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정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견해는 탁월하다. 누구의 생각일까? 토크빌 아니면 양자오?

루이 16세의 정부는 세금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습니다. 수세收稅는 국왕이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을 할 수있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국왕 아래 있는 관리 개개인이 귀족이다 보니 효율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일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게을리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징세인 제도를두어 세금 거두는 일을 하청으로 처리했습니다. 정부는 각 구역마다 징수해야 할 세금 액수만을 정해 놓고 실제로 세금을 거두는 일은 징세인에게 위탁해 정해진 세금을 정부에 내도록 한 겁니다. 징세인이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얼마나 세금을 거두는지는 정부가 일절 간여하지도, 잘잘못을 따져 묻지도 않았습니다.
- P148

혁명은 악독한 징세인의 폐단과 정부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엄청난 무능에서 비롯됐지만 그러한 혁명의 열정 속에는 또 하나의 갈망, 곧 유능한 정부, 그럴듯한 정부에 대한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갈망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혁명의 구호로 수용되지 않고 무시됐지만, 당시 현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와 똑같이 중요했습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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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귀족의 판단이라 믿을만하지 않을까.

구세계인 유럽 사회에서는 무지하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고귀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반드시 열등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위에서 자기보다 유식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자기보다 부유한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비교하다보면 열등감이 생기루수밖에 없지요. 나아가 열등감은 그들을 위축시키고 만족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악하게 하고 법을 어기고 강도짓을 하도록 합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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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셋째 모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식민을 시작해 세워진 버지니아의 제임스 타운은 첫째 모델과 둘째 모델에의 혼합에 가깝다. 북부 뉴잉글랜드의 식민을 주도한 것 역시 유사하다. 다만 왕의 특허장을 가진 식민회사가 북부에 사람들을 데려가기 전에 순례자들이 먼저 도착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처음이었고 나중에 북부가 승리했기 때문에 신화가 되었다.


토크빌은 영국인의 식민 방식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국왕의 명령을 받아 사람을 파견해 식민지를 개척하는 겁니다.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가서 개척하고 경영합니다. 이때 중점은 토지 확장과 점유에 있습니다. 

둘째는 특수한 이익이 있는 곳을 확정하는 겁니다. 예컨대 은광이나 금광이 있는 지역은 개발자가 주도적으로 국왕에게 특별 허가서를 요청해 해당 지역에서의 독점적 권리를얻음으로써 다른 이들이 와서 이익을 다투지 못하도록 합니다.

셋째는 한 무리의 사람이 새로운 지역에 가서 먼저 그곳에 식민지 사회를 세운 뒤 국왕에게 보고해 특별 허가서를 요청함으로써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이권을 승인받는 겁니다. 이 셋째 모델은 북미 대륙에서 나타났습니다.  - P119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남부 지역은 17세기에뉴잉글랜드와는 다른 식민지 사회로 발전했습니다. 남부의식민지는 앞에서 말한 둘째 모델에 가깝습니다. 현지에 간식민지 개발자가 그곳의 풍토가 사탕수수와 면화를 재배하는 데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쟁자의 진입을 막으려고 영국 국왕에게 특별 허가를 얻음으로써 토지 이익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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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귀족과 법복귀족.
토크빌은 두 귀족가문의 결혼으로 탄생.

(프랑스)귀족의 가장 큰 공헌은 그들이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관료의 골간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는 고도의 중앙집권 국가로, 일찍부터 방대한 관료 시스템을 만들어 지방 봉건 세력을 대체하면서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중국은 또 다른 전통을 가진 관료 대국입니다. 중국 관료 시스템에서는 당나라 때 이후 주로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습니다. 과거 덕분에 다른 지방, 다른 계층의 사람이라도 시험을 치르고 관료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은 관료 시스템을 유지하는 인재가 다원성을 지니는 한편, 중심과 주변부, 상하 계층 간을 오갈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 P76

프랑스에는 과거 시험이 없었고, 프랑스의 관료 시스템은 주로 귀족 출신 인재가 메웠습니다. 관료 시스템과 귀족 시스템은 상당히 겹쳤고,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많은 귀족이 단두대로 보내졌고, 상당수 귀족이 서둘러 망명을 했으며, 더 많은 귀족이 가장자리로 물러났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관료 시스템의 심각한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혁명 위원회는 각종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들을 도와 이러한 제도를 집행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 프랑스가 20-30년간 크게 혼란해진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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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역사에 흥미로운 비교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로, 일본 문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베네딕트는 이 책을 쓸 때,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고 일본에 가 본 적도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본에 가서 조사하고 관찰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입니다. 당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 P71

베네딕트는 일본인 수용소로 갔습니다. 미국은 일본에선전포고를 한 후, 미국에 있는 사람 중에서 미국 시민증을가진 미국계 일본인 2세 젊은이와 아이를 포함해 모든 일본인이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수용소에 격리했습니다. 일본어를 배워 본 적도 없고, 일본에 머물러 보지도 못한 베네딕트는 수용소에 가서 이들 미국계 일본인을 만났고, 이들을 상대로 현장 조사를 해 『국화와칼』을 썼습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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