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으로부터 한국전쟁의 재가를 받은 북한이 왜 중국의 군사적 지원을 직접적으로 받았는지 의문이었다. 냉전사의 대가인 저자의 설명 덕분에 궁금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일부 풀렸다. 막 내전을 끝내고 허약했던 중국이 미국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쩌뚱 입장에서 미국의 북진은 임진전쟁에서 일본의 북진이었고 당시 명이 조선을 도왔듯이 신생중국이 북조선을 도왔을 것이다. 정치와 역사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막 건국된 신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일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의 재건에 미칠 수 있는 피해를 이유로 한반도 개입에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중국 국경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 이는 신중국 정권에 실존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중국으로의 관문이었다. 국공내전 당시 중국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적이었고,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가 패배한다면 이를 이용하여 일로, 그리고 국민당 잔존 세력이 공산 중국을 압박할 것이 분명했다.

1950년 당시 중국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에게 이념과 역사, 안보는 모두 중요한 문제였다. 마오쩌둥은 다른 동료들보다 사회주의 진영 내의 이념적 유대에 역점을 두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북한)의 동지들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동지들은 과거에 중국공산당을 도왔고 조선과 중국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였다. - P147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적어도 5, 6개 사단을 38선을 향해이동시켜달라고 개인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요청이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과 중국공산당이 어디까지 헌신할스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중국 지도부는명령을 내리는 것을 망설였다. 10월 2일 정치국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는 개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마오쩌둥이 마침내 개입을 결정하기까지 정치국, 그리고 소련과 거의 2주간의 논의가 필요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 이름 붙인 중국군이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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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은 프랑스와 싸우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훈련을 도와주고싶어 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의 전투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볼 때 한반도의 통일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져야 했다. 이미 마오쩌둥은 1949년 5월 김일성의 특사로중국을 방문한 김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 초에 국제적 상황이 조선 동지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뀔 때만 남조선을 향한 공격이 가능할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 앞에서는 더 직설적이었다. 중국은 전쟁 전戰前 수준의 경제를 회복하고 전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3~5년간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 P142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초강대국 후원자들에게 더 많은 무기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드의 내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와 같은전쟁에서 역할을 하는 데 큰 열의가 없었다. 1949년 여름 두 강대국은, 한반도의 두 정권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자국 병력의 대부분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다.
- P143

었다. 김일성은 남한을 향한 공세에 스탈린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김일성은 현재는 북한의 전력이 우세하지만, 향후 남한의 게릴라들이 진압되고, 남한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군사적으로 회복되면 향후의 세력균형은 불리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스탈린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중국의 국공내전을 이유로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1950년 1월 스탈린은 마음을 바꾸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군사적 승리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의 서방의 도발에 보복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도자는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돕겠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한반도 무력통일을 지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 P144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낸 김일성은 1950년 5월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의지원을 문의했다. 마오쩌둥은 아주 많은 이유로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1) 거절은 스탈린의 결정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2) 그리고 이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할 때 북한이 도와준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3) 그러나 아마도 제일 중요했던 것은 만약 중국이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는 공산당의 신중국이 일본의 부상 이후 깨어져 나간 중국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를 재확립할 의도가 없다는 신호로 읽힐지도 몰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먼저 수립되었지만, 중국 지도자는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동생‘이라고 지칭했다. 형제적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중국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조하고,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비록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원했던 한반도 무력통일 작전에 대한 중국의 실질적인 지원은 제한된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김일성은 그가 원하던 바를 얻어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군사적 승리 이후에 통일이 신속히 이루어져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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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에도) 대부분의 조선인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 요원으로 활약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1946년 중반부터 국공내전이 격화되었다. 여기에서 조선인 부대의 활약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일성이 1946년 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활동하던 북한 지역과 만주가 인접했다는 점도 국공내전 시기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소련의 묵인 아래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과의 전투 중 한반도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들은 무기, 보급, 의료품을 한반도 북반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1946년 말에는 북한 지역의 젊은이들이 모집되어 만주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싸웠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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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가 독립될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카이로 회의 직전 루스벨트를 만났을 때는 장제스는 적어도 얼마간 "한반도가 중국과 미국의 보호tutelage를 받는 반부-독립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재점령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라고 결론 내렸다. 루스벨트는 소련까지 참가하는 국제 신탁통치 방안을 선호했으나, 장제스는 이와같은 해결책을 피하고 싶어했다. 미국, 중국, 영국이 최종적으로 동의한「카이로 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 " - P132

전후의 기회를 준비하면서,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내의 조선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에 봉착했다. 1936년 이전 코민테른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나친 민족주의를 비판했지만, 전쟁 후에 코민테른은 노선을 수정하여 ‘통일 전선united front‘의 이상을 내세웠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노선을 따랐고, 이는 한반도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1936년 이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고대부터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자 비판을 받았었다.

 이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투쟁이 사회혁명이 아니라 민족 해방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비판을 받았다. 

코민테른의 노선 전환이 중국공산당원이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간의 파벌 투쟁을 격화시킨것은 당연하다. 비록 많은 조선인이 북중국에서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함께 투쟁했으나,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까지 작전을 확대할 계획이 없었다. 홍군 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해방 뒤에 조국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소련 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역시 붉은 군대를 위해 먼저 복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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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처지에서 볼 때 청일전쟁 이후의 15년은 충격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는 한일합방이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이었고, 조선인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그들 자신을 비난했다. 일본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역동적이고 대담하고 질서정연하게 보였다. 반면 청나라는 후진적이고 무기력하게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과거가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고 평가하고,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과거의 방식을 고수했기에 민족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1910년 이후 일부 조선인은 이기심 혹은 향후 더 강한 조선을 건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본과 협력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한반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거나, 한반도 안에서 이론적이든 실질적 차원에서 민족의식을 양성하고자 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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