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 필리프 2세가 오드루이크에서 거둔 승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의 예고편으로 불안한 진실을 드러냈다. 화약 대포는 그전에도 포위 작전에서 사용되곤 했지만, 오드루이크에서 처음으로 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어 압도적이고 분명한 승리를 이끌었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XQKwTrJ14LHubgtq5

우수한 공성포의 사용 여부에 따라 지상전의 승자와 패자가 갈라졌다. 프랑스군은 백년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대포를 사용하여 영국군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내고 패배를 승리로 바꿨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인들은 대포를 사용하여 무어인의 마지막 요새를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종국에는 유럽의 첫 강대국인 스페인을 세웠다. 또한 화약 대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오스만왕조는 1453년에 거대한 포탄을 이용하여 고대 콘스탄티노플의 벽을 무너뜨리고 로마제국의 마지막 흔적을 지웠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JCsP35LNdfE2imV9

대포는 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성은 중세 유럽 전사 계급들의 독립성과 힘을 상징할뿐더러 유럽에서 새롭게 생겨난 왕조 군주국들이 중앙 정부를 수립하려는 야심을 뻗칠 때 그에 저항하는 수단이 되었던 건물이었다. 따라서 대포가 성벽을 무너뜨리자 옛 귀족 전사 계급이 가진 자치권도 함께 무너졌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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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피지컬 음반이 다시 부상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는 숫자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2020년에 약 4,000만 장이었던 우리나라의 연간 음반 판매량은 해마다 2,000만 장씩 쑥쑥 늘면서 지난 2023년에는 1억 장을 돌파했습니다. 2010년대 초반에만 해도 10만 장이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디지털 음원이 대중화되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음반은 ‘듣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반면 오늘날의 음반은 ‘소장하기 위한’ 기념품에 가깝습니다. 음악은 음원으로 즐기니까요. 이는 국내 팬덤의 디깅 수준이 상당히 깊어졌음을 가리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음반, 공연, 굿즈 등 모든 상품을 구매할 의향과 의지가 강력해졌죠. - <B주류경제학>, 이재용, 토스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1KnFbCC9vp5sefHy5

현재 한국 음악 엔터계의 빅4인 하이브·SM(카카오)·JYP·YG의 최근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음반 판매가 전체 매출의 30%가량을 차지한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만일 여기서 음반 판매가 전년 대비 증가했다면 그만큼 팬덤이 강화되었다는 뜻이므로 나머지 70%의 매출(공연, 굿즈 등)도 이에 비례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죠. 만약 어느 아이돌 그룹의 신규 음반 초동 판매량이 이전 대비 크게 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아이돌 그룹이 소속된 엔터사의 주가가 오르겠죠. - <B주류경제학>, 이재용, 토스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Y1DqopA8iGC6Ph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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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보통 수감자들에게 먹을 것이 아주 조금 있거나 아예 없을 때에도 카포들은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그들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카포들은 오히려 수용소에 있을 때 가장 영양섭취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수감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이 되면 카포로 뽑혔고, 기대했던 대로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즉시 쫓겨났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과 같은 정신의학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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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과 헬렌 컬러의 인연






1842년 찰스 디킨스가 로라 브리지먼에 관해 글을 썼을 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 소설가가 관심을 보인 덕에 로라는 누구나다 알 만한 존재가 되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헬렌 켈러가 초기에 명성을 얻은 것도 상당 부분 당대 가장 유명한 작가 덕분이었다. - P114

트웨인은 스탠더드오일 경영진 헨리 로저스의 아내 에밀리 로저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경이로운 아이가 가난 때문에 학원을 중단해서 미국에 좋을 일이 없습니단 헬렌이 그들과 계속 공부한다면 수세기에 걸쳐 역사에 남을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이 아이는 모든 세대에 걸쳐 최고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구상을 해 보았습니다. 남편분을 붙잡고 남편을 비롯해 존 록펠러 윌리엄 록펠러 씨 등 스탠더드오일 경영진이 헬렌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애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걸국 로저스는 헬렌이 래드클리프에 다니는 비용을 충당할 거액의 기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상당수의 사회 저명인사가 자선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 유명한 소녀의 이름 옆에 자기의 이름과 자산을 갖다 대려 안달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트웨인의 행동은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것이 틀림없다. - P117

