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표부에 가자 대표단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성명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는 북한이 원하는 것은 북·미 공동성명으로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과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유엔 헌장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유엔 헌장 몇 구절만 바꾸면 그대로 성명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유엔 헌장에 서명한 나라로서, 또 북한의 유엔 가입을 찬성한 나라로서, 우리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Zff3nHEsg9GxWBY6

워싱턴의 국가안보회의에 전화를 걸어 통과 또는 승인 요청을 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빡거리는 초록색 글자들을 읽었다. 그 단어들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그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암시하다니 북한 사람들한테 완전히 넘어간 것 아닌가.”
친구와 나는 그들의 입을 막을 답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실제로 유엔 헌장에 있는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에 무슨 새로운, 과격한, 유별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4qkoEMJX4Yu75Ys5

케네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노순옥 옮김, 중앙M&B 2000)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FvndoEHSHAhVY9J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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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후반 소련 해체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게 핵우산을 제공하지 못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에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물려받은 소련 핵무기의 통제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은 여러 나라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치했던 미국 핵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있었고,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는 그 일환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SKmat5GcPnvGZLVA

1991년 하반기 중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해빙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이 소련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호전적 태도를 삼가야 했던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소련 해체에 따른 제반 문제가 정리되고 나자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뽐내는 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1992년 10월 이후 미국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비롯해 북한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1년 사이의 상황 변화가 작용한 것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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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92년 5월 초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미국이 제기함으로써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5개월 후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오면서 사태가 마구 악화되기 시작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yGpzvb3qwMCQLAz8

IAEA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이 예산도 제공하고 정보도 제공하면서 사찰을 엄격하게 하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걸프전 이전의 관행과 전혀 다른 엄격한 사찰 기준에 첫 번째로 걸려든 것이 바로 북한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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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NPT 탈퇴 당시에 북한의 핵기술이 핵무기 제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져왔다.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그 시점에서 미국이 도와줬다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어내며 핵무기를 만들어냈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PijSXq3TRAzUx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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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반핵 구호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공통 배경

북한은 1950년 이래 미국의 핵 공격 위협을 계속해서 받아왔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평가가 미국과 남한에서 지배적이었고, 남한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미국 핵무기의 존재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에는 1957년 이래 다량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북한에는 소련 핵무기가 배치된 적이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핵무기의 불균형 상태가 수십 년간 계속되었지만, 소련 붕괴 때까지는 미·소 간의 핵균형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소련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중국 핵 능력으론 미국과의 핵균형이 불가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서 남한의 열세 주장도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핵무기의 남한 배치는 누가 봐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1991년 하반기에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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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후에 다가올 ‘고난의 행군’ 상황이 1991년 시점에서도 빤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오랫동안 시행해온 시혜적 교역방법을 경화 결제로 바꾸면서 북한 경제는 발전은커녕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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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체로서의 화약

화약은 초기 대포의 추진체로 그 쓸모를 드러냈다. 한쪽은 막고 반대쪽은 열어 둔 관에 화약을 장전한 후 압축하면 화약이 연소하며 가스가 발생하고 급격히 팽창하여 발사체를 엄청난 힘으로 빠르게 밀어냈다. 이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NbZUhcoufmAGPXnNA

서양에서 처음 주로 사용된 화기는 정말로 큰 총, 즉 화약 대포였다. 보통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먼저 생겨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는 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형 무기, 즉 휴대용 총기는 나중에서야 유럽인들의 무기고에 추가되었고, 서양의 첫 기능성 화기는 대포였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be9Fh4sWrnwqCrm7

돌 포탄에서 주철 포탄으로

주철 포탄이 실용화된 이유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적이고 참신한 개념인 표준화 때문이었다. 역사는 뛰어난 형제, 장 뷔로와 가스파르 뷔로에게 가장 큰 공을 돌린다. 뷔로 형제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전문 포병에 가까웠다. 18세기까지 유럽의 포병은 자신을 군인이라기보다는 고도의 기술을 다루는 기술 조합이자 엘리트 계층으로 여겼다. 뷔로 형제는 전문 포병이자 대포 제조업자로서 대포를 속속들이 잘 알았고, 백년 전쟁의 마지막 이십 년 동안 지휘관으로서 프랑스의 포병대를 이끌기도 했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Dob1EdLunycuzh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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