화적 전환이었다. 당시 왕들은 성직자인 선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전사 집단들이 궁벽한 시골을 배회하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영웅으로부터 ‘정중한 귀족과 ‘남성적 배려가 돋보이는‘ 기사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촉진했다. 결국 이 전사 집단을 황제의 궁정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11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정치한 기사도 문학이 출현했는데, 이 장르는 특히 기사들에게 약자에 대한 가부장적 측은지심, 여성에 대한 낭만적 사랑, 그리고 문학적 세련됨의 의미를 심어주었다. 폭력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쓰이고, 연출된 마상(馬上) 시합 무대에서나 제한적으로 펼쳐지게 될 터였다. 프랑스 남부의 음유시인 기로 드 보르넬은기사들을 청중으로 모아놓고, 고상한 마상 시합을 약탈이나 강탈과 맞바꾸지 말라는 시구를 읊었다. "연약한 양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 교회와 여행자들을 약탈한 연후에 / 숙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 기사는 수치스러움을 알지니.
ן ו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유는 후대의 조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