트웨인과 헬렌의 유명한 우정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들은 주로 두 사람의 다정한 농담, 유머,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 이런 일화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누락되는 것은 두 사람이 좀 더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헬렌은 이렇게 썼다. "나처럼 장애를 지닌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클레멘스 씨 같은 친구가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우리는 세상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주고받았다. 그는 한 번도 내 의견이 쓸모없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다.....클레멘스 씨(마크 트웨인)는 우리가 눈과 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사고능력이 오감으로 측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P122

인종적 편협함을 점점 더 혐오하게 된 트웨인은 나중에 헬렌에게 대단히 중요해지는 여성참정권과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등 여러 사회운동에 관한 정치적 견해를 쌓아 나간다. 비록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이렇게 선언하며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혁명을 일으킬 만큼 참을 수 없는 억압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언제나 혁명주의자의 편이다."

헬렌은 트웨인과 알고 지낼 때까지는 커져 가는 자신의 정치신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평생 클레멘스 씨는 정치에서, 전쟁에서, 그리고 필리핀과 콩고, 파나마 선주민에 대한 잔학 행위에서,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불의를 볼 때마다 맞서 싸웠다."  시사에 관한 토론에 대해서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공적인 사안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가 아주 마음에 들었고 서로 같은 생각일 때가 많았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과 달리 트웨인은 진지한 사안에 관한 헬렌의 의견을 청해 들으며 서로 깊이 존경하는 마음을 키워 나갔다. - P124

잘 알려진 대로 1910년 트웨인이 사망하자 부커 T. 워싱턴 (Booker T. Washington)은 "마크 트웨인의 후계자는 아무도 없다"라며 누구도 그의 유산을 이어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트웨인을 연구한 학자 브렌트 콜리 (Brent Colley)는 그의 진정한 후계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보수적인 남부 출신이라는 배경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명성을 활용해 미국을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은 급진적인 운동가로 자라날 여성 말이다. 스톰필드에 다녀온지 얼마 후 헬렌은 사회당에 입당한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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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컬러와 그레이험 벨 그리고 설리반

켈러 대위는 딸에게 개인교습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벨을 찾아갔겠지만 벨은 한눈에 헬렌의 잠재력을 알아본 듯하다. 아서 켈러에게 교습이 아니라 퍼킨스 시각장애인학교의 마이클 아나그노스에게 편지를 보내 딸을 전담할 교사를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아서는 로라 브리지먼에 관한 글을 읽어 이미 퍼킨스학교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던 케이트의 동의를 얻어 아나그노스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벨은 헬렌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876년에 전화기를 발명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벨이 머지않아 사방에 퍼진 이 기술을 발명한 동기가 보편적인 통신수단 개발이 아니라 청각장애인의 삶을 향상하겠다는 평생의 사명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과학자는 아내와 어머니가 모두 청각장애인이라 수십 년 동안 보청기를 개발하는 실험에 매달렸다. 부족한 연구 자금을 충당하려고 자신의 아버지가 개발한 원리에 따라 교육하는,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를 위한 교습소를 운영했다.  - P61

대부분은 헬렌의 사연을 기적으로 여기고 넘어가려 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헬렌을 가르친 방식에 더 관심을 보였다.

청각장애 교육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청각장애인 공동체에 상당한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1892년 《침묵의 교육자 (The Silent Educator)》에 애니의 교수법이 소개되자 벨은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의 교육에 "상당한 중요성을 띤다고 믿는 한 가지 요소를 강조하는 답변서를 썼다.

"애니는 헬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어린이와 다름없이 대하기로원칙을 정하고, 처음에는 아이가 못 알아듣는 말이 훨씬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헬렌이 들을 수 있었다면 직접 말했을 단어와 문장을 그대로 손에 써 주면서 대화했다. 말을 고르거나 가리지 않고 일상적인 관용구가 포함된 문장 전체를 자주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이의 기억에 언어를 각인시켜 점차 모방하도록 이끌고자했다. 설리번 선생이 헬렌을 가르치면서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위대한 원칙은 일단 꺼내 놓고 보면 당연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듣고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어린이의 언어습득과 관련해 우리가 익히 아는 원칙과도 다르지 않다. 바로 언어는 모방으로 습득한다는 원칙이다.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가 이해하기에 앞서 언이를 먼저 제시해야 하며, 모방할 것이 생기기 전에 어린이가 그 모델에 익숙해져야 한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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