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요약이 본문보다 더 통찰력 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제국 바로 옆 한반도에서 ‘민족‘이 형성된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베스타는 청 제국도 조선도 각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양해하면서,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안정적으로작동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청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할때에도 조선은 청 제국으로부터의 이탈보다는 밀착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본이 변수로 작동했다. 지금까지 조선이 청 제국 아래 누려왔던 자주는 사대주의로 비판받았고, 일본은 조선에게 청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요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일본은 제국주의화하면서 한반도를 병합했고, 이는 한반도의 민족 개념이 강렬한 민족주의‘로변환하는 계기가 된다.

문제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모두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해지면서 저자가 다룬 시기의 복합 주권과 복합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 P218

한반도는 중국 제국 옆에서 사대를 통한 ‘자주‘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중국 제국이 흔들리자 한반도는 짧은 독립을 누리다가, 나라를 잃었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오랜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가까스로 얻어낸 ‘독립‘이기에 우리에게 자주독립은 매우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주독립의 세계관 안에서 제국과 공존해왔던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이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포용력있는 제국이 되기 위해서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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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제국을 민족으로 새롭게 형성한다는 불가능한 도전에 직면했다. 끝내 공산주의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중국공산당이 과거 청 제국의 경계 아래 사는 모든 인민을 대표한다는 선언이다. 중국공산당은 55개의 소수민족과 현재인구의 96퍼센트를 구성하는 한족이 결합된 ‘중화민족中華民族을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 창출해냈다. 이 중화민족 개념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을 모두 포함하는 중국 국가國家 아래 사는 모든 인민이 아주 오래전부터 중화민족에 속해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 기원과 실체의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현대 민족주의는 모두 과거의 복합적인 주권 형태를 이해할 여지를 줄이고 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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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명청과의 관계보다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 훌륭하다. 제국과 의로운 민족과의 관계는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의 현대사 요약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 자신이 서명했던 핵확산금지조약 Non-prolitteration Treaty, NPT을 북한이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어 같은 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발표했다. 

이와 같은 북한의 행보는 미국과 다른 국가들에 경종을 울렸다. 빌 클린턴 Bil Clinton 행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과의 회담을 받아들였다. 김정일의 권력 승계 직후인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기본 합의‘를 체결했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잔류하기로 했다. 이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볼 때 제네바 기본 합의는 자비로운 패권국이 세계 전체를 대표하여 협상에 나선 것이었다. 

김정일에게 제네바 기본 합의는 분명 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 합의는 김정일 정권의 체면을 크게 차려주었을 뿐 아니라 북한은 비핵화의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미국과 완전한 관계 개선을 기대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의 핵 합의는 유지되지 못했다. 1994년 중간선거 이후 공화당이 다수파가 된 미국 의회는 북한과의 협정을 지지할 의사가 없었다. 미국은 제네바 기본 합의의 대가로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던 중유의 공급에 대한 자금 지원을 보류했다. 또 미국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지속해온 북한을 향한 제재도 해제하지 않았다.  - P174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는 대가로 북한이 약속받았던 것은 2기의 경수로였다. 경수로 건설은 첫 삽은 떴으나 완료되지는 않았다. 

경수로 건설 사업은 조지 부시 George W. Bush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 정보당국이 북한이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기술을 확보하려 한다고 보고한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 부시는 9·11 테러이후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자 "주민들은 굶기면3서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는 정권"이라 선언했다.)ㅣ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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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 사건


1956년 8월 30일, 조선로동당 3기 2차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리필규 등이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김일성이 이들을 모조리 숙청한 사건. 조선로동당이 공산주의 정당에서 일인 독재 정권의 도구로, 북한이 일당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 수령이 살아있는 신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봉건주의,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바뀌게 된 단초라 평가되고 있다.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말 그대로 8월에 (북한 입장에서) 종파 세력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 8월 전원회의 사건이라고도 한다.

북한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던 사건이다. 북한 내부에서 알려지지 않은 쿠데타 시도 등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인 회의에서 김일성에게 도전했던 사건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나무위키>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탈스탈린화에 착수했을 때, 중국과 소련의 정치적 조언 사이에서 김일성이 추구하던 숙청은 위기를 맞이했다. 흐루쇼프는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초청했고, 6주간 김일성은 그의완고한 정치 노선을 두고 비판을 받았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김일성이 귀국하면 그를 권좌에서 축출할 준비를 했다. 소련에 노선의 개선을 약속한 후 북한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적어도 사적인 차원에서는 김일성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던 중국 지도부는 소련 대표단과 함께 김일성이 정치적 경쟁자와 타협을 하는 상황을 참관하는 대표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 대표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평양으로 파견했다. - P154

그러나 대표단이 떠나자 김일성에게 반대했던 이들은 투옥되거나 더 나쁜 상황에 놓였다. 1957년 김일성은 측근을 제외한 모든 조선로동당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수천 명이 처형되고, 일부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도망쳤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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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을 거친 후에 선조가 권력을 유지한 것과 한국전쟁 후에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권력을 유지한 것이 공통된 결과이다.

특히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유지한 것은 생각할수록 미스테리다. 북한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50년대 북한 정치사를 읽어봐야겠다. 중국이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북한이 혈통 중심의 체제로 유지되는 것의 기원이 이 시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저지른 치명적인 실책에도 불구하고 권좌로 복귀했다. 소련은 김일성을 보호했고, 전투 대부분을 담당했던 중국은 김일성을 대신할 만한 그들만의 후보가 없었다.

 남쪽에서도 미국의 여러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살아남았다. 신임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에 따르면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우리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이 개자식아"로 요약되었다.  - P150

몇몇 중국인은 한국전쟁이 실제로는 중국에 이득이 되는 전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은 중국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스탈린의 격려 아래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인 지도자의 시선에서 볼 때,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한 푸닥거리를 하고 비용을 치른 것은 바로 중국이었다.

몇몇 중국인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우려했지만, 마오쩌둥은 그들과는 의견을 달리했다.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중국의 개조라는 더 큰 사업의 일부였다. 지난 100년간 중국은 모든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이제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 맞서 교착 상태를 이끌어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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