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주의자 논고』는 또 다른 의의를 가진다. 최초로 민주의 현실 운용을 토론한 저작이라는 점이다.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작품,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전파된 책에는 민주적인 사고와 제도 구상에 대한 수많은 탐구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연방주의자 논고』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념이나 상상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민주를 다룬 글이 없었다 - < 미국 헌법을 읽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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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유대교의 비슷한 듯 다른 유대인 추방신화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가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되자, 유대교와 유대인은 이단과 불신자로 낙인찍혔다. 제국 곳곳에있던 유대교 신자들은 신이 내린 처벌로서의 유배라는 개념을 채택해, 자기 처지를 달래야 했다. 유대교는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추방됐다는 기독교 억압자들의 담론을 받아들였지만, 유대교가 그런 담론에 기반해 내린 결론은 기독교도의 결론과는 달랐다.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에 대한 신의 처벌을 거부이고 버림이라고 생각한 반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 (잠언 3:12)하는 자신들의 특별한 선택된‘ 지위에 대한 확인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대인이 추방된곳의 민족들은 부정한 우상숭배자이다. 하느님이 무한한 자비로 그의자식인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죄를 벗겨줄 때까지 우상숭배자의 아침과 마수는 모든 희생을 치러서라도 거부해야 한다. 유대인이 겪는 추방 등 고난은 결국 구원이라는 보상으로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언 3:11~12)라고 추방을 신이 내리는 징계로 받아들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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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엘리트의 유일신앙

현재, 대다수 성서학자는 진정한 유일신앙은 유다 왕국이 패망해많은 지식인과 지배층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바빌론 유수 시기인 기원전 6세기 후반 이후에 생겨났다고 합의하고 있다. 그전까지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 내에서는 야훼 신앙은 단일신교, 즉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신만을 숭배하는 형태로 종교개혁가 사이에서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요시야 왕 이후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유다의 엘리트들은 바빌론에 끌려갔다. 이들이 거대 제국의 수도에서 소수집단 공동체를 이루고 제 나름대로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임을 현대 미국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의 이민 공동체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이미 요시야 왕 때의 종교개혁에 고취된 이 엘리트들의 손에서 민족적 비극의 경험에 더해진 선진문명의 충격이 성서라는 결과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P78

이들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패권 제국으로 등장한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제(카루스 2세)에 의해 50여년 만에 가나안으로돌아가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바빌론에 남고, 일부만 가나안으로 향했다. 번화한 세계의 중심에서 반세기를 살면서 생활 근거지를 찾은 이들에게는 조상들이 발원했다는 벽촌의 가나안으로 돌아갈현실적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중세 이후까지 바빌론에 존재한 최대유대인 공동체가 이를 말해준다. - P78

페르시아의 통치에서 ‘예후드‘ 지역으로 편제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들은 황제의 대리인으로 사실상 총독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바빌론 유수 이후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등은 사실상 페르시아 황제의총독이라 할 수 있다. 사제이기도 한 이들의 통치는 신정 통치의 성격을 가졌다. 이는 성서에서 다윗 왕국 성립 이전 판관들의 통치를 담은사사기로 엿볼 수 있다.
성서는 남유다 왕국의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만, 그 역대왕들의 타락도 질타하고 저주한다. 성서가 요시야 왕 때 만들어졌다면,
왕가에 대한 이런 불경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당시 예후드를 통치했던 사제들의 관점과 지위에서만 과거 역대 왕을 비판하는 게 가능했을테다. 그리하여 왕국들의 멸망과 바빌론 유수는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이스라엘에 대한 벌이고,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도 야훼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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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 성서


"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5)라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다. 성서의이 대목부터는 ‘역사적 사실이거나, 그 반영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가나안 땅에서 자리 잡아 야훼를 섬기고 그 뜻을 땅 위에서 구현하는믿음의 자식들인 이스라엘 족속의 기원을 만든 ‘역사적 인물‘이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가고, 그 후손인 야곱 등 족장들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일구다가 이집트로 들어가고 후손인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족속들을 탈출시키는 엑소더스를 이끌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정복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건설해 솔로몬이 그 영화를 일구고, 통일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의 가르침을 어겨서 바빌론 유수 등을 시작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 방랑하게 됐다는 것이 성서의 서사이다. - P33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다윗은 헤브론 지역, 솔로몬은 예루살렘 지역의 작은 부족국가 통치자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이 분열돼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왕국이 생겨난 것도아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나중에 별개의 독립된 왕국들로서 성립됐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굴에 따른 역사학계의 합의가 됐다. 따라서,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통일왕국은 역사의 상상물일 뿐이라는 게 그의결론이자, 이제는 학계의 다수가 받아들이는 학설이다.
통일왕국 이야기는 성서가 쓰이기 시작한 말기의 유다 왕국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구하려고 만들어낸 역사이다. 예루살렘이 거대한 제국의 도시로 묘사된 것도 유다 왕국의 수도였던 당시 현실을 과장해과거로 투영시킨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다윗과 솔로몬의 거대한통일왕국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그 왕국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고,
우리는 그 이름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P58

성서는 분명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줬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 이후의 유대인, 현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도영향을 줬다. 성서는 더 나아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시원이기도 하다.
성서가 이런 역할을 했던 건 거기에 적힌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메시지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의 메시지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천착하게된 것은 근대 이후 신학적 세계관이 무너진 데 대한 반동에 더해 이스라엘 건국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성서에서 찾으려 한 탓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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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5)라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다. 성서의이 대목부터는 ‘역사적 사실이거나, 그 반영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가나안 땅에서 자리 잡아 야훼를 섬기고 그 뜻을 땅 위에서 구현하는믿음의 자식들인 이스라엘 족속의 기원을 만든 ‘역사적 인물‘이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가고, 그 후손인 야곱 등 족장들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일구다가 이집트로 들어가고 후손인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족속들을 탈출시키는 엑소더스를 이끌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정복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건설해 솔로몬이 그 영화를 일구고, 통일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의 가르침을 어겨서 바빌론 유수 등을 시작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 방랑하게 됐다는 것이 성서의 서사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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