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는 귀족사회였다. 귀족들은 대토지소유자였다. 그들의 장원을 형성한 것이다. 장원에서 사용된 노동력은 당률에 나와있는 부곡(部曲)이었다. 이들은 귀족의 장원에서 집단으로 노동하는 예농(隸農)이었다.(미야자키 p. 36)
송대에 오면서 귀족이 몰락하고 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신분제 사회가 사라지고 서민계급이 전일화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사대부는 상층 서민이었다는 점에서 상층과 하층의 계급적 차이가 있었지만, 무력과 혈연에 의존한 귀족집단이 사라지고 양인 모두가 응시자격을 갖는 과거를 통해 상층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송대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미야자키 p. 39)
귀족층이 몰락하고 그들의 소유지가 소멸하자 이에 예속되었던 농민들은 예농의 지위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14세기경(원대 중기, 명초)에 이르면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소작하는 자유를 얻었으며 마음대로 이주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다.(이스트만, p. 108)
송대에서 지주는 토지소유를 통해 단순히 지대를 얻을 뿐, 소작인의 신분을 지배하거나 생계에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송대의 전호(佃戶)는 계약에 의하여 지주의 토지를 빌리고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인이며 하나의 경영자였고 농노(農奴)가 아니었다.(미야자키 p. 35)
하지만 전호가 농노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호를 토지에 딸려서 팔거나 노역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근대적인 방식의 착취는 존재했고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副租이, 雜役 등이 강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송대 전호를 농노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엘빈의 경우도 명시적이지 않지만 전호를 농노로 간주하기도 한다.
농노제는 이미 송대부터 시작하여 쇠퇴하고 있었지만, 명조(14C~17C)와 청조의 초기 동안에 장원질서는 여전히 지방에 잔존하고 있었다. 지방의 장원질서를 지탱했던 것은 전호와 노복이었다. 전호는 이미 소작인에 가까웠지만 부분적으로 농노적인 성격이 잔존해 있었다. 노복은 가내노비로서 직영토지의 농업노동자로도 활용되었던 존재이다. 노복과 전호의 폭동이 빈발하는 과정을 거쳐 18세기가 되면서 장원제는 마침내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고1) 지주와 전당업자가 장원영주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비세습적 노복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가내노비로서 남아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업, 전당업, 도시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의 자본수익률이 높음으로 인해 대부호들이 더 이상 토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고 더 이상 시골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태호지역의 연구에 따르면 15세기까지 대토지 소유자는 농촌에 있는 저택에 살았다. 16세기 상업화와 수공업활동의 발전과 함께, 지주는 도시에 투자하고 도시로 거처를 옮겨갔다. 청대에는 대다수 지역 엘리트들이 도회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엘빈 p. 255, 이스트만 p. 110)
둘째, 자유롭지 못하고 통제된 노동력으로서의 노동자들이 대규모단위로 일하는 것보다 가족단위로 일하는 자유로운 전호의 생산성이 높았다.2)
셋째, 수공업의 발전과 시장의 발전에 의해 수공업에 의한 수입이 증대함에 따라 농민들이 지주에 의존해야하는 정도가 약화되었다.(엘빈 p. 260) 태호 주변 지역의 연구에 따르면 16세기 들어서 상업화의 진전에 따라 면방, 제사, 방직이 농가에서 시작되고 농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연수입의 절반이 수공업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되었다.(이스트만, p. 111)
결과적으로 19세기 중국사회는 동시대 전세계에서 가장 사회적 이동성이 활발한 사회로 변화하였다.(엘빈 p. 260)
지방의 권력 성격이 변화했다. 17세기까지 농촌에 거주하는 대지주들은 향촌의 질서유지, 징세, 중소규모 수리사업의 감독과 같은 임무를 맡은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대주주가 더 이상 지방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대지주들이 맡은 역할을 대신한 것이 향신(지방신사)들이었다. 현령이 임명한 지방관청의 서기와 保 및 長이 향촌질서유지의 임무를 인계받았고 신사는 조세징수 담당자, 지방사업 관리자로 전문화되었다.
(엘빈 p.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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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81년 강희제는 안휘선 순무에서 ‘금후로는 지주들이 토지를 매매할 때 전호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지주는 전호를 토지에 딸려서 팔거나 노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상주문을 재가하였다. 옹정제는 18세기 초 세습적 노복을 방면함으로써 해방사업을 종결지었다.
2) 엘빈은 p. 259에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지주가 노복을 전호로 전환시키는 것이 유리했을 것임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