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가 왜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느냐는 이스트만의 질문은 제국주의가 중국의 산업화의 걸림돌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은 지난 10여년 사이 한국의 경제사학회 내에서 안병직, 이영훈 선생의 연구에 의해 중심화두로 부각된 질문이기도 하다. 일제의 침략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파괴적인 작용을 했는지에 대해 안병직 선생은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한 긍정적 효과를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계속해왔다. 이런 연구는 국사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지만 국사학계는 안병직 선생의 연구성과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실증연구를 산출하는데는 - 최소한 지금까지는 -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트만의 책 제8장은 한국 경제사학계와 국사학계의 치열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읽은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스트만이 요약한 제국주의의 중국 산업화에 대한 파괴적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거액의 보상금을 강요했다.
둘째, 1895년 이후 개항장 안에 공장을 설립한 외국인은 막대한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했다.
셋째,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수입관세를 5% 이상 부과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미성숙한 산업을 보호할 수 없었다.
넷째, 값싼 공산품의 수입은 중국의 전통적 수공업을 파괴하여 인민을 빈곤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인민의 구매력을 저하시켰다.
다섯째, 중국경제를 불안정한 세계 무역 시장으로 끌어들여 세계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지 못한 이들을 수요와 가격 변동에 노출시켜 생산자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견해가 제국주의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정통파적인 고전적인 논의라고 한다면, 수정주의적 견해가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사학계에서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이스트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외국의 제조업과 투자는 개항장과 만주에 집중되어 있어서 중국 국내의 경제는 제국주의의 충격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제국주의의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둘째, 비록 관세주권을 제국주의가 제약한 점은 있지만 중국인 역시 외국인에 비해 불공정한 이점을 향유했다. 예컨데 중국인들은 중국 소비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시장구조나 상관행에 대해 우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외국상품 보이콧이나 국산품 장려운동은 외국인에게 매우 불리했다.
셋째, 서양의 충격은 근대적 기술,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넷째, 무역은 농민이나 수공업 생산자에게 제품을 좀더 나은 가격에 판매하는 기회를 부여했다.
다섯째, 중국계 기업은 외국계 기업에 뒤지지 않는 성장률을 보였고 이윤율도 거의 동등했다. 중국의 산업화를 외견상의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바닥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이스트만의 주장의 핵심은 산업화의 지체요인으로서 제국주의는 기껏해야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산업화가 지체된 근본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산업혁명에 성공한 나라가 독특하고 이례적인 것이며 실패한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한 후 프랑스와 독일이 산업혁명을 완수하는데 거의 100년이 걸렸다. 영국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나라들도 산업혁명을 완수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점을 생각하면 중국이 산업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을 중국의 상황과 비슷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1880년대부터 1949년 사이 중국의 산업화의 성과는 그렇게 비참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