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이후 그리스의 역사에서 천재나 거물이 등장하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30인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을 부활시킨것도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민중이었다. 기원전 403년에 부활한 민주정은 그 후 80년간 안정된길을 걸었다. 지도자들은 과거와 같은 가문이나 문벌 출신이 아 - P231

니라 민회에서의 변론을 통해 정책결정에 참여한 새로운 유형의정치가들이었다. 특히 그 기간에는 정치군인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장군들은 군사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욱 충실한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경제도 부흥했다. 민주적 제도는 앞선어느 시절보다 더욱 충실하게 정비됐다. 민회 회의장은 더욱 넓어져 아테네 시민의 민회 참여가 더욱 더 확대됐다.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되어 참가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추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던 것은 당시 연극관람이 정치참여의 하나로중요시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치에서 법치로 지배원리를 변경한 아테네 민중은 페리클레스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인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재무관을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등장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민주정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훗날 민주정을 파탄시키는 원인의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파탄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없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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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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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유수
- 다윗을 왕이자 신의 죄인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환경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수와 귀환이라는 대사건은 유다지역의 엘리트 식자층 전직 궁정서기나 제사장, 또는 그 후손인 사람들에게 왕조 통치자로부터 직접 지배를 받던 때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정치 붕괴와 그로 말미암은 비상 권한의 공백이라는 역사적 돌발 사태는, 그들에게 새롭고도 예외적인 행동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권력이 아닌 종교를 통해서 큰 보상을 받는 독특한 문학적 창조의 무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왕조 창시자(다윗)를 찬미하면서도 그를 더 높은 신적 존재에게 벌 받는 죄인으로 묘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오로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표현의 자유가 신학적 대작(인용자 추가, 구약)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오직 그 때문일 것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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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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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과거에 투사하는 소설!
- 중국도 마찬가지.
- 백성이 지칭하는 대상은 도성 내에 거주하는 성씨를 가진 일부 집단에 한정
- 근대사회가 되면서 심지어 노비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

교육시스템이나 공통된 표준 언어가 없고 또 소통수단도 제한되어 있던 문맹의 소농사회, 곧 극소수 비율만이 읽고 쓸 수 있었던 사회에서, 토라 한두 권은 숭배의 대상이었을지는 몰라도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념적 서사로 기능했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최고 권력자가 백성의 이해를 구하려는 것 역시 근대적 현상으로,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역사적 감각의 부족으로 인해 그런 이미지를 계속 고대사에 갖다 붙이려 한다. 왕은 민족 정치로 대중을 결집시킬 필요가 없었다. 왕들은 행정계급 및 소수 토지귀족들로부터 왕조에 대한 느슨한 이념적 합의를 얻어내는 것만으로 대개 만족했다. 왕들은 백성들의 헌신이 필요치 않았고, 혹시 그런 헌신 의식이 있었다한들 그것을 군주에게 붙잡아 매어둘 수단도 없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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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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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공동체에서 구약과 탈무드의 관계
- 구약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성한 경전
- 구약을 해설한 탈무드가 실질적인 경전

수백 년 된 유대 공동체들이 구약성서를 ‘구전 율법‘ 곧 탈무드의 해석 및 중개 없이 읽을 수 있는 독립된 저작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구약성서는 할라카 와 권위 있는 주석가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의 책으로 여겨져 왔다. 일상적으로 사용된 유대교 텍스트는 탈무드였다. 

이런 탈무드와 달리 토라 즉 모세오경은 어떤 스토리 연결도 없이 각 구절을 임의 선택하여 회당에서 주 단위로 크게 낭송했을 뿐이다. 

한 권으로서의 구약성서 전체는 먼 과거의 카라이트파 유대교와 근대의 프로테스탄트에서나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서는 수백 년 동안 유대인 대부분에게 신성한 경전,
인간의 이해로는 접근할 수 없는 텍스트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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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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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인종과 민족주의
- 독일 민족주의는 유대인을 포용하고 있었다
- 그런데 독일의 개방적 태도가 20세기 돌변한 이유는?

주목해야 할 것은 독일의 비유대인 지식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이런 비관적이고 결정론적인 입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는 검이다. 이 책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게르만 민족주의 지지자들 모두가 ‘키쉬‘한 신념을 가졌거나 반유대주의자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 대다수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 다수도, 독일 유대인들을 필요불가결한 일부로 포함하는 포괄적인 공화주의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독일 내 유대인 식자층도 트라이치케의 적의에 당연히 질겁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레츠의 민족적 종족주의 입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베를린대학교 철학교수였던 모리즈 라자루스(Moritz Lazarus)에서부터 같은 대학교 역사학과의 해리 브레슬라우 (Harry Bresslau), 그리고 그레츠의 제자였으며 나중에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저명한 신칸트주의 철학자가 된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레츠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들 모두 단일 국가 내에 두 개의 ‘민족성‘이 있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통합된 민족 안에도 다양성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게르만적‘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다양한 문화 요소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기에, 그런 문화 요소들을 계속 흡수할수 있는 탄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독일제국의 다른 백성들 즉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무엇보다 먼저 독일인이며,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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