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제국주의 -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폴 코헨 지음, 이남희 옮김 / 산해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1970년대 이전 미국의 중국 연구자들 -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의 중국에 대한 연구자들 - 이 가졌던 연구경향을 분석, 비판하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연구경향을 요약하고 있다.

코헨은 기존의 접근법을 세가지로 대별하고 있다. 그것은 충격-반응 접근법, 근대화 접근법, 제국주의 접근법이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19세기 중국사를 서양의 충격에 따른 중국의 반응으로만 해석하는 방법이다. 근대화 접근법은 전통시대와 근대로 긴 중국의 역사를 간단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방식이다. 제국주의 접근법은 근대화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 접근법이다. 세가지 접근법 모두 서양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중국 내부의 발전이나 갈등구조를 등한시한다. 세가지 접근법은 모두 무엇이 중국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촉진 또는 방해했느냐는 목적론적 접근법에 함몰되어 실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비목적론적 질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연구성과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에서 매우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부분은 제3장 초반의 제임스 펙에 의한 기존 중국전문가 비판과 반비판, 이어진 반반비판 그리고 저자의 촌평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야기된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반성 또는 증오가 미국내 중국학 학계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980년대 남한 대학가를 휩쓴 지적 광풍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주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중동 지역 연구에 있어  서구의 편견을 잘 보여준 것처럼 폴 코헨은 오리엔탈리즘의 폐해가 중국 연구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인문학 관련 책으로 치부될 수 없는 사회과학자에게도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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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1. 대토지소유자들은 세금(전세, 부역, 공물을 모두 포함)을 회피할 능력 또는 자격이 있다.

명제 2. 황제 또는 임금은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또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수를 늘리려고 한다.

명제 3. 황제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소토지소유자들을 살찌워서 그들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늘리거나 아니면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 둘 중의 하나를 취할 수 있다.

명제 4.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은 조선시대 대동법처럼 공납을 지세화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명제 5. 소토지소유자들을 늘리는 극단적인 방법은 혁명의 시기에 대토지소유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토지소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 공신들이 새로운 대토지소유자들로서 등장함에 따라 이런 정책은 결국 실패하였다. 예를 들어 명태조는 귀족과 공신관리에게 장원토지를 분배하였는데 이를 축소하려는 태조말년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명대 전체를 통해 이런 계획은 성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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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은 북송(960-1127) 중엽 신종 때 개혁정책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추진한 개혁정책 중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균수법(均輸法)이란 예산을 미리 짜지 않던 재정운용 관행을 혁신하여 미리 예산을 짜고 물자를 조달할 때 가깝고 값싼 곳에서 조달하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으로 물자를 조달하는 정부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던 政商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청묘법(靑苗法)은 농민에 대한 저금리 융자를 주는 법이다. 농민들은 빌릴 때는 돈을 빌리지만 나중에 변제할 때는 곡물로 하도록 한다. 농민 입장에서는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으므로 고리대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고 정부 입장에서는 곡물로 변제받음으로 인해 군량미의 일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정부는 민간으로부터 강제로 곡물을 징발하고 돈을 지불했으나 지불한 돈이 넉넉치 않아 민간 입장에서는 여간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청묘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시역법(市易法)은 창고업을 겸한 은행업을 시행하는 것으로서 아직 팔리지 않는 물품을 근거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토박이 대상인들이 외부로부터 반입되는 물건을 싸게 전매하여 내부에 비싸게 팔지 못하도록 외부 상인의 금융환경을 개선시켜주는 것이다. 이것은 과점체제를 뒤흔들었다.

모역법(募役法)이란 농촌의 부유계급이 지었던 요역(徭役)을 합리화하는 제도이다. 요역은 현 또는 주 아문에서 아전의 역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이때 조세의 관리, 운송감독 등을 농촌의 상위계층이 담당하고 있었고 그 비용을 농촌 상등계층이 현물로 제공하였다. 자신이 직접 운송감독을 맡고 필요한 경비를 현물로 부담하는 과정에서, 농촌의 상층계급들은 관리의 착취나 과도한 위험부담을 떠앉게 되었다. 모역법의 시행에 따라 미리 비용을 예산으로 짠 뒤 부유계급 전체에 면역전(免役錢)이라는 세금을 부과하여 이 재원으로 요역을 행할 사람을 뽑아서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개혁정책은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의 치열한 정책대립으로 이어졌고 어느 파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정책이 뒤집어졌다가 다시 뒤집히는 일이 이어졌다. 사실 왕안석의 개혁정책들은 기존의 강자가 가진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강자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다. 미야자키는 왕안석이 부자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부자가 재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겸병하는 행위를 미워했다고 평가했다. 미야자키는 소철(蘇轍)이 “왕안석은 소장부다. 빈민을 연민하여 부호를 깊이 증오함으로써 빈민에게 인정을 베풀고도 그 옳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완전한 오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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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제가 해체되고 예농은 사라지고 지주는 부재지주로서 소작인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매우 싼 비용으로 과거준비를 할 수 있고 과거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신분적 제약은 거의 없어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세상, 미신과 마술, 그리고 비합리성을 배척하는 유학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 이러한 명청대의 중국사회의 모습은 서구 근대사회가 갖고 있는 근대적 속성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노비가 있고 천인이 있지만 이들을 제외한 양인들의 세상은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청대 중국사회와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 사회 간의 남아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다. 사회적 이동성이 원리적으로 보장되지만 실질적으로 일정한 집단이 계속 피해를 감수하며 살아야하는 구조에서 피해를 보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권익을 찾아나갈 수 있는 정치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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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신분제사회는 고정된 사회지만 송대(960-1279)에 들어가면서 사회는 침체를 깨트리고 발랄한 활동을 개시한다. 송대는 중국의 르네상스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후한 이후 당까지 긴 경제의 하강국면이 반전되어 호경기가 도래한다. 석탄의 이용, 철의 생산액 급증, 은의 유입 등이 어우러지면서 상승세가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데 호황을 지나면서 송대는 점차 정체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미야자키, p. 46)

 


1300년경(원 중기)부터 1500년경(명 중기 홍치제) 사이에 중국 중세의 경제혁명은 멈추고 중국의 경제는 쇠퇴했다. 비록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활기찬 경제성장이 재개되었지만 양적 성장만 있었을 뿐 과거 시대의 활발한 기술혁신과 발명과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경제의 활력이 소멸한 이유는 첫째, 변경의 미개척지(미국의 프론티어를 떠올리면 된다)가 사람에 의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해외무역 및 외국인과의 접촉이 감소하면서 외국 은의 공급이 줄어들었다. 명태조의 경우 해금(海禁)을 단행하였고 공식적인 조공무역만을 인정하였다. (엘빈 p. 207)

 


이스트만 역시 엘빈과 마찬가지로 송대를 중국경제의 최전성기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스트만은 15세기 이후의 경제의 부침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송대(960~1279)에 중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이후 경제는 침체되었다. 그 이유로는 13세기 몽고침략, 14세기 역병의 만연, 1450~1540년 사이 전세계적인 냉각화 경향, 명대 초기의 해금정책(海禁政策)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 침체의 징후는 인구의 감소로 나타난서 1200년 1억 1천만명이었던 중국이 명초에 겨우 6500만~8000만명 정도 수준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호황에 동반되었다. 1581년 단행된 일조편법은 화폐경제를 촉진시켰다. 18세기까지 경제는 대체로 완만한 성장세를 유지했으며 19세기에는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다. (이스트만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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