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에 향후 100년간 중국과 한반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서로 다른 두 가지 과정이 진행되었다. 하나는 조선 청나라 정부 관계의 점진적인 개선이었다. 건륭제의 꾸준하지만 강력한 외교, 그리고 건륭제의 오랜 재위 기간을 통해 조선인이 청나라 황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의 명나라 말기와 유사할 정도로 복원되었다. 19세기 초까지 많은 조선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과거 명나라를 대하듯이 청나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 다른과정은 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체제를 향한 서구 열강의 진출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온 배들이 조선 앞바다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조선인은 그들의 지리적 관념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하기도 했던 이수광李光은 "세상에서 사해(동서남북 사방의 바다)라 일컫는 것은 다만 중국을 표준으로1988)하여 말한 것이지, 천지 사이의 사해가 아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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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홍무제는 고려의 쿠데타와 이후 진행된 정치적 변화를 바라보며 매우 놀랐고,
한반도의 상황에 점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고려는 명나라의 봉신국이었다. 어떻게 한반도인이 명의 허락 없이 구질서를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홍무제는 건국 10년이 넘어가는 명나라 역시 ‘구질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예禮의 위반 문제를 두고 우려와 실망을 표시했다. 결국,
홍무제는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를 사실상 승인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는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홍무제는 명나라의 안정뿐 아니라 북쪽과 서쪽 지역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과의 전쟁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대신에 홍무제는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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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경 북쪽의 여진족과 바다 건너의 일본을 견제할 때 명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진족과 일본을 상대하는 조선의 대외 관계‘는 명나라와의 봉신 관계보다 상당히복잡했다. 15세기 내내 조선은 여진족 그리고 명나라의 영향이 닿지 않는 다른 부족들을 다루는 데 명나라와 경쟁을 벌였다. 영락제水樂帝(재위1402~1424)가 접경지대를 모두 명나라에 편입하여 관리하려고 하자, 조선은 이에 경계심을 표했다. 태종은 조정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황제(옮긴이 영락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의 예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를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극 정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라고여긴다. 55) 영락제가 서쪽으로 해양 팽창을 하고, 베트남을 명나라의 한지방으로 복속시키려고 하자 조선은 명나라가 조선에도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선은 북쪽 국경 너머를 향한 개입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지도자들은 명 제국과 조선 사이의 만주를 일종의 완충 지대로 만드는 일이 조선의 안보를 전반적으로 확보할 수있는 길이라 생각한 듯하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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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힘의 차이를 고려할 때 청이 왜 조선을 팽창하는 제국에 완전히편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나는 만주족과 그 동맹 세력은 훨씬 더 중요한 명나라와의 전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적을 돕는 일을 포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상의 강요였다. 홍타이지는 먹어야 할 더 큰 떡이 있었고, 그래서 조선을 내버려둘 정도로 현명했다. 

그러나 조선의 생존은 정해진 선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청은 명나라를 대신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명 제국 대신에 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어떤 학자들은 청나라가 중국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중국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명나라가 정한 대부분의 전례에 순응해야 했고, 동시에 이 전례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노력했다. 청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작동했다. 청 제국은 중국인동시에 중국을 넘어선 존재였다. 이들은 만주족 황실을 중심으로 하고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는 제국인 동시에, 명나라와 명나라 이전의 모든 것을상속받은 중화中華 제국이었다. 이는 청나라가 1644년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을 점령한 이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79)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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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13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26세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회시(2차 시험)와 전시(황제 앞에서 보는 최종 시험)에 연거푸 1등, 2등으로 합격했으니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다.

이색이 개경에서 문하생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원에서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1356년경부터일 것이다. 당시 신진사대부 계열의신세대 인재들은 원에서 선진 성리학을 흡수하고 막 귀국한 젊은 천재이색에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색 학당‘은 당대 최고의 명문 엘리트 사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고려 말 개혁파유신 대부분이 ‘이색 학당‘ 출신이었다 할 정도로 개혁파 선비들을 다수 배출했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 이숭인 · 권근 - 이존오(李存吾) ·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 뒷날에 여말선초의 중앙 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학당‘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색이 전파한 성리학은 온건개혁파 유신들과 역성혁명과 유신들의공통된 정치 이념이 되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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