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신화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돌아올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이것이 문익점의 역사적 운명을 바꿔놓았다. 문익점은 파직된 뒤 고향 진주로 돌아가 목면 재배를 시도했다. 하지만 문익점이 심은 목면은 전부 죽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것만 살아남아 3년 만에 밭을 일굴 정도로 재배에 성공했다. 정천익은 중국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 목화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들었다. 정천익과 문익점은 목면 전파에 힘을 쏟아 10년 만에 전국에 목화가 보급되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8gzsE43P89EA1isAA

흔히 목화씨를 가져온 것 때문에 목면이 전국에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화는 당시 원을 오가는 여러 사람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오히려 목화 재배가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데는 목화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목면 짜는 기술 등을 국산화했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시각이다. 한마디로 정천익의 공이 크다는 얘기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b4b3CVWf1UZtLQw9

오늘날 우리가 익히 들었던 문익점에 관한 전설은 조선시대에 와서 모두 소설처럼 창작된 것이다. 문익점이 중국 강남에 가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이야기는 허구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PboRPsnHqfyVMhV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마와 마누라

몽골어는 우리말에도 흔적을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 등에 쓰이는 ‘치’다. 바로 이 치는 ‘다루가치’의 치와 같은 말이다. ‘다루’는 몽골어로 지배한다는 뜻이고 ‘치’는 사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다. 이 ‘치’가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그 외에도 임금의 밥을 뜻하는 ‘수라’라는 말도 몽골어다. ‘대왕마마’,
‘대비마마’ 등 궁중 어른에게 쓰는 최고의 존칭어인 ‘마마’는 세자를 가리키는 몽골어이고 마누라는 세자빈을 가리키는 몽골어다. 물론 오늘날 마누라는 부인의 ‘비칭’으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V2NM9WWQHCFNtiw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4-02-07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누라가 몽골어라니, 한 수 배웁니다.
 

티치 포 아메리카와 헌장학교


‘슈퍼맨을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학교 중에 KIPP LA 대학 준비반 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아는 것이 힘이다. 프로그램(Knowledge Is Power Progran, KIPP)에 가입되어 있는 140여 개 학교들 중 하나다. KIPP 학교들은 공교육에 대한 ‘무관용(No Excuses)‘ 접근법을 대표하는 학교들로서, 규율과 품행을 강조하고 하루의 수업 시간과 수업일수가 길고 교원들을 선택적으로 채용하고 전통적인 읽기와 수학능력을 강조하는 현장학교의 모범을 보여 준다. 이 모범을 많은 학교들이 따르고 있다. KIPP은 1995년 휴스턴과 뉴욕 시에서 ‘미국을 위한 교육(Teach for America)‘
프로그램 -미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들을 최근에 나온 수천 명의 졸업생들을 채용해 성적이 좋지 않은 지역의 학교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프로그램 - 의 지지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현재 KIPP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학교들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비중은 95% 정도이고, KIPP 학생의 80% 이상은 연방정부의 급식 지원 대상에 속할 만큼 저소득층에 속한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신정권의 사병과 관군

최충헌의 장기 집권 시스템은 권력은 강화했지만 국방력은 약화했다. 최충헌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방력은 오히려 약화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최충헌은 도방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을 약화했다. 자신의 문객 중 관군이 되겠다는 사람은 즉시 귀양을 보냈다. 체격 좋고 힘 좋은 젊은이들을 도방의 병사로 뽑아 우대했다. 최충헌 가문의 사병이 열병하면 그 길이가 2, 3리에 달했다 한다. 그에 반해 관군은 용맹하고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yuq1wysjpc5hVs28

거란군이 개경에 육박해 들어오자 최충헌은 군인 수만 명으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게 했고 성 밖의 민가를 헐어서 참호를 팠다. 자신의 안위만이 문제였다. 개경에 육박해 들어오던 거란군을 조충과 김취려 장군이 힘들게 물리쳤다. 1219년(고종 6) 3월 공을 세운 서북면원수 조충과 김취려 등이 개경으로 개선해오자 최충헌은 그들이 세력을 가질까 두려워 개선 의식인 영아례迎迓禮를 중단시키고 장수들에게 사사로운
잔치를 열어주었다. 그 예산도 국가 예산이 아닌 백관들에게 은을 추렴해 충당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7AWpn9LkPVMk4ird7

최충헌은 거란과의 전쟁 중에는 무관 인사 청탁을 하는 이들이 없어 뇌물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정기 무관 인사인 도목정都目政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인사 요청자가 많아지자 그제야 도목정을 시행했다. 그런데 군공을 세운 이는 승진시키지 않고 뇌물을 바친 자만 승진시켰다. 군사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pDCANzEetoTWBYm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신정치의 다이나믹스

명종은 오히려 경대승에게 위협을 느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대승이 ‘사직을 지킨다’는 이유로 정중부를 제거했는데, 명종은 이를 경대승이 자신을 부정한다고 인식했다. 형 의종을 제거한 무신정변이 아니었으면 명종은 즉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om4MHAbEqxwFBtU9

명종은 경대승 대신 무신정변을 주도한 이의민이 오히려 자신의 보위를 지켜주기에 적절한 인물이라고 보았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ahCsnxFwyk3doAG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