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제임스 퍼거슨 지음, 이동구 옮김 / 여문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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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는 선물과 다르다. 공유는 강제적이다. 

이에 비해 증여 행위는 자발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세가지 교환 양식 즉,
증여와 재분배 그리고 거래의 세 가지 유형에
공유도 새로운 유형으로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Thomas Widlok, Anthropology and the Economy of Sharing

수렵채집인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결과의 각주에 소개된 

책이다. 이 책에 관심이 간다. 누가 번역해주면 좋겠다. 

공유와 성원권 간의 연결고리는 ..... 익숙하다...... 공유와 현존의 연결고리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분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는 데 있어 현존의 중요성은 인류학, 특히 수렵채집사회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사회에서는 고기와 같은 귀중한 물품의 배분은 전적으로 지분에 대한 요구에 따라 진행된다. 이를 ‘공유요구demand sharing‘라고 한다. 나누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분배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분은 관용이나 자비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확보하는 것 (지분은 ‘요구‘이며 ‘공유sharing‘는 강제적)이다.

이러한 ‘공유요구‘의 맥락에서 ‘분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뜻 보기엔 단순하다.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나.‘ 물리적인 존재는 필수적이다.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사냥으로 획득한 고기를 얻을 자격이 없다. ‘여기에 있는 사람‘에게만 몫이 분배된다. 

그러나 물론 이들에게도 성원권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은 몫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구성원이 아니라면 배제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리는 성원권과 현존의 조합에서 발휘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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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는 연민보다 짜증에 가깝다!





터무니없이 엄격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장실 정치는 유명하다. 예를 들면 가정용 물 공급을 둘러싼 갈등은 공식적인 논리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무국적 정착민들조차도 물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전염병은 남아프리카인과 모잠비크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이 모든 정치적 쟁점은 시민권이 아닌 현존에 기반을 둔 요구에서 이끌어낸 힘 덕분에 현실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구성원에게 속하는 권리를 조정하기보다는 우리가 인접성 adjacency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적인 요구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문제들을 다뤘다. - P67

진정한 의무를 느끼게 되는 것은 연민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귀찮음이나 짜증에 가깝다.

실제로 진정한 의무의 신호는 동정심보다는 짜증으로 나타난다. 행실이 좋지 않은 동생이 마약에 돈을 다 써버려 집세를 내지 못한다거나, 그러고는 당신 집에 와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한다거나, 어쩌면 지난번처럼 소파에 토해놓거나, 아마도 기약 없이 당신의 아파트에서 머물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까? 결코 "아, 너무 안됐네. 관대하게 대해야겠다!"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편이 가깝지 않을까? "어쩌면 이리도 짜증나게 굴 수 있을까? 근데 어쩌겠어, 내 동생인데…………."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무가 주는 느낌이다. 지리학자 클라이브 바넷Clive Barnett과 데이비드 랜드 David Land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립되고 관조적인 칸트적 관점이 아니라 실제 사회적 맥락에서 할당 결정 allocative decisions을 내린다. 나눔에 대한 생각은 활발한 사회관계 속에서 적극적인 주장과 요구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펼쳐진다.  - P71

시민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자발적으로 제기하는 서비스 요구는 내가 인접성이라고 부르는 이웃의 ‘압박‘관계에서 발생하는 요구가 ‘확장‘된 것이다. 남반구 대도시 중심 지역에 새롭게 이주해 살고 있는 도시인들은 우리가 여기에 살기 때문에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깨끗한 물도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한다. 최소한의 의미에서 우리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며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못해 이런 서비스가 보편적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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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흙과 피 vs 흘린 땀과 흘린 피
또는 법적 시민권 대 육체적 유대


내 생각으로는 성원권과 현존에 대한 이러한 기준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부를 살펴보면 이 두 원칙은 서구 정치 이론이 흔히 가정하는 것보다 더 역동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현존과 성원권이 종종 훨씬 더 유연하게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에서는 ‘피와 흙‘이 배제의 원칙으로 작용해왔다. 잘못된 혈통을 가졌거나 잘못된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추방되거나 배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부 지역의 사회는 지금은 늘 그렇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longue durée 역사적으로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람이 재산‘이라며 외부인을 통합하는 수단을 매우 정교하게 고안했다. 그리고 그러한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흙으로 상징되는 영토와 피로 상징되는 인간적 요소를 소속감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좀 더 유연하고 유쾌한 개념을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 P60

외국인들은 오랜 기간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땀이 흙에 스며들고, 혹은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흘린 피가 함께 살아가는 생생한 정신적 단결의 원천이 되어 어떤 장소에 지속적인 애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관건은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와같은 법적인 시민권이 아니라 가뭄을 함께 겪고, 같은 땅에땀을 쏟으면서 공유된 물리적 존재가 만들어낸 육체적인 유대라는 점이다. 이처럼 오래된 정치적 전통에서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물리적인 존재는 실제로 성원권과 통합된 단일체가 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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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접근과 달리 우리는 지대가 공유되는 정도와 그 속성을 생산성 증가의 이득이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핵심적으로 특징짓는 요소로 간주했다. 

우리가 취한 접근의 중요한 전조로는 봉건제가 붕괴한 이유에 대해 신고전주의 이론과 신맬서스주의 이론을 비판한 브레너(Brenner 1976)의 연구를 꼽을 수 있다. 브레니는 봉건제의 메커니즘과 그것이 종말을 고하는 데 정치권력이 미친 역할을 짚어냈다. 브레너에 따르면 인구 요인은 부차적이었고 가장 중요한 요인은 농민들이 영주의 요구에 저항하기에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느냐 아니냐였다.

 브레너의 접근은 아세모글루와 블리츠키의 2011년 연구(Acemoglu and Wolitzky 2011)에 주되게 영향을 미고우리는 다시 이 연구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이 연구에서 생산성 향상은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주기보다 강압을 강화하기로(가령, 더 많은 경비를 고용하거나 노동자들이 그만두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투자를 하는 식으로 결정할 수 있을 때) 임금을 높이지 않고 낮춘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제도적인 맥락과 노동자가 외부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가령, 고용주가 강압적 조치를 강화할 때이곳을 그만두고 나가서 다른 데서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이 시사점 중 일부는 비강압적인 조건으로도 확대해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협상력에서 권력 균형이 고정되어 있으면 생산성을 높이는 새로운 기술이 임금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권력 균형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화시키게 되면 임금은 감소할 수 있다. 한편, 기술 변화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의를 일구는 것과 노동자들을 면밀히 감시하는 것 사이의 균형점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데, 그 경우에도 높은 생산성과 높은 임금 사이의 연결이 깨어질 수 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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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날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250년 전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내러티브로 놀랍도록 가깝게 되돌아간 듯 보인다. 아니, 우리는 제러미 벤담, 애덤 스미스, 에드먼드 버크의 시대보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엘리트주의적이고 더맹목적으로 낙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 P19

우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진보가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진보"는 또다시 소수의 기업가와 투자자만 부유하게 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량과 권한을 박탈당하고 이득은 거의 얻지 못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포용적인 새 비전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회의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 19세기에도 그랬듯이, 그러려면 통념에 맞설 수 있는 조직과 반론이 있어야 한다. 널리 퍼진 비전에 도전하고 테크놀로지의 방향이 협소한 지배층의 통제를 벗어나게 하는것은 1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보다 오늘날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때보다 덜 필요하지는 않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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