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스의 글에는 소련 병사들이 독일로 진격해 왔을 때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아래와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독일 병사에 의해 파괴된 소련 영토를 수천킬로 되짚어온 가난한 소련 병사 앞에 풍족한 독일 도시와 민간인들이 어떻게 비쳤을지 말이다.
캅카스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농부소년들이 보기에 크라이니츠나 슈트렐라의 평범한 독일 마을의 집은 궁궐 같았다. 시골길도 고속도로처럼 보였고, 잘 먹인 독일 소들은 소련 집단농장의 말라빠진 짐승과는 전혀 달랐다. 이 풍요로움은 분명한 의문을 자아냈다. 이토록 잘사는 독일인이 왜 가난하고 압정에 신음하는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소련군 중위 보리스 이텐베르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기생충들은 정말 잘살았어! 폐허가 된 집, 버려진 가구, 단정하게 나무가 심어진 인도, 읽지도 않은 새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비롯해 정말 풍요로운 삶의 수많은 증거를 봤어. 아직 멀쩡한 집에 들어가면 놀라운 것이 보여. 의자, 소파, 옷장. 독일인들은 정말 잘 살았어. 왜 그 이상을 바라지? 독일인들은 전쟁을 원했고, 결국 대가를 치렀어.”13
1945 중에서
“식량 창고에 집에서 훈제한 고기, 말린 과일, 딸기잼 같은 게 가득했다. 독일 안으로 들어갈수록 곳곳에서 보이는 풍요에 구역질이 났다. … 잘 정리된 병과 깡통에 주먹을 날려 부셔버리고 싶다.”14
소련군 장병 다수에게 독일 민간인에 대한 태도가 부러움에서 분노로, 그리고 범죄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들은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선동 문구를 기억했다.
“날짜를 세지도 말고, 거리를 헤아리지도 말라. 그저 네가 죽인 독일인의 수만 세라.”
이 유명한 선동가는 병사들에게 패망한 적국 독일에 “어떤 자비도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고, 병사들은 그말에 따랐다.
1945 중에서
보병소대의 정치장교로 복무한 시인 보리스 슐루츠키는 독일인을 향한 잔인함에 “그 어떤 정당화도 필요 없다”고 믿었다.
“지금은 법과 진실을 말할 때가 아니다. 독일인들이 먼저 선과 악을 넘어서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는 똑같이, 100배쯤 되갚아주자.”
1945 중에서
소련군이 접근하자 독일 민간인들이 보인 공포 반응은 강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여주는 초기 징후였다. 새로운 미군 부대가 규모를 갖춰 새로운 경계선으로 다가가면서 “넋을 잃고 무질서한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압도당했다. … 이들은 걸어서, 자전거를 타고, 수레를 끌고, 마차를 타고, 그 외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몰려왔다.”19 피난민들의 이동 방향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향했다. 동쪽에서 서쪽이었다
1945 중에서