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대숙청

이른바 ‘대숙청’이라는 공포 기간–소련 시민들은 완곡하게 ‘1937년’이라고 표현한다–은 1937년 초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시작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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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대숙청은 군으로 확산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와 사실상 모든 최고위 군사령관(정치국원인 클림 보로실로프는 제외)이 독일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비공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즉결 처형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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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계층 체포는 1937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사장, 동료 노동자, 이웃에 대한 기회주의적 고발이 당국에 계속 밀려들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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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볼셰비키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 내부에는 혁명이 끝날 때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만드는 취약한 내적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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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만 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하고 100만 명 이상을 굴라그로 보낸 것은 너무 큰 대가였다.

대숙청 이후 당, 정부, 군, 보안대 등 모든 기관의 고위 지도부는 대부분 초보자로 채워졌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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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33 대기근

스탈린은 농민을 죽이려 했다기보다, 농민들이 봄 파종까지 생존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려 했다. 문제는 누구도 그 양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지방 관리들이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도록 압박했고, 농민들이 더는 숨겨둔 게 없다고 말해도 곧이 듣지 않았다. 농민들의 ‘기근 연기’와 ‘거짓 파산 행세’와 같은 기괴한 표현이 소비에트 담론에 등장했다. 농민들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간다는 것을 스탈린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1932~33년 겨울, 굶주림을 피해 도망치는 농민을 막기 위해 도시 입구를 봉쇄해야 했다. 봄이 오자 파종을 위해 국가 창고에 저장했던 양곡을 다시 농촌으로 보내야 했다. 기아 사망자(수십 년 후까지 소련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500만 명 이상이었다. 기근은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반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다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시절 우크라이나 당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건설 70주년 기념식에서 침묵을 깼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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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우대 정책, 적극적 조치

약자 우대 정책은 1930년대에 세계적으로도 신선한 것이었다. 동시대 영어에는 이런 정책을 표현할 용어조차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을 떠나고 싶어 해서는 안 되기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이 정책을 경멸했다. 하지만 노동계급, 농민, 비러시아인 출신 가족은 상승 기회를 환영했다. 미래의 국가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그 밖의 여러 공화국 토착민 출신 지도자들이 이 우대 정책의 수혜자들이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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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산업화와 문화혁명

국가가 지원하는 계획적인 산업화 프로그램을 마치 ‘계급의 적’이나 ‘외국 간섭 세력’에 맞서 싸우는 혁명전쟁처럼 제시한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탈린은 무엇보다도 혁명가였다. 폭력과 계급적 분노 고취는 그가 할 줄 아는 일이었다. 당 역시 이런 일에 능숙했다. 이 방법은 경제적 합리성 측면에서는 매우 불합리했지만 당의 투쟁적 사고방식과 내전기의 당 체제를 고려할 때 그 나름대로 정치적 합리성이 있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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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은 1928년 초 산업 사보타주와 외국 정보기관을 위한 스파이 활동 혐의로 기소된 엔지니어들(‘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재판을 극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그들의 공분을 유발하는 특권적 지위를 가진 ‘파괴자’ 엔지니어들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섰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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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포츠담 그리고 처칠

얄타 회담에서 서구 동맹국들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일차적인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향후 독일의 잠재적 침략 위협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는 더욱 실질적인 완충지대를 만들어주었다.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 급격히 몰락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초강대국은 3개국이 아니라 2개국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곧 명확해졌다. 처칠은 포츠담 회담 중간에 의회 투표를 통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미국과 소련은 전후 초강대국이 될 예정이었고, 동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이고 지정학적인 적대 관계만 남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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